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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kang39
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 캐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 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캐나다사장, 전 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 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역사문화원장

캐나다 문협회원.현 GTA한카노인대학장
http://skang3441.tistory.com/
[email protected]
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22 전체: 256,217 )
캐나다현충일 (돌아오지 않은 병사의 마지막 詩)
samkang39

2011.11.11


11월 11일은 이곳카나다의 현충일입니다.

온타리오 브램턴시 Meadowvale Cemetery에 위치한

한국참전용사 516기 전몰장병의 위패가 모셔진 "위령의 벽"에서

현충일 추모식이 거행 되였습니다. 그 식전의사진들입니다.


카나다는 1949년 한국정부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한 이래


1950년 한국전쟁 발발시 총 26,791명의

카나다군이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516명의 전사자와 1042명의 부상자를 내며

한국의 자유수호에 커다란 기여를 해준 고마운 나라입니다.

 


이 식전에는 캐나다 한국전 참전용사가

10명 밖에 참석하지를 못하였습니다.

작년에는 30명쯤 되였는데, 차츰 연세가 고령화 하여,

금년에는 그리 적은 분들이

오시게 된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두 분은 휠체어를 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행사는 캐나다의 KVA주관으로 계속하기가 어려울 듯 합니다.

여기에는 우리 한국 향군 50명과 가족들 30명,

토론토총영사를 비롯한 정부관계자 5명,


그리고 캐나다 현역 군인을 포함한 정부요인 20여명,

브람톤 시민 200여명, 브람턴 학생 단체 400여명,

경찰 30명, 소방대원 20명,

의료봉사요원 10명등 800여명이 참석을 하였습니다.


그 학생들은 우리의 애국가와

아리랑을 우리의 말로 연습을 하여잘 불러 주었습니다만

그 노래를 정녕 들어 줄 사람은 100명도 아니 되었습니다.


열심히 준비를 한 학생들에게 대단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보다 많은 우리 동포들이 참석하여 주실 것을 기도 드립니다.

 

 


헌화를 하는 데에 관계요인들 외에,

한무명의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가평전투에서

숨진 피터 스미스 상등병의 딸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한국땅에서

세상을 떠날 때에 자기는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든 유복녀라고하드군요.


아버지의 훈장을 가슴에 달고 나와서

아버지의 영령앞에 화환을 올리며 눈물을 닦는

그 여인을바라볼 때에나도 눈시울이 뜨거워 젔습니다.


이후 나는 이 여인과 별도로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애달픈 내용의 글을 별도로 써 보았습니다.

"돌아오지 않은 병사의 마지막 시" 를 읽어 주십시요.

 

 

<돌아오지 않은 병사의 마지막 詩>

--- 2011년 11월 11일 현충일

기념식장을 다녀와서---

 


이 지구 반대편,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 가평이라는 마을 산골짜기에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외로운 언덕 위에 하늘을 보고 누어 있는 한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의 철갑모는 반쯤 벗겨저 있었고, 그의 손에는 아직도 무거운 총이 쥐어저 있었습니다. 그는 아직도 눈을 감지 못하고, 하늘을 울얼어 보며 못다한 임무를 저주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군화는 반쯤 시냇물에 잠겨 있어서 송사리 떼들의 밥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허리띠에는 아직도 두 개의 수류탄이 꽃혀 있었습니다. 그는 캐나다의 군복을 입은 22세의 젊은 병사였습니다.


그는 그렇게 1951년 4월 어느날 그 곳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시신이 전우 부루스에 의하여 거두어 진 것은 한 달이 지나서였습니다. 그렇게 죽어 간 그 병사는 <피터 스미스 상등병> 이였습니다.

 

중공군의 집중공격이 들어 올 때에 부루스 일등병이 다리에 총을 맞고 쓸어 젔습니다. 피터는 그를 업고 그 맑은 물이 흐르는 산속 시냇물을 건느고 있었습니다. 중공군의 계속공격으로 이번에는 피터가 쓸어젔습니다.


불행하게도 피터는 그 자리에서 불귀의 객이 되였고 부르스는 다행히도 다시 살아 났습니다. 부르스가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여 다리를 고치고 나서 피터를 찾으러 갔을 때에 피터는 아직도 그 산속 시냈가에 누워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뱃속에 든 한 아이를 남기고 피터는 그렇게 한국 전쟁터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피터의 아내는 한 평생을 재혼하지 아니하고 뱃속에 있던 딸, 그러니까 피터의 유복녀 딸만을 의지하고 살아 왔습니다. 그 딸이 아버지의 영령앞에 화환을 드리는 모습을 나는 보았습니다. 너무도 감격스럽고 아름다웠습니다. 눈시울이 뜨거워젔습니다. 가슴이 메어저 왔습니다.

 

한국전에 참가하여 숨을 거둔 아버지의 그 무공훈장을 가슴에 달고 나와서 아버지에게 화환을 증정하드군요. 이후 나는 그 여인을 찾아가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이야기 끝에 나에게 복사한 종이 한 장을 건네 주었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죽음의 땅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자기의 엄마에게 보내 온 최후의 편지라고 하였습니다.


2011년 11월 11일 브램턴 미도우베일 묘역, “위령의 벽”에서 거행된 현충일 행사장에서 있었든 일입니다. 나는 집에 와서 그 여인이 준 종이를 펴 보았습니다.

 

사랑한다는 절절한 편지의 마지막에 영국의 서정시인 Robert Burns의 정렬적이고 뜨거운 시 “A Red, Red Rose”(붉고 붉은 장미여)가 맑은 글씨로 적혀 있었습니다. 한 줄을 쓰고 생각하고 또 한 줄을 쓰고 그리워 하던 모습이 역력하게 그 글씨 체에 배어 있었습니다.

 

 

Oh my love is like a red, red rose, that’s newly sprung in June.

Oh my love is like the melody, that’s sweetly played in tune.

As fair art thou, my bonnie lass, so deep in love am I;

And I will love thee still, my dear, till all the sea go dry.

 

And the rocks melt with the sun; and I will love thee still, my dear.

While the sands of life shall run, and fare thee well, my only love!

And fare thee well a while! And I will come again, my love,

Though it were ten thousand mile!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보내면서 “일만 마일이라 할지라도 나는 다시 돌아 온다”는 약속의 구절을 사랑하는 아내에게 보냈지만 피터는 “never returned soldier”가 되였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행복은 이렇게 숨을 거둔 병사들의 죽음의 대가입니다. 두 손을 모아 명복을 빌어 드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