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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30)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엄마 얘한테 속지마” 그래도 할머니는 내 편을 들었다. “아기 엄마가 훔친 건 아닌 것 같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얼른 밖에 나가서 찾아봐. 훔쳐 간 지 1시간도 안 됐으니 팔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을 거야. 아직 은 팔지 못했을 수도 있어.” 그러자 두 오누이는 때리는 것을 멈추고 후다닥 뛰쳐 일어났다. 그리고 나를 끌고 같이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두 갈래로 나뉘어 동네를 샅샅이 누비기 시작했다. 여름 새벽 5시쯤이라 여명이 벌써 밝아 왔고 아직 동네는 조용하였다. 주인 여자와 나는 여기저기 골목길을 누비다가 마주친 동네 아는 아줌마한테 누가 가마솥을 들고 다니거나 파는 것을 이 아침에 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방금 전에 어떤 아줌마 둘이 솥을 들고 00네 집으로 가던데. 너네 솥 누가 훔쳐 갔니?”

 갑자기 솥을 찾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에 우리는 얼른 그 집으로 달려갔는데 그곳에 서는 정말로 낯선 여인 2명이 가마솥을 팔려고 흥정하고 있는 중이었다. 솥을 팔고 다른 훔쳐온 물건들도 팔려고 하던 찰나에 우리가 들이닥쳤다. 우리는 얼른 그들을 붙잡았고 그 집 오빠는 그들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떻게 솥을 훔쳤는지를 말하라고 했더니 사실을 실토했다.

 그들은 새벽에 동네를 한 바퀴 돌던 중 마침 내가 창고에서 집안에 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불쑥 떠오른 생각이 문을 안으로 잠그지 않았을 거라고, 그래서 살며시 문을 열어봤더니 정말 잠겨 있지 않았다. 그렇게 급하게 밥솥을 훔칠 마음을 먹고 내가 집안에 들어간 지 10분후에 문을 열고 솥을 훔쳤다고 한다.

 세상에 이렇게도 우연한 일이 있단 말인가? 도대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에게 일어나는 이 불행의 끝은 과연 언제인가? 그집 식구들은 나에게 사과를 하면서 딴 데 가면 더 고생할 수도 있으니 그냥 자기들과 함께 지내자고 했다. 할머니는 쯧쯧 혀를 차며 어쩌면 아기엄마는 일이 그토록 꼬이고 꼬이는지 참 안타깝다며 따뜻한 밥을 한상 차려주었다.

 그러나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갈기갈기 찢겨진 마음은 그들을 용서할 수 없었고 아니 이 세상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이 나라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이 사건은 내가 탈북을 결심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나는 떠날 결심을 하고 차려준 밥을 일단 배부르게 먹었다. 또 언제 내가 이런 밥을 다시 먹게 될 수 있을지 기약없는 여정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3. 잔인한 여름밤의 악몽

 한바탕 난리를 겪고 그 집에서 나온 후 모든 것을 체념 한 채로 나는 혜산시에서 제일 큰 장마당을 향해 걸었다. 압록강을 옆에 끼고 걷는 내내 나는 강 건너 중국 땅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중국 마을의 풍경은 전혀 낯설게 보이지가 않았다. 과연 강 건너 중국이라는 나라는 어떤가? 저기도 배고파서 굶주리는 사람은 없겠지?

 내가 만약 강을 건너간다면 어디로 가야 하며 어떻게 해야 하나? 중국을 살짝 건너갔다 오면 과연 안전할까? 이젠 여기서는 내가 살아갈 길이 없으니 무조건 중국으로 가야만 살 수 있다. 아무에게 말할 수도 물어볼 수도 없어 나 혼자 마음속에는 끝없는 고민과 갈등이 서로 교차했다. 만약 잡히면 배신자나 조국을 반역한 반역죄를 쓰고 나는 물론이고 나의 가족들 모두 어떤 형벌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혜산 장마당에 도착했는데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온갖 화려한 중국제품들과 쌀, 면, 약품. 주방용품 등을 팔고 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나는 마치 중국 땅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곳 장마당에는 또한 꽃제비들과 집을 잃고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탈북을 목적으로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어 정말 복잡했다.

 나는 예전에 혜산에 가면 중국 사람들이 피를 비싸게 사 간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사실인지 괴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지나가는 아무 행인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저기 여기 혹시 피를 팔 수 있는데 가 어디 있나요?” “피를 판다고요? 모르겠는데…처음 듣네.”

 일단 거리를 정처 없이 걸으며 피를 팔아서라도 당장 차비를 마련해 집으로 돌아가던지 아니면 여기서 먹고 살 돈을 마련해야 한다는 비장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어떤 아저씨에게 피를 팔거나 아니면 무거운 짐을 날라주거나 힘든 일을 하면 돈을 주는 곳이 어디 있냐고 물었다. 그 아저씨는 피를 사 간다는 건 거짓 소문이고 또 아기엄마를 누구도 써주지 않을 거라며 차라리 돈을 벌고 싶으면 중국에 넘어가라고 했다.

 귀가 솔깃해진 나는 어떻게 중국에 건너갈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는 바로 강을 넘어가면 농사꾼들이 일손이 부족해 밭에 김을 매거나 농사 일을 도와주면 품삯을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름과 가을철에는 중국에 넘어가 밭 김을 매는 일을 해주고 가을걷이도 해주고 용돈을 받아오면 북한에서 1년을 살 수 있는 돈을 벌어 올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마구 뛰었다. 여름철에 일을 해주고 돈을 받아오면 힘들게 장사를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밭김도 잘 맬 수 있고 어떤 일도 할 수 있으니 중국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주면 안 되냐고 졸랐다.

 그는 강을 넘어가면 조선사람들이 많으니 일 찾기는 식은죽 먹기라고 한다. 그 아저씨는 돈 10원을 주면서 아기 간식 사주라며 꼭 강을 건너 중국에 가라고, 중국에 가는 길만이 살길이라고 당부했다. 고마운 아저씨다.

 나는 장마당에서 아기와 함께 순대국밥을 사 먹었다. 배고픔에 며칠 동안 자주 보채던 아기는 갑자기 따뜻한 밥을 먹고 배가 부르게 되자 팔짝팔짝 등에서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였다. 이 며칠 동안 고달프고 정말 견디기 어려운 일이 연속 일어나고 있지만 아이는 나의 든든한 길동무였고 천사와 같이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면 고생에 찌들고 일그러진 내 얼굴 에도 미소가 비꼈다.

 밤 9시가 넘어가자 나는 낮에 봐 두었던 강물이 가장 낮은 곳으로 짐작되는 강변에 자리를 폈다. 그리고 옆에 아기를 눕혀 재워 놓고 멍하니 밝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들은 쉴 새 없이 반짝거리며 밤하늘을 수 놓았고 정말 무심하게 나를 말없이 내려다보기만 했다. 밤하늘이 이토록 아름다운지 새삼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 인생은 과연 어떻게 흘러 갈 것인가? 과연 내가 아이를 배 곯지 않고 잘 키워낼 수 있을까?

 칠흑처럼 캄캄한 북한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불빛이 번쩍거리는 강 건너 중국 땅을 번갈아 바라보며 나는 오늘 밤 나 혼자 몰래 저 강을 건너리라 마음먹었다. 강을 건널 생각에 잔뜩 긴장을 하고 있는데 발소리가 저벅저벅 난데없이 들리더니 웬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잘 곳이 없어서 여기서 자오? 아기까지 데리고 어떻게 밖에서 자겠소?”

 “누구세요?” “난 이 동네 사는 사람이오. 잘 곳이 없으면 우리 집으로 갑시다. 밖에서 자면 위험하오.” “아니요. 난 너무 더워서 잠시 밖에 나왔어요. 좀 있다가 집에 들어 갈 거예요. 빨리 가

세요.” 사실 나는 이제는 사람이 제일 무서웠다. 이젠 더 이상 아무도, 그 어떤 말도 믿지 않을 것이다.

 강변 여기저기에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잠을 자려고 드러누워 있었다. 나는 소란스럽던 주변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리며 또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제 중국을 넘어가면 아들만이라도 중국인한테 입양이라도 하면 어떨까? 그리고 난 가끔씩 강을 넘어 아들을 볼 수만 있으면 좋겠다. 내가 비록 아들과 떨어져 살지라도 아이만이라도 배불리 먹고 잘크고 잘 자란다면 못사는 나라 북한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지금 내 형편에서 당장은 그것이 최선이 아닐까? 오만가지 생각들이 내 머리를 맴돌며 곧 강을 건널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나는 곧 나에게 어떤 참혹한 일이 닥쳐올 지를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채 잠시 그렇게 평온함에 잠겨 있었다. 어느덧 시간은 어느덧 밤 10시를 넘었다.

4. 죽음의 압록강

 밤이 점점 깊어가고 소란스럽던 주변이 조용해지자 강을 건널 차비를 했다. 일단 강을 건너면 옷을 거지처럼 입으면 잡혀갈까 봐 입은 옷을 벗고 허름한 잠옷 같은 옷으로 갈아 입었다.

 

 

 

 

 

(지난 호에 이어)

깨끗한 옷과 예쁜 샌들을 벗어서 곱게 보따리에 싸 들었다. 강바닥이 거칠어서 샌들이 망가질까 두려웠던 것이다.

 돌이 많아 거칠고 이끼가 두텁게 오른 미끄러운 강바닥을 어떻게 맨발로 건널수 있을까? 몇 달 전부터 이미 판단력을 상실해버린 나의 어리석은 실수 하나로 내 인생이 어떻게 송두리째 바뀌게 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중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얼핏 보면 쉽게 건널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일단 물속에 발을 잠갔다. 그러나 강물은 뜻밖에도 몹시 차가웠다. 다시 발을 꺼내고 나는 잠이 든 아기를 등에 업었다가 물이 깊어 이토록 차가운 물에 잠기면 어떡하나 걱정이 앞섰다.

 아니, 차라리 아기를 가슴에 안고 건너자! 안고 있다가 물이 깊어지면 두 손으로 높이 들어주면 될 것이다! 설마 저 강물이 내 머리는 넘지 않겠지? 나는 깊은 잠에 들어 있는 아이를 품에 안고, 또 작은 보따리를 손에 들고 드디어 물속에 들어섰다.

 한 걸음씩 조심히 발을 옮기면서 한참을 건너가니 바로 맞은편에서는 중국인들이 강둑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말소리가 너무 가까이 들려 나는 강을 거의 다 건넌듯 한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점점 앞으로 나아갈수록 물은 내 가슴팍에 차오르며 깊어지기 시작했고 발밑은 돌에 붙은 이끼 때문에 미끄럽기 그지없었다.

 그제 서야 나는 맨발 바닥으로 강에 들어선 것을 가슴 치며 후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제 다시 돌아선다 해도 돌아가는 것도 만만치가 않았다. 정말 나는 강 한복판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다 가는 발이 너무 미끄러워 넘어질 것 같았다.

 그런데다가 낮에는 그토록 유유히 흐르던 물이 정작 강 한복판에 들어서 보니 얼마나 물살이 빠르고 거센지 어마어마한 그 위력에 나는 극도의 두려움과 함께 몸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한복판에서 오도 가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나는 양쪽을 번갈아 쳐다보며 과연 어느 쪽이 더 가까운지, 구분하려고 애썼다. 어디든지 더 가까운 쪽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강물이 이미 내 가슴팍을 넘어 목까지 차오르고 물에 잠기지 않게 하려고 높이 쳐들었던 아이마저 물속에 반은 잠겨 버렸다. 잠이 들었던 아이는 갑자기 차가운 강물에 잠기게 되자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흠칫하였다. 나는 조금만 더 높이 들어 최대한 아이를 물속에서 높이 들려고 하는 순간 발이 미끄러져 버렸다.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중심을 잃어버린 나는 거센 물살에 그만 휩쓸려 버렸다. 갑자기 머리끝까지 물속에 잠기게 된 나는 본능적으로 허우적거리면서 순간적으로 양손에 잡았던 아기를 놓치고 말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아기를 놓쳤다는 생각도 할 틈 없이 나는 거센 물살에 한참을 떠내려가다가 겨우 물 밖으로 얼굴을 내미는 순간 있는 힘껏 소리쳤다.

 “사람 살려요. 살려주세요.” 그리고 다시 거센 물살에 휩쓸려 몇 십미터를 떠내려가면서도 나는 사투를 벌이느라 내가 아기를 놓쳤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가 힘이 빠져 허우적거릴 힘도 없고 숨이 막혀 오면서 서서히 체온이 떨어지고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그만 물살에 온몸을 맡긴 채 떠내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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