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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뽑힌 나무(1)
minjukim


*본보는 금주부터 김민주씨의 탈북 수기 <뿌리 뽑힌 나무>연재합니다. 숱한 죽을 고비를 넘나들며 탈북에 성공해 중국과 한국을 거쳐 캐나다에 도착해 살아가기까지 그녀가 겪어온 고난 극복의 눈물겨운 여정을 통해 한인 이민 독자들께 꿈과 용기를 선사하길 기대합니다-편집자 주    

 

<머리말>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터라 당황했고 얼른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심각하게 생각을 해보았다. 과연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내가 북한과 중국, 남한을 거쳐 드디어 캐나다에 정착하여 살고는 있지만 내가 캐네디언은 아니다. 그렇다고 남한사람이라고 하기엔 뭔가 많이 빈약하다. 그럼 나는 북한 사람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아무리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북한 사람이 맞다.

 

 내가 어디를 가든 어디에서 살든 나의 뿌리는 북한이다. 북한과 중국, 한국을 거쳐 드디어 캐나다에 정착하면서 그 나라들의 언어와 풍습,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들과 같아지려고 노력했으나 아무리 해도 절대 그들처럼 될 수 없었다. 내가 북한이라는 나라에서 뿌리를 내리고 해외를 떠돌며 그 가지와 열매를 맺는 모든 과정이 정말 쉽지 않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지나온 내 삶의 뿌리를 조금씩 파헤쳐 보려고 한다.

 

 내가 살았던 북한은 김일성과 김정일을 이어 김정은이 3대 세습통치를 하고 있는 나라이다. 사람만 바뀌었을 뿐 체제와 통치 시스템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북한 주민들의 삶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평생토록 어떻게 국가에 의해 철저히 관리되고 감시 통제되고 있는지, 왜 아직도 북한 인민의 생활은 김일성 시대보다 점점 더 쪼들리고 절대빈곤에 시달리고 있는지 이 책을 통해 이해가 되길 바란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쓰면서 망설였다. 내가 유명인도 아니고 성공한 위인도 아니며 더구나 요즘 유행하는 SNS조차 하지도 않는 내가 자서전을 쓰다니, 과연 누가 내 지나온 이야기를 읽으려고 할까? 탈북 엘리트들이 펴낸 수기를 읽어본 적은 있지만 사회 밑바닥까지의 삶을 경험한 나와는 다른 이야기들이었다.

 

 주변에 어떤 캐네디언들은 북한에 대해 아주 큰 관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대답을 하면 그 대답에 대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 방대하고 심각한 북한의 실상을 사실 한두 시간으로 다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나의 자서전을 통해 ‘신비의 요지경’, 폐쇄국가, 캄캄한 베일에 가려져 있는 가장 비밀스러운 국가 북한에 대한 세상사람들의 이해를 조금이나마 도모하고자 한다.

 

<제1나의 소녀 시절>

1. 고향 평양

 나는 1972년 북한 평양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6살까지 살았다. 하여 평양에서 보냈던 기억은 한정적이다. 그때는 거의 매일 공습경보(전쟁시 공습경보에 대비한 훈련)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를 자장가 소리처럼 들으며 자랐다. 내가 사는 한반도는 전쟁을 잠시 멈춘 정전 협정 상태였기 때문에 전쟁에 대비한 훈련은 삶의 일상이 되었다.

 

 밤에 전기가 끊기고 사이렌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너무 무서워서 울음을 터뜨리면서 엄마 품을 파고들었던 기억이 난다. 전쟁이 언제 다시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대피 훈련, 주민소개훈련, 폭격에 대비한 불빛 막이 훈련은 일상이었다. 북한이 1973년에 1차적으로 완공한 평양 지하철은 수도의 교통 문제 해결과 함께 전쟁이 나면 주민소개 및 대피소로 활용할 목적으로 지하 100∼150M로 깊숙이 건설되었다.

 

 아버지는 기계공장 기사로 근무하셨고, 엄마는 고등중학교 국문학 교사였다. 부모님 두 분 다 노동당원이셨다. 북한에서 지식인들은 입당이 무척 어려웠는데 입당을 하려고 5~7년 혹은 10년까지도 온갖 어렵고 힘든 일에 앞장서며 남보다 몇 배의 노력을 해야 당원이 될 수 있다. 노동당원이 된다는 것은 그 사회의 핵심분자가 되는 것과 같은 의미다. 당원만이 사회적인 지위에 오를 수 있고 북한에서 말하는 소위 “사람 축”에 낄 수가 있다.

 

 결혼할 때 신랑이 비당원이라는 것은 큰 흠이 된다. 비당원들은 결혼대상자를 선택할 때 부족한 사람 취급을 당하거나 자식들 앞에서 부모로서 권위가 위축된다. 우리 부모는 당과 나라를 위해서 잠자는 시간 빼고 나머지 시간은 직장에서 고군분투하였다. 자녀들은 방치하였고, 가정은 뒷전이었다. 주말이나 명절에도 온 가족이 놀러 가거나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낸 적이 한 번도 없다. 부모님들은 아침 7시에 나갔다가 밤늦게 10시 넘어서야 집에 들어오셨다. 차디찬 냉방에 우리 네 형제가 여기저기 쓰러져 잠에 들면 밤 10시가 넘어 들어온 엄마가 흔들어 깨운다.

 

 나이 60에 이르러서도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은 물론 돈 한푼 없이 빈털터리였다. 정년퇴직 후에 엄마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위해서 자신들의 아까운 청춘과 인생을 다 바쳐 헌신하고 충성한 것을 몹시 후회하셨다. 나의 부모님만이 아니라 그 시대의 모든 어른들은 다 그렇게 살아왔다.

 

 나에게 두 언니와 남동생이 있었는데 7~8살 되던 큰 언니가 학교가 끝나면 탁아소에 들려서 나와 동생을 집에 데려오고 손발을 씻기고 먹을 것도 주었다 내가 4살 적에 둘째 언니가 내 발을 씻겨 준다며 펄펄 끓는 물을 바가지로 떠서 다리에 부어버려서 화상을 입었다. 둘째 언니도 나보다 한 살 더 많은 5살짜리 꼬맹이라 끓는 물에 화상을 입는지를 알 턱이 없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나의 발등과 다리에는 아직도 그 화상 흔적이 남아 있다.

 

 한번은 큰 언니가 8살 때 학교에서 시험공부를 밤 10시에 끝내고 탁아소에 있는 나와 동생을 엄마가 당연히 데려갔을 거라고 생각하고 집에 왔더니 엄마도 막 그때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엄마는 언니가 탁아소에서 동생들을 데려오지 않았다고 너무 혼내어 큰언니는 울면서 그 늦은 밤에 탁아소에 가서 우리를 데려왔다고 한다. 그 시간까지 우리만 탁아소에 남아 보육원들이 우리를 너무 싫어했다. 우리 때문에 퇴근을 못하기 때문이다.

 

 당시 평양에서는 석유곤로(버너)로 밥을 짓거나 구멍탄(연탄)으로 온돌도 덥히고 밥도 해 먹었다. 연탄이 떨어지면 석유로 밥을 해먹었는데 온 집안에 석유 냄새가 진동하고 온돌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나마 석유까지 떨어지면 밥을 해 먹지도 못하고 배고파도 참고 엄마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남자애들처럼 모험을 좋아했다고 한다. 어느해 여름 방학이었다. 탁아소도 방학이라 문을 닫았는데 엄마는 4살 된 나와 두 살배기 동생을 집에 가두어 놓고 문을 잠그고 출근했다. 저녁에 엄마가 퇴근할 때까지 나와 동생은 하루 종일 집안에서 놀아야 했다. 나는 심심하고 뭔가 놀 거리를 찾다가 높은 책상 위에서 엄마가 매일 아침 얼굴에 바르는 크림통을 발견했다. 그것을 얼굴에 바르면 어떻게 될까하고 갑자기 궁금해진 나는 책상 위에 직접 올라가서 얼굴에 발라 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책상이 너무 높아 나는 의자를 놓고 올라가 또 책 꽃이 위에 있는 크림통을 잡는 데 성공했다. 뚜껑을 열어봤더니 하얗고 부드러운 크림에서 처음 맡아보는 신기한 향기가 풍겨왔다. 나는 손가락을 넣고 휘젓다가 얼굴에도 바르고 바로 그 옆에 있던 손거울도 집어서 들여다보다가 별로 재미가 없어서 그만 내려오려고 하였다. 그런데 의자를 밟고 내려가지 않아도 한번에 뛰어내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금도 그 장면은 기억이 나는데 나는 두 주먹을 움켜쥐고 하나, 둘, 셋에 책상 위에서 바로 바닥으로 뛰어내렸는데 책상이 흔들리면서 크림통이 먼저 땅에 떨어지고 박살이 나 버렸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위에 무릎을 찍으면서 많은 유리 조각들이 다리에 박혀버렸고 피가 흘러내렸다. 문이 밖으로 잠겼기 때문에 우리는 이웃에 도움도 청하지 못하고 학교에 간 언니들이 귀가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나는 학습장(노트) 종이를 뜯어 다리에 감고 실로 동여매고 언니들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오후 4시쯤에 큰언니가 돌아와서 나를 보고 깜짝 놀라며 얼른 엄마가 일하는 학교에 날 데려갔다. 그리고 나는 병원에 바로 실려 갔는데 의사 선생이 살에 박힌 무수한 유리 조각들을 다 뽑아내고 엄청나게 벌어진 상처를 실로 끄러 맸는데 칼을 잡고 있던 의사의 모습도 기억이 난다. 4살밖에 안 되는 애가 아프다고 울지 않고 견디는 것을 보고 의사 선생님이 크게 놀랐다고 한다. 나는 상처가 아픈 것보다 엄마가 아끼던 크림통을 박살 내버려서 엄마한테 혼날 것이 더 무서웠고 걱정이 되었다. 그 당시엔 크림 한 통 사기가 힘들었고 한 통으로 아끼고 아껴서 오래오래 써야 했기 때문이다.

 

 태양이 쨍쨍 내리쬐는 7월 한 여름날, 집안에서 동생과 놀다가 심심해진 나는 장롱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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