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
ON
추천업소
추천업소 선택:
추천업소 그룹 리스트
  • 식품ㆍ음식점ㆍ쇼핑1
  • 부동산ㆍ건축ㆍ생활2
  • 미용ㆍ건강ㆍ의료3
  • 자동차ㆍ수리ㆍ운송4
  • 관광ㆍ하숙ㆍ스포츠5
  • 이민ㆍ유학ㆍ학교6
  • 금융ㆍ보험ㆍ모기지7
  • 컴퓨터ㆍ인터넷ㆍ전화8
  • 오락ㆍ유흥ㆍPC방9
  • 법률ㆍ회계ㆍ번역10
  • 꽃ㆍ결혼ㆍ사진11
  • 예술ㆍ광고ㆍ인쇄12
  • 도매ㆍ무역ㆍ장비13
  • 종교ㆍ언론ㆍ단체14
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36 전체: 114,378 )
이민사의 선구자들
leehyungin

 

 

 

마치 인질마냥 바다 건너 유럽행 전세기에 몸을 실었었다. 훌쩍 지난 반세기 전에, 20~30대로 8천 명의 광산 근로자들, 그들과 함께 1만 1천명이라는 병원 간호사들도 같은 때에 미지의 유럽땅 서독을 향했던 것이다.


 1만9천명의 젊고 싱싱한 남녀 젊은이들이 허기진 시대를 달래며 굶주림에 몸서리치며 발버둥쳤던 조국을 탈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었다. 기회는 새로움에 대한 동경과 피 끓는 비전을 꿈꾸게 되었던 것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 불빛처럼, 그 빛을 뚫고 꿈을 싣고 생전 처음 타보는 하늘길이었다. ‘루프트 한자’라는 하늘길을 나비처럼 날며 조국에 근대화라는 숙제를 풀기 위하여 죄수들처럼 독일 마르크라는 생소한 돈다발을 그리워하며, 숫기어린 앙가슴을 움켜쥐고 이방의 세계를 지옥길일지도 모르는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석탄광산이라! 광산에 전혀 문외한들이 학교생활이 끝나고 방황하던 많은 이들이 앞다투어 지원했던 경쟁을 뚫고 해외파견의 역사를 창출했던 국가정책의 실현이었다.


천근같은 유럽사람들의 몸무게를 지탱하고 힘든 병원 간호사 일인들 감당키 어려움 정도는 계산할 틈도 없었다. GNP 700여 불에서 허덕이던 1960년대의 험악한 나라사정으로 우리들의 젊음이 저당잡힌 것쯤, 땅속이라도 상관없다는 결단이요, 패기 하나로 덤벼들었다.

 

 

 

 


우리는 광부라는 이름으로, 병상의 파수꾼인 간호사로 서독행을 택한 것이다. 그마저도 감사하며 엄청난 기대를 들끓는 가슴속에 끌어안고서, 사우디아라비아 행 건설노동자들도, 파라과이 일대를 파헤친 농업이민사도, 월남파병이란 전쟁의 역사 속에 뛰어들어야 했던, 그때 그 시절 한많은 시름을 달래고자 떠났던 미지의 투쟁길이었다.


 죽음이 두려우랴, 우물 안의 개구리 같은 좁고 험한 곳에서 해외근로자라 한들 무슨 상관이랴, 젊고 왕성하던 투지와 도전의식이 펄펄 끓던 그 시절 시퍼런 바닷속인들 어찌 마다했을까!


 그들이 3년여의 고용계약으로 외화획득의 보물을 파내어 조국 경제 이정표의 뿌리가 되었다. 북미주로 새터민들이 되어 터를 닦는 일이야 뭐든지 할 수 있었다. 1천 미터 땅속을 누볐던 그들이었는데 지상에서야 무엇인들 어려우랴. 지하 1천 미터 광산이라면 들어가고 나오는 2시간을 제하고, 6시간을 굴속을 기어다니며 석탄가루가 땀과 함께 온몸을 범벅, 입술과 눈만 보일락말락 목소리로만 옆 사람을 확인하는 절박하고 열악한 작업조건이었다. 죽음이 젊음을 앗아 가버린 일도 많았다.


 천만근 바위덩어리가 지하천장에서 떨어지는 위험이 날마다 눈앞에 펼쳐지는 아찔아찔한 총칼이나 다름없는 전쟁터였다. 보릿고개를 넘겨야 했던 그때 처절한 그 시대는 그렇게 열렸다. 국가 근대화라는 선견지명과 신비스러운 비전을 캐낼 줄 아는 지략의 정치가의 등장으로 암담했던 그 땅을 겨우 반세기만에 3만 불을 넘기는 세계 10대 경제대국의 반열에 당당히 올려놓게 된 것이다.


그들에게 씌워주는 월계관이 있다. 금빛도 아니고 은빛 역시 아니다. 서독광산 근로자요 병원 간호사였다. 국가는 그들의 호칭을 ‘산업전사’라 우대한다.


 아버지가 농사를 지었다고 그 아들보고 농사꾼의 아들이라 말하던가? 엄마가 공장생활 했다고 공장뜨기 딸이냐고 물어야 하던가? 3만 불의 주역이 된 씨앗 같은 인고의 주역들, 수십 년 연중행사로 살아있음을 확인하며 그 기쁨을 공원 에서 피크닉으로 즐겼다. 모두들 가는 세월의 피해자인 듯 서글픈 표정들을 감춰가며, 하나같이 언제 젊었던가?


고장도 없는 세월의 흐름에 온몸들이 3만 불의 흔적들만 온몸을 휘감아 버렸다. 대화마다 반가움에도 군데군데 수술 자국이며, 아픈 곳이 어디어디라고, 무슨 운동, 건강관리, 모두들 잃고 사라져 버린 젊은 시절 추억속에 하소연들뿐이었다.


6,25참전용사며, 월남파병 장병들, 고엽제 피해 전우들, 총칼 들고 전쟁의 피와 대결했던 그들의 충성과 희생양이 호국의 영웅들 아닌가! 그들은 1년 정도 참전의 군생활이었지만, 죽는 날까지 전시작전 위로금이 배당된다는데, 가끔은 고국방문길을 열어줘 발전하는 고향길 흙냄새를 확인토록 고국관계기관의 배려가 남다르다는데, 3년씩이나 천길 지하막장에서 기어 다니며 석탄 먼지와 씨름했던 산업역군들의 칭호에는 한푼은커녕, 국가적 위로 한마디 없다.


형평성에 매우 뒤틀린 재외동포재단의 행정처리가 이렇게도 모르는 척 차별이 유별난데도, 국가정책 입안자들의 입씨름들은 무엇들 하고 있을까? 서독출신 근로자들이 촛불 들고 태극기 들고 악을 쓰고 시위라도 했어야 한다고 기다리고 있을까? 울지 않는 아이에겐 엄마젖도 필요없다는 걸까? 하기야 요즘엔 플라스틱 우유병으로 아이들 키워내지.


2만 명에 육박하는 싱싱한 젊은이들, 조국 근대화의 밑거름에 쓰임받은 세월이 장장 15년을 감당했었는데, 그들의 피땀으로 이루어낸 그 시절의 이야기들,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동우회 야유회 테이블에는, 뜨거운 여름날 구름따라 바람따라 산업전사자들의 추억만이 녹음방초와 함께 애국가를 힘차게 노래하고 있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