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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23인 클럽> 명예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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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에세이: 자연의 모자이크를 따라서-쯔빙글리의 슬픔과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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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나는 한국에서 떠나 스위스 취리히공항에서 랑데부했다. 보우 오 라크라는 호숫가 호텔에서 꿈같은 은혼의 하룻밤을 지냈다. 다음날 아침 취리히 시내의 구 시가지가 있는 리마트 강기슭을 산책하다가 산같이 우뚝 서 있는 교회 앞에서 거대한 동상과 맞닥뜨렸다. 

스위스에 가면 꼭 찾아보려 했던 쯔빙글리. 자신이 섬기던 바세르 교회 앞에 서서 오른손에 성경을, 왼손엔 긴 칼을 짚고 47세 때 기독교 개혁의 순교자로 전사한 카펠 언덕을 응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의 발치엔 분홍빛 화환이 정성스럽게 놓여있고, 돌절구 연못 속엔 자줏빛 국화가 가득 피어있다. 울리히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비엔나에서 대학교육을 받고 사제가 된다. 로마교황청의 면제부 판매와 교회의 어지러움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독일 신학자 에라스무스의 사상에 심취한다. 

 “성경으로 돌아가자(Back to the Bible)”고 주장하면서 라틴어 신구약성서를 취리히 고대언어로 번역해서 사제만이 아닌 모든 사람이 읽게 해준다. 그의 신념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운동과 유사한 스위스 중심의 ‘개혁파’ 운동으로 이어진다. 

쯔빙글리는 취리히에서 독일어권 주민들을 상대로 개혁운동을 전개했고, 그로부터 10여 년 후 칼뱅은 제네바에서 프랑스어권 주민을 상대로 개혁운동을 펼친다.

 쯔빙글리는 1506년에 사제로 서품 받고 10년간 글라루스에서 목회자로 사역하는 동안, 글라루스의 청년들이 교황의 용병으로 프랑스를 상대로 한 전쟁터에 군종신부로 세 차례 참전한다. 이때 용병제도의 비윤리성을 목격하고 비판한다. 

1518년 12월 취리히 그로스뮌스터 교회의 주임사제로 청빙을 받았고, 카펠 전투에서 쓰러지기까지 헌신적이며 활기찬 교회지도자였으며, 열렬한 애국자이자 민족주의자였다.

 1520년, 복음은 자유롭게 설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사순절 기간에 육식을 금하는 일이나 성직자의 독신제가 성경에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판단, 스위스 의회에 성직자의 결혼을 허용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쯔빙글리는 교회 안에서 음악을 사용하는 것도 금했다. 그 후, 칼뱅이 교회음악을 부활하지 않았다면 어찌 됐을까. 내가 교회 예배 때 가장 행복한 시간은 찬송을 부르고 찬양을 듣는 시간인데. 쯔빙글리가 성상과 음악과 성찬을 배격한 것은 하느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적인 예배라야 한다는 그의 신념에서 온 것. 

쯔빙글리는 성찬과 세례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성찬 자체가 신비적으로 은혜를 가져온다는 가톨릭교회의 화체설과 루터의 공재설을 부인하고 성찬을 하나의 ‘기념’으로(as a memorial) 간주한다. 

 취리히는 1531년 10월 가톨릭 세력에 함락된다. 취리히 군에 가담해서 싸우던 쯔빙글리는 수십 명의 설교자들과 수많은 군인들과 함께 전사한다. 가톨릭군은 쯔빙글리의 주검을 다시 화형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같은 자녀들의 싸움에 하느님은 얼마나 가슴 아프셨을까.

 그 후 스위스 안에서의 개혁운동은 잠잠해졌지만, 그때 다시 맺은 2차 카펠평화조약은 스위스를 더 이상 피 흘리지 않는 민주적 중립국으로 만든다. 

 쯔빙글리 동상을 받치고 있는 둥근 대리석 위에 적힌 그의 비문을 읽어보았다. "저들은 육신을 죽일 수 있지만 영혼은 죽이지 못하리라고 기독교회의 진리와 자유를 위해 영웅의 죽음을 맞은 율리히 쯔빙글리가 이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1531년 10월11일"

 우리는 갑자기 해가 진 듯 적막한 린덴호프 광장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광장 못 미쳐서 고전적인 분위기를 띈 한 미술관이 보인다. 쿤스타우스 취리히 미술관 벽에 설치한 로댕의 조각작품만은 못해도, 그 미술관 건물 앞엔 사방으로 네 개의 구멍이 뚫린 붉고 둥근 우주 모양의 조각작품이 길가에 전시돼 있었다. 

 광장의 한 모퉁이 테이블에서 향기가 진한 스위스 커피를 마시고, 리마트 강둑 위로 우뚝 솟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그로스뮌스터 대성당을 구경했다. 취리히는 쯔빙글리의 도시라는 듯 그 성당의 반달 문설주엔 ‘하느님의 이 전에서 쯔빙글리가 개혁을 일으켰도다’고 새겨져 있다. 

 이 교회가 ‘종교개혁의 어머니 교회’로도 불리는 것은, 그가 1529년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곳에서 설교를 했기 때문이다. 교회 안의 성가대 석 중앙에 높은 스테인드글라스는 오거스트 자코메티의 작품. 그가 조각가 알베르또 자코메티의 조카란 사실에 스테인드글라스가 더 눈부셔왔다. 

수탐파라는 산골 마을에서 본 그의 작품이 생각났다. ‘걸어가는 사람 II’라는 제목을 단 그의 작품은 나무젓가락처럼 가느다란 깡마른 쇠붙이 인간이 걸어가는 모습. 고뇌에 눌린 자들을 위해 평생을 걸어다닌 바로 쯔빙글리의 인체골격 같아 보였다. 알베르또가 이곳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그를 형상화한 작품을 떠올린 것은 아닐까?

 쯔빙글리가 가고 500여 년이 흐른 6월에 열린 에든버러2010년 세계선교대회는 특별하다. 카펠 전투에서 마주 싸우던 로마 가톨릭교회가 이 대회에 참가하여, 에든버러의 역사적인 교회 ‘St. Giles Cathedral’에서 ‘리마예식서’로 신구교단이 함께 예배를 올리게 되므로. 쯔빙글리와 칼뱅의 개혁정신은 이제 세계교회를 하나가 되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는 듯. 바세 교회 앞에 우뚝 서 있는 쯔빙글리의 슬픈 얼굴도 이젠 기쁨의 미소를 지으리라. 우리도 발걸음 가볍게 보랏빛 안개에 싸인 호반의 호텔로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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