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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greenon
프랭크의 수석과 목조각 공예와 모니카의 케나다의 삶을 주제로 살아 나가는 생활상을 소개하고 함께 하는 장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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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드디어 직장을 잡다
evergreenon

경험과 기술을 중시하는 남편의 캐나다 에서의 직업 남편은 한국에 근무할 당시에 암센타의 연구원으로 근무를 하였는데 그 당시 업무에 성실함이나 진취도에 대한 평가에서 직장의 귀감이 될 정도로 자신의 일에 대해선 무척 애착을 갖고 성실히 일을 해 왔다. 하지만 캐나다에서의 제 2의 출발선을 무역업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케네디언 교회에서 만난 사업자와 함께 손을 잡고 일을 했다. 그러나 경험 부족의 원인도 있지만 그 업무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운임비용, 창고 세, 상품 대금 등의 일부를 회사 직원으로서 부담해야 된다는 사칙을 반대하여 그 업을 그만 두었다. 그는 평소에 빈틈이 없기 때문에 자기에게 피드백 될 문제를 잘 짚고 결정 했을 것으로 나는 믿었다. 나 역시 그만 두는데 동조를 했지만 아직 까지 우리는 장사라는 단어를 써서 사업을 해본 유능한 사업자가 아닐 뿐 더러 그런 경험도 없고 그곳에 투자할 만한 그런 여유 돈도 충분치 않다. 그래서 남편은 안정된 직장 찾기에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그는 이곳에서 무료로 훈련 시키는 Job Finding Club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한달 여에 걸친 직업의 정보나 이력서 작성법, 목표 직업에 대한 접근 등등에 대해 배우고 그리고 우수하게 이수를 했다. 이수를 하고 난 이후부터 매일 신문을 사들 고 들어와서 자신이 원하고 져 하는 직업 분야에 이력서를 작성하여 Fax를 이용하든지 아니면 전자우편을 이용하여 보냈다. 아마 수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해답이 오는 곳은 없었다. 나중에 다시 자신이 이수했던 담당자와 상의를 했다. 남편의 이력서를 검토하고 난 뒤에 이력서에 나타난 학력이나 내용 등은 카나다에서 별로 회사에 채용 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 이라고 답해주고 수정 할 것을 제시해 주었다. 그랬다. 이나라는 학부를 중요시 여기지 않는다. 채용할 사람이 어떠한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그 기술로 인한 경험도 는 몇 년이 되었고, 일에 대한 성취도 또 경험에 유사한 발전된 모델들을 배우려는 자세가 포함 되어 있느냐는 게 제일 Top Issue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안 사실 이였지만 한국에서의 모든 것은 다 인정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편은 많은 고민을 했다. 평소에 당신은 자연을 너무나 사랑했고 자연과 함께 하는 일이라면 무었이든지 하곤 했다. 자신의 취미로서 분재나, 야생화 가꾸기, 난 재배, 공간이 없는 아파트에서 정원 가꾸기 등 한국에서 실지 프로 이상의 실력을 갖고 많은 집에 혜택을 주곤 했다. 내가 생각 할 때는 천부적으로 그는 창조성 이나 미적 감각 등이 뛰어나 그 계통으로 공부하면 훌륭한 우리나라의 예술인의 한사람 으로 지금쯤 자리 할 수 있었다고 항상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이력서 수정을 한다고 했다. 나는 처음에는 이해가 안되었다. 이력서를 새로 쓴다는 것은 잘못된 것을 수정 하는 거면 몰라도 어떻게 통째로 모두 변경이 가능할까 하고 의심을 했다. 그러나 남편의 설명으로는 내가 배운 모든 것 들을 이 나라에 적용해서 직업을 구하려면 평생 못 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평소에 자신이 좋아 하든 정원 가꾸기 및 디자인 설계 등은 어떤 문제라도 자신이 있기 때문에 그 방면을 중심으로 이력서를 쓰는데 대학 졸업 및 경험을 조경 혹은 정원학과로 하고 자신이 취미로 했던 분재나, 좁은 공간에서의 정원 창출이라는 이런 창조성을 겸해서 이력서를 작성 한다면 좋은 반응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방향으로 일을 밀어 부쳤다. 3-4군데 이력서를 제출을 했을 때 당장 전화가 와서 인터뷰를 하자는 연락이 왔다. 사실 여러 곳이 있었지만 제일 이 곳이 마음에 들어 했고 분야도 다양히 갖춰져 있고 규모도 아주 큰 회사였으며 집에서 고속도로로 약 10여분이면 가능하고 해서 남편은 인터뷰에 응시 하겠다는 의사를 비추고 그날을 기다려 왔다. 하지만 남편은 다소 걱정하는 눈빛 이였다. 그 분야에 대해서 전문적인 영어 지식이 짧다는게 문제 였다. 일반 의사 소통은 문제 없지만 그 분야는 전문 분야이기 때문에 질의 내용에 답변을 하기가 문제라는 것이다. 남편은 인터뷰 날짜가 결정되자 마자 다운 타운에 있는 서점에 가서 몇 권의 조경과 정원에 관한 전문 서적을 사왔다. 그리고는 밤늦게 까지 그곳에 있는 전문 용어를 외우는 것이 였다. 밥을 먹으면서도 화장실에서도… 중얼 중얼. 드디어 인터뷰 날이 였다. 나는 속으로 제발 당신의 안정된 직장을 가지기를 희망하는 기도를 올렸다. 아침에 나의 성의를 다하여 아침을 마련하여 상을 차렸다. 우리 모든 아이들에게 오늘은 이 집의 대들보 이신 아버지와 아저씨가 인터뷰를 하러 가는 날이라고 너희 모두들 마음속 으로 빌어 드려라고 아이들에게 주문을 했다. 남편의 인터뷰만 마치고 오는 시간만 기다려 졌다. 2시간 후에 남편은 돌아왔다. 그리고 지원자가 너무 많은 것 같다고 했다. 케네디언과 같은 완벽한 영어 구사력도 못하는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나를 고용한다는 것은 좀 무리지 않겠나. 그리고 나이도 이제 그들 보다 한참 많은데 하고 말 꼬리를 흐렸다. 그렇지만 어떤 질문을 했고 진행은 어떻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달라고 졸랐다. 당신의 말을 빌리자면 인터뷰 시에 이력서를 참작하고 이미 자신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문에 형광 펜으로 줄을 그어 놓았었고 학교 졸업과 경력에 대한 질문에 이어 디자인 부문에서는 실지 모의 실험인 모레와 바위 및 나무를 내어주고 동서남북의 방향을 위주로 정원의 디자인과 더불어 나무와 꽃과 정원석을 놓아야 할 위치 등을 실행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라는 것이 였다고 했다. 위치 선정을 다 끝내고 난 뒤에 당신은 부언의 설명으로 이제는 캐나다도 유럽 스타일의 정원에 대해서 서서히 실증을 낼 수 있는 단계이기 때문에 아시아 즉 일본식 스타일의 아기자기한 정원과 유럽 스타일의 화려함을 겸해서 창작이 되어져야 한다고 설명을 했더니 사장이 웃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일주일 내로 가부 결정을 드릴 테니 수고했다고 다음날 보자고 했다고 말했다. 나는 다시 한번 더 확인했다. 지금 당신이 헤어질 때 사장이 뭐 라고 했다고요 하고 다시 물었다. See you next another day라고 영어로 또박또박 나에게 말을 했다. 그렇다 나는 기뻤다. 이는 희망적인 말이다. 만일 남편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면 왜 다음에 보자고 했을까? 이곳의 평범한 인사란 말인가? 너무나 헷갈리는 말 같았다. 그 이후에 남편과 나는 집에서 꼼작 을 아니했다. 시장도 나 혼자 보러 다녔고 오직 전화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날 오전 9시에 전화벨이 울렸다. 남편이 수화기를 들었는데 영어로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하든 일을 모두 멈추고 바싹 다가 갔다. 회사에서 당신을 채용하기로 결정했고 정확한 업무 시작일은 4월 1일 부 터이고 계약을 위해 며칠 후에 나와야 하며 끝으로 축하한다고 말했다고 당신에게 듣는 순간 나는 당신이 얼마나 위대해 보였는지 몰랐다. 당신은 이 먼 외국 땅 까지 와서 이 나라 사람도 구인,구직이 힘이 드는데 영주권을 손에 잡은 지 1년도 채 안되어서 직장을 그것도 케네디언이 경영하는 회사에 들어갈 수 있는 게 이건 하나님이 당신을 이끌어 주셨고 복과 행운을 전부 주셨기에 가능 한 것이라고 나는 설명을 했다. 그래서 나는 남편이 더욱 존경스러워 보였다. 우리 집은 남편의 케네디언 회사 취직으로 인해서 더욱 활기를 찾을 수 있게 되었고 또 다소의 변화가 일게 되었다. 우선 아이들을 데리고 오고 가고 하는 것을 혼자 해야 하고 집안의 잡다한 세금정리, 학교에 가서 아이들에 대한 정보와 상담을 혼자 다 해야 하는 다소의 일에 대한 로딩이 걸리게 되었지만 그건 기쁨으로 충당해 낼 수 있는 문제 였기에 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이 기쁨을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제일 먼저 전했고 그들은 연일 축하를 해 주었다. 그리고 미시사가에 있는 조선생님댁과 토론 토에 사는 아빠 친구에게 연락을 했는데 그들로부터 축하 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너무나 행복 했었다. 남편은 4월부터 직장 엘 나갔는데 한달 정도는 업무를 익히기 위해서 회사가 관리하여 계약을 맺고 있는 모든 곳을 선임자와 함께 일을 배웠다. 회사의 모든 직원들은 남편을 반겨 주었고 만나는 사람마다 남편보고 당신은 Lucky Guy라고 얘기 한다는 것이다. 나는 제일 처음에는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당신이 나에게 이야기 하기를 올해 채용당시 남편이 지원한 자리는 무려 150매의 이력서가 경쟁한 자리라 하여 그렇게 부른다고 했다. 이 말을 들으니 우리는 한국인의 피를 가졌지만 너무나 자랑 서러움이 전에 보다 더한 뿌듯한 감을 느끼게 되었다. 남편의 직장에서는 알게 모르게 남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아 보았던 것 같다. 이곳에서는 직장을 구할 때 반드시 References라고 하여 이 사람을 보증할 참고인을 제출을 해야 한다. 우리와 같이 한국인으로서 이민을 와서 이곳에서 보증인을 세우려면 정말 힘이 든다. 또 가능하면 케네디언으로 보증인을 세우라고 한다. 남편은 우리가 사는 동네 주위에서는 이제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참고인을 설명하자면 우리가 지금 사는 이 동네로 이사를 온 한달 후 즘에 남편은 우편물을 가지러 동네 어귀로 가게 되었는데 그 길을 지나치다가 잔디를 깎고 계신 한 케네디언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는 남편은 그분에게 다가가서 얼마 전에 이사를 온 저기 사는 누군데 라며 인사를 올렸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취미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렀다고 한다. 이분도 너무나 부지런 하신 분이다. 하루도 일 없이는 못 산다고 했고 남편과 모든 것이 꼭 닮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남편을 지나치면서 몇 번 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대화해 보기는 처음이라 이야기 하면서 당신에 대해서 참 호감이 간다고 전하셨다. 그리고 자신도 집에서 나무를 가지고 무엇이든지 만들기를 좋아 한다고 하면서 자기집 창고에 가보자고 하여서 그곳에 갔다. 그곳에는 공구에 천국일 정도로 많이 수집을 해두시고 계셨다. 옆에 있는 테이블이나 이 모든 것을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혹시 이런 공구가 있느냐고 묻고는 아직 개봉도 하지 않은 전기 톱을 박스 채로 그냥 주시는 것이 였다. 이를 계기로 서로의 집을 오가면서 내가 어려울 때는 우리 집의 무슨 일이든지 도와 주시고 가르쳐 주기도 한다. 그래서 만만 할 때 잘 부르는 한국적인 정감 나는 소리가 바로 “ 형” 이 아닌가 그래서 그분을 남편은 형으로 부르고 있다. 이런 출발에서 그분은 기꺼이 남편의 참고인이 되어 주셨고 다른 한분 은 전에 무역업을 같이했던 직원인데 그분 역시 자신의 일을 그만두고 현직의 헤밀턴 시장님의 공직 차를 몰고 있는 공무원이 되었다. 이 분이 남편의 두 번째 참고인이 되어 주셨고 이분들에게 남편의 회사에서 남편에 대한 주위에 평 등을 수집했던 것이 였다. 한달 정도의 트레이닝 기간을 거치면서 실제의 일들을 현지에서 주고 실행하는 것을 몇 차례 했고 한번은 회사와 계약이 채결이 되어 있는 지역 최고 부호의 집의 정원을 돌보기 위해 몇몇 직원들과 가게 되었는데 그 집 주인이 정원사를 찾는 것이 였다. 주위의 직원들이 나를 추천 해 주어 주인의 말과 생각을 토대로 작은 정원을 꾸며 주게 되었다. 그분은 대단히 만족하다는 말을 했고 매주 와 달라는 것이 였다. 자신이 직접 사장에게 전화를 하겠다고 했다. 나를 채용한 사장님은 그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미 나에게 맡길 장소를 선정을 해 두었다는 것이 였다. 그런 일 등을 해서 남편은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다음달 부 터는 암센타와 병원이 함께 운영되는 종합병원의 주임 정원사로 발령을 받게 되었고 이곳에서 남편은 자신의 스타일대로 꽃을 심고 가꾸고 전지를 하며 주변 환경을 많이 개선하여 병원의 직원들로부터 아주 호평을 받게 되었고 남편이 관리하여 가꾸고 있던 꽃밭과 나무와 연관 지어 회사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정원에 선정 되었고 온타리오주에서 심사하는 Landscaping & Gardening 부문에서 Best Place로 선정되기도 했다. 남편은 이를 계기로 입사한지 채 1년도 안되어 2번의 봉급 인상 이라는 선물을 받았고 날로 회사로부터 코리언 Frank Kim에 대한 인정을 확실히 받고 있었다. 남편의 일은 보통 3월 중순경에 시작이 되어 12월 초순이면 일이 끝나게 된다. 그리고는 겨울 방학이다. 카나다는 복지 시설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다음해 3월 중순까지 방학 기간 동안에 정부에서 관장하는 Employee Insurance로 부터 현재 받고 있는 봉급의 70%를 집으로 우송을 해준다. 나머지는 회사의 제량에 따라 다르다. 이는 평상시 봉급 수령 시에 이를 대비하여 회사에서 일정의 금액을 납부하고 있는 것이다.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이런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 너무 좋아한다. 이 방학 기간동안에 남편은 자신의 취미 생활을 소화 한다. 실지 업무를 하는 기간은 본인의 취미 활동을 하기에는 부족하고 여름 나름대로 자신이 좋아하는 Golf를 치기 때문에 겨울 동안의 이 기간을 무척 좋아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도 지하에 마련된 자신만의 취미실에서 올 중순에 있을 수석(인상석) 전시에 쓰일 좌대를 만든다고 쿵쿵 거리는 소리가 나의 귓전을 두드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