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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greenon
프랭크의 수석과 목조각 공예와 모니카의 케나다의 삶을 주제로 살아 나가는 생활상을 소개하고 함께 하는 장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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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둥지와 그 주변환경
evergreenon

우리의 집과 주변 환경 내가 이민을 택하게 된 제일 중요한 동기중의 하나가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교육환경 제공이 그 첫째였고, 또 남편이나 나 또한 제2의 인생을 선진국의 잘 된 복지와 문화 그리고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데 있다고 이미 앞장에서 밝힌바 가 있었다. 물론 유학 온 아이들도 우리가 이곳으로 오는 데 기여를 했다고 보아야 한다. 영주권을 받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우리 아이들의 학교 문제였고 우리 집에서 약 걸어서 10분 거리에 유명한 공립학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이들 학교 입학을 위해서 학교의 소개 책자를 보고 교장과의 인터뷰 날짜를 잡았고, 9월 새 학기부터 정식적으로 이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입학 허가를 받았다. 두 번째로는 건강의료보험 신청, 사회보장제도 카드, 나의 운전 면허증교환 등을 했다. 나는 여기서 내가 이 글을 쓰면서 왜 우리집이라는 말을 강조 하였는지에 대해 나는 잠시 언급하고 져 한다. 캐나다 법률상 주택을 매입할 때 등기는 반드시 기혼자 일 경우에는 부부 이름을 다 올려서 등기를 하도록 법률화 되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을 했다. 부부라 할지라도 상호 동의가 없으면 집을 매매 할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정화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살고 있는 주변 환경은 유색인종이 거의 살지 않는다. 소득 수준도 상당히 높아서 도심지에서 그런대로 화이트 칼라에 속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살고 있기 때문에 어떨 때는 사는 것이 상당히 조심 서럽기 까지 하다. 그리고 교통편도 자신의 차량이 없으면 정말 불편하기 짝이 없다. 하루에 버스가 몇 대 다니지 않기 때문이고 반대로 자신이 차를 소유하고 있으면 10분내에 도심지 진입이 가능한 고속도로와 고향을 연상할 정도로 산을 가로 질러 온타리오주 에서는 가장 오래 되었다는 Wilson 이라는 지방도가 있기 때문에 도심에서 벗어난 전원 주거지라고 보는 것이 이해 하기가 더욱 빠를 것 같다. 그리고 5분 거리의 남쪽에는 각종 식료품을 파는 대형 몰 들과 편의 시설인 우체국 및 은행들 그리고 소방서 등이 자리하고 있고 서쪽 5분 거리에는 주요 공산품을 파는 대형 몰들이 있어 주거의 편의성을 십분 활용할 수 있다. 특히 우리집은 대문과 담장 조차도 없다. 모든 게 개방되어 있다. 집을 지은지가 10여년이 지났는데도 이 나라는 먼지가 많이 발생되지 않아 집들은 새 집 처럼 보이고 깨끗하며 범죄 발생률도 최저 상태이다. 10여분 거리에 자전거 트레일러가 원시림 보호 공원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휴일이면 이곳을 찾아 놀러 오기도 한다. 가장 마음에 드는 장소로는 이 지역사회를 위한 컴뮤니티 센터가 아이들 학교 앞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최신예 설비를 갖춘 아이스 링크와 스포츠 게임을 실내에서 즐길 수 있도록 해 두었고 봄부터 가을 까지는 대형 축구 잔디 구장 2곳이 붙어 있다. 우리집을 기점으로 최소 15분 거리 내에 약 20개 정도의 골프장이 산재 되어 있어 언제나 부킹이 가능하기 때문에 골프를 좋아하는 남편과 나로서는 금상 첨화가 아닐 수 없다. 오래 이곳에 살진 않았지만 백인 우월 주의자 들이나 인종 차별하는 막되 먹은 인간들은 아직까지 만나 보지도 당해 보지도 못했다. 어려움이 있을 때 서로 도와 주려는 사람들 밖에 아직 못 보았다. 어느날 우리집에는 비보가 날아 들었다. 유학 온 학생 중 남편 친구의 딸의 일이 였는데 한국에서 자기를 끔찍이도 사랑해 주시던 할머니가 돌아 가셨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그 순간 우리집 모두는 실지 울음 바다가 되었는데 짧은 몇 개월 동안에 그만큼 정이 들었기 때문 이였다. 아이를 한국으로 보내 주셨으면 하는 양친들의 의견 이였지만 나는 아이들을 거두고 있는 입장에서 반대를 하였다 이곳에 와서 적응 한지도 얼마 안되었고 또 학교의 공부도 너무 힘들어 하고 있는데 다녀 오면 슬픔 속에서 또 적응이라는 단계를 거친 다는 것은 아이에게 다소 무리라는 생각에서 였다. 그리고 일단 맡겨 둔 아이는 내가 상황을 더 잘 아니까 나의 정책에 따라 줄 것을 호소하고 그곳 일은 어른 들끼리 잘 해결하고 시간 있으면 부모님 들이 아이들의 상황도 점검 해 볼 겸 한번 다녀 가시는 게 어떠냐고 제시 했다. 한국에서 살 때 보다 몇 배나 넓은 집 이여서 그런지 우리가 가져온 짐을 제자리에 위치 시켜 놓아도 모두가 썰렁해 보였다. 지하에서 2층까지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정말 힘든 이삿짐 정리 였다. 한국에 있을 때 우리는 결혼 후 거의 20번 가깝게 이사를 다녀봐서 이사라면 어떻게 짐을 정리하고 싸고 배치할 지에 대해서는 정말 환하게 읽고 있었다. 남편은 한국에서도 이사를 한다고 결정 되었을 때 보통 한달 전부터 짐을 하나씩 꾸려 빈 방에다 적재를 해 두곤 했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곳에 이사와 서 쓸 수 있도록 모든 가구 등을 이미6개월 전에 주문을 해두고 이사 날짜에 맞춰서 배달 해줄 것을 부탁해둔 상태 였고 물건은 하루에 다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하루하루 몇 가지씩 나눠서 들어오고 있었다. 아이들 학교에 등교 시켜 놓고 우리는 늘 이삿짐 정리 및 주변 정리에 너무 바빠 있었다. 이사를 한 일주일 후에 집에 유학 와 있는 조카를 제외한 세 명의 남편 친구들이 캐나다 우리집을 방문한다는 연락이 와서 나는 공항에 픽업을 갔다. 이사 후에 정말 바쁜 날 이였는데 이렇게 손님들까지 겹치게 되어 너무나 정신이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공항 픽업으로 공항에 여러 차례 와 봤지만 지금은 기 기분이 너무나도 달라 있는 자신을 느낄 수가 있었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화장실 안내 판 까지 보이고 비행기 도착을 알리는 전광판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호적에 올릴 수 없었던 자식을 숨겨서 키우는 슬픈 사연을 지닌 어느 여인네의 공항 마중과 흡사하게 전 에는 나의 어깨는 움쳐려 졌었었고 왠지 남들과 같이 기를 못 피고 공항 마중을 나왔었는데 이제는 그 상황이 다른 나를 나 자신은 인정하고 있었다. 이른 기분 때문인가. 나는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공항 안을 돌아 다니면서 한국인들에 괜히 말을 걸어 보고 싶기도 하고 나도 “ 영주권자 이다” 라는 말을 해주고 싶을 정도로 나의 마음은 전 과는 무지하게 달라져 있었다. 딸들과 눈물로 상봉을 한 이 아이들 아버지와는 학교 방문을 필두로 가까운 인근의 유명 지 여행을 일주일 동안 빡빡하게 다녔다. 나중에 더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하고 말을 건넸었는데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 아이들과 같이 갈수 있다면 몰라도 우리 끼리 만 가는 게 별로 기분이 내키지 않는다고 아이들과의 시간을 더욱 할애 하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행 목적이 아니고 아이들의 공부하는 모습과 그 환경이 보고 싶었기 때문에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먼 이국 땅도 마지 않고 이곳까지 찾아오지 아니 했겠는가. 이렇게 해서 그들은 만족한 상태로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되돌아 갔다. 유학생 아이들의 공부하는 단계가 올라 갈수록 아이들은 힘들어 했고 신경도 몇 배나 떠 쓰였다. 그리고는 자주도록 시간이 있으면 대화를 나눴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점 등을 남편과 아이들과 상의하여 결론에 도달하면 곧 실행해 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 친구의 조카는 학과 선정에 있어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한국에서 이탈리아의 유명 옷 브랜드를 가져와서 한국에서 디자인하여 국내에 한정적으로 파는 의류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부친의 사업에 필요한 의류 디자인 계통을 전공하고 져 했다. 그러나 자신들이 추구하고 져 하는 이탈리아 풍의 의류 디자인을 배우는 것이 캐나다 보다 이탈리아로 유학을 보내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가지고 아이는 이곳의 학업을 중단하고 이탈리아로 유학을 보내겠다는 전갈을 받았다. 나는 생각했다. 어른들의 잠깐 짧은 착오로 아이들을 왜 혹사 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 계기를 바탕으로 내가 키우는 아이들에게는 그러한 일들이 일어 나지 않기를 소원했다. 그 아이가 캐나다를 떠나기 전 날 한국에 살고 있을 때에 남편의 가문에 큰 기둥이 셨든 시삼촌 깨서 당뇨와 간염을 지병으로 오랜 기간동안 고생을 해 오시다가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고 내가 근무하던 담당 의사 선생님께 연락을 해 보니 간에 문제가 생겨 아마 오래 생존 하시기가 힘들 것 같다고 전해 주셨다. 나는 당신으로부터 많은 정신적, 경제적인 도움을 받아 온 당신에게 인간의 도리를 다 하는 것이 예의 인 것을 알고 집에 모든 일들은 남편과 큰 나의 딸에게 부탁을 하고 예정에도 없었던 한국 행 비행기를 타고 이 아이와 같이 한국을 동행하게 되었다. 우리 아이들이 다니고 있는 학교는 공립이고 또 이 학교는 ESL 코스가 없었기 때문에 케네디 언 학생들과 똑같이 모든 수업을 참관하고 청강을 해야 했다. 내가 없는 동안 무척 어려울 것이 예상됐고 그래도 이제껏 가르쳐온 모든 것을 바탕으로 훌륭히 남편과 잘 해낼 줄로 믿었다. 비행기에 탑승하고 있는 동안 늘 이런 걱정만 들게 되었다. 이게 자식을 떠나는 부모의 심정이 아니겠나. 한국에 도착이 되어 나는 짧은 기간 동안에 같이 호흡을 나누던 이 아이에게 먼 장래를 위해서 굳은 일 좋은 일이 많았지만 긍정적으로 좋은 일만 인상에 남기 자는 말을 끝으로 우리는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