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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유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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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캐나다 침략(11)-1812년 전쟁 전후(1)
donyoo

 

캐나다 역사(1777-1811)

프랑스 루이 15세는 7년전쟁의 패배로 맺은 영국과의 겐트 조약에서 프랑스가 캐나다를 영국에 양보하는 대신 캐리비안해에 위치한 구아두루프 열도를 차지했다. 이 열도에서 생산되는 설탕이 캐나다 모피무역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선견작가인 볼테어도 캐나다는 눈과 추위의 지역일 뿐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7년전쟁의 북미전쟁 부분을 프랑스 인디언 전쟁이라고 불린다. 노바스코샤주에서 쫓겨난 프랑스계 아카디언들은 프랑스로 귀국하던지 퀘벡 타지역이나 뉴 브런스윅지역으로 뿔뿔이 헤어졌다. 투쟁할 수 있는 반영국 프랑스계 정착자들도 대부분 프랑스로 돌아갔다.

1775년 미국의 캐나다 침략을 통해 미국과 합세하여 영군을 몰아내고 미국의 14번째 주가 되는 것을 거부한 대다수의 퀘벡주민들과 아카디언들은 영국지배에 만족했다.

1783년 파리조약에 의해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게 되고 캐나다와 미국의 영토가 명확하게 표기되면서 미국의 영국 왕당파들은 대부분 영국으로 역이주했고 40,000여명으로 추산되는 왕당파는 캐나다 동북지역의 세인트 잔 강으로 모여들어 1784년 뉴브런스윅 주를 형성했다.

이중 3,500여명은 자유를 찾은 미국 흑인노예들이었다. 온타리오주 동부나 토론토지역으로 이주한 왕당파는 약 20,000명으로 추산된다.

1791년 캐나다는 언어구사로 지역이 나뉘어지고 불어권 퀘벡지역을 하위 캐나다( LOWER CANADA ) 영어권 온타리오 지역을 상위 캐나다( UPPER CANADA )로 분리했다.

캐나다는 세금을 낮추고 정착자들에게 200에이커의 농토를 부여하여 미국을 포함한 유럽인들의 캐나다 이민을 장려했다. 1811년말 상위 캐나다 인구는 11만 하위 캐나다 인구는 30만이 넘게 되었다.

 

평화조약으로 평화가 보장되지 않는다

워싱턴 초대 대통령(1789-1797)은 미국이 독립되었다 하더라도 영국은 어느 때고 미국을 침략할 수 있다고 예견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다. “임전태세를 갖추는 것이 평화유지를 위한 최선의 수단이다. 임전태세는 단합된 국민의 애국심과 군인의 충성심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평화는 조약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고 국력으로 지켜지는 것이다.”

프랑스가 미국의 동맹국이 되어 미국 독립을 가능하게 했지만 워싱턴은 미국의 국방력이 영국을 견제할 수 있을 때까지 영국과 유대관계를 맺어야 된다고 믿었다.

그는 영불간의 분쟁에 중립을 지키고 1795년 영국과 제이조약을 맺어 미불간의 무역협정을 파기하라는 영국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고 5대호와 샴플레인에 세운 영국의 요새철퇴를 요구했다. 워싱턴은 제이조약으로 영국의 침략을 피해 미국의 국방력을 키우는데 필요한 시간을 버는 외교정책을 세웠다.

워싱턴의 정책을 이어받은 아담스2대 대통령(1789-1801)은 미국의 국방력을 키우기 위해 강력한 해군을 키웠다.

 

침략을 부르는 민주공화당 정책

연방정부의 축소화, 농업장려, 중앙은행 반대를 당 원칙으로 하는 제퍼슨3대 대통령(1801-1809)의 민주공화당은 연방정부의 국채를 줄이기 위해 국방예산 삭감으로 강력한 미 해군을 거의 와해시켰다. 영국은 이틈을 타고 계속 미국상선을 나포하여 영국함대에서 불법으로 도주하여 미 상선에서 일하는 전 영국 해군뿐 아니라 미국선원들도 납치하여 강제로 영해군에 근무하게 만들었다.

친불정책을 추구하는 제퍼슨은 영해군의 미상선 나포를 방지하기 위해 영불 양국가와 무역제재를 감행했으나 심각한 미국 경제침체를 야기하여 무역제재를 풀어야 했고 영국의 행패를 감수해야 했다.

제퍼슨의 정책은 워싱턴의 부국강병 정책을 역행하는 것이 되어 영국이 마음대로 해상침략을 하게 만들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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