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
ON
추천업소
추천업소 선택:
추천업소 그룹 리스트
  • 식품ㆍ음식점ㆍ쇼핑1
  • 부동산ㆍ건축ㆍ생활2
  • 미용ㆍ건강ㆍ의료3
  • 자동차ㆍ수리ㆍ운송4
  • 관광ㆍ하숙ㆍ스포츠5
  • 이민ㆍ유학ㆍ학교6
  • 금융ㆍ보험ㆍ모기지7
  • 컴퓨터ㆍ인터넷ㆍ전화8
  • 오락ㆍ유흥ㆍPC방9
  • 법률ㆍ회계ㆍ번역10
  • 꽃ㆍ결혼ㆍ사진11
  • 예술ㆍ광고ㆍ인쇄12
  • 도매ㆍ무역ㆍ장비13
  • 종교ㆍ언론ㆍ단체14
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159 전체: 517,966 )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4) - 버림받은 아픔을 호소한 예수님
daekim

 

“제육시로부터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시니, 이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5-46)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아침 9시였다. 예수님이 처형당하시는 것을 구경하려고 모인 무리들은 십자가 위의 주님을 욕하고, 비웃으며, 놀려댔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으며, 옆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겠다.”고 그에게 구원을 허락해 주셨다. 그리고는 십자가 밑에서 슬픈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고 계신 어머니 마리아의 남은 생을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셨다.

 

그러는 동안 3시간이 흘러 정오가 다가올 때 참으로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 광명한 대낮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님을 조롱하며 모욕하던 무리들이 조용해졌다. 갈보리 언덕에 정적이 찾아 들었고,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과 공포가 스며들었다. 이때 고요한 적막을 깨며 십자가 위의 예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인 이래 인간사회에서는 수많은 살인사건들이 일어났다. 그 모든 살인사건들 중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한 것보다 더 불법적이고 악랄한 살인행위는 없었다.

 

예수님을 직접 재판한 본디오 빌라도는 “나는 그에게서 아무런 잘못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주님의 무죄를 선언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그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고 밝히신 구세주 그리스도를 살인, 강도, 국가반역죄 등의 중 범죄자들만 처벌하는 십자가에 매달았기 때문이다. 이 천인공노할 살인극의 피해자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돌연히 하나님을 향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외치신 것이다.

 

버림받는 것처럼 슬프고 괴로운 일은 없다. 폐광으로 인해 북적대던 광산촌이 “유령 촌”으로 변해버린 촌락을 지나는 이들의 가슴마다 한없는 슬픔이 찾아 든다. 버림받은 아내와 남편과 버려진 아이들은 당사자들은 물론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눈시울을 적신다. 예수께서 하나님이 주신 인류구원의 막중한 사명을 지내고 세상에 오셔서 33년을 머무시는 동안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 사이에는 한 번도 교통이 끊어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너무도 외롭고, 괴롭고, 슬픈 시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끼지 못한 예수님이 어째서 그를 버리셨느냐고 울부짖으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의 압제를 받으며 진통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 그들을 애굽에서 탈출시켰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서 속수무책일 때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어 그들을 건너게 하였으며, 그들이 40년 간 광야에서 방황할 때 모든 위험과 환란에서 건져내어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인도하셨다.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을 지켜주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는 아들 예수님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도 숱한 사람들에게서 버림 당하셨다. 그의 백성들과 고향 사람들은 물론 가족들까지도 예수님을 멀리하며 그를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만은 언제나 그의 곁에 계셨다. 예수님이 온갖 멸시와 천대와 박해를 받으시면서도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동행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위로와 도움의 손길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 예수님에게서 그의 얼굴을 돌리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며, 반석이시며, 방패시며, 구원자시다. 여호수아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며, 너를 떠나지 않겠다.”(수 1:5) 말씀하시고, 그 약속을 지키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런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 그의 아들을 버리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요1 4:8), 인간을 향한 그의 사랑은 영원하시다(시 117:1).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정의로우시기도 하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죄를 증오하시며, 성결하고 거룩하시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사 6:30)라 찬양했으며, 하박국은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심으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신다.”(합 1:13)고 기록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기에 그의 법도에 어긋나는 모든 행위를 처벌하시는 분이시다. 이는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죽음이란 형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을 말해준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으며”(롬 3:23), “죄의 값은 사망”(롬 6:23)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그의 공의에 따라 죄 범한 인간들을 멸하는 대신 그의 아들로 하여금 인간의 죄값을 지불하게 하여 세상만민을 위한 계획을 세우셨고, 예수님은 그 같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가 죽어야만 인간을 살릴 수 있음을 알고 계셨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째서 그를 버리셔야만 하는가를 알고 계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아픔과 슬픔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가도 알고 계셨다. 때문에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 간구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을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왜 나를 버리느냐?”는 아들의 절규를 들으면서도 인간의 죄를 등에 진 예수님에게 죄의 값인 죽음의 형벌을 내릴 수밖에 없으셨던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실 때 세상은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빛이신 하나님이 떠나시면 찾아 드는 것이 어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까지 그를 떠나고 온 세상이 캄캄해진 가운데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시던 예수님의 고통과 슬픔과 아픔은 크기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참으셨다. 멸망으로 향하는 인간들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주기 위해서였다.

 

이는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갈보리 언덕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에 그들이 범한 모든 부끄럽고 추악한 죄를 씻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해 드려야 함을 의미한다. 그래야만 죄의 값인 사망의 형벌로부터 해방된다고 성경이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롬 8:1).

 

예수님은 그를 죽음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버림 받으면서도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분리 당하는 고통을 참기가 너무도 힘들어서 왜 그를 버리느냐고 외치셨다. 그러나 그 부르짖음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나 도전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 두 번이나 외치신 것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좋은 일들만 생길 때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러나 고난과 역경의 파도가 그치지 않고 몰려들면 “어째서 이런 일들이 내게 일어나느냐?”며 하나님에게 불평과 원망을 토로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어가는 아들을 보면서도 침묵하시는 아버지를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심으로 하나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나타내신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살아야 함”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갈보리 언덕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 사랑의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양으로 삼음으로 그의 공의를 충족시키며 정의를 행하신 것이다. 사탄의 사주를 받은 인간들은 하나님이 아들을 죽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살인극을 저질렀지만,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의 인류구원 계획을 이루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므로 활짝 열어 놓으신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내야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할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흠 없는 어린 양을 죽여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고 하시며, 그가 애굽의 장자들을 멸하실 때 “그 피를 보면 그 집은 넘어 가겠다.”(출 12:13) 하신 말씀을 상기하면 인간의 구원은 예수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하나님에게 버림받으셨기에 이루어 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인간을 구원하신 예수님의 사랑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요 15:13)하신 그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 같은 예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으로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 영생의 길로 들어선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무수한 사람들이 거센 죄악의 물결에 떠내려가며, 많은 무리들이 넓고도 편한 죄의 길을 희희낙락하며 걸어가고 있다. 그들은 생각할지 모른다.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은 결국 그들 모두에게도 구원의 은총을 베푸실 것이라고.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보내는 구원의 초청장은 영원토록 유효한 것이 아니다. 심판의 날에는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 아닌 공의와 정의로 구원 받을 자와 멸망할 자를 가르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굳게 닫힌 노아의 방주의 문이 결코 다시 열리지 않았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 애타게 부르짖은 예수님의 음성에 하나님께서 대답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신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예수께서 만족시키셔야만 인간을 위한 구원의 문이 열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죄의 생활을 뒤로 하고, 구원받은 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며, 죄악 된 인생길을 걸어가는 이들에게 생명 줄을 던지는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해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