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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개선문(1) -티투스 개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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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정변 속에서도, 침략하면 승리하던 막강한 세력을 유지해온 로마 시대에는 36개의 개선문이 세워졌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지금도 로마에는 2000년 전부터 세워진 개선문이 3개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며 남아있어 후대에 세워지는 대부분의 개선문의 모범이 되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콜로세움 바로 옆에 우뚝 서 있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지만 남아 있는 3개의 개선문 중에 제일 처음 세워진 개선문은 콜로세움의 서쪽으로 포로 로마노(Foro Romano)로 들어갈 때 지나게 되는 티투스의 예루살렘 정벌을 기념하여 세운 티투스 개선문이다. 

 

 

 

 


콜로세움 쪽을 바라보는 쪽 개선문의 정상에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이 신격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신격 티투스에게 바친다’라는 뜻의 글귀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SENATVS/POPULVSQUE ROMANVS/DIVO TITO VESPASIANI F(ilio)/VESPASIANO AVGUSTO”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두 형제, 로물루스(Romulus)와 레무스(Remus)가 건국한 로마이고 보면 낳을 때부터 귀족인 집안이 어디 있었겠는가 마는 BC500년 경부터 시작된 공화정이 이어 오다 보니 수많은 귀족들이 탄생하게 되었고, 공화정이 제정으로 바뀌었다 한들 또 다른 귀족들이 탄생하게 되는 것은 인간사의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세리(稅吏)였던 에퀴테스 계층의 로마인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의 아들로 태어난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가 정치적 혼란기에 여차여차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그 아들 티투스가 자리를 이어받고, 또 뒤를 이어 그 동생이 황제가 되고 나니 집안의 귀족화, 신격화가 필요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티투스와 그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가 신격화되었다는 것은 이 개선문이 티투스가 죽은 다음인 서기 81년 이후에 세워졌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황제가 된 후에 세웠다는 뜻이 된다.


서기 71년, 유대나라를 완전히 초토화한 후 티투스가 많은 전리품과 노예들을 데리고 로마로 개선할 때에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가 그 개선행렬에 함께 하였으나 아직 개선문은 없었다. 티투스는 후일 요세프스가 되는 요셉 벤 마티아스를 개선식에 대동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79년 6월 24일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타계하고 39세의 티투스가 즉위했다. 아우구스투스 이래 황제의 친아들이 후계자가 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이 군사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며 원로원으로부터 황제자리를 세습할 수 있는 권한 등 많은 권한을 법적으로 인정받았으나 어떤 법령보다도 그에게 더 중요했던 문제는 자신의 치외법권적 권능을 인정받고 벼락출세한 자기 가문의 위신을 높이는 일이었다.

 

 

 

 


포로 로마노를 확장하며 네로의 '황금궁전' 터 위에 콜로세움 공사를 시작함과 동시에 군사문제에도 군기 확립과 안정을 도모하던, 10년의 치세 동안 로마 시민들은 “베스파시아누스는 내란을 종식시켜 제국의 붕괴를 막은 인물”로 인정하였으며 그가 죽은 후에 즉시 신으로 추앙되었다.


티투스는 예루살렘 성전을 불 태우고 성벽을 헐어 버렸듯이 황제로 즉위하기 전 정복전쟁을 할 때까지는 성격이 포악하고 행실이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황제가 된 다음부터는 로마제국의 최고통치자로서 자신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식시키며, 로마의 도로망과 수로 등 인프라를 정비하는데 신경을 쏟으며 아버지가 시작한 원형경기장의 완공에 전념하노라 자신의 승전을 기념하는 개선문 공사는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재위하던 2년 동안 로마에는 여러 가지 큰 재앙이 많았다. 서기 79년 8월 24일, 황제가 된지 불과 두 달 만에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아직도 발굴 초기단계이지만 일부 입장이 허용되고 있다.)이 완전히 지구상에서 사라졌는가 하면, 서기 80년 초에는 로마의 중심부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서기 81년 여름에는 로마에 유례없는 전염병이 나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콜로세움 개막행사 100일 축제가 끝날 때쯤 그는 눈물을 하염없이 쏟았다고 하는데, 혹시 자신의 죽음을 이미 감지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은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그를 기리기 위하여 개선문을 세운 것이란다. 반면 유대인들은 그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죄로 신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서로 보는 관점이 상반되어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에게 끌려서 로마로 온 수많은 유대인들의 후예들이 1400년 후에 피렌체에서 꽃을 피운 문예부흥 운동에 많은 역할을 하였으며, 결국 이 운동이 유럽의 중세 암흑시대를 근대로 바꾸는 촉매작용을 하였으니 티투스의 개선이 새롭게 조명되어야 하지 않을까?  


요즈음도 유럽에서, 북미주에서 세상의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금융을 지배하고 있는 대다수가 유대 디아스포라의 후예들이니 말이다. 아직도 유대 나라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옛날처럼 사두개파니 바리새파니 하며 서로 물고 뜯고 싸움질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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