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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ghyunsoo
마인즈프로덕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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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외할아버지는 만주로 이주했을까?”
Hwanghyunsoo

 

어머니는 일제 강점기인 1931년에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셨다. 일곱 살 때 아버지를 따라 가족 모두가 만주로 이주한다. 지금의 길림성 연변 하마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해방이 된 다음해, 혼자서 이모가 살고 있는 회령으로 가게 된다. 짐작이지만, 해방이 됐더라도 정착한 터전을 바로 버리고 가족 모두가 다시 회령으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아 우선 막내딸을 이모 댁에 보내지 않았나 싶다. 그러다가 6.25 전쟁이 일어나 어머니는 이모네 가족과 함께 남한으로 피난 내려와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 된다.

이제 나도 외손녀가 생기다 보니, “외할아버지는 왜 가족들을 데리고 만주로 이주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여쭤보면 됐을텐데, 아쉬워 해도 벌써 지난 일이다. 그나마 책이나 대중음악 등에 묻어 있는 일제 강점기의 ‘만주 이주’를 더듬어 느껴본다.

일제 강점기에 만주로 이주하는 것은 정치, 경제적인 이유로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평안도와 함경도 등 북부지역 주민들이 이주를 하다가, 후기로 접어들수록 경상, 전라, 충청 등 남부지방 농민들이 많아진다. 대부분 정치적 이주보다는 경제적 궁핍으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1910년에 시행된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과 그 후, ‘산미증식계획’으로 조선  농민들은 몰락하였고 토지를 빼앗기거나 소작할 땅을 잃는다. 1931년 만주 사변으로 만주국을 세우며 일제가 사실상 장악하며 일본은 만주 개간을 위해 조선인들의 이주를 장려하였다. 이러한 상황 변화로 1930년에 60만 명이었던 이주민이 1944년에는 약 170만 명이나 된다.

1945년 광복 후에는 그 중 약 80만 명이 귀국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때 귀국하지 않고 만주에 남아있던 조선인들의 후예들이 1세기를 거쳐 현재의 중국 조선족이 된다. 나의 외할아버지 가족도 그때 다시 돌아오지 못해 그곳에서 정착한다.

만주로 떠난 이주민들의 고된 삶은 당시의 대중가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아직도 알려지고 있는 <오대강 타령>, <타향살이>, <울리는 만주선>, <찔레꽃> 등에 애환의 이주 생활이 담겨 있다. <오대강 타령>의 일부분이다. 동쪽은 두만강 간도살이 가는 / 고향을 떠나갈 눈물은 핏빛” 에서 느껴지듯이 ‘살이’란 무엇에 종사하거나 기거해 살아가는 것이다. ‘시집살이’, ‘처가살이’, ‘머슴살이’, ‘셋방살이’, ‘피난살이’ ‘타향살이’에서 보듯 어느 것 하나 편하고 여유롭지 않은 서민의 삶이다. 핏빛 눈물로 두만강을 건너가는 조선 농민의 앞길에 기다리고 있을 ‘간도살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울리는 만주선>에서는 수탈의 상징인 일본 제국주의 열차에 몸을 실은 이주민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고향에서 바엔 타향이 좋다/ 찾아가는 세상은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모른다 모른다.” 라며 절규하듯 반복한다. 고향에서 살 수 없어 만주로 가는 길은 이처럼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찾아가는 길이었다.

 

아직도 인기 있는 <찔레꽃>의 가사다. “1.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고향/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 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이별가를 불러 주던 잊을 동무야/ 2. 달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동무/ 천리 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전에 모여 앉아 백인 사진/ 하염없이 바라보던 즐거운 시절아/ 3. 연분홍 봄바람이 돌아드는 북간도/ 아름다운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꾀꼬리는 중천에 슬피 울고/ 호랑나비 춤을 춘다 그리운 고향아”

<찔레꽃>은 1942년에 발표되었지만, 해방 직후에 크게 유행한 노래다. 하지만, 작곡가가 월북했다는 소문이 돌며 한때 금지곡이 되기도 한다. 노랫말 속에 ‘남쪽 나라 초가삼간’과 ‘천리 객창 북두성’은 서로 대비를 이루는 표현이다.

‘초가삼간’을 떠올리는 순간, 떠나온 고향, 동무들과 놀던 시절이 그리워 3년 전에 찍은 사진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따뜻한 봄이 돌아와 북간도에도 찔레꽃이 피고 꾀꼬리가 울지만, 고향은 더욱 그립다.

기회의 땅, 만주에 뿌리내리고 열심히 살아보려 해도 현실은 힘들었다. ‘이상 국가’를 건설한다던 총독부의 선전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두고 온 고향을 떠올리지만, 쉽게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답답한 마음을 노래에 담아 달랬다.

 

 

광복이 되니 이번에는 삼팔선이 생긴다. <가거라 삼팔선>은 산이 막혀 오시나요/ ~ 물이 막혀 오시나요/ 같은 고향 땅을 가고 오련만/ 남북이 가로막혀 원한 천리 / 꿈마다 너를 찾아 꿈마다 너를 찾아/ 삼팔선을 헤맨다” 라며 남북 분단을 슬퍼한다.

애당초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해 설정한 삼팔선은 남북의 왕래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처음부터 통행이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었고, 초기에는 통제가 느슨한 편이었다. 마침내 삼팔선은 남북의 강력한 체제 구축으로 가는 영구분단선이 된다. 삼팔선을 경계로 나뉜 남과 북에서는 이념에 배치되는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남과 북으로 넘어간다. 이 노래에는 분단 현실에 대한 원망과 통일에 대한 염원이 들어 있다.

한국전쟁 중, 1.4 후퇴로 흥남부두를 떠난 실향민은 임시 수도 부산으로 간다. 어렵사리 피난 왔으나 살아갈 일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암울한 현실 속에서 잃어버린 연인을 찾아 헤매는 노래가 만들어진다. <굳세어라 금순아>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던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홀로 왔다”

전쟁 중에 연인과 생이별하고 피난지에서 장사치로 일하며 살아간다. 흥남 부두에서 헤어진 ‘금순이’에게 안부를 전하고 다시 만날 때까지 굳세게 잘 지내기를 바라는 내용이다.

당시의 대중가요를 들으면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다. 노래 속에는 고향을 떠난 이주의 삶 속에 애환과 그리움이 녹아 있다. 고국을 떠나온 우리 같은 해외 교포들도 그때 ‘만주 이주민’ 같은 절박함은 없지만 그리움과 향수는 다르지 않다. 그래서인지 당시의 노래를 들으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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