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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선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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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0
한국전쟁에 있어 가평전투의 의미

 

 올해는 6.25 전쟁이 휴전한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으니 강산이 일곱 번 변한 시점이지만 아직도 우리는 북한의 위험 속에서 살고 있으며 갈수록 긴장의 속도가 더해지고 있다.

캐나다에 사는 우리로서는 6.25 전쟁시 용감하게 싸워 승리한 캐나다군의 가평전투(1951년 4월23~25)를 기억하고, 그들의 용감성과 고마움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고자 한다.

 

가평전투란?

가평전투는 1951년 4월23일부터 25일까지 가평일대 677고지에서 중공군 1개 사단과 싸워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를 막아내고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캐나다군은 영연방 제 27여단의 소속으로 캐나다 PPCLI 대대가 이 일대를 방어하고 있었다. 영연방 제 27여단은 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의 영연방군으로 편성된 부대였다.

계속 북으로 퇴거만 하던 중공군은 4월에 접어들자 다시 춘계 대공세를 강행하면서 침공의 양상이 뚜렷해졌다. 그 당시 이 지역 방어를 맡고 있던 한국군 제6사단은 적군에게 밀려 후퇴하고 있었으며, 결국 영연방 제27여단이 방어를 하게 되었다.

여단장인 BUKE 준장(영)은 뉴질랜드 포병대대를 가평 10Km 북쪽인 794 고지(수덕산) 부근으로 급파하는 동시에 영국 Middlesex 보병대도 794고지로 이동시켜 뉴질랜드 포대를 엄호토록 배치하였다. 그리고 잔여 보병대대를 다음과 같이 배치 하였다.

가평 6km 북쪽 504고지(죽순리 동쪽) 일대에 호주대대를, 좌측 가평천 건너 677고지(내촌 2km 남쪽) 일대에 캐나다 PPCLI대대를 배치하였다. 그러나 전방의 상황이 악화되자 794고지에 주둔한 영국 Middlesex대대와 뉴질랜드 포병대를 여단지역으로 철수시킨다.

이리하여 일선 대대는 우측에 호주 대대가, 좌측 677고지 일대는 캐나다 대대가 담당한다. 캐나다 대대는 방공호를 파고 화기를 배치하는 등 방어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이 지역은 방어지형으로서는 최적지였다. 23일 밤 10시경부터 대대적인 중공군의 공세에 사상자가 속출하고 일대 혼전이 전개 되었다.

날이 밝자 뉴질랜드 포대와 미 공군 지원에 힘입어 전투가 다소 호전되는 기세가 보였으나 중공군은 끊임없는 공격으로 대대를 크게 위협하였다. BUKE준장은 이 상황 속에서 현 진지를 지탱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결과 오후 5시를 기해 호주군 대대에 철수 명령을 내린다.

캐나다 PPCLI 대대장 Stone 중령은 677고지 정면 일대를 방어하기 위해 4개 중대 중 B중대를 전면 배치 등 만반의 대비책을 마련하였다. 캐나다 대대가 처음으로 적들과 접하게 된 것은 24일 아침 7시였다.

그러나 적의 공세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이날 야간 8시부터였다. 밤 11시가 되자 적들의 집중공세가 시작되었고 수적으로 증가되고 기관총과 박격포의 지원을 받은 적들은 의외로 강하였으며, 이에 맞선 B중대는 결국 최 전면의 일부 진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B중대는 주 전지로 철수하여 부대를 재편성한 다음 격렬한 백병전 끝에 적을 물리치고 잃었던 진지를 다시 회복하였다. 적들의 시도를 재빨리 간파한 대대장 Stone 중령은 적들에게 집중강타를 명령하였다. 적들은 중화기의 적시 맹타에 놀랐고 무수한 사상자를 남기고 철수하고 말았다.

적은 가평천 골짜기를 따라 일시에 가평까지 침공하려던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이번에는 25일을 기하여 산세가 험악한 677고지의 D중대 진지로 공격 방향을 바꾸어 전면 포위를 시도하였다. 이때 중대장 Mills 대위가 대대장에게 일단 후퇴하여 재공격 태세로 대처함이 어떠한지 보고하였다.

이에 Stone 중령의 답변은 "NO! 절대불가, 한 명도 후퇴불가, 모두 끝까지 항전하라"였다. 25일 날이 밝자 중공군은 수적으로 많은 인원으로 두 차례 공격을 시도 했으나 실패했다. 25일 이후부터는 적은 완전히 공격을 체념한 듯이 움직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리하여 만 3일에 걸쳐 가평일대를 피로 물들인 혈전은 영연방 제27여단의 빛나는 승리로 막을 내렸다. 가평전투에서 가평을 침공하고 서울-춘천을 장악하려던 적들은 UN군의 정연한 방어와 막강한 화력의 집중 발휘로 그 공세는 무너지기 시작하여 4월말 경에 완전히 격퇴되어 후퇴하고 말았다.

가평전투는 영연방 27여단 및 한국전에 참가한 모둔 UN군 부대에게 가장 모범적인 전투의 하나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미국 정부로부터 최고인 대통령 부대표창이 캐나다의 PPCLI 대대와 호주 대대에게 수여되었다.

PPCLI부대는 캐나다군에게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은 유일한 부대이다. 캐나다 대대의 전투요원 손실은 전사자 10명, 부상자 23명 계 33명 이었으나 중공군은 1천여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결론

비극적인 6.25전쟁이 휴전된 지 70년이 지났다. 세월이 흘러 현재 대한민국은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1950년 당시 캐나다 군의 숫자는 5만명 가량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5년 밖에 안되어 군 병력이 절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캐나다군은 2만6791명을 파병하여 UN군에서 미국, 영국 다음으로 3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병하였다.

온타리오 브램턴 Meadowvale cemetery에 가보면 한국전에서 전사한 516명 전사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많은 전사자가 20세 전후의 꽃 같은 나이의 젊은이 들이다. 이 분들의 고귀한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었을까.

이번 가평전투 72주년 4월을 맞이하여 그분들의 고마움과 희생정신을 높이 기리고자 한다. 2021년, 2022년 2년에 걸쳐 온타리오 브램턴 Meadowvale cemetery와 나이아가라 폭포 근처의 무명용사 묘지(Fairview Cemetery)에 가평전투 승전비를 건립했으며, 자랑스러운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역사를 망각한 민족은 미래도 없습니다. We will remember them forever(우리는 그들을 영원히 기억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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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30
가평전투와 캐나디군의 활약상

 

지난 2년간 추진되었던 가평전투 기념비를 드디어 브램턴시 메도베일 묘지에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평전투가 6.25전쟁사에 어떤 의미이고 캐나다 군이 얼마나 용맹했는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1. 가평 전투란?

이 전투는 영연방(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제27여단이 4월19일 사창리 4km 서쪽에서 한국군 제6사단 제19연대에 담당전선을 인계한 다음, 군단 예비대로 가평으로 남하한지 3일 만인 1950년 4월23일부터 4월25일까지 싸운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영연방군이 한국전쟁 중 경험한 가장 큰 규모의 전투이자 가장 큰 영광을 안겨준 전투입니다.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를 막아내는데 성공한 제27여단, 특히 캐나다의 PPCLI대대와 호주대대의 활약상은 6.25전쟁사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영연방 제27여단은 1)영국군Middlesex연대 제1대대, 2)캐나다군 PPCLI 제2대대, 3)호주군 제3대대, 4)뉴질랜드 포병 제16야전연대를 말합니다.

2. 가평전투의 개황

1950년 4월19일 군 예비대가 된 영연방 제27여단은 가평에 CP를 개설하고 각 대대를 부근의 계곡지대에 배치 하였습니다. 이때의 한국전 전선은 동부에서는 제1, 3군단이 북한군 제3, 5군단을 추격하고 있었으며, 중서부는 미 제9, 10군단이 춘천과 가평으로 진출하려 중공군 제39, 40군과 대치하고, 서부에서는 미 제1군단이 북한군 제1군단과 중공군 제26, 27군을 임진강 이북으로 격퇴하고 임진강 연안까지 진출 중이었습니다.

계속 북으로 퇴각만 하던 적은 4월로 접어들자 새로운 전기를 찾은 듯 북한군 제3군단과 중공군 제39, 40, 64군 등 새로운 부대를 전선에 투입하여 춘계공세를 위한 부대의 재편과 공세를 강화하더니, 4월 중순부터는 그 활동이 본격화하면서 침공의 양상이 뚜렷해졌습니다.

이와 같은 적의 침공 기세가 노골화하자 미 제8군은 전 전선의 방어태세를 강화하는 한편 현 전선을 방어보다는 앞으로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군의 공격이 개시되자 적의 저항이 강화되었으며, 23일 마침내 사창리 방향으로 남하하는 중공군 대병력(제20군)과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사단은 사창리 전방에서 적들에게 일대공격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가평까지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때에 한국군 제6사단을 위해 가평을 사수하라는 군단의 작전명령이 영연방 제27여단에 하달되었습니다.

3. 캐나다군의 활약상

사창리 북쪽에서는 불리한 전황 속에 휘말려 전열에서 이탈된 일부 한국군 제6사단 장병들이 가평천의 골짜기를 따라 하나 둘씩 영연방 제27여단 지역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23일 정오경이고, 그들의 수는 시간이 경과함으로 증가하여 갔습니다.

이때 제6사단을 지원하던 뉴질랜드 제16포병연대는 여단지역 내로 철수하였습니다. 전방 상황이 급변하자 여단장 Burke준장은 곧 여단으로 들어 닥칠 위기를 직감하였으며, 이때에 군단으로부터 명령을 받게 됩니다. 작전명령은 "뉴질랜드 포병연대를 즉시 한국군 제6사단을 계속 지원케 하는 한편 예하 각 대대를 전방으로 전개하여 제6사단의 철수로를 확보, 그의 철수를 엄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여단장은 뉴질랜드 포병대를 가평 10km북쪽인 794고지(수덕산) 부근으로 급파하는 동시에 영국Middlesex 보병대대도 794고지로 이동시켜 뉴질랜드 포대를 엄호토록 배치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여단은 예비대가 된지 4일 만에 또다시 전투에 휩쓸리게 되었습니다.

Burke준장은 곧이어 잔여 보병대대를 다음과 같이 배치하였습니다. 가평6km북쪽 504고지(죽순리 동쪽) 일대에 호주대대를, 그리고 좌측 가평천 건너 677고지(내촌2km남쪽) 일대에 캐나다의 PPCLI대대를 배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단장은 전방의 상황이 악화하자 794고지에 배치한 영국 Middlesex 대대와 뉴질랜드 포병대를 여단지역으로 철수시킵니다. 이리하여 일선 대대는 우측에 호주대대가 좌측677고지 일대는 캐나다 대대가 담당하여 급히 방공호를 파고 화기를 배치하는 등 방어준비에 만전을 기하였습니다.

이 지역은 방어 지형으로서는 최적지였습니다. 전투는 우측의 호주대대 진지에서부터 일어났습니다. 23일 밤 10시경부터 대대적인 중공군의 공세에 사상자가 속출하고 일대 혼전이 전개되었습니다.

날이 밝자 뉴질랜드 포대와 미 공군 지원에 힘입어 전투가 다소 호전되는 기세를 보였으나 적은 끊임없는 공격으로 대대를 크게 위협하였습니다. Burke 준장은 이 상황 속에서 현 진지를 지탱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결과 오후5시를 기해 호주대대에 철수명령을 내립니다.

한편 가평천 건너 캐나다 진지에서는 호주 대대가 적의 공격을 받아 싸울 때 아무런 징후도 없이 지냈습니다. PPCLI대대장(Stone 중령)은 677고지 정면 일대를 방어하기 위하여 4개 중대(A, B, C, D) 중 B중대를 전면배치 등 만반의 대비책을 마련하였습니다.

캐나다 대대가 처음으로 적들과 접하게 된 것은 24일 아침7시였습니다. 그러나 적의 공세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이날 야간인 오후8시부터였습니다. 밤11시가 되자 적들은 집중 공세를 시작했고, 수적으로 증강되고 기관총과 박격포의 지원을 받은 적들은 의외로 강하였으며, 이에 맞선 B중대는 결국 최 전면의 일부 진지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B중대는 주진지로 철수하여 부대를 재편성한 다음 격렬한 백병전 끝에 적을 물리치고 잃었던 진지를 다시 되찾았습니다. 적들의 시도를 재빨리 간파한 대대장 Stone 중령은 적들에게 집중 강타를 명령하였습니다. 적들은 중화기의 적시 맹타에 놀랐고 무수한 사상자를 남기고 철수하고 말았습니다.

적은 기동하기 쉬운 가평천 골짜기를 따라 일시에 가평까지 침공하려던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이번에는 25일을 기하여 산세가 험악한 677고지의 D중대(중대장 Mills대위) 진지로 공격방향을 바꾸어 전면 포위를 시도하였습니다.

이때 중대장 Mills대위는 대대장에게 일단 후퇴하여 재공격 태세로 대처함이  어떠한지 보고하였습니다. 이에 Stone 중령의 답변은 "NO! 절대불가. 한 명도 후퇴불가. 모두 끝까지 항전하라! "였습니다.

25일 날이 밝자마자 중공군은 수적으로 많은 인원으로 2차례나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했습니다. 25일 이후부터는 적은 완전히 공격을 체념한 듯이 움직임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만3일에 걸쳐 가평일대를 피로 물들인 혈전은 영연방 제27여단의 빛나는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가평전투에서 가평을 침공하고 서울-춘천을 장악하려던 적들은 UN군의 정연한 방어와 막강한 화력의 집중 발휘로 그 공세가 무너지기 시작하여 4월말 경에 완전히 격퇴되어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4. 가평 전투의 의미

 캐나다 대대의 전투요원 손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사10명, 부상23명, 계33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가평전투에서 중공군은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영연방 제27여단의 가평전투는 한국전에 참가한 모든UN군 부대에게 가장 모범적인 전투의 하나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미국 정부로부터 최고인 대통령 부대표창을 캐나다 PPCLI 대대와 호주 대대에게 수여되었습니다.  

PPCLI 부대는 캐나다군에서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은 유일한 부대입니다. 오늘날 가평전투가 있었던 현장에는 양 대대가 각각 세운 기념비가 있으며, 가평에는 영연방 4개국이 한국정부와 공동으로 건립한 종합전적비가 있습니다.

또 PPCLI 제2대대가 싸운 677고지에는 UN한국참전국협회와 가평군민이 세운 기념비가 있어 이 전투를 길이 새기고 있습니다. 가평전투가 끝난 후 영연방 제27여단은 명칭이 영연방 제28여단(여단장G. Taylor 준장)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제27에서 제28로 바뀌었을 뿐 실질적인 변화는 없었습니다. PPCLI 제2대대는 가평전투 한달 후 1951년 5월. 한국에 도착한 캐나다군 제25 보병여단에 배속되었으며, 1952년에는 PPCLI 제1대대, 1953년에는 PPCLI 제3대대로 교대하고, 여단본부는 캐나다에 있었습니다.

 금번 대한민국 가평군에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그리고 대한민국을 위해 희생하신 캐나다 참전용사분들의 높은 뜻을 기리고자 전사자 516명의 위패를 모신 브램턴시 메도베일 묘지에 기념비를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뜻깊고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We will remember them forever” (우리는 그들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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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4
6.25 전쟁과 캐나다군 파병

 

1) 6.25 당시 배경

 

대한민국 5천년 역사 중 조선시대 이래 피해가 가장 크고 치열했던 전쟁을 꼽으라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6.25 전쟁을 꼽을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외국침략에 의한 전쟁이었다면 6.25전쟁은 동족간의 전쟁 이었습니다. 36년간의 일제침략에 의해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겼다가 1945년 8월15일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과 연합군의 승리로 대한민국은 드디어 독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2년도 안된 1950년 6월. 대한민국은 모든 점에서 어렵고 부족했습니다. 1950년 6월25일 새벽4시.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으로부터 소련제 T-34탱크 242대 원조를 받고, 일요일 새벽에 남침을 시도 하였습니다.

탱크 한 대 없던 남한은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었습니다. 북한군은 탱크를 앞세워 남으로 남으로 침공하였고, 국군은 낙동강까지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UN의 안전보장 이사회에서는 북한의 남침을 민주주의에 대한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16개국의 UN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950년 6월25일부터 휴전을 한 1953년7월27일 까지 3년1개월2일 동안 싸운 결과 한반도는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2)캐나다군의 참전경위

1950년 6.25전쟁은 민주주의 자유진영에 대한 공산주의의 침략전쟁 이었습니다. 그 당시 캐나다는 한국에 대표부조차 두지 않았던 나라였으나 평소 자유를 사랑하고 세계평화를 추구하여 왔기에 북괴군의 침략을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캐나다는 북괴군의 침략을 어느 나라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미국과 UN의 행동에 적극 동조 하였습니다.

1950년 6월30일 개회 중이던 제21차 하원회의에서 전 의원들이 한국전의 사태를 보고받고, UN결의에 따른 파병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어떠한 정부의 조치도 적극 지원한다"고 만장일치로 결의 하였습니다. 이것은 정부뿐 아니라 의회에서도 한국파병을 적극 지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날 의회에서 Louis St. Laurent수상은 "캐나다가 UN의 결의를 이행하는 데에 참여하는 것은 그 목적이 어떤 한 국가를 상대로 하는 싸움에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UN의 통제와 권위 밑에서 평화회복을 위한 집단 안보활동의 일부를 캐나다가 담당하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말함으로써 한국에 파병하는 의미를 분명히 했습니다.

 

(3)지상군(육군) 파병의 애로점

해군과 공군 참전문제를 비교적 손쉽게 결정할 수 있었던 캐나다 정부도 지상군의 파병문제를 결정하는데 쉽지가 않았습니다. 당시 캐나다는 미국이나 영국과 달리 극동에 주둔하는 지상병력도 없었으며, 1950년 6월말 정규 육군이 고작2만369명 뿐이었습니다. 보병부대는 형식상 3개 연대가 있었다고 하지만 각 연대의 보유병력이 1개 대대에 불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파병을 하자고 하니 Broke Claxton 국방장관을 중심으로 수 차례 육군수뇌회의를 개최하였으며 번번히 결론을 얻지 못하고 시간만 끌었습니다. 정부는 7월20일 미국 정부로부터 UN군에 파병할 1개 여단규모의 파병요청을 받고도 회답을 미룰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정부의 태도에 국내의 여러 신문은 그 무기력을 비난하고 UN의 헌장에 보다 충실해야 한다고 강력히 촉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정부는 8월7일 마침내 육군부대의 파병을 결정하고 이날 저녁 Laurent 수상은 전국 라디오 망을 통하여 이 결정을 발표 하였습니다.

"캐나다 정부는 한국에서 싸우고 있는 UN군에 파병할 1개 보병여단을 창설 하기로 결정하였으며, 동시에 이에 필요한 요원을 전투경험이 있는 퇴역장병들 가운데서 선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캐나다 육군당국은 결정발표 다음날인 8월8일부터 한국행 "캐나다 육군 특별부대"라는 가칭 밑에 요원모집 에 착수하고 선발된 지원병들은 국내의 3개 기존부대에서 기초훈련을 분담 실시토록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11월 초순에는 각 연대에서 1개 대대식 모두 3개 대대가 편성 되었으며 이들은 각각 열차 편으로 집결지인 미국의 Fort Lewis 기지로 출발 하였습니다. 11월21일 3개 대대가 모두 한곳에 집결하자 초대 여단장으로 임명된 J.M. Rockingham 준장의 지휘하에 극동 출발을 위한 제반 준비를 시작 하였으며 "캐나다 제25여단" 이라는 정식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4) 한국전 참전 첫 부대(PPCLI 연대 2대대)

캐나다 제25 여단의 준비과정에 많은 문제가 발생 하였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전 상황의 급변 이었습니다. UN군의 인천상륙작전 뒤에 10월 중순으로 접어들자, 그처럼 캐나다군 급파를 요구하던 UN 당국이 평양함락은 물론 11월 하순에는 압록강까지 진격하게 되자 UN군 장병들은 다가오는 성탄절에는 다들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하였습니다.

실제로 군 수뇌부들은 한국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결과 캐나다 정부는 계획된 여단 병력 중 우선 1개 대대만을 파병하기로 결정하고 잔여병력은 미국Fort Lewis 기지에서 계속 훈련하는 한편 한국전 상황의 추이를 지켜보기로 하였습니다.

이 결정에 따라 캐나다 정부는 제 25여단의 3개 보병대대중PPCLI(Princess Patricia's Canadian Light Infantry) 연대의 제2대대를 제1차 파병부대로 지정하고 11월5일 미국선박인 Private Joe P. Martinez호 편으로 시애틀항을 출발 하였습니다.

주력인 여단병력을 남겨놓은 채 출항하게 된 PPCLI 제2대대 장병들은 싸우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떠나는 것과 같은 가벼운 기분으로 극동행 선박에 올랐고, 23일간의 항행 끝에 1950년 12월18일 918명이 부산행에 도착 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이 북한군과 합세하여 압록강을 넘어올 줄은 아무도 예측 못했습니다.

 

(5) 6.25 전쟁의 피해 현황 및 우리의 마음가짐

남북한을 통틀어 전쟁의 피해는 너무도 컸습니다. 국토는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피해는 1)군인 전사상자, 실종자: 62만명, 2)민간인 사상, 부상, 실종자: 99만명, 3)유엔군 사상자: 15만명, 4)이산가족: 1천만명.

북한 피해는 1)북한군 사망, 실종자: 64만명, 2) 민간인 피해자: 150만명, 3)중공군 사망 및 실종자: 97만명, 4)북한 산업시설: 대부분 파괴.

캐나다군 피해는 1)사망: 516명, 2)부상: 1212명, 3)참전자: 2만6791명.

6.25전쟁은 세계 전쟁 역사상 유일하게 모든 대륙에서 군인을 파병하여 우리를 도와 주었습니다. 아시아(터키, 태국, 필리핀), 유럽(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브르크, 그리스), 아프리카(남아공, 이디오피아), 북아메리카(미국, 캐나다), 남아메리카(콜롬비아), 오세아니아(호주, 뉴질랜드).

아마도 UN 16개국의 참전용사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입니다. 한국전쟁으로 남북한 250만명이 죽거나 실종되었습니다.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저 주어지는 자유란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는 피의 값으로 산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희생하신 분들의 그 고귀한 희생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6.25전쟁 직후 대한민국은 인도 다음으로 세계에서 못 사는 나라였습니다. 필리핀, 태국은 물론 북한보다도 못사는 나라였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IT산업, 대학진학률, 반도체, 핸드폰, 조선소 등이 세계1위의 나라가 되었고, 세계경제규모 10위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6월 호국의 달을 맞이하여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대한민국을 구하려다 생명을 바친 수많은 젊은이들과 참전용사분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부산 유엔묘지에 가면 UN참전국들의 많은 젊은이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이들의 희생으로 이룩한 오늘의 대한민국, 이제는 우리도 그분들께 은혜를 갚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우리는 잊지 않겠습니다. 당신들의 희생과 고마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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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0
6.25 참전 캐나다 공군 이야기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어언 6.25전쟁이 발발한지 71년이 지났습니다. 캐나다군은 6.25전쟁시 UN군 16개국 중 미국.영국에 이어 3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병 했습니다. 그 당시 캐나다군은 여력이 충분치 못함에도 불구하고 총병력 2만6791명을 파병했으며, 부상1212명 전사 516명의 희생을 감수 했습니다.

대다수 국민들은 캐나다군이 6.25전쟁에 참여해 공을 세우고 희생을 한 것을 알고 있으나 공군이 파병되어 싸웠던 내용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은 6.25전쟁시 캐나다 공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1) 캐나다 공군 파병 현황

 제1차로 해군 구축함 3척을 UN해군 작전에 투입하기로 결정한 캐나다 정부는 그 뒤 한국의 전황이 계속 나빠지자 제2차로 1개의 항공수송대를 파병하기로 결정 하였습니다.

캐나다 공군당국은 1950년 7월21일 제 426항공수송대를 정상임무로부터 해제시켜 미국의Mccord 공군기지와 일본의 하네다 공군기지 사이를 왕복 하면서 병력 및 군보급 물자를 수송케 하였습니다.

제426항공수송대 한국전 참가는 비록 후방지원의 형식을 취하기는 하였으나 UN군의 전력증강 문제에 많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또한 캐나다 공군당국은 항공수송대대 이외에 공중전에 풍부한 경험을 가진 조종사 22명을 선발하여 미 공군에 파병 근무케 함으로써 UN군의 제공권 확보에 크게 기여를 하였습니다.

(2) 제426 항공수송대대

 1950년 7월초 캐나다 정부는 한국에서의 UN의 노력을 지원하기 위하여 공군 제426 항공수송대대를 미국 항공수송단(Military Air Transportation Service)의 작전 지휘하에 넣어 한국전쟁에서 필요한 병력과 장비의 공수임무를 담당케 할 것이라고 공식으로 발표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캐나다 공군 당국은 이 특별한 작전을 "Hawk" (매) 작전이라

 명명하여 제 426 항공수송대대에 출동을 준비할 것을 명령하는 한편

 미공군 당국과 협의하여 미국 워싱턴주 Tacoma근방의 Mcchord 공군기

 지를 "Hawk" 작전기지로 사용하기로 하였습니다.

한편 출동준비에 착수한 제426 항공 수송대대(대대장 C.H.Mussels중령)는 연일 철야근무를 계속한 끝에 7월 중순까지 필요한 모든 준비를 끝냈습니다. 7월25일 대대(4발 수송기 6대로 편성)는 대대장 Mussels 중령의 지휘로 몬트리얼 Dorval 공항을 이륙하여 의례적 행사를 치르고 다음날 26일 Mcchord 기지에 착륙하였습니다.

초기 Mcchord 기지는 무척 혼잡스럽고 질서가 전혀 없었습니다. 당초 1개 전투기 대대가 주둔하던 이 기지가 미국군 항공수송단이 운영하게 된 후부터 갑자기 수많은 장거리 공수작전을 위한 대형 수송기들의 발착지로 변하자 모든 근무시설은 초만원 상태를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제426항공수송대대가 이용할 수 있는 시설과 미국측으로부터 제공 받을 수 있는 지원은 거의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캐나다의 항공정비 기술자들은 오직 Dorval 공항으로부터 휴대한 장비로만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 격납고용으로 할당받은 건물도 간신히 수송기1대가 들어갈 정도여서 대부분의 정비작업을 노천에서 비를 맞아가며 실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대에 부여된 임무는 너무나 과중하였습니다. 이행 작전계획은 기대하였던 것보다 2-3배 과중하게 짜인 것입니다.

6대의 수송기와 12명의 승무원들이 하루1만 마일에 달하는 장거리 왕복비행을 하여야 했습니다. 시간으로 따지면 각 수송기마다 매월 300시간 이상을 비행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보병부대와 바주카로켓 등 무기를 날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작전은 1954년6월9일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1954년 6월9일 공수번호 제 599기의 왕복비행을 마지막으로 ‘Hawk’ 작전을 끝낸 제426항공수송대대는 Dorval공항에서 작전 임무완수를 축하하는 의식을 했는데 여기에 참석한 국방장관Brooke Claxton은 대대장병들이 많은 고난을 극복하고 훌륭한 업적을 이룩하여 캐나다 공군의 전통을 빛나게 하였다고 극찬을 하였습니다.

실로 캐나다 제426항공수송대대가 4년간에 걸쳐 이룩한 공수업적량은 적지 않았으며 총599회의 왕복으로 3만4000시간을 비행한 끝에 1만3000명의 완전 무장한 군인과 7백만 파운드에 달하는 군수화물 및 우편물을 운송 하였습니다.

그리고 흔히 수송과정에서 발생하기 쉬운 병력손실 및 화물의 손상도 전혀 없었습니다. 실로 지대한 공을 세웠습니다.

(3) 캐나다 F-86 조종사의 활약상

캐나다 공군당국이 제 426항공수송대대를 UN군의 공수작전에 투입한 경우와는 달리 Sabre(F-86형 제트전투기)의 조종사들의 파병은 그 목적과 방법에 있어서 특이 하였습니다. 캐나다 공군당국은 조종사들을 파병하는데 있어서 그들에게 실전경험을 얻게 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한때에 1-2명씩 한국에서 작전 중인 미 공군 전투폭격기여단에 순번제로 모두22명을 파병하였습니다.

당시 여력이 없었던 공군당국으로서는 이외의 적극적인 지원 방법을 취할 수가 없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러나 파병동기가 어찌되었던 파병된 캐나다 조종사들이 한국전선의 상공에 출현함으로써 UN공군의 전력을 증강시키고 이들이 ‘MIG 출격항로’(MIG Alley)에서 소련의 신예기인 MIG-15기를 상대로 공중전을 전개한 끝에 최소한 9대를 격추하고 10대 이상을 파손하였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에 파병한 캐나다 조종사들은 미 공군 당국과의 협약에 따라 6개월을 복무하게 되었는데 이기간 내라도 50회의 출격임무를 완수하면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조종사들은 그들이 배속된 김포공군기지의 미 제4전투폭격기여단과 수원의 미 제51전투폭격기여단의 ‘MIG Alley’ 출격작전이 쉴새 없이 이행되는 가운데 대부분 6개월이 되기 이전에 50회의 출격 임무를 끝내었습니다.

이들 Sabre 조종사들은 대부분이 제2차 대전에 출전하여 많은 전투경험을 쌓은 조종사들이지만 한국에서는 그 전력이 일절 무시된 채로 한 편대의 평 조종사로 새 출발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 안 가서 대부분의 미 공군 조종사들을 능가하는 우수한 기능을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1952년 5월에 수원 미 제51전투폭격기여단에 배속된 J.C.A.Lafrance대위는 8월5일 첫 출격에 나섰는데 적기2대중 1대를 즉시 격퇴시키고 나머지 1대를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성공 일보 전에서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의 비상한 솜씨와 용맹성은 즉시 인정되어 그는 당일로 편대장으로 승진 하였습니다.

또 다른 예로, 1952년7월에 역시 수원 미 제51전투폭격기여단에 배속된 J.D. Lindsay 소령은 제20회 출격에 앞서 편대장이 되었는데 그는 50회의 출격임무를 완수하는 과정에서 MIG기 2대를 피격하고 또 2대를 격추함으로써 동료들로부터 ‘MIG자석’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캐나다 조종사들의 이와 같은 놀라운 능력 발휘가 가능했던 것은 물론 그들이 제2차 대전에서 체득한 실전경험과 평소의 훈련의 결과라고도 하겠지만 그보다도 그들의 우방에 대한 지대한 임무완수를 위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용맹과 희생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MIG-15기를 한 대라고 더 격추시키겠다는 강한 일념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MIG기의 독무대인 ‘MIG Alley’로 출격 하였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도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세계 경제 10위권에 오를 수 있고 현재 행복하게 사는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잊어서는 결코 안되겠습니다.

이에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한국전 참전용사의 희생을 감사하고 한번쯤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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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4
‘빨간 마후라’ 이야기

 

 

공군 하면 먼저 ‘빨간 마후라’를 떠올린다. 공군 출신이 아니더라도 ‘빨간 마후라’의 익숙한 멜로디는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그런데 빨간 마후라가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영화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오늘은 여러분께 빨간 마후라 영화의 주인공 유치곤 장군을 소개하고자 한다.


유치곤 장군은 1927년 대구에서 태어났으며, 1944년 일본 육군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광복 후 1951년에 대한민국 공군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강릉 공군 기지에서 첫 출격하여 1953년에 공군에서 처음으로 200회 출격을 돌파 했으며, 이후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등 12개에 달하는 훈장을 수훈했다.


그의 빛나는 전과 중 가장 큰 활약상은 ‘승호리 철교폭파’일 것이다. 평양동부 10Km 지점에 위치한 승호리 철교는 대동강을 횡단하는 철교로 중요한 보급로였기 때문에 미 공군은 1951년 12월 승호리 철교 폭파를 감행한다. 이에 북한군은 폭파된 철교의 아래쪽 지점에 튼튼하고 견고한 철교를 가설 했으며 대공 포화망을 밀집했다. 


미 공군은 새 철교를 폭파하고자 500회나 출격을 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결국 임무를 대한민국 공군에 부여한다. 그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레이더 시설도 없고 항공기 능력도 떨어지므로 무척 힘든 일이었다. 1952년 1월 우리 공군의 강릉기지에서 전투기가 출격 하였으나 철교폭파에는 실패했다. 


이에 우리 공군은, 미 공군의 공격전술은 8000 ft 고도에서 강하하여 3000 ft 고도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것이나 이번 임무에서는 4000 ft 고도에서 강하하여 1500 ft 고도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저고도 공격방법’을 실행해야 한다며 생명을 무릅쓴 출격을 실시했다. 


기존의 UN 공군소속 항공기들은 한번도 시행하지 못했던 위험한 공격이었지만, 이 공격으로 마침내 승호리 철교는 폭파 되었다. 미 공군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은 성공 하였다. 


승호리 철교폭파 작전은 유치곤 장군이 속해있는 제2 편대에서 이룬 전과였다. 대 전과를 이룬 이 작전은 훗날 ‘빨간 마후라’의 영화 줄거리가 되었으며 유치곤 장군은 ‘산돼지’ 나관중 소령의 모티브가 되었다.


그 당시 제1편대에는 윤응렬 대위, 정주량 대위, 장성태 대위, 제2편대에는 옥만호 대위, 유치곤 중위, 박재호 대위가 속해 있었으며 나중에 이 분들 중에 공군참모총장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하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다. 유치곤 장군, 유용석 소령은 순직 부자 조종사이기 때문이다. 1965년 1월 유치곤 장군은 39세라는 젊은 나이로 순직했고, 그의 첫째 아들 유용석 소령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종사로 활약하던 1982년 2월 불의의 사고로 산화했다.


유소령의 모교인 대구 대륜고등학교(22회)와 공군사관학교 동기회(26기)에서는 성금을 모아 그의 동상을 아버지 유치곤 장군 동상 옆에 세움으로써 부자의 숭고한 업적과 희생을 기억하도록 하였다. 매년 열리는 참꽃축제를 비롯해 자연 휴양림, 대견사 등 관광지가 풍부한 대구 비슬산에 유치곤 장군 호국기념관이 있다. 위치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이다.


어느덧 6.25 전쟁이 휴전 된지 65년이 지났다. 한번 전투에 나서면 저돌적이고 용감하게 돌격했기에 ‘산돼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는 유치곤 장군은 비록 저 세상에 가셨지만 유치곤 장군 호국기념관을 통해 ‘빨간 마후라’라는 영화를 통해 우리들 마음속에 남아있다. 그리고 조국을 지키다 산화한 유치곤 장군이야 말로 우리의 진정한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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