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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수기]

jinwoo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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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출생, 동아대 정법대, ROTC 21기 임관,
삼성그룹 근무, 2002년 캐나다 이민,
현재 킹스턴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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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4
내 생애, 가장 용기있는 결정, Oh! 캐나다-“바다를 건널 수 있는 자는, 용감한 사람이다”

       

▲군인 가족 돕기 마라톤 대회 참가

 

 

 

(지난 호에 이어)
80년대 초 동부 전선의 사단 사령부에서 근무할 때, 장군 예우에 대한 엄격한 규율은 물론 감히 접근조차 어려웠던 사단장의 모습이 문득 떠 올랐고, 사단장과 동일 계급을 다신 분이, 이곳 캐나다 국방부 카페에서는 병사들과 자연스럽게 아무런 신분적 특권 없이, 같은 조건으로 스스로 해결함이 몸에 배인 듯 해 문화적 충격으로 닿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중 곰곰 생각해 본 결과, 그것은 아주 본받을 만한 솔선수범이었고 매우 합리적이란 생각에 이르렀다. 즉 어쩌면 저런 평소의 가식 없는 행위가 선행될 때, 전장 터에서는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진정한 군인들의 세계가 형성될 수 있겠다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므로 캐나다 군대는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해서, 계급에 따른 지휘 계통을 세울 때와 동등한 인격체로서 일반 사회생활을 할 때를 구분 할 줄 아는 군사 문화 선진국이란 생각마저 들었던 것이다.


그 동안 한국 군대문화도 많이 개선되어 왔다고 얘기는 들었지만, 그러나 여전히 과잉이다 싶은 “장군 전용”이란 수식어가 붙은 식당, 위락 시설 등을 비롯, 권위적이고 비민주적이었던 군사문화의 잔재를 개선하여 점차 발전하는 민주적 강군으로 거듭나길 기원해 본다.

 

3. 신호등 꺼진 교차로, 교통경찰 없이도 “No problem”


이민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겪었던 제법 오래된 일인데, 아직까지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걸로 봐서, 나름대로 상당히 인상적으로 받아졌던 일인 모양이다.


특정 신호등 정전 사태가, 그토록 번잡하고 교통량이 많은 사거리에서 어느 날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작스레 발생한 사고임에도 불구하고, 운전자 모두가 자발적으로 질서 정연하게 차례를 지켜가며 순차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저력과 시민정신은 어디서 비롯 되는가? 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보게 된 사건이었다.


본인도 엉겁결에 처음 당해보는 일이었지만 다른 운전자들이 하는 방식대로 나름 침착하게 대처했다. 운전자 각자가 차례대로 네 방향에서 순차적으로 빠져나가는 광경이 당초 우려한 혼돈이나 무질서의 상황이 아니라, 너무도 신기하고 절묘해서 차라리 아름답기까지 한 모습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했다.


여하튼 혼잡을 겪을 것이란 우려와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별다른 무리 없이 신호등 꺼진 복잡한 사거리를 여유롭게(?)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누가 통제 했거나, 교통 경찰이 있어서 그 수신호에 따라 움직였다면 신기해 할 이유도 없지만, 시민들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자칫 혼란의 사태로 빠지기 쉬운 상황을, 외부 도움 없이 물 흐르듯 하나 하나, 차례 차례 각자의 질서를 지키며 해결해 나가는 것이 참된 민주 시민의 힘이요, 저력이란 걸 새삼 느끼게 된 계기였다.


이런 성숙된 시민 의식이 축적되어 오늘의 캐나다란 나라가 성립되었다는 것과 그런 연유로 캐나다는 또 선진국이라 일컬어진다는 사실을 직접 목격하며 경험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자율적 시민 의식을 가진 캐나다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감사했던 기억이 새삼 되살아 난 듯하다. 떠나온 조국, 한국도 그런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 기대하며, 천천히 차근차근, 비록 시간이 걸린다 하더라도, 우리가 꼭 이루어 낼 것이라 생각한다.

 

4. 헌혈 57번째, 중년 부인과 나의 헌혈 스토리


헌혈은 한국에서 고교 2학년 시절, 첫 헌혈 행사에 참가한 이후, 직장 생활 할 때도 몇 차례 더 참여했던 경험이 있다. 기본적으로 헌혈은 건강이 허락해야만 가능하니, 자신의 건강 상태를 간접적으로 점검해 보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 같다.


이민 후 커미셔너로서 국방부 청사에서 근무할 때였는데, 안내 표지가 눈에 띄었다. 즉, 주말에 헌혈 행사가 있으니 참여를 바란다는 공지였다. 그냥 무심하게 읽고 집으로 오는 버스에 몸을 실었는데,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이민 와서 먹고 사는 문제와 아이들 학교, 주거 문제 등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는 가운데서도, 항상 마음 한 켠에는 뭔가 의미 있는 일을 갈구하는 바램이 잠재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자 마침 “헌혈”광고를 보고 신체만 건강하다면 비교적 쉽게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버스 안에서, 주말 헌혈 행사에 참여하기로 마음을 정한 것이다. 행사 당일은 다행히 근무가 없었다. 청사에 도착해서 신분 확인 후, 기본 검진 후 마침내 헌혈을 마쳤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채혈 양이 한국의 거의 2배 가량 되어 무척 놀랐다. 그런데 옆 침상에 누워 헌혈을 하던 부인은, 이번 헌혈이 57번 째라며, 헌혈을 하게 되면 오히려 자기건강을 더 돌보게 된다고 하여 존경스럽단 생각이 들었다.


본인도 그렇게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어 이를 계기로 실행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던 것 같다. 그러나 결국 이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는데 이유를 생각해보니, 이민 초기에 겪었던 어려움은 신체적, 정신적으로도 상당한 부담이 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혈”이란 순수한 의미만 생각하다 낭패를 겪은 것이다.


첫 헌혈 이후, 두 번 더 헌혈 행사에 참여 했었는데, 마지막 3번째는 하지 말았어야 할 헌혈이었다. 즉 몸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특히 헌혈 당일, 야간 근무가 있는 날에 이루어진 바라 사고가 난 것이다. 


여건이 허락하지 않으면 당연히 “No”하고 거절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헌혈 후 야간 근무 중에 심한 어지럼증과 구토 증세를 느껴 화장실을 가다 의식을 잃고 앰블런스에 실려간 사건인데, 난생 처음으로 기절을 경험한 것이다.


좋은 일 하다 그랬지만, 내 몸이 견딜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병원에서 링겔 주사를 맞고 깨어나 보니,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회사에서 누가 다녀 갔는지 모르지만 야릇한 서러움이 느껴졌다.


그 후론, 본인의 건강은 스스로 지켜야 함을 깨닫고, 병원 헌혈 대기자 명단에서도 제외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돕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만일 그로 인해 본인이 위기 상황에 처한다면, 나의 가족은 누가 돌볼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민 생활이 만만치 않다는 것과 무리하면 화를 자초하게 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묘한 우연의 일치일까, 최근 대한민국 ROTC 중앙회에서 헌혈 행사를 적극 장려하고, 동기생들이 앞장서서 참여한다는 기쁜 소식이 먼 곳, 캐나다까지 들려왔다. 본인도 동참하고 싶다는 마음을 전한다.

 

5. 빛나는 모교 졸업장, 캐나다 학위와 동등하게


이민 와서 자랑스런 기억 중의 하나가, 모교인 동아대 학위증으로 캐나다의 것과 동등하게 인정받고, 장교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 경우가 아닌가 싶다. 이민 3년 차 시절, 오직 그땐 경찰에만 관심을 가졌을 땐데, 이민자들 중 캐나다 경찰이 되고자 하는 이를 위해 마련된 Advanced language training for Policing 이란 프로그램이 있었다. 


참가자들은 출신 국가에서 경찰이나 군인으로 근무했던 이들이 많았고, 본인도 대한민국 ROTC 출신으로 열심히 참여했다. 본 과정에서 캐나다 경찰에 대한 기본 소양과 법률 체계 등을 배울 수 있었고, 각 경찰의 인사 담당들이 나와 상세 설명과 시범을 보여줘 아주 유용했다.


본 교육 기간 중에 모국에서 이수한 고교 및 대학 학력을 캐나다의 ICAS (International Credential Assessment Service of Canada)란 공식 기관을 통해 동등 자격 여부를 확인해 주었는데, 그 때 모교의 학위증을 인정 받았던 것이다.


학위 인정 후, 자격에 걸맞은 직종에 응시할 기회는 별로 없었다. 왜냐하면 경찰은 고졸에 영주권자(단, 연방경찰인 RCMP는 시민권자)면 응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대졸 직종을 동등 학위증으로 취업한다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고교 졸업장인 디프로마(diploma)를 요하는 시큐리티 직종에 응시했고, 처음 대졸 동등(Equivalency) 학위로 응시한 것이 캐나다군 장교 시험이었다. 전 과정 중 필기 및 신체검사, 체력, 인성, 인터뷰 등을 통과 후, 마지막 10년 배경 체크에서 8년 뒤, 합격 소식을 접하게 되어 아쉬웠지만, 충분한 보람과 가치가 있었기에 소개하는 바이다.


만일 본인(43세 응시, 51세 합격통보)보다, 좀 더 젊은 나이에 준비하여 진정 캐나다 군에 도전할 의사가 있다면, 동등 학위를 활용하고, 영어 실력 향상에 주력하면서, 별도 본인 비용 없이 시도하면 도전할 만하다는 것이다.


즉 밑질게 없는 것이다. 즉 응시해 놓고 다른 생업에 종사하면서 여유 있게 임하란 것이다. 높은 사회적 위상과 고수입 등 여러 측면에서 괜찮은 캐나다 장교 시험에 도전해 볼 것을 권해 본다. 


최선을 다해 목표를 이루고자 하면 차선책으로 일반 군인의 기회도 주어질 것이다. 일반 군인 역시 상당히 높은 임금을 받는다. 또 한번 영어 실력의 중요성을 명심하고, 이민자가 선택 할 수 있는 직종이 한정된 가운데서, 만일 영어와 체력이 된다면 의미 있는 도전인 것이다.


혹시 이 글을 접하는 30대 중반의 예비역 중, 진정 새롭게 캐나다 군에 도전할  의사가 있다면 43세에 시도한 본인의 무모함이 당신의 꿈을 실현하는 촉진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참고로 아들의 지인인 캐나다군 한인 장교 한 분이, 늦은 나이에 응시해서 현재 킹스턴에서 군종 장교로 근무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면에 본인의 경우는 비록 훈련 입교는 불가했지만, 캐나다군 장교 시험을 통과했다는 자긍심은 캐나다에 살아가는 나만의 소중한 자존심이자 버팀목 임을 고백해 본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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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가장 용기있는 결정, Oh! 캐나다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자는, 용감한 사람이다”

      

 

 

 

(지난 호에 이어)
그리고 우리 가족 모두는 당신을 사랑하고 존중합니다. 조금은 쑥스럽지만 그래도 글로써 하는 것이니 훨씬 나은 듯 합니다. 사실상 캐나다에 도착한 이래로 잠시도 쉬지 않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해 오직 가족과 가정의 안정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해 왔기에, 우리 가족은 각자 맡은 바 자기 역할을 보다 성실하게 수행 할 수 있었다 생각되오. 실제로 당신이 보여준 헌신과 낮은 자세는, 본인에게도 어떠한 궂은 일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었고 또 헤쳐나갈 수 있는 자신감으로 승화된 듯 하오. 때문에 조금은 무모한 듯 끊임없이 일하고 도전했던 모습은 아이들 한데도 영향을 끼쳐, 스스로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무언의 암시로 전해진 듯하오. 여하튼 오늘이 있기까지의 모든 긍정적 메시지 전달의 근저에는, 변함없는 당신의 희생이 따랐기에 가능한 것이었소. 가장으로서 다시 한번 감사의 말과 함께 가족 모두를 대표해 당신께 사랑한단 말 전하오.” 


이 글을 접하는 장래 이민 예비 후보자님들! 조금 낯뜨겁고 부끄러운 개인적 고백을 양해해 주시고, 향후 캐나다 이민 생활을 어떻게 임해야 할 것인가, 가족 간에는 어떤 마음의 자세와 소통이 소중하며, 무엇이 서로를 지탱해 주는 본질적 요소인가를 생각하는데 작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5. 과연 믿을까? “2자녀 대학 졸업까지 ‘교육비 제로’”


사실상 캐나다건 한국이건 자녀들이 대학을 졸업하려면, 많은 비용이 소요됨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둘씩이나 졸업시켜야 한다면 얼마를 벌어야 감당할 수 있나 지레 겁먹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본인이 살고 있는 온타리오 주는 “오삽”(OSAP: Ontario Student Assistance program)이란 학자금 대출 제도가 있어, 부모에게 부담 주지 않고 졸업 후, 취업하여 본인이 갚아나가는 것이 일반적 현실이다. 


캐나다로 이민 온, 이민 1세대로서, 처음엔 어떻게 하면 중-고교 학업을 마치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까를 걱정하던 단계에서 대학4년 전액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그 수혜 자격을 졸업할 때까지 지킬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공부에 큰 애착을 보여주지 않았던 아들의 경우도 결국 사관학교를 선택했지만, 워털루 공대를 주장하던 아내와는 이견이 있기도 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정보 부족으로 사관학교 제도 자체를 잘 모르는 경우와 그런데 응시를 하더라도 꼼꼼한 선발 과정을 미리 대비하지 않고는 쉽게 통과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또 막상 입교가 되었다 해도 엄격한 규칙과 군사 훈련에 대한 부적응 또는 학과 점수 미달로 탈락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다. 다행히 아들은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무사히 졸업과 임관을 거쳐, 현재 전자 장비를 탑재한 군수 운송 장비를 유지 보수하는 장교로 근무 중이다.


그래서 재학 중 당연히 학비는 면제일 뿐만 아니라, 되레 봉급을 받으면서 학위와 직업을 동시에 취득한 셈이다. 딸의 경우 대학 선택시 오타와 대학 4년 전액 장학금 결정을 한 것은 평생을 좌우한 솔로몬의 지혜 같은 것이었다.


만일 명성을 따라 일년 장학금만 받고 맥길을 택했다면 일차적으로 ‘교육비 제로’란 명제는 불가능 했을 것이며, 또한 캐나다 전국에서 모인 우수한 인재들과 경합하며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와 부담감을 갖고 학교 생활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또한 장래 도전할지 모르는 로스쿨 등을 감안하면, 학부 성적은 늘 상위권에 있어야만 입학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생각이 깊은 합리적 결정이 중요한 것이다.


한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캐나다도 요즘 변호사 공급 과잉이란 사실이다. 이렇듯 모두가 빠르게 변하니 정보와 추세를 감안해서 진로 선택도 해야 하는 듯 하다. 어쩌면 아이들은 시행착오를 최소화 하면서 각자의 꿈을 일궈낸 듯 하다.


언제 이런 날이 오리라고 상상이나 했던가? 꿈에나 가능하리라 생각하던 일이 현실로 다가왔고 그로 인해 난 너무도 감사하다는 말로 대신한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고 살기 좋은 나라가 캐나다라고 서슴지 않고 말하고 싶다.


초기 이민 생활의 고난과 어려움은 오히려 우리 가족에게 선물이었던 것이다. 즉 고통은 초기, 우리를 힘들게 하였지만 이를 인내하는 동안 어느 듯 용기와 자신감으로 승화된 듯 희망을 불어넣어준 것이다.


그 얼마나 벅찬 순간이었던지 가슴 뭉클하고 감동에 젖었던 순간들이 새록새록 기억에 새롭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정말 그랬었나 싶을 정도로 세월이 빠르게 흘러갔고 이젠 잘 믿기지 않는 옛 추억이 돼버렸다.

 

제2절 캐나다를 선진국이라 하는 이유

 

1. 평등을 지향하는 수평사회 - 고매한 인간미 


누가 나를 꼭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고, 현재 자신의 사회적 신분이 높거나 과거에 높았다 하더라도 깍듯한 대접이나 특별한 예우를 바라지 않는 사회, 반대로 다소 평범한 삶을 살아왔다 하더라도 지극히 동등한 인격체로 자연스레 서로를 대하는 사회가 이곳 캐나다가 아닐까 생각된다.


새삼 이민자의 입장에서, 소위 사회 지도층이란 사람들과의 우연한 만남에서 그들의 몸에 밴 행동을 소개하는 바이다. 이민 초기, 다운타운에서 가게를 운영할 당시,같은 빌딩의 로펌 대표가 보여 주었던 너무도 인간적이고 겸손한 태도에 깊은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사무실에 일을 돕는 2명의 비서가 있음에도 직접 세탁물을 들고 내려와서 본인이 찾아가는 순수한 모습을 보여 주었고 언제나 웃음 띤 인자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또 다른 사례는 건물내 치과에 치료를 받으러 온 손님으로서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 가게로 들렀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우연히 그 분의 직업을 알게 되었는데 그저 인상 좋고 기품 있는 부인이 아니라 온타리오주 고등법원의 현직 판사였다는 사실에 놀랐던 경험도 감명을 받기 충분하였다.


대부분 고압적 태도와 권위로 일관하는 것이 일반적인 한국의 전문직 법률가들의 모습인데 반해, 이곳 캐나다에서는 전혀 다른 평범한 모습으로 다가와 서민적 감성을 불러 일으켜준 이색적 경험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가장 극적이었던 것은 캐나다 현직 외무 장관과의 만남이었다. 어느 주말 오후, 시큐리티 근무 중 VIP의 방문이 있을 것이란 정보가 있었고, 마침 그 분이 도착했을 때 본인은 무의식적으로 거수 경례로 인사하며 아주 정중히 맞이 했는데, 그것은 군시절에 단련된 반사적 행동이었지 싶다.


그런데 VIP 도착 후 몇 시간이 지난 시점, 모임 후 기분이 아주 좋았던지, 여하튼 행사가 끝나고 건물을 나서기 전, VIP가 내게로 다가와 경례를 하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서 만류하며 맞이 했는데, 출신국이 어딘지, 언제 캐나다에 왔는지 등을 물었다. 


 2년 전에 한국에서 이민 왔다고 하니, 본인도 한국을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며 더욱 반기며 친근하게 대해 주었던 것이다. 기억을 더듬으며 그분에 대한 기록을 검색해 보니, 2004년부터 3년간 캐나다 외무장관으로 재직했던 것이다.

 

방문 당시, 현직 외무장관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절로 고개가 숙여지며 따스한 존경심이 일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 숙인다는 격언을 비로소 캐나다에 이민 와 실생활 중에 경험한 바가 되었고, 또한 직위가 높을수록 오히려 군림하기보다는 평등을 실천하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서 이민 와 캐나다에 살고 있는 나 자신을 되돌아 보니 시민을 배려하는 좋은 나라에 살고 있다는 마음이 들었다.

 

2. 국방부내 카페에서 장군도 사병도 똑같이 line-up


시큐리티 업무에 종사한지 3년 만에, 일반 시큐리티 업체에서 연방정부 청사의 안전을 주로 담당하는 ‘커미셔너’(Commissionaire, Ottawa)로 새 직장을 얻었다.


상당히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어 감사했고, 특히 직장 의료 혜택으로 전 가족이 첫 치과 진료를 받았을 때의 감동은 여전히 가슴 벅찬 기억으로 남아있다.


여하튼 이민 초기시절에 캐나다 군복무를 마친 예비역들을 중심으로 이뤄진, “커미셔너”에 입사 후, 연방정부의 각기 다른 부서의 청사에 근무한 적도 있지만 특히 국방부(National Defence)에 배속되어, 다운타운에 있는 본부 청사에서 근무할 때다.


오전 근무 후, 아내가 싸준 김밥으로 간단히 점심을 마치고 커피를 사러 카페에 들렀다. 청사 내에 있는 대형 카페에는 국방부에 근무하는 수 많은 현역 군인과 군무원이 진열대에서 물건을 골라 직접 계산하기도 하고, 어떤 품목은 줄을 서서 기다렸다 지불하는 방식이었다.


본인도 별 생각 없이 군인들과 군무원들 사이에서 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국의 전방 부대에서 군생활을 경험한 본인의 입장에서 아주 놀라웠던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즉 병사들과 함께 조용히 한 줄로 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메이플 2개(소장) 현역 장성이 그들 틈에 서있었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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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제4장 캐나다에 살며 웃고 울먹였던 소회      

 
제1절. 그리움과 역경 속에서 핀 들꽃

 

1. 그들 만의 선택, 눈물로 얼룩진 ‘발 마사지기’


 이민 첫 해에 맞은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던 것 같다. 이민 후, 일 없이 줄곧 ESL 수업만 받다가, 운 좋게도 아내가 지인의 소개로 일하게 된 곳이 쇼핑몰의 일식당이다. 매장에서 종일 선 채로 스시를 만들고, 판매까지 해야 하는 탓에,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아내는 완전 녹초가 되었다.


당시 힘든 일들이 몸에 배이지 않아, 밤에 잘 적에는 다리에 쥐가 나 통증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 땐, 아이들도 놀라 깨어나 다리를 주무르며 엄마의 고통을 풀어 주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이들도 엄마가 무척이나 안쓰러웠던 모양이었다. 왜냐하면 아이 둘이서 어떤 의견을 나눴는지 모르지만 평소 용돈으로 모아 두었던 저금통을 깨, 엄마의 저리는 발을 풀어 달라고 마사지기를 사왔던 것이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 하면서…


그것은 결국 엄마의 눈물샘을 자극하고 말아, 함께 붙들고 소리 내 울어버리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 것이다. 한참을 울고 나니 서럽고 힘든 마음도 좀 가벼워진 듯 했고, 아이들의 기특한 마음에 응답하는 따뜻한 분위기가 필요할 듯 했다.


특히 그날은 쉬는 날이라, 오랜만에 가족이 함께 기분도 풀고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래서 평소 봐 두었던 바다가재 요리로 정했더니 모두에게 정말 맛있고 특별한 시간이 되었다. 


특히 우리 가족은 바다가 고향인 부산이다 보니 캐나다의 특산품, 바다가재 요리가 일품 이었다. 특별하게 즐거웠던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마사지기를 작동해 보니 발의 피로를 풀어 주는데 효과가 좋아 참으로 흡족한 선물이라 생각되었다.


여하튼 엄마의 발 치료 효용성까지 갖추었으니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이었고, 엄마가 힘들게 일하고 와 밤잠을 설치며 고통을 호소하는 모습을 보고, 저금통 털어 산 아들, 딸을 거듭 사랑스럽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아이들이 있어 고달픈 이민자의 삶도 견딜만한 것 같다.


아이들의 기특한 마음과 가족의 따뜻한 사랑을 확인시켜준 발 마사지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뒤 반납하고 말았는데 이유인 즉, 엄마는 이제 단련이 되어 더 이상 다리에 쥐가 나지 않으니 그 정성은 받고, 대신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전자 사전으로 바꾸겠다는 생각에 반납 조치한 것이다.


나중에 아이들은 엄마가 자기들이 필요한 선물로 되돌려 주니 더 좋아하는 듯 했다. 이민 첫해에 있었던 슬프고 감동적인 사연이 곁들여 있는, 아이들 엄마에 대한 ‘추억의 발 마사지기 선물’ 이야기다.

 

2. “아빠, 왜 우린 방학 때 한국 안가요?”


이민 온지 약 5년쯤 된 여름 방학이었던 것 같다. 아들이 불만 섞인 목소리로  질문했다. 왜 자기네들은 한국에 가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실상은 왜 보내주지 않느냐는 항의였다. 


이민 와서 정신 없이 지내다 보니 훌쩍 5년의 시간이 흘렀고, 실제 아이들은 한번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없었기에 그럴만하다고 여겨진다. 당시 아들이 다니는 학교엔, 유학 온 친구와 이민 온 친구들이 몇 있었는데 다들 최소 한번은 한국을 다녀 온 터라, 아들의 심기는 불편 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때 솔직한 심정으로 “지금 형편이 어려우니 좀 참았다가 다음에 가자”라고 위로했다면 더 의기소침 할 수도 있었겠지만 난 그렇게 답변하지 않았다. 즉 지금은 캐나다 생활에 집중하는 게 더 낫겠다. 왜냐하면 한국 방문은 언제든 기회가 있으니, 중요한 커뎃 여름 캠프와 또 누나가 다녀온 ‘익스 플로어’ 프로그램인 불어 배우기에 전념하자고 했다. 


그렇게 방향을 잡아 주었더니 다행히 아들도 큰 불만 없이 커뎃 여름 캠프와 ‘익스 플로어’에 참여했다. 전술한 바 있지만 커뎃 여름 캠프는 비용을 내는 게 아니라 참가자에게 수당을 지급하니 ‘꿩 먹고 알 먹는 격’ 이었고, 불어 학습 역시 바이링궐이 되는데 도움이 되었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이렇듯 미묘한 상황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긍정적으로 바뀜을 알 수 있다. 즉 “너흰 한국 가서 재밌게 놀다 와라, 난 그 동안 캐나다에서 더 배우고 불어 공부도 좀 해야겠다”라고 아들이 생각진 않았지만, 실상은 그런 식이 되어 버렸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모두 성인이 되어 각자 길을 걸어가고 있다. 딸애는 불어를 많이 쓰는 연방 공무원으로, 아들은 육군 장교로 근무하고 있다. 반면 다른 친구들은 영어만 쓰는 직업이 주종인걸 보면, 현재 각자의 직업들은 불어 학습을 위해 학창시절부터 신경을 얼마만큼 썼느냐에 꽤 관련이 있다 생각된다.


한국에 계신 부모, 친척을 만나러 고국을 방문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인지상정이지만 다만 외국어를 배워야 하는 학업 성취도 등을 감안하면, 잠시 시기를 늦추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힘들게 배운 1-2년 동안의 외국어 실력은 한국 방문과 동시 많은 것을 잃기 때문이다.


반면, 5년여 동안 한국에 가지 않고, 캐나다에 머물며 오직 아이들의 계발을 독려한 것이, 오늘날 그들의 사회적 입지 및 성장과 무관치 않은 셈이다. 따라서 가능하다면 5년 정도 혹은 3년이라도 한국 방문을 미루고 불어 학습과 여름 방학을 알차게 보내면, 장래 사회진출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 절제된 노력이 지속될 때 캐나다에서의 적극적 사회 참여도 가능할 것이다. 다시 한번 일정기간은 오직 캐나다 생활에 집중하면서 선택과 용기 있는 실천을 기대해 본다.

 

3. 애들은 기억한다, 그 고단한 몸짓을!


남들처럼 잘 입히거나 먹이지도 못한 것 같은데, 두 아이는 밝고 구김살 없이 착하게 잘 자라준 것 같아 다행스럽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지금도 이민초기, 어릴 적 아이들을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 쓰린 부분이 남아있다.


딸은 동생보다 한 살 위인데 누나라는 책임감 때문인지 우리 부부가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도서관에서 책을 보거나 공부하며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들은 누나의 보호 아래 있다고 생각 했음인지, 아님 지쳐 허기와 피곤 때문이었던지 도서관 책상 위에 엎드려 곤하게 잠든 채, 기다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이들 등교시간은 꽤 이른 편이다. 약 오전 7시쯤 스쿨버스로 학교에 가면 오후 3시 반경 마치는 것이 일반적 중-고교생들의 학교 생활인데 반해, 우리 아이들은 학교를 파하고도 공공 도서관에서 거의 4시간을 더 머물러야 했으니, 하루 12시간을 학교와 도서관에서 보내야 했던 것이다.


얼마나 지치고 힘들었을까, 란 질문에 그저 피할 수 없었던 초기 이민 생활의 슬픈 사연 이려니 했는데, 마치 “몸에 좋은 쓴 약”처럼 덕분에 기본적인 학교 공부와 과제 등에 스스로 대비하는 습관으로 이어진 듯하다. 


당시 힘들고 고달팠던 하루 하루가 모여, 결국 오늘의 안정된 생활로 연결된 초석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그래서 “세상은 둥글다”란 말을 하는가 싶다. 즉 캐나다의 법에 의거, 15세 미만 미성년자들 만의 귀가를 허용하지 않음으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그런 생활이 3년 이상 지속된 상황이었는데, 대학을 마칠 때까지 그렇게 굳어진 것이다.


이민 초기, 그렇게 부러웠던 대학교수, 공무원, IT산업 박사 연구원들의 자녀들은 안녕하신지 묻고 싶다. 당시 모든 것을 다 갖춘 듯 보였던 그 분들도 자식 교육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니, 새삼 “세상은 공평한 것인가”하며 나를 되돌아 본다.


이민 사회에서 느끼는 사실 하나는,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의 교육과 관련해 “우리 집이 여유가 있구나” 혹은 ”과외를 하니 공부도 별게 아니네 하며 게으름을 피우는 순간, 그들 인생은 다른 길을 향하는 것 같고, 대신 “우리 부모님이 저렇게 고생하며 힘들게 일하시는구나”하며 공감하고 가슴 아파할 줄 아는 아이로 자란다면, 부모들이 기대하는 것보다 큰 보람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즉, 부모의 힘든 삶을 직접 눈으로 목격 함으로써, 자녀들은 강한 정신력도 갖게 되는 것 같다. 이것은 어떤 이론 교육보다 효과가 있다 생각되는데, 이유는 이민 생활에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부모의 모습 자체가 산 교육인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도 절실하고 가슴에 와 닿는 교훈이 되어 마음으로 전해지는 듯하다. 따라서 이민 초기시절, 자녀들 눈에 비쳐진 부모의 치열하게 살아가는 숙명적 모습, 그게 바로 아이들 마음 속 깊이 새겨지는 참교육이라 생각된다.

 

4. 전 가족 힘의 원천은, 아내의 헌신


실상 아내 앞에서 “당신은 우리 가족 모두의 힘의 원천이었소”라고 표현을 하기엔 겸연쩍고 쑥스러운 일이기에, 한번도 그런 표현을 한 적은 없다. 당연할 것이다. 어느 대한민국 남자가, 특히 경상도 사나이가 자기 아내를 두고 그런 팔불출 같은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불편하고 부자연스런 것이지만 더 미루다간 평생 못할 것 같아, 이 글을 통해 아내에게 과감히 전하고저 한다. “당신으로 인하여 우리가족 모두는 건강하고 행복 하였으며, 당신과 더불어 빛나는 우리 가족만의 평화로운 캐나다 아침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그러므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 집 막둥이 해피를 포함하여 무한 행복을 선언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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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4
내 생애, 가장 용기있는 결정, Oh! 캐나다-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자는, 용감한 사람이다”

    

 

    

(지난 호에 이어)


4. Ottawa U의 선물은, 프랑스 유학 or Best Friend? 


 딸애가 조기에 오타와 대학의 장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무료한 대학 생활을 이어 갔다면 프랑스 유학의 인연은 닿지 않았을 것이고 연방 공무원 역시 장담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즉 신중히 내린 자신의 결정에 대해 최선의 노력을 않는다면, 항상 후회가 남는 것이다. 그러나 잘 적응해 주어 감사했다. 장학금과 관련해 재미있는 사실은 입학 당시 전액 장학생으로 선정 되어도, 중도에 자격을 잃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것이다. 


즉 4년 지속해서 상위 평점을 유지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뜻이고, 특히 전공에 대한 흥미와 열정이 없다면, 장학금 수혜 자격은 이내 잃고 마는 것이다. 현재까지 딸애의 절친인 쥬리엣은 오타와 대학의 스페인어 수업에서 만났다고 한다. 둘은 아주 친한데 서로에게 공통된 요소들이 많기 때문인 것 같다.


첫째, 오타와 대학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것이고, 둘째, 모국어외 영어, 불어와 스페니쉬를 잘 구사하는 이민 1.5세란 점도 닮았고, 학구열 또한 높아 베스트 프렌드가 된 것이다. 대학에서 좋은 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다. 둘은 매일 재미있는 학창시절을 이어가는 가운데, 딸애는 프랑스 유학을 거쳐 연방 공무원이 됐고, 쥬리엣은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경제연구소에 근무하며 우정을 나누고 있다.


한편 딸애가 프랑스로 유학 가기 전, 시앙폴 대학과 관련한 정보를 얻은 것은, 아내가 드라이 크리닝 비즈니스를 할 때, 단골 고객이었던 온타리오 주판사, ‘Mr. 타디’로부터였다. 시앙폴 대학은 ‘타디’ 자신이 학생 때 가장 유학하고 싶었던 학교였다며, 딸애가 가게 되었다고 하니 “정말 축하한다”며 함께 기뻐했다. 


이처럼 인간미 있는 온타리오 주, 현역 판사의 진솔한 모습을 보니 캐나다의 성숙한 민주 사회가 한층 돋보였다. 이같이 프랑스 유학이 행운이란 생각도 잠시, 딸애가 현지에서 겪었던 어려움은, 당사자만이 느낄 수 있는 힘든 과정의 연속이었다.


중간시험에서 탈락해 울먹이던 딸애의 목소리가, 맨 나중 “전 과목 통과”란 결실로 나타나기 전까지는, 심한 열병을 몇 번이나 앓은 후에야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 어려운 과정을 거쳐 열매 맺을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었다.


한편 2년 전, 아내와 여행했던 파리는 세계의 관광객들로 붐볐지만 테러 위협과 EU 연합소속, 동유럽 국가들의 달갑지 않은 손님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렇지만 세느강을 배경으로 한 에펠탑의 야경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황금 빛으로 장식한 베르사이유 궁전은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몽마르뜨 언덕도, 개선문도 좋았지만 파리 여행 후 남겨졌던 아쉬움은 딸애가 공부했던 시앙폴 대학을 방문하지 못한 것이었다. 별로 볼 게 없다는 딸애의 만류 때문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기억도 다 할 수 없는 수많은 관광지 방문보다, 시앙폴 대학을 방문 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파리에서의 불만은, 물가는 비싸고, 교통은 복잡하였으며 아프리카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로 많이 붐볐다. 그리고 특별히 조심해야 할 것이 관광객을 상대로 한 사기꾼이 많다는 것이다. 우리도 예상치 못한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캐나다로 돌아오니 “천국이다”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어제 저녁에 들려온 속보, 파리의 노틀담 대성당 화재로 참사 발생, 오! 안타까워라.

 

5. 캐나다 왕립 사관학교(RMC: Royal Military College)


RMC는 캐나다의 유일한 사관학교다. 특이한 것은 육.해.공군 사관생도를 따로 분리해서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3군을 통합하여 한 장소에서 장교들을 양성하는 독특한 방식의 사관학교이다. 


위치는 집 가까이에 있다. 토론토에서 3시간 동쪽으로 떨어져 세인트 로렌스강과 온타리오 호수를 끼고 아주 중요한 위치에 고풍스런 스타일과 멋진 건물들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바로 킹스턴이다. 


주변 타운쉽과 인구 약 15만 명에 달하는 아름답고 유서 깊은 곳이다. 수도 오타와는 약 2시간 거리이고 온타리오 호수를 경계로 건너편은 미국의 뉴욕주다. 아들이 RMC 졸업 후 병과 교육을 거쳐 배치 받은 곳이 이곳이라, 2년 전에 이사 왔다.


처음 이민 와서 이곳에 나들이를 왔을 때 어린 아들한테, “아빠 바램은 네가 꼭 RMC에 진학하면 좋겠다”하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아들은 약속을 지켜줘 고맙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한때 육본에 근무하던 현역 동기생이 이곳을 방문하여, 한국의 사관학교 제도와 캐나다의 RMC를 비교 연구하기도 하였다. 


여하튼 캐나다는 국방의 의무가 없는 나라다. 그러므로 자신의 결정과 책임으로 지원하는 철저한 직업 군인제라 그런지 충분한 대우와 보상을 해주는 것 같다. 캐나다군의 최대 장점은 ‘세계 평화 유지’를 주 목표로 하여 소수 정예 병력을 유지하고 있음으로 어느 국가보다도 높은 급여 수준이다. 그러므로 관심 있는 1.5세들은 적극적으로 RMC에 지원하여 캐나다군 경력을 바탕으로 군대 뿐만 아니라, 캐나다 주류사회 진출도 활성화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RMC에 재학 중인 소수 민족들 중 가장 뛰어난 적응도를 보이는 민족이 한국인이라 한다. 역시 뛰어난 우수성을 캐나다 사관학교 내에서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수년 전 소수 민족 최초로 장군으로 진급, 캐나다군 의무 사령관을 역임한 분은 오타와 대학과 토론토 의대를 졸업한 후 군의관으로 장기 지원하여 의무 사령관까지 된 분으로, 한국인의 명예를 빛낸 덕분으로 ‘자랑스런 한국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RMC 내의 학교 생활은 마치 일반 대학처럼 자유 분방했다. 한국에서 ROTC 학군단 생활을 대학에서 경험한 본인은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그러나 캐나다 군 그들만의 자발적 군인 정신과 저력은, 어쩌면 1, 2차 세계 대전에서나 한국 전쟁, 가평 전투에서도 5배나 많은 중공군을 상대로 캐나다군 대대 병력이 방어했다는 빛나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캐나다의 경제 규모는 한국보다 약간 앞서지만 반면 군대 규모는 10분의 1 수준이다. 그러므로 캐나다 군인들에게 세계 정상급 대우를 해주지 않나 싶다. 멋진 기회를 제공하는 캐나다 사관학교 RMC에 더 많이 도전하여, 자신의 꿈과 희망을 이루어나가는 전초 기지로 적극 활용되길 바란다. 

 

6. RMC에 진학하면 어떤 장점이 있나요? 


 중요한 질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선돼야 할 것은 더 많은 관심이다.


관심을 가지면 좀 더 알게 되고, 또한 자녀들이 입교 후 어려운 훈련 과정을 마치고 전공에 따른 육, 해, 공군 장교로 임관되면 어떤 혜택이 주어지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본인 생각으로는 RMC는 1.5세 자녀들이 택할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선택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우리 한국인에 있어 군대는 의무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캐나다의 가장 큰 도시인 토론토의 부모님들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자녀들의 진로 선택에 있어 의사, 변호사, 교수 외에 캐나다군 장교, 즉 RMC를 그런 기존의 전문직업과 함께 고려 하였으면 한다. 


왜냐하면 그런 전문인이 되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들이는 시간과 노력, 경제적 투입에 비하여, RMC는 봉급을 받으면서 학위와 안정적 직업을 보장받는 셈이니 사회, 경제적 보상은 비교할 수 없는 큰 혜택이라 생각된다.


RMC는 토론토서 가까운 킹스턴에 소재하고 있는데, 이상한 것이 매년 RMC 신입생 중 한국계 1.5세 자녀들의 절대 다수가 밴쿠버 출신이란 것이다. 이유인 즉 밴쿠버 교민 사회에서는 많이 알려져, 자녀들을 RMC로 보내고자 하는 관심이 많은데 비해 토론토는 아직 덜 알려져 있는 듯하다.


6년 전 아들의 RMC 임관식 전야, 초청 파티에 갔을 때에도 우리 부부를 제외한 나머지 12명의 부모들이 모두 B.C주 출신 이었는데, 아직도 그런 추세는 여전한 듯하다.


이제라도 토론토를 비롯한 온 주 도시의 한인 자녀들이 RMC에 관심을 갖고 더 많이 지원할 것을 제안해 본다. 참고로 RMC 지원자는 이랬으면 하는 개인적인 견해를 적어본다. 우선은 건강한 신체와 적극적인 정신 자세가 중요하다. 그런 기본적 자세가 되어 있다면 일단 도전할 만한 자질이라 하겠다. 


고교 졸업 평점은 85점에서 90점 대는 되어야 할 것이며 또한 리더십을 중시하며 학교 내 운동부와 사회 참여, 봉사 활동 등도 중요한 듯하다. 아들의 경우는 고교 평균 90점에 럭비부 활동과 태권도 단증과 커뎃 활동 등이 있었고, 한가지 특이했던 것은 본인이 커미셔너로 재직할 때, “군인가족 돕기 마라톤 대회”에 아들과 함께 참여 후, 추천서를 제출 할 수 있었는데, 아주 적절했던 추천서가 아니었나 싶다.


참고로 RMC는 모든 비용이 국비로 처리되어 경제적 부담이 전혀 없다. 오히려 용돈까지 받으며 임관과 동시 직장을 보장 받는 셈이니 일거 양득이 아닐 수 없다.


즉 모든 의식주가 무료(매월 받는 봉급에서 숙식비를 공제한 후, 잔액을 지급함: 매월 600불 정도 남았음)인데다 높은 사회적 인식과 봉급 또한 예상 밖이다. 생도 1학년부터 펜션이 시작됨으로 생각지도 않았던 혜택 외에도 출장, 휴가, 이사비 등으로 놀랐다. 충분히 도전할 만한 매력적 이유가 참 많았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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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7
내 생애, 가장 용기있는 결정, Oh! 캐나다-“바다를 건널 수 있는 자는, 용감한 사람이다”

  

 


       

(지난 호에 이어)
인생의 대부분의 기회는 스스로 만들고 그 기회를 매개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이다. 두 번째로 꼽고 싶은 스페니쉬 배우기의 직접 효과는, 불어를 배우는데 있어 좋은 디딤돌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부가적 효과는 처음부터 기대한 바는 아니었고 스페니쉬 배우면서 다양한 새 친구들을 사귀게 되니 학교 생활 자체가 즐거움의 연속으로 이어짐과 동시에 불어 학습의 상승 효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런 것들은 미리 알았던 것이 아닌 직접 체험하고 얻은 결과이다. 매 학년 올라 갈 때마다, 전교생 중 불어학습 코어 과정의 1등 금메달은 딸애가 항상 받았던 기억이 있다.
아마 이런 것들이 딸애한테는 진취적 학습 과정에 훌륭한 동기 부여가 된 것 같다. 제3 언어, 쉽지 않은 도전이지만 관심이 있다면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제3절 ‘대학 선택과 진로’는 보다 신중하고 현명하게!


1. 캐나다에 결코 쉬운 대학은 없다


캐나다는 대학 시험을 별도로 치는 것이 아니라, 고2, 3학년 동안 취득한 점수로 원하는 대학에 지원하여 합격 여부를 통보 받는데, 딸의 경우는 맥길, 퀸즈, 오타와와 토론토대 4곳에 지원하여 모두 합격 통지를 받았다.


관건은 어느 대학에서 장학금을 더 많이 주느냐가 중요했다. 오타와대에서 4년 전액 장학금을 약속했고, 다른 3곳은 1년치 장학금 수준이었다. 3곳 모두 소위 캐나다의 명문이라 일컬어지는 만큼, 1년 장학금을 받아도 자부심과 함께 좋은 조건이었다. 


며칠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여러 방면 사람들의 경험과 의견을 종합한 결과, 오타와 대학을 결정했다. 이 때문에 진학 후 처음 1년은, 딸애의 불평과 비난을 많이 받기도 했지만, 나중 오타와 대학의 진가를 알고 자랑스러워 했다.


처음 딸아이의 선호도가 높았던 대학은 맥길 대학이었다. 퀘벡주 몬트리올에 소재한 명문대 중의 하나다. 영어 대학이면서 의대는 미국에서 많이 유학온다고 했다. 불어는 특히 딸애가 좋아했고 지리적으로도 2시간 거리라 부담이 없었다.


만일 맥길을 택했던, 퀸즈 혹은 토론토대학을 갔더라도 잘 해냈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최선의 선택이 어딘가가 중요했다. 그때 만일 한국식 사고로 판단했다면 오타와대보다 명성이 높은 곳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캐나다는 다른 문화를 가졌다라는 점에서 신중히 생각했다. 이 때 합리적인 판단에 도움 준 이는 로펌 대표 변호사의 아들, 잭의 영향이 컸다. 그는 칼튼 대학과 오타와 대학 로스쿨을 졸업한 특별 변호사 였는데, 하바드나 예일이 아닌 칼튼 대학 전액 장학생으로 간 이유가 궁금했다.


즉, 부모가 부유해도 젊어서부터 부모에게 의지하거나 빚을 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또 로스쿨을 가려면 대학 평점이 높아야 하는데, 경쟁이 심한 대학에서 초기 부담을 질 필요가 없다고 했다.


충격이 있었지만 공감하고 감동받은 부분이 더 컸다. 그래서 이런 논리를 딸한테 적용한 결과, 오늘의 결과에 이르지 않았나 싶다. 세월이 지난 지금, 탁월한 선택이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학교와 가까운 집에서 지내며 가족간의 돈독한 정과 서로에 대한 이해심을 키운 것, 그리고 프랑스 교환 학생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유학한 경험은, 도저히 금전으로 환산 할 수 없는 자산이었다.


최소 경비로 최대 효율을 높인다는 경제원칙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학업에 전념 할 수 있는 차원에서도, 합리적 대학의 선택은 정말 중요하다. 특히 1.5세 자녀의 대학 생활은 의식주 모든 면에서 부모의 손길이 아직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도 싶다.


명심해야 할 것은 캐나다 어느 대학도 녹록하지 않음을 깨달아야 한다. 명성이 아니다.


2. 굳이 집 떠나, 먼 곳의 대학 생활


독립심 강한 캐나다의 틴 에이저 뿐만 아니라, 한인 가정의 자녀들도 어느  대학을 갈 것인가? 물으면 대개가 집 가까이 있는 대학보다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고자 한다. 아마 이미 익숙해진 곳 보다는 아직 경험하지 않은 곳에서 멋진 대학 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바램이 담긴 선택이라 생각된다.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가 된다. 그러나 대학 선택시 무조건 멀리 떠나야 한다는 선입견은 지양해야 하며, 만일 가까운 대학에서 원하는 공부를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훨씬 현명한 결정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대학 4년이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란 관점에서 이동 거리, 건강 및 시간관리 차원에서도 합리적 선택이 필요한 것이다. 즉 방학 기간이나 연말 연휴 때, 집을 방문하고자 할 때도, 이 모두가 비용으로 연결되니 좀 더 신중해지자는 것이다.


물론 경제적 요인이 전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논리다. 그러나 캐나다 대학은 한국과는 달리 특정 대학의 인맥이나 학연이 크게 작용하는 사회는 아닌 듯하다.


그러므로 본인이 편하게 다니고 공부 할 수 있는, 즉 실속 있는 대학의 선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대부분 1-2년간 힘들게 다녀 본 뒤에야 깨닫는 경우가 많아, 미리 잘 생각하면 후회가 덜 하기 때문이다.


딸이 처음 맥길대를 가겠다고 했을 때, 왜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친지 한 사람 없는 이역만리 캐나다로 이민 와서 마침내 “가족 중 딸이 떠나는 구나”하는 감정이 북받쳤기 때문이리라.


여기서 한가지 짚어야 할 것은, 오로지 자신만의 고유한 대학, 특정 학과를 지원하는 경우는 어떤 지리적 이유와 상관없이 본인의 결정 사항이니 논외로 함을 참고 바란다.


그런 것 같다. 세상에서 부모만큼 자식의 건강을 챙기고 생각해 주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부모 자식 관계인 것이다. 캐나다에서의 대학시절이 어쩌면 오직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가장 부모의 도움이 절실한 때 일수도 있다.


부모는 자녀들이 공부할 때나,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선택하는데 있어서도 조건 없는 협력자다. 따라서 자녀들은 자신의 꿈과 미래를 설계할 때 부모님 마음도 잠시 헤아려 보는 여유와 시간을 가지고, 원대한 꿈을 계속 펼쳐가길 기대하는 바이다.


3. “아빠,우리 대학(Ottawa U)이 훨씬 좋아요”


 딸애로부터 그렇게 빨리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정말 반전이었다. 오타와 대학 1년을 마치고 2년 전공이 정해진 후, 들었던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젠 ‘안도의 숨을 쉬어도 될런가’ 싶어 감사했다.


왜냐하면 나름 깊이 생각하고 권유했던 오타와U 입학 결정이, 초기 학교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아 많은 불평을 했었고 그로 인해 숱한 마음 고생과 갈등이 있었다.


심지어 “아빠는 4년 장학금 때문에 결정”한 것 아니었냐는 비난도 있었다. 물론 경제적 혜택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딸애의 장래 문제를 두고, 장학금 수혜를 우선 고려한다는 것은 오해였다. 


오타와 대학은 학생수나 개설 강좌, 로스쿨, MBA 코스 등과 불어 강의도 동시 제공하는 대규모 대학이다. 캐나다 공식 언어인 영어, 불어 바이링궐 대학이라 그런지 연방 정부에서 적극 지원하고 재정도 풍부하다는 인상을 여러 차례 받았다.


여하튼 학기 초에 일부 신입생들의 태도에 딸애가 처음 많이 실망했던 것 같다. 그러나 결국 나태한 자세로 임하는 학생들은 곧 걸러지게 마련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오타와 대학의 유수한 졸업생들이 연방 정부의 인재 풀로서 일익을 담당한다는 점이다.


혹시 연방 공무원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은, 오타와 대학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생각한다. 그래서 어릴 적 불어 학습의 필요성을 제기한 바 있다. 그리고 특히 딸애는 방학을 맞아 토론토 대학이나 욕대학 등 멀리 떨어진 대학을 택한 고교 친구들을 만나 보고는 더욱 심증이 굳어졌던 모양이다.


즉 친구들과 여러 면을 비교해 봤을 때, 오타와에서 알찬 대학 생활로 미래에 대한 확신과 더욱 자신 있는 모습으로 변해가는 자기 모습을 발견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대도시 토론토에서 생활하는 고교 친구들의 실제 상황이, 비싼 물가와 렌트비에 큰 부담을 느끼는 팍팍한 삶이 주 애로사항이었던 모양이다.


거기에다 식사까지 불규칙하기 일쑤였으니, 엄마가 해주던 맛있는 저녁을 몇 번씩이나 그리워했다는 얘기가, 다름아닌 토론토에서 보낸 고교 친구들의 실제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에 비해 좋은 환경에서, 가족과 함께 즐겁고 알찬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은 4년 장학금에다, 엄마가 해주는 아침 식사와 런치, 직행 버스로 등교하는 짧은 거리, 그리고 학과에선 상위 점수에다 교수님들한테는 인정과 칭찬을 받는 학생에서 프랑스 유학이라는 티켓까지 손에 쥐었으니 어찌 오타와 대학을 자랑스러워 하지 않겠는가.


정말 기대 이상으로 잘된 결정이었고 너무 감사한 일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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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9
내 생애, 가장 용기있는 결정, Oh! 캐나다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자는, 용감한 사람이다”?

 

    

(지난 호에 이어)
이민 와서 처음 6개월 동안 매일 울면서 다녔던 딸 애가 조기졸업 할 수 있는 수준까지 왔다 하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참 흐뭇하고 벅찬 감회가 가슴에 와 닿았다. 


여하튼 졸업 점수를 다 채웠지만 최종 12학년을 마치고 졸업하는 방향으로 결정하니 여러 면에서 여유가 있었다. 즉 평소에 관심 가졌던 분야도 그랬지만 고교 마지막 학창시절이란 생각에, 영화관 내 팝콘가게, 파트타임 일도 해 보고 싶다 해서 했다. 


그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향후, 변호사 직업이 본인 적성에 맞을지 일부러 “법” 과목을 신청해 들었다. 어느 시험 하루 전날, 딸애로부터 예상 문제를 질문해 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아주 답이 긴 문제를 물었는데, 정확히 답변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이 다음에 충분한 사회적 경험을 한 후, 본인이 원하면 로스쿨에 도전할 만 하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다른 이색 경험은 연방 국회에서 업무를 돕는 Page position 후보로 선정되어, 캐나다 의회 생활을 엿봤던 기회도 있었고, 학교를 대표해 공영 방송에 출연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여하튼 여유 있게 고교 생활을 마무리 할 수 있었기에 대학을 선택함에 있어서도 심사 숙고하여, 오타와 대학 4년 전액 장학생이란 결정을 할 수 있었다 생각된다. 


오타와 대학에서 만난 딸아이의 베스트 프렌드는 고교를 조기졸업 했는데, 스마트 할 뿐 아니니라 영특한 것은 확실 했으나, 당시 사회적 경험을 논할 땐, 역시 어린 티를 벗어 날 수는 없는 듯 했는데 지금은 사회 생활 잘하고 있는 성인이니 알 수 없다. 즉 조기 졸업,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본인 선택의 문제이다.

 

3. 불어 학습, 자녀 미래의 가장 확실한 투자


캐나다의 거대 도시인 토론토나 밴쿠버, 혹은 캘거리 등에 살면 실상 자녀들도 불어의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 듯 하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관심을 갖지 않는 한 영어만 쓰더라도 일상 생활에 큰 불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민 후 주로 오타와에서 살아온 본인으로선 “불어를 할 수 있다면 더 나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데” 하는 아쉬움을 여러 번 느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몇 번을 불어를 배울까 망설였는데, 불어를 능숙한 단계까지 끌어올린 딸애의 충고로 불어 배우기를 포기하였다.


불어의 어려움 그리고 연령, 필요성 등 모든 것을 감안한 진심 어린 충고로 생각된다. 하지만 자라나는 1.5세 혹은 2세들의 입장은 확연히 달라야 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영어만으로 치열한 취업 경쟁을 뚫으려 한다면 현지 백인 친구들과 너무 벅찬 부담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대신 바른 판단과 결심으로 어릴적부터 마치 필수인 양, 불어를 열심히 익혀 영어, 불어 바이링궐 자격을 확보해 버리면 훨씬 수월하면서도 더 나은 조건의 연방 혹은 주정부 공무원으로 폭넓은 진출이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설사 개인회사라 하더라도 유리한 조건으로 자신 만의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연방 정부의 “익스 플로어” 프로그램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자라나는 1.5세 혹은 2세들은 어릴 적부터 바이링궐 요건을 갖추어 경쟁할 수 있도록 대비해야 할 것이다.


딸 애의 경우, 나름 성공적인 바이링궐 스토리를 소개하면 고교 시절, 여름 방학 기간에 익스 플로어 프로그램에 2번 참여하였고, 개학 기간 중 스페인어 학습을 꾸준히 3년 이상 해왔으며, 대학은 4년 장학금을 제시한 오타와 대학을 택함으로써 북미 최대 바이링궐 대학의 강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프랑스 시앙폴 대학 교환 학생으로 선발되어, 파리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대학 재학 중에, 현지 경험과 불어 실력 연마를 동시에 이루게 된 것이다. 


특히 시앙폴 대학 수료 과정에서 초기 몇 과목을 실패하는 바람에 엄청난 마음 고생을 했는데, 당시 딸이 우려했던 바는 수료를 못하면 그 동안 받고 있던 장학금 수혜를 놓치게 될까 걱정했던 것이다.


본인도 딸아이 에게는 부담을 주지 않으려 “걱정하지 말아라. 아빠도 네 대학 등록금 한번 낼 수 있도록 기회 한번 주렴”하면서 딸을 안심시키기도 했는데, 역시 더욱 열심히 노력한 결과 최종 시험에서 전 과목을 통과하는 저력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결실이 딸애가 갖고 있는 연방 공무원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이 아닌가 싶다.

 

4. 황당 경험 “오후 3시 반 땡”


한국에서 대학을 준비하는 고3, 대입 수험생이라면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어떻게 고 3 수험생이 오후 3시 반에 수업을 모두 마치고, 바로 집으로 갈 수 있으며, 대학 진학과 관련한 긴장감이 하나도 없단 말인가? 


이런 광경이 처음엔 적응이 되지 않아 우려 하기도 했는데 큰 딸애를 이런 방식으로 대학을 보내고 나니 둘째부터는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다만 둘째는 본인 적성과 진로를 감안해 캐나다 사관학교(RMC)를 지원하였고, 4년 생도 생활을 무사히 끝내고 졸업과 임관을 하고 보니, 이제 아이들 진로를 위한 나의 노력은 끝이 났는가? 하며 되돌아 본 적이 있다.


특히 한국 노래 중 “막내 아들 대학 시험, 뜬 눈으로 지새던 밤들”하는 노래를 들을 때면 그런 아릿한 추억은 없는 것 같아 약간 아쉬운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여하튼 이것이 캐나다 대입, 수험생들의 학창 시절이고 우리도 어느덧 그에 적응 된 듯하다.


대학 입시에 있어 캐나다랑 한국과 크게 다른 점이, 4년제 대학을 가는 학생이 그리 많지 않으며 대부분 취업을 위해 칼리지로 진학하는 학생들이 주류인 듯 하고, 심지어 고교 졸업으로 취업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즉, 자기 적성에 맞춰 공부를 심도 있게 더 하고 싶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확연히 나눠지는 것이다. 그에 비해 한국은 거의 대학을 반드시 진학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해 왔으니 경쟁은 당연한 것이었다.


최근 청년 실업이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으니 이젠 필연적으로 사회적 인식 변화가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한가지 참고 사항으로 소개한다. 간혹 한인 학부형들이 자녀들의 고교 생활 동안 범하는 실수는, 별도로 과외를 통해 높은 점수를 따는 것인데, 이런 과외 습관은 자칫 자녀들에게 해가 되는 듯 하다.


왜냐하면 대학에 가서는 스스로 공부를 해야 하는데, 과외 습성이 든 학생들은, 대학생활 중에 과제를 하면서 뒤늦게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즉 상당한 스트레스와 학습 부담을 느끼고 중도에 포기하기도 하니 주의를 요한다. 


본인은 처음부터 아이들한테 선언했다.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이고, 만약 공부가 싫거나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건설 노동자 혹은 피자 배달 등을 하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과외 시킬 돈도 없지만, 있다 해도 그럴 마음이 없으니 아예 생각지 말라 했다. 그런 결과였는지 아이들은 스스로 무난히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했다. 이처럼 자녀들의 정신 상태가 아주 중요한 것 같다.

 

5. 제3외국어는 고도의 전략적 선택


이민 초기 시절이었다. 자칫 아이들만 집에 남겨두고, 우리 부부는 일을 가야하는 상황에서, 토요일 오전 3시간씩의 스페니쉬 배우기는 기막힌 시간 활용이자 아이들 장래를 위해서도 참으로 시의 적절하게 활용한 사례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종일 아이들만 집에 남겨져야 했다면 그들은 과연 어떻게 무료한 시간을 보냈을까를 생각해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교차되어 어쩌면 슬픈 생각마저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활기찬 수업 분위기와 다양한 인종과 계층의 사람들이, 제3의 언어를 배우기 위해 아이들을 데려다 줄 수 있었다. 이는 새로운 언어를 배움과 동시, 다른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해 주는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어 정말 알찬 시간이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세월이 많이 지난 지금도 돌이켜 보면, 청소년 시기에 그만큼 가치 있고 의미 있는 학습 효과를 찾기란 쉽지 않았기에 이를 소개해준 친구, 제이슨한테 감사한 마음 전한다.


실상, 자녀의 외국어 학습 방향을 이렇게 영어와 불어를 신경 쓰며 제3 외국어까지 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실행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우리 부부가 각자 일을 가야만 했던 상황이라 다른 방법이 없어 택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힘들던 상황에 대해 오히려 감사를 드리고 싶은 것이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성인이 되었지만 당시 스페인어를 배우는 동안, 친구를 사귀는 범위도 한층 넓어졌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부문에서 넘치는 자신감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제3 외국어는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많은 가능성을 열어 주고 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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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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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즉 본인은 2002년, 캐나다 도착 이후부터 관심을 집중한 것이 자녀 불어 교육인데, 말하자면 어릴 적부터 불어 학습을 마치 필수 과목처럼 인식 시킴으로써 캐나다 주류 사회 진출을 늘리자는 것이다. 


다행히 한국 이민자들은 불어 자체에 대한 거부 반응은 별로 없다. 일부 영국 출신자들은 절대로 불어 배우기를 거부하고 또 일부 퀘벡 출신자들은 평생을 불어 한가지만으로 살아가는 경우도 많은데 비해 우린 그 정도는 아니란 뜻이다.


단지 부모들의 생각에, ‘영어도 안 되는 입장에서 어떻게 불어까지 하냐’ 라는 부정 인식이 문제다. 그러나 아이들의 습득 능력은 성인과 확연히 다름을 알고 지속적인 독려가 필요하다.


캐나다에서의 바이링궐은 장래 진로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므로 어릴 적부터 철저히 교육시켜 영-불어를 능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실상 불어는 쉽게 터득할 수 있는 언어는 아님으로, 별 저항 없이 받아 들이는 어릴 때가 가장 적기인 것이다.


첫 이민 와서 대부분 부모들 생각은 쉽게 동의하지 못한다. 이해는 되지만 그것은 부모의 생각일 뿐 잘못된 선입견인 것이다. 즉 자녀들이 할 수 있다 생각하면, 할 것이고 어렵다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다.


불어 학습, 이것은 한국 대학입시 경쟁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자녀 장래를 위해서는 꼭 넘어야 할 산이라 얘기하자. 이렇듯 확고한 믿음으로 계획 한 것이 불어 교육이었고 과감하게 실행에 옮겼다.


그 결과 딸은 대학생 때 프랑스에 교환 학생으로 다녀왔고 현재 연방 공무원으로 근무하며 만족한 생활을 하고 있다. 아들도 사관학교 졸업 후 캐나다군 장교가 갖춰야 할 바이링궐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시험을 통해 계속 연마하고 있다.


이제 아이들은 캐나다 사회의 일원으로 인생을 꾸려 갈 듯해 안심이다. 즉 우리 부부가 걸어왔던 험난한 길과는 사뭇 다른 삶과 희망을 얘기한다. 한편으로 뿌듯하고 또 한편엔 이것이 이민 온 보람인가 하고 위로한다.


그렇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각자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했다.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고,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수많은 사연들이 이민자의 삶이다. 


단 한번뿐인 인생에서 어렵게 택한 캐나다 이민 생활이 각자의 인생 노정에서, 다시 한번 의미 있고 좀더 보람 있는 흔적으로 기억되기를 바래본다.

 

6. 억세게 운 좋은 만남, “제이슨”


아이들 어학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한 사람을 꼽는다면 당연히 제이슨이다.


그는 한국에 영어 선생으로 3년간 다녀 왔는데, 캐네디언으로서 어쩜 그렇게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지 아주 놀라웠다. 부드러운 인상과 성격도 밝은데다 참 친절했다.


그는 한국을 다녀온 후, 로스쿨을 마치고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는데 적성에 맞지 않아 선생님이 되기 위한 코스를 밟고 있다고 했다. 변호사 자격까지 딴 사람이 교사로 진로를 바꾼다는 것이 당시는 이해 할 수 없었지만 이젠 공감할 수 있다.


캐나다에서 우선 가치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어렵게 딴 변호사 자격을 포기하고 적성에 맞춘 진로를 과감히 결정하는 열정과 용기를 지닌 친구였다. 


처음 제이슨을 만난 것은 우연히 동네 슈퍼 마켓에서였다. 우리 가족이 생경한 눈으로 어리버리 쇼핑을 하고 있으니 한 눈에 알아 보고는 ”한국인 이시죠? 캐나다는 언제 오셨나요? 근처에 사세요?” 하면서 여러 질문을 한국어로 물어와 오히려 당황하여, 한국어로 답해야 할지, 영어로 할지 망설이기도 했다.


여러 대화 중의 한 질문이 훗날 어학 교육에 매우 중요한 정보가 되리라곤 예상 못한 것이었다. 특히 이민 초기 시절, 배워야 한다는 열망이 강했던 시기여서 무리 없이 진행된 듯 하다.


즉, “제 3 외국어도 관심 있느냐?”였는데, 공립 및 카톨릭 교육 위원회에서 매주 토요일, 등록비만 내면 어학 교육을 시켜준다는 것이었다. 확인해 보니, 세계 주요 언어들을 거의 진행하고 있었고 한국어도 있어 반가웠다. 


난 망설이지 않고 스페인어를 택하도록 했다. 왜냐하면 남미 국가들의 언어였기 때문이었다. 이 결정 또한 행운인 것은 스페인어가 불어 학습에 아주 도움이 된 것이다. 이후 멕시코 ‘캔쿤(Cancun)에 가족 여행을 다녀왔는데, 캔쿤의 호텔 직원이 딸의 스페인어 실력에 깜짝 놀라던 추억이 생각난다.


혹시 자녀의 제3외국어 학습에 관심이 있다면, 영-불 바이링궐을 위해서 스페인어를 택하라 권하고 싶다. 이는 자녀 장래를 위해 가치 있는 도전이라 생각되며 아이에게도 높은 자존감을 심어주는 듯 했다.


즉 스페인어를 배운 후, 스페인 외교관 딸 그리고 칠레 친구와 절친한 삼총사가 되어 중학 시절을 아주 재미있게 보내었을 뿐만 아니라 누구와도 자신 있게 행동하는 딸아이의 모습을 보니 아주 놀라웠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제2절 한국 방문 없이 애써 바빴던 특활 활동


1. 연방 정부가 지원하는 “Explore program”


아직 이 제도가 존재할까 싶어 인터넷 검색을 했다. 그런데 더욱 짜임새 있고 융통성 있게 보강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본 프로그램을 통해 불어 교육을 받은 지가 10여 년이 지났으니 어찌 변화가 없겠냐 마는 오히려 더욱 발전한 것이었다.


즉, 이전엔 여름방학 때만 시행된 것 같았는데 이젠 봄에도 가능한 듯하고,연령도 고교 및 대학생들이 대상이었던 것 같은데 대폭 확대한 것이었다. 아주 바람직한 방향이었다.


은퇴 후 “나도 도전해도 되겠네”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내 쏟아질 아내의 비아냥이 생각나 엄두가 나지 않지만, 여전히 그런 미련이 지금까지 있나 싶어 혼자 웃는다.


처음 딸애가 Grade 10, 여름방학 때 퀘벡의 ‘존키에(Jonquire)’라는 시골 지역으로 가게 되었다고 했을 때 다소 불안하여 함께 동행해 참석했다. 오타와에서 몬트리올까지 2시간, 몬트리올에서 퀘벡시티까지 3시간, 다시 퀘벡시티에서 3시간을 북쪽으로 가야 했으니 장장 8시간이 소요되는 거리였다.


처음 칼리지에 딸린 기숙사를 요청했으나 배정받지 못해, 개인 집에 머물게 되어, 딸과 함께 직접 방문해 인사를 나눴는데 마침 캐나다 군인 가족이라 안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함께 머물 여학생 두 명이 더 있었는데, 밴쿠버에서 온 한국 학생, 또 한 명은 토론토에서 온 일본인 2세라 서로 부담이 적은 아세안이라 다행이라 생각 했는데, 학교서 미리 감안해 세심하게 배정을 한 것이었다.


첫 여름 방학을 알차게 보낸 뒤 다음 해에는, 둘째도 신청해서 다른 퀘벡 도시에서 불어 교육을 받았다. 교육적 효과를 충분히 봤다고 보인다. 본 교육의 핵심적 가치는 캐나다 연방정부가 지향하는 이중언어, 바이링궐 즉 영어-불어 학습에 대한 균등한 기회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다.


본 글을 접한 부모님들은 자녀들의 캐나다 사회에 더 많은 사회 참여를 위하여, 불어 교육에 대한 목적 달성을 위해 적극 활용 하시길 바란다. 역시 외국어 배우기는 어릴 적에 받는 게 유리할 듯하다. 


비용은 연방 정부에서 부담하니 걱정할 필요가 없는 셈이다. 고교 시절 혹은 대학생 때, 이런 불어 학습 기회를 가진다는 것은 행운이며 소중한 선택이라 생각된다. 


향후에 캐나다에서 살아갈 자녀들의 직업 선택의 폭을 크게 늘리는데 기여할 것이다. 반드시 잘 기억해 두었다가 보다 적극적으로 한인 자녀들에게 활용 되기를 소망한다. 함께 공유 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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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가장 용기있는 결정, Oh! 캐나다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자는, 용감한 사람이다”

 

 

         

(지난 호에 이어)


2. 도서관에서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아이 둘은 학교를 마치면 곧장 집으로 가지 못하고 늘 학교 옆에 있었던 공공 도서관으로 가야만 했다. 배는 고픈데 아직 일터에서 돌아오지 않은 엄마, 아빠를 도서관에서 기다리다 지친 아들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나 마음이 찡하다.


사연을 모르는 입장에선 “이게 무슨 얘기인가? 할 것이다. 즉 캐나다 법은 15세 미만 자녀의 경우, 어른이 집에 없으면 미성년자 들만의 귀가를 허용치 않기에, 부모가 일을 마쳐야만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에 있어 약 3년에 걸친 고달픈 시절이었다. 스포츠를 좋아했던 탓에 지쳐 엎드려 자던 모습의 아들과는 달리 딸애는 단 한번도 그런 모습으로 엄마, 아빠를 맞지 않았고 책 읽기에 빠져 있거나, 학업에 심취해 몰입하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동생과는 불과 1년 차 인데도 생각과 행동은 서너 살 이상 차이 난 듯 성숙하였고, 어쩌면 그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진취적으로 성장했구나 싶기도 하다. 


즉 어려운 환경에서 불가피하게 주어졌던 학습 시간이 오히려 노력하는 계기가 되었고, 또 스스로 공부하는 힘으로 발전한 듯 대견하다. 대부분의 한국 주부들이 그렇듯 아내도 집에 있었으면 어떠했을까를 상상해 본다. 


즉 남들 못지않게 아이들을 알뜰하게 챙겨 먹였을 것이다. 이국 캐나다에서,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을 용케도 잘 마치고 왔다고 격려하며 대견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린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한창 많이 먹을 때였지만 식사 시간 조차 맞출 수 없었던 것이다.


아내도 일을 해야만 했고 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열심히 일하며 지냈던 초기 힘든 상황이 아이들로 하여금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게 한 것 같다. 엄마, 아빠의 고생을 지켜본 아이들도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아이들에게 뭘 심어주겠다고 어떤 교육 목적을 노린 것이 아닌데, 어쩔 수 없는 여건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가 더 나은 효과를 가져다 준 것이다. 즉 일부러 과외 선생 데려서 공부 시키려 했다면 역 효과가 날수도 있는데, 과외는 고사하고 저녁 식사 마저 매일 늦어 안쓰러웠다. 그나마 우리 가족이 다함께 있어 행복하다 위로하며 지냈는데, 어느 듯 아이 둘 모두 각자 자리에 우뚝 선 것 같아 정말 감사하다.

 

3. 사립, 공립 학교와 가톨릭 학교의 차이


아이 둘을 처음엔 공립 학교로 입학시켰다. 왜냐하면 세계 각국에서 이민자로 혹은 난민으로 왔다 하더라도 캐나다가 지향하는 평등과 존중의 가치에 부합하는 인간으로서의 성숙은 종교적 색채를 담은 가톨릭보다 공립 학교가 나을 것이란 개인적 논리에 근거하였다.


그러나 분명 기대와 현실엔 차이가 존재했다. 취지가 좋아도 아이들이 힘들어 한다면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즉 요지는 아이가 즐거워하느냐 않느냐가 핵심인 것이다. 


둘째 남자애는 문제가 없었으나 첫째 딸애가 무척 힘들어 했다. 약 3개월 정도의 공립 학교 생활을 접고 가톨릭 학교로 옮겼는데, 그 후 딸애는 학교 생활을 아주 즐거워하였는데 참으로 시기 적절한 조치였던 것이다.


공립 학교도 충분히 좋은 시설과 환경을 갖추고 있으므로 단적으로 가톨릭 학교가 공립 학교보다 낫다고는 할 수 없다. 단, 공립학교는 종교를 초월해서 세계 각국의 학생들이 함께 다니는 학교라는 사실에 비해 가톨릭학교는 대부분의 학부형들의 종교가 가톨릭이라는 점인데, 간혹 종교와 무관하게 다니는 경우도 있어 상세 사항은 지역마다 규정이 달라 개별적으로 알아 봐야 할 것이다.


우린 아이를 비롯 우리 부부도 영세를 받은 입장이라 가톨릭 학교 입학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집 근처의 공립 학교는 특별히 중동 계통의 학생들이 많았던 탓에 딸애가 힘들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동네에 따라 다를 수 있으므로 선입견은 갖지 않길 바란다.


다만 개인적 경험으로 공립보다는 가톨릭 학교가 괜찮았다는 것을 참고로 하기 바란다. 그러나 사립학교는 완전히 다른 차원임을 알아야 한다. 즉, 너무 많은 경비가 소요되는 것이다. 공립과 가톨릭학교는 고교 졸업 때까지 무료이지만, 사립학교는 엄연히 비싼 회비를 개인적으로 내면서 다녀야 함으로 큰 경제적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즉 학비가 비싸더라도 개의치 않고, 단지 특별 교육 환경에서 엘리트 교육을 목표로 한다면 도전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 아이들이 대학 진학 후에 만난, 사립학교 출신 친구들의 면면을 보거나 또 친구의 친구 즉 사립학교 동문들을 보았을 때 그리 흔치 않은 하버드, 예일을 나왔다는 경우를 본적이 있어 “하, 돈을 들이는 이유가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엄연히 캐나다의 공립과 가톨릭학교는 무료 교육인데, 그리고 질적인 면에서도 크게 모자람이 없는 캐나다의 공교육 제도를 두고 굳이 비싼  돈 들여서 가야 하는 이유, 분명히 거기엔 특권의식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전혀 경제적 부담이 안될 때, 한번쯤 심각히 고민해도 괜찮을 듯하다.


우리 아이들은 지극히 평범하고 일반적 방법으로 캐나다의 공교육 과정을 거쳐 대학을 졸업한 마당에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욕심이 지나치면 실물을 거둔다는 말처럼 “그만하면 됐다”고 말한다. That’s enough. I really appreciate it.

 

4. 강력히 추천하는, 커뎃(Cadet) 활동


아이들이 7, 8학년 중등학교 시절에 캐나다 육, 해, 공군 조직을 그대로 축소한 듯한 청소년 훈련단체인, Youth Military Cadet에 가입했다. 매주 목요일 오후, 집 근처에 군부대가 있어 둘 다 육군 커뎃 활동을 한 것이다. 


커뎃과의 최초 인연은 동네 커뮤니티 실내 아이스링크에 스케이트를 배우러 갔다가 이웃 주민에게서 들었다. 그래서 봄부터 직접 참가하게 된 것이다. 실제 예비역 군인들이 교관이 되고 학생들은 군복을 입고 제식훈련 및 군대식 규율을 익혀가는 것이다. 


특히 군악대 활동을 통해 트럼펫 등 악기 연주도 배울 수 있어 일거양득이었다. 그리고 여름방학 동안에는 야외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 생활을 하기도 하는데, 특이한 점은 캠프 참가 비용을 내는 게 아니라, 반대로 수당을 받으면서 캠프 활동과 훈련을 한다는 점에서 한국 이민자의 입장에선 ‘가재 잡고 도랑친다’ 는 격언이 딱 맞는 경우가 아닌가 싶다.


부모의 입장에서 여름방학 동안, 아이들이 어디라도 다녀와야 마음이 편한데, 역시 비용이 드는 것이고 혹시 한국을 다녀온다면 훨씬 더 많은 경비가 들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커뎃 훈련 캠프는 반대로 수당을 받으며 재미있는 야영 캠프에 참가하는 셈이니, 초기 이민자의 입장에서는 아이들 여름방학 캠프로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표현도 괜찮을 듯하다.


그리고 자녀들 중 캐나다 사관학교 입학을 목표로 한다면, 커리어의 연속성 차원에서도 아주 바람직한 선택이라 보인다. 우리 두 아이들 중, 첫째보다는 남자인 둘째가 관심을 더 보인 것이 최종 사관학교 입학으로 이어졌는데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아이들은 처음엔 육군 커뎃을 하다가, 이사를 해 오타와 공항 가까이에 있던 공군 커텟을 경험하기도 했다. 이 때 공군 수송기를 타 보기도 해 학창시절 특활 활동으로는 여러 면에서 아주 좋은 교육적 효과를 본 것 같다.


특히 자녀가 만일 장래 군인 관련 직업을 비롯 경찰, 소방대원 등의 특수직에 도전하는 경우, 본 커텟 활동은 청소년기에 아주 좋은 경험이라 생각된다. 기왕이면 커뎃 활동을 기초로 하여 몸과 마음을 단련시켜 캐나다 사관학교로 입학하게 되면, 경력 인정과 동시 여러 혜택을 받게 되는데 심지어 생도 봉급도 더 많이 받게 되는 사례를 본 적이 있다. 


밴쿠버에서 온 아들의 사관학교 동기생의 경우가 그랬다. 이 같은 내용을 미리  인지해서 청소년기의 우리 자녀들에게 보다 많은 기회와 관심을 갖게 하고, 필요한 이들에게 유용한 정보로써 활용되길 바란다. (다음 호에 계속)

 

5. ‘No English’ 에서 영-불 ‘바이링궐’(Bilingual)까지! 


많은 분들이 캐나다 이민을 선택한 이유 중의 하나가, 자녀 교육을 위해서라 한다. 즉 이민 1세대가 고생하더라도 자녀들이 꿈과 희망을 키우며 훌륭하게 성장해 준다면, 그 에 상응하는 보람을 찾게 될 것이란 믿음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기대와 현실은 종종 서로를 외면한다. 심지어 주류 사회로의 진출은 고사하고 안정된 직장 조차 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어쩌면 부모로서 캐나다 이민을 후회할 지 모른다. 그런 연유로, 향후 최소한 자녀 교육을 목적으로 한 신규 이민자들을 위해, 단 1명이라도 캐나다 주류 사회로의 진출을 돕기 위한 방안을 제시해 본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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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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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그러나 아직 채용절차가 모두 끝난 것이 아니고 다음 주, 1주일간 실기 TEST가 있다고 전했다. 특히 딸애는 “아빠, 꼭 합격해야 돼요” 하며 몇 번을 당부했다. 이런 바램과 염원을 안고, 그 다음주엔 기차로 런던에 도착했다. 


호텔에서 시행된 일주간의 훈련에는 노바스코샤에서 온 여성 참가자도 있어 신기했다. 처음 12명이 참가해 90% 이상 받아야 하는 필기 시험에서 5명이 탈락했고, 또 격투기 시험에서 2명의 추가 탈락자가 생겼다. 


마지막에 권총 사격이 있었는데 결국 탈이 났다. 25미터 부문에서 타겟을 벗어나고 만 것이다. 과녁이 잘 안보여서 애를 먹었는데 한번 더 기회를 줬지만 실패였다. 시력이 그렇게 약해진 줄 미처 몰라 안경을 준비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고 무엇보다 꼭 합격하라던 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감독관도 몹시 아쉬웠던 모양이었다. 태권도를 오랫동안 수련해서 한국을 좀 아는 감독관은 내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수업에 임했고 실기에서도 열심히 했다고 인식했는지, 특별 추천을 해주겠다고 했다.


즉 무장 경호 대신 현금 준비와 입금 프로세싱을 하는 내근 직을 추천했다. 본사에는 이미 승낙을 받았다고 했다. 이런 경우를 천우신조라 해야 할지, 너무도 고마운 인연이었다. 도와 달라고 아쉬운 소리 한 것도 아닌데, 다만 꼭 붙고 말겠다는 바램과 열성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한 것은 사실이었다.


특히 딸애의 강렬한 염원에 답하려 밤잠을 줄이면서 최선을 다해 참가한 교육이었다. 그래서인지 감독관이 먼저 도움을 준 셈이었다. 그리하여 딸애의 간절한 소망을 이룰 수 있었고,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자 그 다음주부터 내근 직 풀타임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종 시험을 통과했고 오타와에서 함께 참가했던 군인 출신, 마크의 경우는 달랐다. 한달 넘게 기다려도 풀타임 자리가 나지 않아, 내근 직으로 일을 보충하기도 했는데, 결국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말았다. 적은 수입으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한번 인생사 새옹지마란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되었는데, 우리는 늘 최선을 다할 때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마주하게 됨을 알 수 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이민 초기 시절의 생일날, 캐나다 취업과 관련된 일화이다. 참 우여곡절이 많았구나 싶었다.

 

5. 최종 통과한 캐나다 장교 시험,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웬 생뚱맞은 얘기인가 할 것이다. 아니 이민자가, 그것도 40대를 넘긴 나이에 웬, 캐나다 장교시험이냐 라며 놀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연을 밝히면. 우연한 기회에 같은 빌딩에 있었던 모병센타 모병관의 추천이 있었으며 또 아들의 사관학교 입교 절차에 관한 정보를 취합하는 과정에서, 당시 캐나다 정부의 아프가니스탄 파병 결정에 따라 많은 군 인적자원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모병관의 농담 섞인 한마디 “You can apply for the position as well”가 내겐 진심으로 다가왔고, 그 당시 “내가 캐나다에 이민 와서 무엇을 두려워하랴”라는 강한 정신력과 믿음이 있었기에 과감히 지원서를 제출했던 것이다. 그것도 일반 군인이 아닌 대졸 학력을 요구하는 장교 시험에 지원하여 합격한 것이다.


최종 합격이란 소식을 듣는 데는 십 년 이력조회로 인해 한국을 거쳐 오느라 무려 8년이란 긴 세월이 흐른 뒤여서 거의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모병관으로부터 전해 온 합격 통보였던 것이다. 


8년 전 처음 지원서를 제출하고 나서 적성검사, 신체 및 체력 검정 그리고 인터뷰 과정을 마친 후 10년 배경 조사를 한다는 것이었는데, 캐나다 생활 4년 만에 즉, 시민권을 취득하자마자 시도한 도전이었는데 문제는 배경 조사 기간이 캐나다 생활에 비해 한국에서 장시간이 소요된 것이었다. 


정확히는 43세에 응시하여 51세 즉 8년 만에 합격 통보를 받았는데, 처음 지원했던 Logistic(군수, 인사, 예산 등) 분야는 경쟁이 치열하니 상대적으로 경쟁이 덜한 Mars Office(해군 항해장교)를 추천하여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합격 통보를 받았지만 해군 본부에서는 신임 장교 훈련 입소가 곤란하다고 했다. 충분히 이해가 되었으며, 아들의 사관생도 3년 차 생활을 이미 들여다본 바여서 전혀 이의 제기할 뜻이 없었다.


군 작전 및 비상 임무 등 모든 명령을 신속히 이해하고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데, 미군 방식인 한국군대 경험이 영국 방식인 캐나다군의 훈련 과정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짐은 당연하다 해도, 부족한 영어와 신체 나이는 극복하기 어렵단 사실을 받아 들여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자랑스럽게 느껴진 것은 캐나다 군 장교시험을 끝까지 완주하여 합격했다는 사실과 아들이 아빠의 꿈을 대신해서 사관학교를  졸업과 동시 임관하여 현역 캐나다 육군 대위로 열심히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감사한 것은 모교, 동아대 학사 학위로써 캐나다 장교시험에서 캐나다 학위와 동등한 자격으로 최종 합격했다는 사실 또한 마음껏 자존감을 높여 주었다. 비록 힘들었던 과정이었지만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고 생각된다.


 
제3장. 자녀교육과 관련한 소중한 경험들

제1절 이민 초기의 가슴 아팠던 사연들


1. 눈물로 시작된 학교 생활, ‘딱 6개월’


남자 아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둘째는 아주 편하고 자연스럽게 학교 생활에 적응했었는데, 첫째 딸애는 성격이 예민한 편이라 고충이 아주 심했다. 특히 캐나다로 오기 전 영어 공부를 좀 시킬까 망설였는데, 해외 주재 경험이 있는 형님께서 굳이 한국 발음에 노출시키지 말고, 현지 영어를 바로 배우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조언으로 별도 교육은 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초기에 더 많은 눈물과 아픔을 겪어야 했나 싶었지만 결국, 형님의 조언이 옳았구나 싶다. 여하튼 한국에서 5, 6학년 한 학기를 마치고 와, 수학 시험만 보고 6, 7학년으로 배정된 아이들의 학교 생활은 날씨로 치면 아들은 쾌청, 딸은 완전 먹구름에 온종일 비였다.


즉 딸애는 등교해서 집에 올 때까지 거의 눈물로 얼룩진 생활이었는데 약 6개월이 지나니 기후 변화가 왔다. 딸아이도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에 미소와 생기가 돌면서 학교 생활이 아주 재미있다고 했다. 정말 다행스럽고 감사했다. 첫 등교 한달 동안은 얼마나 안쓰러웠는지 아내는 이민을 후회 하기도 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은 늘 고통이 따르고 세상엔 공짜가 없는 법이다. 학교 선택은 종교와 인종에 개의치 말자는 폭넓은 취지로 공립학교를 택했으나 예상은 완전 빗나가고 말았다. 즉 한국인 입장에서는 단정한 교복을 입고 절제된 생활을 가르치는 가톨릭 학교와 취향이 맞는 듯 했다.


첫 배정된 공립학교에서 많이 힘들어 했기에 신속하게 가톨릭 학교로 전학한 것은 참 다행이었다. 마침 가톨릭 학교에는 동급생 중 한국 아이도 있어 딸의 심리적 안정도 빠르게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당시 토론토 한인지역 학교엔 한 반에 한국 학생들이 10명이 넘었다고 하니 한국 아이들끼리 몰려 다니느라 영어 배우기가 많이 힘들다고 했다. 반면 오타와에서는 학년 전체에 한국 아이들이 2-3명 수준이었으니 영어를 배운다는 측면에서는 아주 훌륭한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가톨릭 학교로 전학하기 전, 공립학교 교장 선생님과 담임 선생에게 항의 방문 했던 것은 죄송한 마음이다. 특히 중동계 학생들이 많아, 딸애를 괴롭혔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들 입장에서 보면 영어를 전혀 못하는 동양계 여학생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한 행동일 수도 있었겠다 싶기 때문이다. 


지나고 나니 모든 것이 추억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당시 가톨릭 학교로 전학 하는데 많은 도움 주신 수녀님께도 감사한 마음 전하고 싶다. 비록 아픈 기억이었다 하더라도 경험한 것을 알리고 소통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 같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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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건널 수 있는 자는, 용감한 사람이다”        

 

 

 

 

(지난 호에 이어)
Security 직업의 장점은 육체적 피로감이 덜하므로 오히려 나이 들수록 괜찮은 직업이라는 생각이다. 직장을 구하면 근무지에 따라 야간 근무를 해야 하는데 적응 될 때까지는 감수해야 할 부분이다. 시큐리티 회사는 캐나다 법에 명시된 규정을 적용하여 오버 타임이나 공휴일 근무 때는 임금의 1.5배를 지불하니 소득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3개월 내지 6개월 기준으로 검안 및 치과 진료 혜택을 주는 회사와 그렇지 않은 곳이 있는데 확인해서 응시를 하되, 우선 직장을 구해서 경험을 먼저 쌓는 것이 중요하다. 


시큐리티 직업의 2가지 본질은 “Watch & Report”다. 근무 중 발생한 사건을 6하 원칙에 따라 기술해서 보고하면 그것으로 임무는 거의 다한 것이다. 근무 중 긴급 자위권 방어를 제외하고 여하한 경우에도 육체적인 접촉은 피해야 하며, 단 쓰기 능력이 있어야 업무 내용을 Report 할 수 있다.


본인의 시큐리티 입문 계기는, 캐나다 도착 후 시도한 경찰되기에서 비롯됐다. 이곳 젊은이들도 경찰을 목표로 한다면, 거의 예외 없이 시큐리티 일을 해야하며, 업무를 얼마나 성실하게 임하는지 이들을 보고 있으면, 미래 경찰의 가부를 대략 판정 할 수 있다.


라이선스를 따는 방법은 온라인에서 코스를 이수하면 될 것이다. 비용은 크게 부담되지 않는 수준인데, 일부 회사(Commissionaire)는 무료로 딸 수 있도록 교육을 시켜 주기도 하니 확인해서 응시하는 게 좋을 듯하다.


만일 캐나다 영주권자 신분으로 도착한 현재, 대한민국 국방 의무를 아주 자신 있게 마친 30대라면, 시큐리티 잡을 병행하며 Police foundation이라는 칼리지 코스(1년 혹은 2년)를 택해, 경찰 되기를 시도하면 가능성이 높은 편이라 생각된다.


본인이 응시 할 당시, 약간의 사전 지식이 있었다면 하는 아쉬운 생각에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당시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2. ‘캐나다 경찰되기’는 정말 무모 했었나?


본인은 실현 가능한 목표였고 아쉬움이 남는 도전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옆에서 훈수하는 아내는 여전히 무리한 도전 이었다고 주장을 한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마지막 세 번째까지 합격을 못한 것은 사실이니 구차한 변명은 않는 게 낫겠다. 


캐나다에 도착해서 여러 직장을 알아 보는 도중, 같은 아파트에 살았던 친구가 엘리베이터에서 유니폼 입고 출퇴근하는 모습을 가끔 보고 질문한 것이 시초다. 당시 그는 브링스(Brinks)라는 회사에 다녔는데 권총으로 무장한 채 현금 운송 및 서비스를 하며 제법 높은 임금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친구의 목표도 최종 경찰이 되는 것인데, 경찰 시험 인터뷰 과정에서 항시 관련 업종에서 경험을 쌓았는지를 묻기 때문에 브링스에서 일한다고 했다. 경찰에도 연방경찰과 주정부 경찰 그리고 도시 경찰로 나눠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참고로 그는 연방경찰 시험에 최종 합격하여, 연방 경찰학교로 입소한다는 소식을 끝으로 헤어졌는데 지금쯤 훌륭히 근무 중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본인도 그 후 총기 면허를 따게 되었고 이어서 캐나다 경찰되기 도전이 시작되었다. 우선 시민권을 요구하는 연방경찰(RCMP) 대신 영주권만으로 가능한 온타리오 주경찰(OPP)과 오타와 경찰(OPS)을 목표로 준비를 한 것이다. 당시 이민 오자 마자 바로 경찰되기는 다소 무리였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아무런 선입견 없이 6개월 정도 혼자 준비한 결과 3년 유효한 필기시험은 한번에 합격 했었고 6개월마다 갱신해야 하는 체력시험 역시 무난히 합격했다.


다만 적절한 쓰기 요령이 필요했던 에세이 시험에 연달아 실패 함으로써 포기 했지만 끝까지 승부수를 띄웠더라면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도 있었다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때문에 후임 이민자들 중, 도전 의식이 강한 30대로서 칼리지 수업을 받으면서 시도를 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본인이 시험을 치르는 과정에서, 선배의 한마디 조언이 있었다면 좋은 결과를 거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시는 정보를 제공해 줄 어느 누구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열심히 했기에 자부심이 있고 여러분께 추천하는 것이다. 


실제로 경찰이 되고자 하는 현지 젊은이들도 쉽게 통과 할 수 있는 시험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군대를 다녀온 한국 예비역 중에서 우선은 체력과 적성이 가장 중요하고 다음은 오직 영어 실력만 차분히 보완하면서 부지런히 쌓아가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즉,칼리지 2년(Police foundation)은 영어 실력 쌓기에 좋은 시기인 것이다.


이때 Security job을 병행하면서 돈도 벌면서 경험을 쌓아야 하는 것이다. 가끔은 영어 외에 외국어 즉 한국어를 대도시 경찰에선 필요로 하므로 특별 가산점을 주기도 하니 참고할 필요가 있다.


최근 오타와 경찰에서 다수의 경찰을 모집한다 하니 많은 30, 40대들이 도전하길 바란다. 경찰 시험을 준비하면 장점은 군인, 교정직, 소방대원(fire fighter) 등 관련 직종에 대한 응시 기회가 많이 열리는 것을 보는데 자신을 던진 용감한 도전은 또 다른 예상 못한 기회를 부른다고 생각된다.

 

3. 함께 느낀 가장의 자격과 보람,

 

‘커미셔너’가 되어캐나다에 도착해서, 연방 정부 건물에서 일하는 커미셔너(Commissionaire) 들을 처음 보았을 때 “저 사람들은 뭐 하는 사람인가”하고 궁금해 했다. 왜냐하면 외견상 보면 마치 경찰 혹은 군인 같기 때문이다. 


현재 연방 정부 건물을 대상으로 시큐리티 업무를 맡고 있는 커미셔너의 배경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참전 군인들의 직장 보장 차원에서, 영국 여왕의 명으로 공공 건물의 안전 업무를 일임했다고 한다.


때문에 임금 수준이나 제반 복지 혜택이 어느 시큐리티 업체에 비해 좋은 편이다. 이민 초기, 다운타운에서 컨비니언스를 운영할 당시, 가게 건물 내의 공공 시설을 지키는 커미셔너들과 접촉할 기회가 있었는데, 모두가 영어, 불어를 구사했다. 


그래서 ‘응시가 불가능 하겠구나’싶었는데 자세히 알아보니 오전 근무는 바이링궐, 즉 영어와 불어를 구사해야 하나, 오후 3시 이후 근무엔 영어만 해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커미셔너에 지원하게 되었는데 특히 고국의 병무청에 의뢰하여 받은 ‘영문 군대 경력 증명서’는 커미셔너 입사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처럼 우리의 군 경험은 시큐리티 업체 취업에 상당히 유리한 셈이다. 서류 전형 입사 후, 1주일 강의와 시험을 거쳐 정식 커미셔너가 되면, 연방 정부 빌딩으로 일을 가는데, 운이 좋으면 곧장 풀타임으로 배치되는 경우도 있다.


본인은 입사 후 다운타운과 여러 곳을 다녔는데, 오타와 지리를 익히며 캐나다 공무원 사회를 이해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정식 커미셔너가 된 이후 가장 감동적 순간은 3개월 후부터 받게 된 가족의 검안 및 치과 진료가 가장 인상에 남는다.


그 동안 캐나다에 도착해 전혀 받지 못했던 시력 검사와 안경 및 콘텍 렌즈 등을 비로소 아이들과 아내에게 해주었을 때, 얼마나 가슴 뭉클했던지 “드디어 됐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고 스케일링 및 진료를 받는 동안, 가슴 뿌듯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 후 8년 동안 커미셔너로서 풀타임으로 일한 부서는 국방부(National defence), 보건부(Health Canada), 농림부(Agriculture Canada)와 국세청(Ravenue Canada) 등이다. 모두가 보람 있는 추억을 가득 안겨 주었다. 정말 흥미롭고 감사한 일이다.

 

4. 기쁨 2배의 생일선물, “You are hired” at G4S


이민 5년차 쯤에 맞이한 생일날 이었다. 아이들로부터는 한국말과 영어로 쓰여진 축하 카드를 받았고, 아내는 인사말로 때웠지만 여하튼 기분 좋은 날이었다. 그래서 그날 가게 문은 좀 일찍 닫기로 했고, 생일 축하는 베트남국수 집에서 하는 것으로 정했다. 왜냐하면 소박하지만 맛에 중독이라도 된 듯, 다른 어느 맛집 보다 더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한인 성당에서 봉사하시던 신부님이, 발령을 받고 이임 인사말 중에서, 오타와 베트남 국수 맛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며 아쉬워하셨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식당에 도착하여 자리 배정을 받고서 앉으려는 순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는데, 일전에 인터뷰를 마친 채용 담당자로부터 “Congratulation, You are hired”란 참 반가운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다. 아이들도 아내도 모두 기뻐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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