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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6
가문의 전도사

<성인장애인공동체 기획시리즈>

차상원(회원)

 

 처음엔 내 이야기를 글로 쓴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컸다. ‘병신 된 것도 서러운데 남들에게 광고할 일 있느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글을 요청하신 분(민혜기 사모님)에게 화를 냈으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무언가 필요한 일이니 그러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도 그런 나를 에둘러 응원해주었다. 3주 전 ‘우리들의 이야기 나누기’ 시간에 공동체 사람들 앞에서 내 이야기를 하게 된 것도, 그리고 오늘 인터뷰에 나선 것도 모두 아내의 응원 덕분이다.

 

 공동체에 나오는 회원 모두 그러시겠지만 나도 내가 장애인이 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살아오는 동안 장애인을 많이 봤다. 붐비는 시장바닥에서 고무 튜브로 둘러싼 하반신을 질질 끌면서 구걸하는 사람이라도 볼라치면, ‘저 사람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저렇지? 저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지’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 나는 외아들로 아버지의 훈육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자랐다. 어머니도 “너는 아빠가 안 계셨으면 키우지 못했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한마디로 철부지였다.

 

 2009년, 술을 마시러 밖에 나갔는데 깨어보니 병상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 길에 쓰러져 있는 나를 보고 911에 신고하여 목숨을 건진 것이다. 더 큰 일은 그 다음이었다. 퇴원하여 지내던 중 그리 심각하지 않은 일로 입원했다가 뜻밖의 감염이 진행되어 지금과 같은 장애를 입게 된 것이다. 이 충격으로 한국에 계시던 아버지께서 암이 재발하여 끝내 돌아가시게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임종도 참석하지 못한 불효한 아들을 눈물 흘리시며 마지막까지 부르셨다고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할머니마저 돌아가셨다. 손자가 병을 얻고 그로 인해 아들까지 잃게 된 충격이 얼마나 크셨을까! 나는 조상들에게 두루 불효한 자손이 되고 말았다.

 

 그 무렵은 교회를 다닌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다.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절망감에 예수님과 하나님을 원망했다. ‘하나님은 믿음 주고 구원 주시는 분인데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세요? 난 이렇게 살고 싶지 않으니 차라리 데려가세요’라고. 그런데 아내의 기도는 내 원망과는 조금 달랐다. ‘하나님 너무 하십니다. 제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차씨 집안에 시집와 이런 시련을 겪게 하는 겁니까? 다른 건 바라지 않습니다. 제발 저의 남편, 살려만 주세요’였다. 아내의 기도 때문이었을까? 하루는 병상에서 비몽사몽 간에 헤매고 있는데, 갑자기 뜨거운 불이 내 몸을 확 비추는 것이었다. 이게 뭐지?’하고 눈을 떴는데 어떤 분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상원아, 이제 일어나야지!’ 하시며 내 다리를 잡고 쓰다듬어 주셨다. 그 체험을 한 이틀 뒤 나는 일어났다.

 

 퇴원은 하였으나 집에 돌아온 나는 더는 과거의 쾌활했던 내가 아니었다. 심한 우울증이 찾아왔다. 그러던 중 교회에 청년부 전도사님이 한 분 오셨다. 그분은 한국에 계실 때 대학병원의 물리치료실에 근무하셨다고 했다. 남편의 사역을 도울 수 있는 일을 찾던 중에 그분도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나와 같은 장애인들을 지금까지 돕고 있다. 정성으로 돌봐주신 그분 덕택에 1년이 지난 뒤에 나는 워커로 보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분은 내가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면 오히려 “차 집사님을 보면서 제가 더 감사해요, 이렇게 하나님의 뜻으로 나에게 봉사할 기회를 주셨으니 감사하지요”라고 하신다. 그분은 지금도 일주일에 두 번씩 나를 포함하여 공동체 회원을 위해 봉사하고 계신다.

 

 내가 투병하는 동안에 성장기를 보낸 우리 아이들도 힘이 들었을 것이다. 큰아이가 지금은 훌쩍 자라 나를 이해하고 많이 돕지만 둘째는 나하고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그 아이 기억에 아빠는 항상 아파 있었던 존재였다. 가족 상담을 했을 때의 일이다. 작은 애가 그린 그림에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형만 있고 자신은 밖에서 노는 상황을 그려 놓았다. 그림을 본 캐네디언 상담사는 ‘혹시 아이가 어렸을 때 집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엄마 아빠랑 같이 안 지냈는가?’라고 물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아내와 나는 많이 울었다. 내가 이렇게 되고, 아내는 나를 돌보랴, 큰애 돌보랴 너무 힘이 들었다. 부득이 둘째를 한국에 보내 외가에서 지내도록 했었다. 그런 연유로 아이는 자기가 집안에서 거추장스러운 존재라고 인식했을 것이고, 그것이 어린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게 된 것이다.

 

 인생이 덧없음을 이모가 돌아가시고 실감했다. 이모가 병석에 계실 때 어머니는 “예수님이 너를 깨워 주신 것 같이 이모가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네가 기도 좀 해다오” 하셨다. 내가 집안에 전도사가 된 기분이었다. 가끔 어머니는 나에게 ‘네가 행복의 통로다’라고 하신다. 우습게도 우리 부부의 혼담이 오갈 때 양가 모두 서로 예수를 안 믿으니 좋다고까지 했었다. 그런데 아내가 내 일을 겪으면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고, 어머니도 믿게 되셨다. 끝내는 장인 장모까지 예수님을 믿게 되셨다.

 

 처음 내가 쓰러졌을 때 어머니는 거의 실신하셨다. 용하다는 점집을 찾아가니 점쟁이는 ‘누가 뒤에서 나를 잡고 있다’라고 했다 한다. 그것을 풀려면 굿을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강고하신 아버지도 마음이 약해지셔서 굿을 고민하셨다고 한다. 예수님 안 믿었으면 삼천만원 주고 굿을 할 뻔했다. 이제 아버지를 뵈올 순 없으나 부모님이 여기 오셨을 때 큰애 데리고 함께 찍은 사진을 침대 머리맡에 걸어두고 있다. 요즘 들어 그 사진을 보며, ‘어른들 말씀은 틀린 것이 없구나’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돌이켜 보니 내 삶의 중요한 전환점에는 항상 곁에 아내가 있었다. 아내는 원래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분 조카딸이었다. 아내를 보자마자 홀딱 반한 내가 양가 부모님들을 설득하여 2002년 1월에 결혼하게 되었다. 캐나다 이민 신청을 할 때도 나와는 달리 이민 카테고리의 상위 직업군에 속한 아내 덕분에 이민 수속이 수월했다. 나는 모든 이민 케이스가 우리처럼 쉬운 줄 알았는데 사실은 정반대였다. 이주공사에서는 수속비용을 할인해 주면서 우리의 케이스를 광고로 삼자고 할 정도였다. 신청한 지 3개월도 안 되어 영주권이 나왔기에 나는 영주권 취득을 위해 적성과 무관하게 다녀야 했던 센테니얼 아카데미 자동차학과를 그만둘 수 있었다. 한국에서부터 해 오던 여행사 가이드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이 때문이었다.

 

 성인장애인공동체도 아내의 권유로 나오게 되었다. 처음에는 ‘지금 내가 장애인이 됐다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라는 거야 뭐야!’라고 소리치며 화를 냈다. 하루는 마지못해 공동체에 나갔다가 내 평생의 존경할 만한 멘토를 만나게 되었다. 동갑내기이며 전임 회장인 유홍선 사무장이다. 그는 태어나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었지만 보통 사람들보다 더 빠르고 더 열정적이었다. 누나와 여동생들 틈에 끼어 응석받이로만 자랐던 나였기에 그의 모습과 행동은 나에게 도전으로 다가왔다.

 

 그뿐 아니었다. 공동체에는 어머니, 누나 그리고 동생 같은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내 어머니는 평소에 “나는 너희들에게 정말 감사하다. 형제간에 너희만큼 우애하는 걸 못 봤다”라고 하시며 항상 자식들을 다독이셨다. 누나와 동생들은 지금도 나하고 전화를 할 때면 내가 안타까워 모두 운다. 형제애가 두터운 우리다. 그런데 공동체에서 내 혈육과 같은 분들을 만난 것이다. 어디서 이런 분들을 만날 수 있겠는가! 어디서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있겠는가! 나는 이 행복이 어느 순간에 깨져버리지나 않을까 두렵다. 이런 속마음을 내가 의지하는 공동체의 누님 한 분에게 털어놓은 적도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우리 공동체에는 온몸으로 열성을 다하시는 봉사자분들이 계신다. 나는 이런 분들을 본 적이 없다. 고등학교 때부터 봉사활동을 해봤기 때문에 안다. 공동체에 몇 번 다녀가신 어머니도 나보고 하시는 말씀이 ‘운동 갈 때는 싫어하는 표정이 역력하더니, 공동체 갈 때는 그렇게 밝을 수가 없구나’ 하셨다. 표정도 마음을 숨길 수는 없는가 보다. 헌신해 주시는 봉사자들이 아니라면 어떻게 내 표정이 그토록 밝을 수 있었겠는가?

 

 한번은 아직 어린 큰아들을 데리고 공동체에 간 적이 있었다. 공동체를 다녀온 후 아이가 엄마에게 그랬다고 한다. “난,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아픈 사람인 줄 알았는데 여기 와서 보니까 우리 아빠는 아픈 것도 아니야. 더 심하신 분들도 있는데 내가 아빠한테 했던 것처럼 그분들에게도 잘해줘야 할 것 같아”라고. 그저 감사할 뿐이다.

 

 공동체에는 고마운 분들이 많지만, 그중에도 민혜기 사모님과 유홍선 전임 회장, 그리고 설립자이신 정동석 목사님은 나를 구원해주신 분들이나 다름없다. 생각해 보면 나와 같은 사람들이 한인사회 내에 많을 것 같다. 장애인공동체라는 단체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서 안 오시는 분들이 있는데 여기 몇 번 와보면 그런 생각이 다 없어질 것이다. 나는 나의 좋은 경험을 그분들과 나누고 싶다. 시간을 거꾸로 되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조금만 더 나아진다면 남에게 더 봉사하고 도움이 필요한 분들에게 우리 공동체를 더 알리고 싶은 마음뿐이다. 나는 그런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고대한다.

 

*원고는 구술생애사 작가 김동환님께서 성인장애인공동체 차상원 회원과의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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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6
성인장애인공동체와 나(1)

 

장마리아(회원)

 

45년 전, 한국에서 의류 디자이너로 일을 하고 있던 나는 부모님, 오빠와 상의한 끝에 1974년 7월에 캐나다에 이민을 오게 되었다. 나의 본명은 장정혜이고,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서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래서 가족들은 나를 항상 ‘찌끄러기’라고 불렀다. 학교는 덕성여대 의상과를 졸업하고 의상디자이너로 1971년부터 일을 하고 있었다.

 

이민 온 한 달 후 이곳에서도 디자이너 경력으로 유대인 회사에 직장을 잡았다. 거기서 컷팅과 패턴 뜨는 직책으로 일을 시작하여 2년 정도 일을 한 다음 1976년 초에 결혼했다. 그리고 에드먼턴으로 이사를 하여서 8년을 살다가 토론토로 다시 돌아와 가게를 열었다.

 

가게를 하는 동안에 남편은 도움을 주지 않았다. 몹시 힘들었다. 가게를 하면서 먹지도 못하고 쉬는 날도 없이 일하다 보니 몇 차례 유산하게 되어 현재 자녀는 없다. 남편은 외도하였고 이혼 후 혼자 지내왔다.

 

첫 번째 스트로크는 2014년 7월에 찾아왔다. 에드먼턴에서 토론토로 이사 후 7년 반 동안 운영해오던 비즈니스를 접은 바로 한 달 뒤였다. 비즈니스 하느라 식사도 잘 못하고, 잠도 잘 못 잘 뿐 아니라 쉬는 날도 없었다. 일에 빠져서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스스로 몸을 해친 것이다. 그렇게 오래 일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늦게야 들었다.

 

스트로크의 조짐은 있었다. 비즈니스를 정리하려고 주인과 협상을 했으나 원만치가 않았다. 그러던 중 6월에 가게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것이다. 병원에 갔더니 전문의가 ‘스트로크의 전조’라고 했다. 그래서 ‘이거 뭐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데,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병원에서 준 약을 먹다 중단해버렸는데 한 달이 지난 7월에 쓰러진 것이다.

 

혼자 집에서 밥을 먹을 때였다 ‘이러다간 안 되겠다, 병원에 가야겠다’라고 생각을 하는 데 나도 모르게 쓰러져 버렸다. 결과적으로 이런 생활환경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DNA가 겹쳐 뇌졸중이란 병이 나에게 찾아온 것이다. 쓰러졌을 때도 의식은 희미하게 있어서 병원에는 전철 타고 버스 타고 내 발로 걸어서 들어갔다.

 

병원에 도착해 간호사에게 이야기하니 CT를 찍자고 했고 검사를 하더니 그 즉시 입원을 시켰다. 그리고 언제 의식이 사라졌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그 후 1주일 만에 의식이 깨어났다. 의식을 차린 3주 후에 완쾌되지도 않은 몸으로 살던 집이 팔릴 것 같다 해서 한 달 만에 퇴원했다. 그 뒤로 두 번째 스트로크가 올 때까지 나는 오른쪽 편마비 장애를 갖게 되었다. 이때가 내 나이 65세였다.

 

가족력이 없었던 나에게 스트로크라는 것은 생소한 병이었다. 뭐가 뭔지, 어떻게 증상이 달라지는지, 병에 대한 정보가 통 없었다. 힘은 들었어도, 그 당시에는 병에 대해 워낙 몰랐기 때문에 오히려 힘든 줄도 몰랐다. 이렇게 그냥 사는가 보다 했었다.

 

손위에 일곱째 언니가 있었는데 병원에서 어떻게 연락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입원한 지 1주일이 지난 뒤에야 병문안을 왔다. 내가 혼자 집을 나서면서 병원을 간다고 했다. 며칠 동안이나 집을 안 들어갔는데도 혼자 병원에 간 동생이 궁금하지도 않았는지 무척이나 서운했다.

 

두 번째 스트로크는 2015년 10월에 왔다. 그 해 4월에는 오빠 산소에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내가 탄 휠 트랜스가 서 있는데 뒤차가 우리 차를 추돌한 것이다. 이 사고의 후유증으로 나는 2년 이상 밤에 잠을 자지 못했다. 몇 달도 안 되어서 체중은 15kg이나 빠지고 노인이 다 되어버렸다. 이런 상태에서 스트로크가 다시 찾아온 것이다.

 

이번에는 왼쪽으로 왔다. 첫 번째 스트로크가 찾아온 지 1년 3개월 만이다. 병원에는 넉 달을 입원해 있었다. 보통 한 병원에서 3개월까지만 입원할 수 있어서 다른 곳으로 옮겨서 한 달을 더 있었다.

 

첫 스트로크가 왔을 때는 병원에서 치료를 잘해줬고, 회복도 빨랐다. 언어장애로 말을 못 하다가 말도 하게 되고 왼쪽에 편마비가 왔는데 치료받고 왼쪽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점점 나아지겠지 했다.

 

그런데 나에게 제일 충격을 준 것은 두 번이나 겪은 스트로크가 아니다. 바로 혈육인 친언니의 동생에 대한 무관심이었다. 처음 스트로크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도 언니는 일주일이 지난 다음에 나를 찾아왔다. 언니는 나에게 전화도 잘 안 한다. 한번은 1년하고도 서너 달이 지난 다음에서야 나를 찾아왔다.

 

또 한 번은 생일이라고 선물을 사다 주었는데 너무 비싸서 내가 가서 물리고 돈으로 받아다가 쓰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그것을 가져가 자기 딸에게 주고 나한테는 아무것도 주질 않았다. 지금은 서운한 마음뿐이다. 언니는 먼저 이민 와있던 나에게 초청 부탁을 해서 내가 스폰서가 되어 주어 캐나다에 올 수 있었다.

 

병원에 있을 때 하도 병문안을 안 와서 얘기 중에 ‘내가 언니 스폰서’라고 했더니 ‘듣기 싫다’라고 했다. 스트로크가 온 사람은 생각과 몸이 다르게 움직인다. 혼자 할 수 없는 일들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꼭 받아야 하는데 도움을 청하기가 점점 싫어졌다.

 

결국은 내가 밥을 못 해먹으니까 언니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면 언니는 “나는 국을 안 먹는데 너 때문에 싫어도 먹는다“는 식으로 내 탓을 한다. 그러면 끓이지 말라고 했다. 맘속으로는 아주 서러웠다. 아마 오빠가 살아 계셨으면 언니의 무관심이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오빠는 연극도 하시고 방송도 하신 재능이 많으신 분이었다. 지금의 얼 TV 토론토 한국방송을 하시면서 내 일도 많이 도와주셨다. 그나마 오빠와는 가까웠는데 돌아가시고 나니 더욱더 그립다.

 

첫 번째 스트로크 때는 회복이 빠른 편이었으나 두 번째 스트로크 이후 후유증이 지금도 남아 있다. PSW(Personal Support Worker)를 신청하고 10개월 넘게 기다렸다. PSW가 오면 일주일에 두 번을 방문해서 목욕도 시켜주고, 청소도 해준다. 밥만 내가 데워 먹으면 된다.

 

그런데 PSW도 각기 다르므로 나하고 맞아야 한다. 그 사람들이 오히려 클라이언트를 힘들게 하는 부분도 있다. 나는 PSW와 세 번의 트러블이 있었다. 동양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한번은 흑인 PSW를 시장에 보냈는데, 2시간짜리가 20분을 남겨놓고 돌아왔다. 그래서 항의 했더니 “처음에 시장가면 목욕 안 시켜도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하는 거다. 우리 집에서 시장 갔다 오는 데는 20분이면 충분한 거리다. 그래서 난 “20분 안에 목욕을 시켜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목욕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나오라는 것이다. 집에 가야 한다고.

 

이런 일을 겪고도 말을 못하면 회사에 리포트도 못하고 아픈 것도 서러운데 무시까지 당하면 너무 힘들다. 시장 가서 받아온 영수증에 보니까 10분 동안에 시장은 다 봤다. 그래서 그 영수증을 첨부해서 기관에 항의했다. 그랬더니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서 보내왔다. 이런 일을 겪은 후, 지금은 PSW와 잘 지낸다.

 

2015년 한 해는 나에게 힘든 일들이 여러 가지로 겹쳤다. 어렵게 집을 팔고 이사를 했고, 교통사고가 났고, 두 번째 뇌졸중이 찾아왔다. 일을 못 하니까 돈도 안 들어오고, 그때는 65세도 안 돼서 정부 보조금도 받지 못했다. 물론 지금도 연금은 받지 못하고 TTC(Toronto Transit Commission, 토론토 교통국) 무료이용, 치과에서 발치와 틀니 2가지, 그리고 CPP(Canada Pension Plan, 캐나다 은퇴 연금)만 혜택을 받고 있다. 스트로크 오기 직전에 했던 비즈니스에 대한 소득신고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16년 이후는 했는데 2015년 이전의 세금 보고는 지금 준비 중이다.

 

주변에서 도움을 청하라고 하는데, 도움을 받아서 할 일은 아니다. 내가 하루에 컴퓨터로 계산해서 조금씩이라도 준비하고 있다. 변호사나 회계사에게 의뢰하더라도 내가 분류를 다 해줘야 한다. 현재 나는 캐나다 영주권자이다. 시민권을 신청했지만, 마지막 인터뷰에서 물을 필요가 없는 것을 묻는 바람에 떨어진 적이 있다. 그 다음부터는 시민권 신청을 하지 않았다.

 

스트로크라는 게 잠을 못 자기도 하고 밥도 못 먹고 다른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스트로크는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증상이 많이 나타난다. 약을 먹으면 죽을 때까지 먹어야 한다고 해서 처음에는 받아오지 않았는데 이제는 먹고 있다. 치과를 갔는데 내가 자꾸 소리를 내서 치료를 못 한다고 해서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먹기 시작한 것이다.

 

그 치과에는 정부에서 시니어 무료치료 시행 전에 갔었는데 그때는 딱 두 가지만 무료였다. 치아를 빼는 것과 틀니 하는 것이었다. 싸는 것도 무료가 아니라고 해서 지금 하다만 상태이다. 그러니 내가 자비로 해야 하는데 돈이 없다. 그래서 잇몸으로 음식을 먹고 있다.

 

사진을 찍어서 이를 빼는 치과의사에게 보내야 하는 데 거기서는 어떤 것을 뽑아야 할지 모르게 사진을 찍었다고 해서 다시 찍으라고 했다. 다시 찍는데 $100이다. 의치하는 데 이백 몇십 불이 든다고 했다. 제도 시행 이전에 갔기 때문에 무료가 안 되는 것들은 내가 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스트로크가 오기 전 힘들게 가게는 했지만 좋은 기억들도 있었다. 돈보다도 손님 중에 나를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중심을 두고 가게를 운영했다. 돈을 내고 내 기구를 쓰지만, 혹시 그 사람 중에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는지에 초점을 두고 비즈니스를 하였다. 내가 누군가를 인도한다는 생각으로 세 사람을 구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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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6
(독자 기고) 자연과 함께 드리는 예배

 

심상익

(토론토)
[email protected]

 

코로나19로 인해 오래 동안 예배에 출석치 못했는데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으로 인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축제(천국잔치, 성령임재의 체험)인 교회(예수그리스도의 몸)의 예배에 참석하여 감동, 감격, 환희의 예배와 경배를 드릴 수 있다는 소식에 어린 시절 밤잠을 설치며 소풍을 준비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허물과 실수와 억만가지 죄로 얼룩진 70여 년의 생애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용서받은 자 되어 창조 하나님의 아들로 예배 드릴 수 있음이 인생 최대 최고의 행복자, 승리자, 축복받은 자로 남은 여생을 담대히 힘차고 씩씩하게 보낼 수 있다는 자긍심 자부심도 예수 안에서 가져본다.

 

하늘아! 노래할지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찬양할지어다. 산들아 숲과 그 가운데의 모든 나무들아 소리 내어 찬양할지어다. 하나님께서 야곱(용서 받아야만 할 자)을 구속 구원하셨으니 이스라엘(하나님의 사자와 한판 씨름하여 승리한 자) 중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 임이로다(사 44:23).

 

숲으로 우거진 돈 밸리(Don Valley) 골프장 높은 산 언덕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 예배 처소를 마련하고 일주일 5회 정도 이른 아침 Happy(우리 집 강아지 이름)를 옆에 두고 대자연과 함께 신령과 진정으로 감동 감격의 예배를…

 

예배의 시작을 알리는 합창단의 연주와 찬양은 “나뭇잎이 바람소리에 놀라는 파랑개비의 소리, 가지와 가지가 삐걱대는 소리, 각종 새들의 소리, 오래 묵은 낙엽 바스락 소리, 낙엽 위로 빠르게 움직이는 다람쥐 소리, 가끔 멍멍대는 강아지 해피의 소리로…”

 

창조자의 사랑과 은혜의 입김(성령)과 새벽에 뿜어내는 깨끗한 산소 공기의 호흡(말씀)을 심장 속 깊은 곳까지 들어 마시는 상쾌함으로 만국의 공통어 할렐루야! 아멘! 임마누엘! 목청이 터지도록 외칠 때 “아들아! 고맙다. 감사하다” 하시는 세미한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이 내 심령을 울리며 스며드는 느낌을 체험해 본다.

 

 카세트 테이프로 목사님의 기도와 설교와 축도로 예배를 마치고 내게 주실 오늘의 말씀을 기다려 본다. 떠오르는 태양빛으로 인해 풍성한 나뭇잎 사이에 메말라 죽어버린 가지들을 보면서 갚은 나무 뿌리에서 올라오는 영양수를 어찌 너는 공급받지 못해 잎을 내지 못했니? 전생에 무슨 잘못이라도 있어 저주받은 것은 아닌지? 온갖 잡탕 생각에 갑자기 십자가 모형의 말라 비틀어진 나뭇가지가 눈에 보였다.

 

골고다의 십자가!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여신 예수 그리스도.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 마땅한 자. 나 같은 죄인의 생명을 영원케 하시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은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우주적 은혜, 긍휼, 사랑이 축복된 선물이요 은혜 중에 은혜로다.

 

그러므로 나의 생명은 천하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하고 귀중할 뿐만 아니라 아직도 영원한 생명을 포기하고 소유치 못한 이웃들과 나를 만나는 사람들의 생명도 귀중히 여기며 그들도 하루속히 생명의 주인이요 실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도받을 수 있도록 생명을 증거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리라 다짐하여 본다.

 

예배를 마치고 자주 묵상의 시간을… 내 살아가는 날 동안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감동을 가슴 뭉클한 감격을… 내 살아가는 날 동안 얼싸안고 슬픔과 아픔을 나누는 섬김을… 내 살아가는 날 동안 세상과 자연을 아름답게 하는 기쁨을… 내 살아가는 날 동안 행복했노라 고백이 너와 나의 만남에서… 내 살아가는 날 동안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천국을 맛보는 남은 생애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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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2
성인장애인공동체 기획 시리즈 - 대한 남아의 자존심

 

진근섭(회원)

 

 “이역 땅 머나먼 길 떠나오던 그 날에 희망도 부풀었다 그립던 그 임아. 하소연할 길 없어 눈물짓던 그 임아 눈물도 많았다.”

 

 곡괭이란 쥐어 본 일도 없었던 나는 서독 광부 지원단에 섞여 이역만리 소위 광부 일을 자처했던 그 시절! 외롭고 힘들 때 자주 불렀던 이 노래를 지금도 가끔 흥얼거린다.

 

 서독에서의 생활 그럭저럭 3년이란 세월이 지나고 있었던 어느 날 통역관 시험 공고에 눈이 번쩍 뜨였다. 운 좋게도 시험에 합격 통역관으로 발탁되었다. 이로 인해 보통은 3년 계약 광부 일이었으나 나는 3년 더 연장하고 현지에 머물게 되었다

 

 그 시절 계약 기간이 끝난 후 나는 한국으로 가는 것보다 캐나다행을 선택했다. 그러나 캐나다 비자 받기가 만만치 않은 상황에 봉착하자 여권을 위조하여 캐나다 입국에 성공했다.

 

 때는 9월 말,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막막한 처지였을 때 어느 분의 조언으로 에드먼턴으로 갔다. 옐로우나이프 광산을 찾아간 것이다. 1개월 후 광산에서 일할 것을 전제로 워킹 퍼밋이 나왔다.

 

 2년 후 캐나다 이민 비자를 받곤 곧 토론토로 돌아왔다. 한국에 남겨놓고 온 아내와 두 남매를 초청해 아파트도 구했고 편의점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중매로 결혼했던 나는 도저히 아내와 맞지 않아 결국 이혼하게 되었다. 스트레스와 아내와의 불화, 이 모든 것이 원인이 되었던가, 내 나이 57세에 쓰러지고 말았다.

 

 홀로 남아 딸의 도움을 받으며 반신 장애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리도 건장했던 대한 남아의 기상은 어디로 갔나? 내 건강 내가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인데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은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자꾸만 의사의 소홀로 쓰러진 것 같아 의사에게 책임을 돌렸다. 불행은 또 겹쳐 아들까지 잃고 말았다.

 

 1990년대 말경 성인장애인공동체라는 존재를 알게 되었다. 한울연합교회 내에 장애인 모임이 있다 하여 공동체 프로그램에 참석하며 교회도 출석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곤 했다.

 

 그래도 갈 곳이 있다는 것, 나를 반겨주는 사람들이 있는 공동체와 교회는 나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60대를 사는 나에게 재혼의 기회가 왔다. 토론토에서 지금의 내 아내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여행자 신분으로 온 그녀와 결혼을 약속했고 우리 둘은 갓난아기를 입양키로 뜻을 모았다. 몇년 간의 수속 절차를 거쳐 한 가족으로 살아온 지 어느덧 10여 년이 훨씬 넘었다.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며 사는 아내와 내 아들 승준이가 준수한 청년으로 잘 자라주어 고맙기 그지없다.  2019년도 여름 캠프에 봉사자로 참석했던 내 아들의 모습은 자랑스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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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2
(장애인공동체 기획시리즈) 공동체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이성민(이사/회원)

 

 올해로 스물 두 돌이 된 성인장애인공동체의 출발은 한 만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한인회 행사로 기억되는 한 세미나가 끝난 뒤 민혜기님, 임청신님, 그리고 나 세 사람이 자리를 함께 했다. 초기에는 모임에 특별한 목적을 둔 것이 아니었다. 사교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한 달에 한 번 정도 정기적으로 만나서 담소도 나누고 식사도 함께하면서 친교를 이어갔다.

 

 시간이 지나는 동안 이민사회를 잘 아시는 민혜기 사모님이 집에만 계시는 분들을 한 분 한 분 모임에 초대하셨다.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다 보니 모임 장소가 문제였다. 식당에서 만나는 것도 힘들어져 나중에는 교회를 빌려서 모임을 하게 된 것이 오늘날 성인 장애인 공동체의 실마리가 되었다.

 

 사람들이 모이자 과연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몰랐다.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동체는 점차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변모한 것이다. 내 생각으로 이런 모양새를 갖춘 것은 10년 안팎이다. 초창기에 모이셨던 분 중에 지금까지 나오시는 분들이 몇 분 계신다.

 

 당시 구성원 중에는 이미 세상을 떠나신 분도 있다. 나도 이민자로서 내 삶을 살아내야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깊이 관여하기는 힘들었다. 이런저런 일로 모임에 한동안 참석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공동체가 존폐위기까지 내몰렸을 때, 몇몇 분들이 ‘공동체가 이대로 주저앉게 할 수는 없다’ 해서 나도 다시 모임에 나오게 되었다. 이후 공동체는 제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나는 요즈음도 공동체에 자주 참석하진 못한다. 공동체의 정기모임이 있는 금요일에는 거의 참석을 못하고 있다. 여름캠프의 경우는 휴가를 내서 참석한다. 주변의 말씀을 들어보면 요즘 공동체에는 좋은 분들이 많이 오셔서 잘 이끌어 주신다고 한다. 과거에 비하면 공동체가 상당한 궤도에 올라있다고 할 수 있다. 일하시는 분들이 상당히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그리고 비전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다. 다만 한인끼리는 잘하고 있는데 캐나다 전체 사회 내에서의 역할은 잘 몰라서 못하는 것들이 있다. 해당 분야에 전문역량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데 아직 한인사회에는 그런 분들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이제 공동체는 더 전문적 지식을 갖추거나 훈련을 받은 분들의 도움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또한 몇 가지 생각해볼 문제들이 있다. 우선 장애인에 대해 한국사람들과 캐나다인이 가진 인식의 차이이다. 캐나다인들은 우리의 성인장애인공동체와 같은 그룹을 잘 만들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장애인을 일반사회 안에서 그냥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자 노력한다.

 

 한국은 다르다. 예전부터 장애인들을 따로 모아서 살아가도록 했다. 우리는 또한 이민자의 특수성도 가지고 있다. 아직 우리는 완벽한 캐나다인이 아니다. 장애인도 마찬가지다. 이런 이유로 이민사회 내에서의 또 다른 하위그룹으로서 장애인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캐나다 장애인 정책과 연결고리가 많지 않았다. 현재는 그런 고리를 찾는 작업을 열심히 하고 있다.

 

 그리고 공동체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도 하고 있다. 장애인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성인장애인공동체에서 장애인의 범위를 어디까지 잡아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다. 어떤 부분들은 한인노인회가 담당해주면 좋을 것들이 있다. 아직은 우리가 정말 어디에 포커스를 맞춰야 할 것인지 계속 논의 중이다.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기에 ‘장애인은 곁에서 도와주고 서포트만 좀 해주면 된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장애인들의 시각은 다르다. 나는 일하고 싶은 젊은 장애인들이 성인장애인공동체를 통해 자립의 길로 나가기를 바라고 있다. 사고를 당했든 질병이든 장애를 입은 사람 중에는 자신의 생활을 해나가기 위해서 꼭 직업이 필요하다.

 

 한 살 때 소아마비를 겪은 내가 이민 와서 처음 캐나다인 사회에서 일할 곳을 찾을 때 소셜워커나 도움을 주던 사람들이 내게 던졌던 첫 번째 질문이 있다. “당신의 커뮤니티 안에서 일할 곳을 찾아보았는가?”라는 것이다. 내가 한인커뮤니티에 접근했을 때 가장 빨리 직업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한인커뮤니티 안에는 장애인들이 직업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정말로 없다. 내가 소망하는 것은 우리 공동체와 한인사회 안에 볼륨이 큰 업체들이 함께 고민해서 특정 분야에 특정 유형의 장애인들을 고용하는 것이다. 공동체 안에 있는 젊은 장애인들이 가장 먼저 손꼽는 서비스가 바로 이것이다.

 

 특히 젊은 나이에 중도장애를 입는 경우 그 삶은 거의 절망 수준이다. 여기서 살다가 교통사고를 당하든 스트로크를 겪든 갑자기 찾아온 장애로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공동체와 한인커뮤니티가 서로 협력하여 장애인 고용이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 간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될 것이다.

 

 누구라도 중도에 장애를 입게 되면 그로 인해 그 사람은 실직하게 된다. 일정기간 재활 끝에 재취업을 하려고 해도 넘기 힘든 장벽이 버티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 장벽을 한인사회가 한 칸은 넘겨줄 수 있다면 좋겠다. 가령 내가 현재 어떤 일을 하는 상황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는 쉽다. 그러나 처음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항상 처음이 어렵다.

 

 만약 어떤 장애인이 한인커뮤니티 내 기업에서 일하고 있다가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 가정해보자. 그쪽에서는 ‘당신은 장애가 있는데 이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나 지금 이런 곳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면 된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쉬워진다. 그러나 ‘할 수 있느냐?’고 묻는데 ‘나 아직 안 해봤어.’ 하면 ‘어 그래? 그럼, 나도 잘 모르겠다’라고 나오게 된다. 그래서 한인커뮤니티가 그런 관문을 통과시켜줄 수 있는 역할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만약 이런 일이 가능하다면 자기를 내려놓고 공동체에 나올 장애인들이 많이 있다.

 

 사람들은 보통 장애를 입으면 세상 밖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분들의 현실적인 문제는 자립이다. 한국어를 할 줄 아는 한국사람들이 한인사회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정말 감사한 일일 것이다. 물론 지금도 성인 장애인 공동체는 한인사회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한인커뮤니티와 장애인 공동체가 협력하여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커뮤니티는 서로 성장해 갈 것이다. 이것이 내가 바라는 공동체의 비전이다.

 

(본 원고는 구술생애사 작가 김동환님께서 성인장애인공동체 이성민 회원과의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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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5
좋은 기억, 고달픈 기억

장애인공동체 기획시리즈

이대식(회원)

 

 나는 198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있었을 때부터 부모님은 교회에 다니셨고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나는 모태 신앙인인 셈이다. 어머니가 나를 낳으실 때 뱃속에서 머리부터 나와야 하는데 다리부터 먼저 나왔다고 한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태어날 때부터 소아마비가 약간 있었다. 조금 자라서는 뇌성마비 증상도 나타났다. 그 당시에는 걷지도 못하고 제대로 앉지도 못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하고 어머니와 바닷가에 간 기억이 난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비디오카메라로 내가 걷는 것을 촬영하셨다. 내가 걸을 때는 두 까치발로 걸어서 넘어지고 또 넘어졌다. 그 후 아버지는 내 뒤꿈치에 아킬레스건 수술을 하면 두 까치발을 뜬 것이 땅에 닿을 거라고 하셨고, 2년이 지난 후 3살이 되었을 때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두 뒤꿈치의 아킬레스건 수술을 했다. 이런 일로 초등학교는 1년 늦은 9살이 되어서야 다닐 수 있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니 다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애들에게 놀림과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했다. 힘이 있었다면 놀리는 얘들을 때려주고 싶었다. 심지어 누군가 갑자기 뒤에서 밀어서 앞으로 넘어지면서 이가 전부 다 부러진 적도 있다. 공부는 열심히 한 편이었다. 언어장애가 있어서 복지관에서 언어치료도 받았고 말은 지금과 같이 더듬거렸다. 초등학교 시절은 좋은 여자 짝꿍을 만난 5학년 때를 빼고 항상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해 고달팠다. 5학년 때 만난 짝꿍은 다른 애들과 달랐다. 그 짝꿍은 ‘대식이를 더 괴롭히면 안 된다’라고 주장하였다. 그 일 이후로 짝꿍 덕분에 5학년 시절은 고마운 일도 많았고, 왕따를 더 당하지 않았다. 짝꿍하고 서로 장난도 많이 치고 즐겁게 지내곤 했다.


 백팀하고 청팀하고 나눠서 하는 운동회가 다가왔다. 짝꿍은 내 옆에 앉아 있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달리기, 이어달리기, 공굴리기 등등을 하며 즐겁게 지냈다. 그 짝꿍이랑 6학년까지 같이 가고 싶었었는데 그게 안 되었다. 6학년이 되니 전쟁 같은 왕따는 또다시 시작되었다. 고달픈 시간이었다. 너무 힘들어서 학교에 가기 싫었다. 그러나 이런 인생은 또다시 안 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2001년 초등학교 졸업을 하고서야 왕따는 끝이 났다. 생각해보니 초등학교 5년 동안 내 인생은 너무도 고달팠었다. 이어서 서울 중랑구 중화동에 있는 장안중학교에 입학하였다, 특수학교에 다니지 않고 일반 학교 안에 있는 특수반에 다녔다. 이때는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고, 장애인 반 선생님도 좋은 분이었다. 공부도 잘 따라갔던 편이다. 친구들, 선생님과 좋은 시간을 많이 가졌다. 쉬는 시간에 물장난도 많이 하고 선생님과도 장난을 쳤다. 길지는 않았지만 꿈같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는 중학생이 되어 짧은 1학년 한 학기를 마치고 친구들과 선생님께 작별 인사를 하게 되었다. 가족이 캐나다에 이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들과 선생님을 뒤로 하고 드디어 캐나다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7월 9일에 토론토 피어슨 공항에 도착하였다. 나는 캐나다에 도착한 것이 즐거웠고 꿈만 같았다. 그동안 캐나다에 오기 위해서 한국에서 영어 과외도 받았었다. 우리 가족은 옥빌이란 도시에 정착했다. 형은 2000년도에 먼저 와 있었다. 부모님은 투자이민으로 오셔서 컨비니언스 가게를 하셨다. 나는 미시사가에 있는 학교에 들어갔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ESL반에 들어갔는데 한국 학생들도 많았다, ESL 과정을 마치고 프라이빗 스쿨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많은 것을 배웠다. 선생님, 친구들과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 학교를 마치고 미시사가에 있는 카톨릭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학생 수가 2,000명이 넘는 학교였다. 처음에는 일반학급에 있었고 나중에 PIPS(Personal Investigation Processing System) 클래스에 다녔다. 그 교실에는 장애가 있는 애들도 있었다. 학교생활에 익숙해지자 친구들도 많이 사귀게 되었고 나는 인기가 무척 많았다. 젤러스에 가서 코업일도 하고 흥미로운 시간을 보냈다. 이때 나는 필리핀 출신 여자 친구가 있었다. 서로 같이 000도 가고, 즐겁게 지냈지만, 고등학교 때만 사귀었다.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어느덧 2008년이 되어 고등학교를 마치기 전 한국에 다시 가게 되었다. 부모님은 내가 좀 더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하셨다. 한국에서는 2008년부터 2011년까지 머물렀다. 나는 경기도 광주 지원리에 있는 삼육재활원이라는 장애인 기술고등학교에 다녔다. 토요일에는 그 학교에 있는 교회에 다녔다. 예배가 끝나면 서울로 가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할아버지가 서예로 한문 쓰시는 것도 보았다. 교회에서는 유초등부 교사 및 파워포인트 일을 맡게 되었다. 교회에 나오는 아이들과 재미있는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고 내가 맡은 파워포인트 일도 열심히 하였다. 또래 친구도 사귀었다.


 2010년 눈이 많이 내리던 어느날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친척들과 부모님 모두 할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얼마 전까지도 곁에 계셨던 할아버지이셨는데, 이제는 영영 작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나오고 너무도 슬펐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기만 하다. 나는 삼육재활원에 2학년으로 들어가서 3학년에 졸업했다.


 그후 학교 안에 있는 작업소에 들어갔다. 거기서 납땜질을 4~5개월 동안 배웠다. 납땜질하기 위해서 이력서도 냈고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급여가 30만 원으로 너무 적어 그만두었다. 다음에는 기술학교에 가서 Auto CAD(자동전산설계)를 2달 정도 배웠는데 재미있었다. 그런데 나한테 지급된 재료비를 자꾸 잃어버려 선생님이 그만두라고 해서 아쉽게도 그만두게 되었다.


 그해 12월 크리스마스 전날이었다. 나는 할머니, 삼촌, 친척들에게 작별 인사하고 어머니와 함께 비행기 타고 캐나다로 다시 왔다. 영주권만 받은 상태에서 한국에서 3년을 지내는 동안 영주권 유효기간이 만료되어 버렸다. 형이 이민국에 설명을 잘해서 2012년도에 무사히 영주권은 연장되었다. 다시 캐나다로 돌아온 나는 성인들이 다니는 링크 스쿨에 들어가서 영어도 배우고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을 꾸준히 배우기 시작했다. 이 학교는 7개월 정도 다녔다. 장애인에게 P training이라고 15세부터 30세까지 참여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성인장애인공동체에는 백민준 형을 통해 나가기 시작했다. 공동체에 와보니 매주 아침체조도 하고 맛있는 점심도 먹고 소그룹 활동도 했다. 많은 것을 배워서 좋았다. 매주 목요일마다 파크골프도 참가하고 있다. 파크골프는 연습을 거듭할수록 더 잘 치게 되어 흥미롭다. 나는 그날이 항상 기다려진다. 그런데 요즘 나는 서른 살이 넘어서도 돈이 없으니까 너무 힘들다. ODSP 잔액도 형이 다 관리하고 나에게 용돈은 매달 200불만 주니까 너무 모자란다. 만약 내가 일을 한다면 컴퓨터로 하는 일과 같이 앉아서 하는 일을 하고 싶다.

 

 생각해보니 작년에는 내 주변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실제 본 것은 아니지만 Yonge & Finch에서 Yonge & Sheppard까지 와이드 밴으로 여자들만 공격한 사건이 있었다. 여자들이 싫어서 여자들만 공격한 거라고 했다. 거기서 내가 다니던 A교회 장로님 손녀딸도 변을 당했다. 한국 사람이 하는 포장마차에서 일하던 중 사고를 당한 것이다. 내 핸드폰에 그녀의 사진이 지금도 남아있다. 나이가 95년생인데 짧은 생을 살다 간 것이다. 나는 끔찍한 이런 사건이 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내 친구 또래가 아파트 9층에서 뛰어내려 죽었다. 나는 그 친구의 장례식장에 갔고 화장터에도 갔다. 그 친구와 나는 캐나다데이 때마다 기념식도 같이 갔고, 친구는 나에게 돈가스도 사주었다. 내 친구가 세상을 떠나서 마음이 너무 아프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2명이나 작년에 죽었다. 안타깝고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사건이다.

 

 2019년 2월 9일에 나는 캐나다 시민권 시험을 치렀다. 결과는 합격이다. 3월 22일에는 미시사가에서 선서를 하고 시민권 증서를 받았다. 이것은 나에게 큰 사건이었다. 형이 아니었으면 시민권은 못받았을 것이다. 형이 “시민권 시험 떨어지면 한국에 가야 한다”고 했다. 또 떨어지면 몇 달 걸리기 때문에 영주권 유효기간도 1달도 안 남는다고 그랬다. 결과적으로 형의 충고와 조언이 나를 긴장시켰고 열심히 준비했다. 나는 시험을 준비하면서 ‘꼭 합격해서 캐나다에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어진 30분간 열심히 풀어서 75%를 획득했다. 캐나다 시민 수료증을 받고 정식으로 캐나다인이 된 지금 나는 너무도 행복하다.


(*이 원고는 구술생애사 작가 김동환님께서 성인장애인공동체 이대식 회원과의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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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5
괘종시계 (에세이21 당선작)

이현숙

(미시사가 문인)     

[email protected]

 

 어린 시절, 내가 태어난 시골집 대청마루에 커다란 괘종시계가 걸려 있었다. 아버지는 이 삼 일에 한 번씩 문을 열고 밥을 주셨다. 시계 판 구멍에 열쇠를 꽂고 돌리면 '뚜르 -룩, 뚜룩'하는  소리가 났다.

 

 시계에 밥 주는 일은 아버지가 하시는 유일한 집안일이었다. 늘 옥색 두루마기를 바람에 날리며 시내(市內) 출입을 자주 하셨다. 오빠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아버지는 시내로 살림을 나가게 되었다. 오빠를 좋은 중학교에 보내기 위한 준비가 겉으로 드러난 이유였다. 이사 준비로 부산한 엄마와 달리, 시골집에 혼자 남은 할머니가 외롭다며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나를 잡으셨다.

 

 시골, 그 너른 집에 할머니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한낮의 햇살이 지루할 때면 마루에 누워 시계추 소리를 세고 있다가 잠이 들기도 하였다. 천천히 가는 시계를 보며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희한하게도 그럴 때마다 동구 밖 언덕에는 두루마기가 잘 어울리는 훤칠한 키의 아버지가 걸어오고 계셨다. 옷도 벗지 않고 마루로 성큼 올라서서 시계에 밥을 주고는 하룻밤도 채 주무시지 않고 시내로 나가셨다. 눈물을 짜는 내게 할머니는 '초등학교 들어가면 데려갈 거다' 하고 달래셨다. 다시 시계가 느려지면 내 어린 시간도 기다림으로 멈춰지고는 하였다.

 

 오빠가 서울의 명문 중학교에 합격이 되었다며 시내에 살던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한다고 했다. 엄마의 상기된 표정과 달리 할머니는 긴 담뱃대만 물고 계셨다. 서울은 거리만 먼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두려움의 도시였다. 6.25 때 할아버지를 잃고 홀로 사신 할머니에게는 장손이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간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섭섭함을 담배 재를 놋 재떨이에 터시는 것으로 대신하셨다.

 

 다시 시계가 멈추었다. 할머니는 재봉틀 의자를 시계 밑으로 옮기고 나에게 단단히 잡으라 하셨다. 시계 문을 열고 태엽을 감으셨다. 아버지처럼 빠르고 힘차진 않아도 천천히 그렇게 말이다. 그리고 의자에서 내려올 때마다 알지 못하는 짧은 한숨을 내쉬면서 마루에 앉아 담배 대를 잡으셨다. 아버지를 기다린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아들 하나에 내리 딸 다섯을 둔 할머니도 아버지를 기다리고 계셨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어느 날, 아버지의 손을 잡고 기차를 탔다. 서울은 할머니의 말대로 두려움의 도시였다. 진한 시골 사투리의 내 말투는 늘 아이들의 웃음거리가 되었고, 이름만 겨우 배우고 들어간 초등학교 수업은 나를 주눅들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가나다라'를 배우기보다 급한 것은 서울말을 쓰는 것이었다.

 

 서울에 산다는 것은 많은 것을 감수해야 했다. 학교에 갔다 오면 돌잡이 여동생을 업어주는 일도 빠질 수 없는 나의 일과가 되었다. 또래들이 하는 고무줄놀이에 끼고 싶어 등에 있는 동생을 시멘트 쓰레기통 위에 올려놓았다가 떨어트린 일도 있었다. 자지러지게 우는 동생의 콧잔등에 옅은 선혈이 보였다. 그런 날은 종일토록 보채는 동생을 업고 다친 변명거리를 만들며 장에 간 엄마를 기다렸다.

 

 늦여름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뜨개질하던 엄마가 동생에게 아버지가 어디쯤 오는지 머리를 긁어보라고 하셨다. 오빠에게 아버지 마중을 나가라고 했다. 통금 사이렌이 불자, 오빠 혼자 돌아왔다. 엄마는 밤을 꼬박 새워 뜨개질을 하셨다. 다음 날 아침, 무거운 분위기에서 도망치듯 학교에 갔다. 장마가 시작되는지 밤마다 비가 내렸다. 오빠는 며칠째 우산을 들고 나가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러나 늘 혼자 돌아왔다.

 

 아버지의 부재(不在)로 터전을 잃은 남은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오빠는 입주 가정교사로, 나는 청주에 있는 고모네 집에, 어린 동생은 시골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사촌 언니 집에서 장사를 배운 엄마가 북선동 산꼭대기에 방 한칸을 장만했다. 꼭 일년 만에 가족이 다시 모였다. 동생이 문제였다. 너무 어려 엄마가 장사를 나가면 돌볼 수가 없기에, 당분간 시골 할머니 댁에 그대로 두기로 하였다

 

 초등학교 졸업반 무렵, 엄마가 시골집에 가서 동생을 데리고 오라 하셨다. 그곳에 가면 아버지가 계실 것 같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차를 탔다. 마당에 들어서니, 과자 그릇을 든 동생이 대청마루에 앉아 있었다. 눈물이 날만큼 반가운 나와 달리 말갛게 쳐다보다가, 서울에서 온 언니라는 말에 그제야 다가왔다.

 

 괘종시계는 긴 추를 늘어뜨리고 누런 파리똥이 달라붙어 있었다. 할머니는 시계 밥 주는 일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한동안은 위험을 무릅쓰고 의자에 올라가 태엽을 감으면서, 아들을 기다리셨을 것이다. 이제 그도 지치고 부질없다고 생각하셨을까? 고물 장수가 온다고 했다. 오래된 물건들을 정리하신다고, 그 괘종시계도 주신다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쓰러져가는 시골집을 허물고 현대식으로 다시 지었다. 대청마루는 없어졌지만, 그 자리에 크지 않은 거실이 만들어졌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엄마는 괘종시계가 걸렸던 곳에 예전 것과 모양이 비슷한 시계를 걸어 놓으셨다. 밥을 주지 않아도 되는 전자시계다.

 지금도 고향 집에 가면, 구십이 넘은 아버지의 두루마기 자락이 보일 것 같다.

 

<당선 소감>

 덜 가지신 분 들에게 위로가 되는 글을

 잠시 머물다 돌아간다고 짐을 싼 것이 벌써 20년이 다 되어 갑니다. 이민의 삶은 그리 녹록지 않습니다. 일을 하다가 가끔 하늘을 봅니다. 그리고 ‘글을 써야지’ 하는 다짐을 하곤 합니다.

 

 바이러스로 병원, 은행, 백화점 그리고 교회까지 문을 닫았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문을 닫고 있을 때 완료추천의 소식을 받았습니다. 두렵고 어수선한 상황 가운데 굵고 환한 빛 기둥이 가슴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혼자만의 기쁨에 젖어 있어 많이 미안했습니다. 덜 가지신 분들에게 위로가 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미흡한 글 밀어주신 <에세이21>의 예당 선생님과 모든 선생님들께 정중하게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한 발자국 멀리서 지켜보고 격려해 주신 선배님,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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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5
6.25사변 70주년을 맞으면서

조영연 (한카노인회 전 회장)

 

6. 25 사변이란?

6.25사변은 우리나라 역사상 영원히 잊지 못할 큰 사건이다. 때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하여 북한 김일성 일당은 평화롭던 대한민국을 하루 아침에 삼켜버리려고 242대의 전차를 앞세워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2일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1950 6 25일부터 서울 함락 28일까지

필자는 당시 서울운동장 건너편에 위치한 덕수 중학교 5학년 (현재 고등학교 2학년)학생으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7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70년이 흐른 지금도 그때의 기억은 생생하다. 그래서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글을 쓰게 되었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6.25에 대하여 잘 모르기 때문에 6.25가 남침이다 북침이다 하고 각자 의견들을 말하고 있으나, 필자가 겪은 내용을 읽어보면 6.25에 대한 내용을 확실히 이해하리라고 믿는다.

 

1950년 6월 25일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고, 어떤 사람들은 집에서 쉬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당시 성동구 신당동에 위치한 성동고등학교 이웃에 거주하고 있었다.

 

볼일이 있어 오전 10시경 을지로 6가 근처를 지나가는데 군용차량들이 “국군 장병들은 빨리 원대 복귀하라”는 방송을 하면서 지나간다. 서울 시민들은 무슨 영문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나 역시 무슨 일인가 하고 의아할 뿐이다. 전쟁이 났다는 것은 전혀 상상도 못하였었다.

 

6월 26일은 월요일이다.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이 설명을 한다. 북한의 김일성 일당이 전쟁을 일으켰는데 국군이 곳 모두 퇴각시키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그날은 그런대로 단축수업을 하였다.

 

6월 27일 화요일에 학교에 갔더니 곧 UN군이 참여하여 적군을 퇴각시키니 안심을 하라고 전한다. 그러나 그날은 수업을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야말로 큰일이 난 것이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을지로 6가에 Medical Center Hospital이 있다. 그 병원 옆을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병원 담으로 안을 들여다 본다. 당시 병원 울타리는 나무 판으로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인가 호기심이 생겨서 나도 병원 안을 들여다 보았더니 병원 주차장에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그러면서 군용차량들이 계속 병원에 왔다 갔다 한다. 군용차량들은 군인 부상자들과 사상자들을 병원으로 싫어 나르는 차량들이다. 지금 생각하여도 끔찍한 장면이다.

 

6월 27일에 북괴군을 물리친다고 하더니 오후가 되니까 피난민들이 북쪽에서 밀려오기 시작한다. 우이동과 미아리고개를 넘어오고 있다. 당시는 피난민들이 우마차를 끌고 우마차 위에 짐을 싫고 아기들은 우마차를 타고 오기 시작한다. 서울시내에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안심하고 있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별일이야 없겠지 생각하고 있었다.

 

저녁이 되니 모두가 불안하여진다. 그래서 신당동에 거주하고 있는 많은 주민들이 신당동 뒷동산(현재 대경상고 자리)에 올라가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 보았다. 그날 저녁은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모두들 비가 내리는 것에 대하여 아랑곳 하지 않았다.

 

서울 시내를 내려다 보면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나 역시 그 사람들과 함께 지냈다. 저녁 12시경이 되니까 국군 패잔병들이 우리가 있는 산마루 쪽으로 퇴각을 하면서 “미안합니다”하면서 지나간다. 여기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신당동 거주자로써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밤새껏 산 언덕에서 밤을 꼬박 새웠다.

 

6월 28일 새벽 5시경 날이 밝아온다. 날이 밝아오니 신설동쪽에서 “인민공화국 만세” 하면서 인민군들과 일부 시민들이 합세하여 외치고 있다. 상황은 끝이 났다. 산에 있던 사람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나 또한 집으로 돌아갔다. 이미 서울이 함락되어 인민군 손에 들어간 것이다.

 

1950 6 25 전의 서울 풍경

여기서 잠깐 6.25가 발발하기 전, 서울의 현황을 알아보자. 필자는 당시 중학교 학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정치에 대한 내용을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었다. 그러나 당시 많은 공산당원들이 서울 시내 곳곳에서 암약을 한 사실들은 기억한다. 왜냐하면 아침이면 곳곳에 삐라(벽보)가 붙어있다. 특히 시내 복판에 있는 건물의 기둥에는 삐라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삐라의 내용은 공산당과 김일성을 찬양하는 내용들이다. 그것을 파출소 직원이나 동사무소 직원들은 떼러 다닌다. 그런 광경을 많이 보았었다. 당시 서울뿐만 아니라 남한 내에 얼마나 많은 간첩이나 공산당원들이 활동하였는지 알 수 있다.

 

6.25사변을 일으킨 김일성 일당과 스탈린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남한 침략에 대하여 승인을 얻고자 수차 부탁을 하였으나 스탈린은 아직 때가 이르다고 승인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일성이 끈질기게 요구하여 48번 만에 승인을 하여주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스탈린은 지원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하였고, 작전계획서까지 작성하여 주었다고 한다.

 

스탈린이 여러 차례 김일성의 남침을 거절한 이유는 아직 시기가 되지 아니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중국의 공산 통일과 애치슨 라인에서 한반도가 제외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승인하여 주었다고 한다.

 

애치슨 라인이란?

애치슨 라인이란 1950년 1월 12일 당시 미국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발표한 선언이다. 이 애치슨 라인은 미국의 극동방위선이 대만의 동쪽과 일본의 오키나와 및 필리핀을 연결하는 방어선이다.

 

여기에서 눈여겨볼 것은 대한민국은 방어선에서 빠졌다는 사실이다. 이를 미국의 상원외교위원장이 1950년 1월 12일 대외에 발표를 하였다. 결과적으로 볼 때에 한반도는 당시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외시켰었다.

 

김일성은 이때를 기하여 소련의 스탈린 면회를 요청한다. 남한을 침략하기 위한 허가를 받기 위해서다. 북한 김일성 일당은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중공의 모택동과 소련의 스탈린의 지지와 협조를 얻는다. 승인을 받은 김일성 일당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하여 남침을 감행하기 위하여 38도선 이남으로 침략하였다.

 

 이에 무방비상태의 한국에서는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에서는 토의 끝에 한국에 파병하기로 결정하였다. 1950년 7월 7일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를 총 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이 조직되었다. 유엔군 사령부는 일본 도교에 본부를 두고 작전 지휘를 하였다.

 

 인민군들은 무방비 상태였던 남한의 중부지방과 호남지방을 삽시간에 침략 점령하였다. 이에 유엔 연합군은 낙동강 결전을 전개하였다. 이때에 연합군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이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을 전개하며 대대적인 반격을 감행하여 10월 10일에는 북한의 평양에 이어 압록강 부근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나 11월 중순경에 중공군이 개입하여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로 인하여 1월 4일에 또다시 서울을 빼앗겼다. 그러나 3월 15일 다시 수도 서울을 탈환하였다.

 

이 와중에 북한의 남로당은 한국 내부 전복을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로 인하여 남로당을 제압하려는 한국 정부와의 충돌로 거창 양민학살 사건과 방위군 사건 등이 발생하였다. 이후 3년간 계속된 전투로 인하여 수많은 군인들과 민간인이 사상하였으며,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파괴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1953 7 27 휴전협정 체결

6.25사변은 3년 1개월 2일만인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휴전 협정을 체결한 이후에도 군사분계선에서는 크고 작은 군사적 분쟁이 계속되어 왔다. 1950년 6.25전쟁은 국제연합군과 중국 및 소련까지 관여한 세계 2차 대전 이후 최대의 국제적인 전쟁이었다.

 

6.25사변에 참여한 UN 인민군과 사상자들

UN군 사령부 발표에 의하면 6.25사변에 참여한 한국군은 1,090,911명으로 집계되었으며, UN군은 미국 480,000명, 영국 56,000명, 캐나다 25,687명, 터키 14,936명, 오스트레일리아 8,407명, 필리핀 7,420명, 태국 6,326명, 네덜란드 5,322명, 콜롬비아 5,100명, 그리스 왕국 4,992명, 뉴질랜드 3,794명, 에티오피아 제국 3,518명, 벨기에 3,498명, 프랑스 3,421명, 남아프리카 연방 826명, 룩셈부르크 83명 등이다.

 

또한 의료부대로 스웨덴을 비롯하여 노르웨이, 이탈리아, 덴마크, 인도 등에서 3,759명이 참여하여 총 인원 1,719,579 명이 참여하였다.

이에 공산군은 인민군 800,000명, 중공군 1,350,000명, 소련군 26,000명 등 총 인원 2,150,000명이 참여하였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양측의 피해상황은 대략 다음과 같다.

한국군 전사자 149,005명, 부상자 710,783명, 실종자 132,256명이다. 또한 민간인들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민간인 사망자 37,599명, 부상자 229,625명, 실종자 303,212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총 사망자는 186,604명이며, 부상자는 940,408명이며, 실종자 435,468명으로 총계 1,562,48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또한 미국 군인 전사자 36,574 명, 부상자 103,284, 실종자 3,737명, 포로 4,439명 합계 148,034명을 비롯하여 UN 각국의 합계는 1,500,000여명이다.

 

이에 비해 인민군은 군인 전사자 294,000명, 부상자 226,000명, 실종 및 포로 120,000명이며, 민간인 사망자 406,000, 부상자 1,594,000명과 실종자 680,000명 등 총 사망자 700,000명, 부상자 1,820,000명, 실종자 800,000명으로 총 합계인원은 3,320,000명이다.

 

또한 중공군의 사상자 및 실종자와 포로를 합하면 592,000명이며, 소련군도 전사자와 부상자 815명을 합하여 1,190,000명이며, 총합계는 1,577,000명 이상이다.

 

상기와 같이 남, 북간에 막대한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특히 민간인이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당시 남북간 전체 인구의 1/5이 피해를 입었다. 개인적으로 계산하여 보면 한 가족당 1명 이상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인명피해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큰 피해를 입었다. 남한의 일반 공업시설의 40%, 북한은 전력의 74%, 연료공업의 89%, 화학공업의 70%가 피해를 입었다.

 

6.25사변이 발발 한지 7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또한 휴전협정을 체결한지 6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북한은 아직도 호시탐탐 남침만 엿보고 있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하여 청와대에 있는 모든 참모들, 각 장관들과 여당 국회의원들은 북한의 김정은이나 지도자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듯하다.

 

그들은 아무리 협정을 하고 계약을 하고, 약속을 하여도 자기들이 불리하면 하루 아침에 모든 계약을 파기한다. 그런 무리들과 체결이나 약속을 믿는 것은 오직 죽음만을 초래할 뿐이다. 위정자들이 정신을 차리지 아니하면 70대, 80대 이상의 노인들 피땀 흘려 세워놓은 대한민국이 지구상에서 사라질까 걱정이 앞선다.

 

김일성 장군과 김성주

필자는 충청도 면소재지에 위치한 작은 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를 다녔다. 1942년도 왜정시대 국민학교 3학년 때의 일이 생각난다. 당시는 왜정시대이기 때문에 교장 선생님은 당연히 일본사람이며, 선생님 중에도 일본사람이 많이 있었다.

 

필자의 담임선생님은 한국 분이었다. 이름은 생각이 안 나지만 성은 임(林-일본 발음으로 “하야시”)선생님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애국자였다. 김일성과 독립군에 대하여 가끔씩 선생님은 설명을 하여주었다. 그러면서 이 말은 절대 나가서 발설하지 말라고 신신 부탁한다. 만일에 일본 사람이 알게 되면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바로 체포한다고 한다. “네가 박사야! 잠깐 이리와”하면서.

 

문헌에 의하면 진짜 김일성은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1937년 11월 13일 일만군(日滿軍)과 교전 끝에 36세의 나이로 전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1942년도에는 이미 전사한 김일성을 모르고 담임선생은 설명하였던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제2차 대전이 끝나자 북한의 가짜 김일성은 원래 본명이 김성주로써 1912년 4월 15일생이다. 김성주는 김일성이란 이름으로 만주지역에서 항일운동도 많이 하다가 소련으로 건너가 소련군에 입대하여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시는 소련군 소령으로 북한으로 들어왔다.

 

가짜 김일성(金日成, 1912년 4월 15일 - 1994년 7월 8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최고 영도자였다. 1948년 9월 9일부터 1972년 12월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내각 수상을 지냈고, 1972년 12월 28일부터 1994년 7월 8일 사망 전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지도자를 지냈다.

 

반미 종북 분자들인 대한민국의 주사파들은 이른바 ‘백두혈통 왕국’의 시조이자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전체주의 독재자 ‘가짜 김일성’을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이라고 외치며 신주(神主)모시듯 받들어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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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8
장애인공동체 기획시리즈 - 가족의 탄생

유홍선(사무장/회원)

 

 가족이란 단어를 떠올리기만 해도 편안함, 따뜻함, 그리움, 고마움, 미안함의 온갖 감정들이 마음속 작은 파동을 일으킨다. 캐고 또 캐도 고갈되지 않을 많은 이야기. 가족 속에 내 존재 자체가 있다.

 

 나에게, 가족은 등을 내어주는 사람이다. 끄집어낼 수 있는 가장 첫 기억. 어머니의 등이었다. 어두운 겨울 밤길, 바닥에 넘어진 어머니는 아픔 때문이었는지, 어떤 서러움이 통증을 핑계 삼아 터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꺼이꺼이 울었다. 업힌 채 어머니의 그 울음 진동을 온몸으로 받아냈던 그 춥던 날이 가장 먼 기억이다.

 

 1살이 채 안 되어 소아마비로 하반신 마비가 된 이후 시골에 살며 휠체어도 없던 내게 이동 수단은 대부분이 가족의 등이었다. 학교 들어가기 직전, 비로소 부끄러움을 알아버려 거부하기 전까지 아기 포대기는 내 피부와 같았다. 먼 거리 통학을 위해 배운 어머니의 자전거가 추가되었고, 내 덩치가 커짐에 따라 등을 내어주는 사람은 아버지로, 큰형으로, 작은형으로 역할을 나누고 옮겨 갔을 뿐 긴 시간 동안 나는 가족의 등에 의존해 살아왔다.

 

 밤샘 아르바이트를 몇 달 동안 하던 작은형은 어느 날 프라이드 베타 차 키를 내 앞에 내밀었다. 큰형은 386 컴퓨터를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나는 서울로 향했다. 막내아들이 자가용 차에 휠체어와 컴퓨터를 싣고 떠날 때 어머니는 또 울었다. 그렇게 가족의 등에서 조금씩 내려왔다.

 

 2005년 개인사업과 사회생활에 지칠대로 지친 나는 토론토에 사는 친구가 지나가는 말로 ‘놀러 오라’는 그 한마디에 항공 티켓을 끊었다. 이제 겨우 토론토에 정착한 친구는 차도 없고, 운전도 못하는 처지였으나 나이아가라 폭포는 보여주고 싶어 해서 카지노 행 버스를 탔다. 문제는 버스에 오르는 일. 162cm의 가냘픈 이 여인은 동갑내기인 나를 자기 등에 업어 버스에 태웠다.

 

 다음 해인 2006년 2월 우리는 토론토에서 결혼했다. 이렇게 두번째 가족이 만들어졌다. 어머니는 “우리 막내 장가만 가면 내가 덩실덩실 춤을 추겠다”는 말을 은연중 하시곤 했다. 하지만 외로워 죽을 것 같던 사춘기와 상처받기 두려워 철벽을 둘렀던 청년기를 지난 나는 결혼은 내 인생 계획에 없다고 단언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내 휘어지고 뒤틀린 몸을 보여줄 수 없고 받아줄 사람도 없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는 것은 그 아이에게 못할 짓이라는 치기어린 확신까지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인생이란… 내 모자람을 알고 있음에도 마음을 열어준 아내와의 사랑에서 시작하여 역시 계획에 없었지만 하늘이 허락하여 준 딸 아이까지, 결국 작은 가족이 만들어졌다. 이제는 전적으로 삶의 이유가 되는.

 

 그리고 또 하나의 가족. 2013년에 본격적으로 만난 성인장애인공동체. 머리로 시작하여 가슴으로 가족이 되었다. 한인사회에 장애인을 위한 단체는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처음 존재를 알았을 때 다행이다 싶었다. 기회가 된다면 도와주고도 싶었다. 그렇다고 함께할 생각은 없었다. 내 처지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마주한다는 것이 그리 반가운 일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16주년 행사에서 한 순서를 맡아 노래해 달라고 요청왔을 때 나름 적당한 거리에서의 도움이 될 듯하여 수락했다.

 

 그렇게 준비하던 어느 날 공동체의 위기 운운하며 한인 언론에 크게 보도되더니 창립 주년 행사가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존폐를 놓고 고민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무슨 호기였을까? 엉겁결에 참석한 비상대책 비슷한 회의에서 창립 초기의 마음으로 다시 해보자는 의견을 냈고 그 말에 대한 책임으로 이듬해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역할을 맡았고 이후 4년간 회장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초기에만 해도 단체의 필요성과 역할 등 기능적 관점으로 접근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회원들의 아픔과 기쁨, 눈물과 환희, 절망과 재활의 희망 등을 입체적으로 경험하고 나누는 사이 이들과 점점 또 하나의 가족이 되어 갔다. 왜 아니겠는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좋은 계절엔 두세 번도 본다. 굳이 긴 얘기를 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같은 아픔을 겪은 사이다. 잘난 척할 것도 숨길 것도 굳이 없다. 비록 피와 호르몬은 섞여 있지 않아도 우정과 사랑과 위로와 연민이 씨줄 날줄이 되어 엮인 새로운 가족이 탄생한 것이다.

 

 처음 책임을 맡고 공동체 일원이 되었을 때 다짐한 것이 있다. ‘길지 않은 인생, 단 한 사람에게라도 유의미한 말과 미소와 행동으로 선하고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면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하자. 내 등을 조금 내주자.’였다. 그렇게 시작했던 공동체와의 만남. 이제는 안다. 하나의 가족이 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등을 내어주고 있다는 것을.

 

 Hollies의 ‘He ain’t heavy, he’s my brother’의 노랫말이 좋아 자주 듣는다. “But I’m strong, strong enough to carry him, he ain’t heavy – he’s my brother” 그 사람을 업고 있어도 무겁지 않은 것은 그가 나의 형제이고 나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족의 일원으로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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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1
<성인장애인공동체 기획 연재> 신 케빈 '생사의 갈림길에서'

 

(본보는 금주부터 성인장애인공동체 회원과 가족, 봉사자들의 수기작품을 연재합니다. 이 글들은 공동체 창립 23주년 수필집 <동행> 책에 소개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격려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신 케빈

 

 20대가 흔히 하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인해 벌써 6년이란 시간이 흐른 지금. 이제는 익숙해질만도 하건만, 아직도 나에게 적용되는 말인지 가끔 혼란이 올 때가 있는 말입니다. 전 올해로 27살. 많다면 많다고도 할 수 있고 누군가의 눈에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 같이 보일 수도 있는 나이입니다. 하지만 저와 비슷한 나이에 뇌출혈이라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본 또래는 많지 않습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요.

 

 전 평범한 한국 토박이였습니다. 92년 서울의 한 병원에서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가정의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1남 1녀 중 장남이고, 겉으로 보기에도 지극히 평범한 가정의 장남입니다.

 

 인생의 전환점은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13살의 아이는 부모님이 더 나은 장래를 바라는 마음에 이민길에 오르게 됩니다. 당시엔 좀 통통한 편이었고 내성적이기도 했지만 나름으로 열심히 노력한 덕에 큰 어려움 없이 적응하던 시기였습니다.

 

 사실 장애의 전조는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가지고 태어난 질환은 뇌동정맥 기형이라는 혈관성 병으로, 태아 상태에서 뇌혈관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서 뇌혈관의 일부가 뭉쳐진 채로 태어나는, 많은 사람이 희귀병인 줄 알고 놀라지만, 사실 400~500명 중 한 명꼴로 가지고 있는 병입니다. 단지 많은 수의 사람들이 출혈이 없이 살아갈 때가 많아서 잘 부각되지 않을 뿐.

 

 하지만 어릴 때부터 번쩍거리는 빛을 싫어하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이유없이 심한 두통이 제 인생 전반에 이런 큰 장애를 가져올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별거 아닌 편두통 정도로 치부했던 것이 21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여담이지만 21번째 생일 1주일 전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당시 병원에서 두번이나 수술하고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깨어나서 말을 듣지 않는 왼팔과 왼다리를 보며 ‘내가 불구가 되다니!’ 라고 속으로 절규하며 정말 최악의 생일선물이라고 속으로 피눈물을 쏟으며 인생을 저주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나중에 들었지만, 당시 출혈이 너무도 심각한 편이라 조금만 늦었더라면 터져나온 피가 뇌를 뭉개버려서 죽을 뻔했다고 의사가 말해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두개골을 정수리에서부터 귀 옆까지 갈라내고 혈관을 5센치미터 이상 제거하는 대수술은 확실히 평범한 21살 대학생에겐 너무도 가혹한 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남몰래 눈물로 병원 침대보를 적시던 시간에도,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에도, 가족을 포기할 순 없었습니다. 전 한 가정의 장남이자 장손입니다. 이대로 평생 수발을 받으며 안그래도 고생하시는 부모님, 제가 고지식해서 그런진 몰라도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과 이대로 인생을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가기엔 당시 가지고 있었던 의무감과 사명감, 또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삶에 대한 갈구가 더 컸던 거 같습니다.

 

 결국 살기로 결심했고, 눈물나는 재활병원을 거치면서 아직도 한참 멀지만 어느정도 진전된 모습을 보며 시련을 이겨내고 역경을 헤쳐나가는 자신을 볼 땐 가끔 뿌듯하기도 합니다. 평생 가족과 남에게 짐덩이가 되며 살 수 없다는 자존심과, 수술하는 동안 실신할 정도로 울부짖던 어머니에 대한 마음이 절 포기하지 않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벌써 6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 이제는 상황이 그때와 비교하면 꿈도 못 꿀 정도로 나아졌음을 느낍니다. 아직도 심각한 중증장애인이지만 평생 지팡이를 짚고 살아야 한다는 의사의 소견을 뛰어넘고 아무런 보행기 없이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고, 어쩔 수 없이 휴학했던 학교도 어찌어찌 남보다 1.5배가 걸렸지만 졸업도 했고, 주위 사람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 자립하는 일도 느리지만 착실하게 쌓고 있습니다.

 

 아직 가야 할 길은 멀지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라고 위로하며 살고 있습니다. 물론 저 혼자 이뤄낸 것은 아닙니다. 아무런 내색하지 않고 헌신하며 지켜준 가족과, 중증장애인이 되었어도 끊어지지 않는 우애를 이어가는 친구들에겐 너무도 고마운 마음입니다.

 

 그중에서도 장애인공동체는 아직 장애 6년 차밖에 안된 저한테 수많은 정보와 도움의 손길을 이어준 소중한 단체라는 걸 다시한번 느낍니다. 공동체를 알지 못했더라면 저보다 오랜 기간 장애를 갖고 살아오신 분들의 팁과 조언을 모르고 살았을 뻔한 저를 돌이켜보면 공동체는 더욱 각별하게 느껴집니다.

 

 왕복 두 시간 가까운 거리도, 늘 똑같은 생활도 더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금요일이 기다려지기까지 하는 요즘입니다. 생활에 활력을 넣어주는 공동체 행사들이 기다려지고 감사해집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예전처럼 절망 속에만 빠져 있지는 않습니다. 나름 발전하려고 노력하고 앞으로 나가는 이 시기에 공동체와 같은 손길은 가뭄에 단비 같은 도움입니다. 앞으로도 이 좋은 연결을 진심으로 오래오래 이어 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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