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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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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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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302
9207
2019-06-16
저무는 것에 대하여

 
저무는 것에 대하여
 

 

 

생각은 뒤죽박죽
풀어놓은 실타래처럼 엉키고
뿌리째 뽑혀나간 달음질하는 마음의 꽁무니

 

닫혔다 열렸다
몸보다 무거운 마음 털어낼 수 없어 
그늘이 깊고 둥근 숲 
떠나려는 봄 목덜미 붙잡으려고
애쓴 몸짓 저리 아프다 

 

첨삭도 하지 않은 말들 풀어놓고 
그저 고개만 끄덕이던 시간들  
침묵보다 더 낮게 흐르는 시간 나눠 마시며
몇 살이세요?
꿀꺽 나를 먹고 사는 일 
거듭거듭 날 먹고 있으니
부채살처럼 퍼져가는 주름 웃음살들   
이제는 저물 일밖에 없다고

 


서로에게  주저주저하는 사이 
안으로 단단한 것들은 저마다
뒷모습이 헐렁하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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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229
9207
2019-06-10
비망록

 
비망록
 

 

 

개미 한마리
수박씨 머리에 이고 싱크대 위를  지나간다
물소리에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새가슴이었을 것이다

 

불끈거리는 팔뚝을 이마에 얹고
그의 발은 함부로 땅을 딛지 못한 채
쌀 씻는 저녁을 향해 길을 내고 있다

 

콩닥거리는 손바닥 안에 밥알이 뜨거워질 때 
두근거리는 심장에 배를 붙여 본 사람은
창틀 낭하를 기어 오르는 
그의 가슴팍을 걷어차지 못할 것이다
묻지 않았지만,  이 저녁  난간 위를 
겁없이 올라가야 할 연유가 그에게 있었으리

 

설거지 하던 손 멈추고
비탈에 몸 붙여 살아온 이민을 생각한다
낯선땅에 와서 누구든 한번쯤은
그런 날 있었으리라
제 몸에 부치는 수박씨를 보듬고
발밑 세상 속으로 걸어가야 했을 
그의 길이 내 몸을 지나간다

 

절뚝이며 창을 넘는 그의 행진을 
물의 가슴으로 지켜보며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여름밤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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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140
9207
2019-06-04
상처라는 거

 
상처라는 거      
 

 

 

오월의  뜨락 
비 맞은 꽃들은 다 젖는다   

 

흠뻑 젖은 채  
떨고 서 있는 보랏빛 제비꽃 

 

후드득  소낙비 한 방 얻어맞고
입술 깨문 채 고개숙인  며느리 밥풀꽃 

 

툭, 오며가며 던진 네 말 한마디
왜 이리 가슴을 후벼파는걸까

 

무덤을  목전에 두고  
남 밥그릇에 제 숟가락 집어놓고 
제 밥이라고 침 튀기며 말팔매질하는 
저 팍팍한 마음이 안쓰러워

 

젖어서 고개숙인 저 꽃들만    
춥고 아프겠는가
말매에 가시달린  넌?   

 

밥풀 달고 쓸어내리는 깊고 붉은 상처 
젖은 것들은 춥고 아파서  
손가락 발가락 오그라들고
온 몸뚱아리 뻣뻣하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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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051
9207
2019-05-24
가오리 연

 

가오리 연
 

 

 

뜬 소문을 생각했다
천리를 가는 꼬리 달린 연 
봄바람에 흔들리다 엉뚱한 소문에  휘말리는 연줄 
끝내 제풀에 걸려 날아가다 꼬리 잘리고
재갈 물린 입술 저항에 버티다 스스로 추락하고 마는

 

파릇한 보리밭둑이나 키 큰 감나무에 붙들려
등과 입술이 퍼덕거리는 가오리 꼬락서니
바람부는 방향으로 귀 열고 소문 쫓다
들판 지나는 전선줄에 매달리기라도 한다면
그 입술에 새의 배설물 짓무르겠다
제 얼굴에 튄 오물 냄새로 진동하겠다 

 

바람 불면 후욱 날아 오르다
금세 곤두박질치는 소문이라는 것이
저 연(鳶 ) 같은 것인지도 몰라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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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491
9207
2019-04-15
내 안의 강

 
내 안의 강
 

 

 

18살, 아들을 몇 대 쥐어박고
나선 저녁 강가
해 떨어진 그랜드강에
후둘거리는 다리를 끌고
하루를 다친 상심한 발걸음으로 앉아 
뒤채이는 강물 소리를 듣는다

 

차라리, 이곳에 발걸음 하길 잘했다.

 

내 살로 빚은 자식 두들겨 놓고
저문 강가에 홀로 선 어미는 
저 물새보다 자유롭지 못하다.

 

너 때문에 온 것이여 ! 이눔아
비스듬히 옆으로만 걸어가는 게에게
한 보따리 낙담을 풀어놓고
입 벌어지는 수북한 잔소리에
세상 문 하나 철렁 닫히고
눈가에 밴 얼룩을 어쩌지 못한 채
탯줄처럼 질긴 자식에게
세상에서 부끄러운 어미를 보이고 말았다.

 

남의 땅에서
자식 키우는 일이
겨울볕에 빨래 말리기보다
몇 배 어렵다는 것을
베개 젖어 본 사람은 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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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399
9207
2019-04-06
이민 일기(2.글썽이는 곶감 )

 
이민 일기
(2.글썽이는 곶감 )


 

 

 

남도 땅 끝에서 어머니 보내신 
곶감을 펼쳐 놓으면
그녀의 숨결이 내 목을 감싸 온다
달큰한 맛에 목이 메이면
헐렁해진 가늘고 긴 팔로 나를 안고는
두 손으로 언 뺨을 비벼 온다

 

그러면 나는 그녀가 굽은 허리를 펴서
종일 매달린 감을 올려다 봤을 날들을 생각한다
침침한 눈을 비비면서
곶감을 만들었을 손길을 떠올리며
-뭐하러 그렇게 힘들게 해서 먼 나라 딸에게 보내시는지
그걸 누가 먹는다고 어머니도 참.
나는 혼잣말을 한다
그러다가 어쩌면 이 곶감도 
마지막일 거라는 생각에 손이 풀린다

 

펼쳐 놓았던 포장지 위에 곶감을
들었다 놓았다 
한나절 손에 일 잡히지 않고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창 밖엔 어느새 눈보라

 

먼데서 달려온 성긴 눈발 
글썽이며 질펀하게 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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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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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30
이민 일기(1. 저녁 수채화)

 
이민 일기
(1. 저녁 수채화) 


 

 

잠든 남편 머리맡
베개닛을 갈아 끼운다  
끙하고 뒤채일 때마다 달라붙는 코피들 
하루종일 못을 박고 돌아와   
잠든 코골이 곁에 앉아
살며시 벗겨낸 베개닛을 살펴본다

 

홀홀단신 건너온 안개 속  이민
하던 사업이 빚더미에 나앉았을 때
파산만은 막아보자고 힘에 붙인
일용직 묵묵히 참고 견디던 그이

 

툭하면 돌아가자고 투정하던 식구들 위해
손마디가 닳도록 희망으로 버티어 내더니 
마침내 코피까지 쏟아내는구나
땀으로 얼룩진 베개닛에 낭자한 핏덩이가
이민의 꿈을 덧칠하듯 끈적거리고 있다

 

돌부리에 넘어져도 안고 구르던 꿈
그 꿈 하나 건지기 위해 
남의 땅에서 흘린 피, 그리고 땀방울들 
온기 남아 있는 그 위에 손을 얹어본다

 

손끝에 와 닿는 비릿한 꿈
비비고 치대기를 반복하자
대야 속 핏물이 거품 속에 풀리듯 
환해지는 그의 꿈
빨랫줄에 물구나무로 펄럭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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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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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3
감정의 DNA

 
감정의 DNA
 

 

 

그것은 난해한 기호들로 이루어진 신의 영역이었다      

 

목소리의 고저음에 따라 눈살을 찌푸리기도 하고
미간의 흐름에  따라 주눅이 들어 
눈이 깊어지고 목이 길게 늘어나기도 하지만 
턱을 괴고 앉아 있는 그녀는 분명
낯선 음표들을 꺼내 건반에 옮기는 멜로디의 달인 같아 보였다 

 

희고 검은 건반 위로  툭툭 떨어지는 고음들        
미묘한 감정의 힘을 이용해 건반을 누른다 

 

목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음계의 높낮이를 받아내는 표정은
현을 두드려주는 해머 같은 것이어서 
내가 데리고 온 차겁고 이글거리는 푸른빛들은
분명한 음을 가진 그녀의 소리 곁에     
반음의  방해자로 지쳐 돌아왔다 

 

다섯 손가락으로 버거운 건반 위에 음계들
뺨을 치듯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간 뒤  
고요하다

 

검은 반음들이 어디에서 불화음을 내는지 
감정의 DNA를 몸 안으로 자꾸 들여놓다 보면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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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7
2019-03-18
봄의 서곡

 
봄의 서곡 
 

 

 

 

눈을 치우다
쓰러진 눈삽 팽개치고 봄을 생각했다
보관할 곳 조차 없는 눈, 눈치봐가며
삼월의 수선화
사월의 목련
오월의 튤립
얼음장 속에서 뿌리 털어내는 푸른 싹 하나  
너 혼자 올라올 수 있겠니
발목이 푹푹 빠지는데 너의 모습을 볼 수 있겠니
눈 덮인  대지에  코를 박고
가혹한 시간을 견뎌내는 저들의 고통을
눈삽이 먼저 염려했다
그럴수록 눈 치우는 손길은 가벼워지고 
누구는 봄이 온다는 기별을  받았다는 둥
누구는 봄바람이 다녀간 흔적을 보았다는 둥
양지쪽 담장 아래 심장이 쿵쿵 뛰는    
흰 눈을 이불처럼 뒤집어 쓴 노란 싹 하나  
두 눈을 끔벅이며 흙을 털어내고 있다 
대지를 잃어버린 캄캄한 저 안쪽 왁자한 걸 보니  
곧 봄 오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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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50
9207
2019-03-07
홀로 잠드는 집

 
홀로 잠드는 집 
 

 

 

창백한 야근을 마치고 
퇴근 가방에 온수 물통을 꺼내는 여자가 
한기에 온몸을 떨며 무릎이 꺾였을 때

 

충혈된 눈을 비비며 단잠에 빠진 여자를 위해 
냄비 위로 흘러 넘치는 육수를 온몸으로 받아
한나절 내내 마른 행주를 가만 덮어주는 일이거나 

 

어디로 가야 하나
고개 떨구고 그 자리에 말뚝처럼 서 있을 때
생존을 위해 닳은 신발 뒤축을 
누구보다 먼저 이해하고 격려하며 홀로 잠들 줄 아는 집 

 

때론 지붕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을 잠재우고
흔들리는 창문을 애써 다독이며
주인 행세를 자처하며 뜬눈으로 홀로 잠들었을 집 

 

길 모퉁이 멀어질때까지 
숨이 막힐 듯 차올랐던 그곳은 나의 광장 
고개를 천천히 들어 발음했을 때
언제나 두근거리기도 하지만

 

늦게 귀가하는 그녀의 빈집처럼 
내가 그를 생각하는 일이
그 어둠과 고요만큼 아프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혼자 땀을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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