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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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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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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9
내려놓는 가을

2.25g의 칼슘, 550g의 인산염, 252g의 칼륨

168g의 나트륨, 28g의 마그네슘, 철, 동

체중 중, 산소 65%, 수소18%, 탄소10%, 질소 3%,

가격으로 따지자면 1 달러에 함량 미달.

 

내 몸의 가치 평가서입니다.

 

알사탕 한 개, 연필 한 자루, 도넛 하나의 값

1 달러 루니로 살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 커피 한 잔 살 수 없는

욕심으로 포장된 육신이

왜 이리 천근만근 무거운지요.

 

있는 것 다 내려 놓는

가을입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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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6
어떤 투정

 
어떤 투정
 

 

 

 

햇빛 광광 내리쬐는 주말 오후
게임기를 든 11살 아들이
일하는 아빠에게  한마디 툭 던진다 

 

"아빠 ! 주말 하루 문 닫고 쉬어요"
-놀면 누가 밥 준다드냐?
"왜 우리는 맨날 일만 해야 돼요"?
-헛튼 소리 말아라.
남의 땅에 얹혀 사는 우리는.

 

먼지 묻은  장갑을 털어 뒷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아빠는 늘 그랬다

 

아들의 투정은 아빠에겐 투쟁이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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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4
9월에 읽는 경전

 
9월에 읽는 경전 
 

 

 

9월은 유독 생이 가볍다
곡식 익어가는 따가운 햇살을 등에 업고
앉아 있노라면 성자가 따로 없다
죄다 숙연해진다
그래서 9월의 오후는 고독하다
둥그런 저녁이 남아있는 몽상의 시간은
근심으로 가득 차 있다
돌이킬 수 없는 말들이 난무하고
듣고 싶지 않은 소리들이
편의점처럼 가까이에 있다
그것들이 우리를 지치게 한다
무한의 풍경이 이파리 끝에서 열리는
상수리나무 아래서 바라본 생의 단출함
내 기억에 유일하게 남은 건
나무도 사람처럼 위로받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빛의 생살 앞에
고요를 보는 눈
말을 듣는 귀
정말이지 9월의 오후는 경건하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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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4
지상의 이별법

 
지상의 이별법
 

 

 

 

언젠가 네게로 갈 것이다

 

얼마쯤 쓸쓸한 날에
언덕을 넘고
강을 건너서
행복했던 저녁들과 안녕하고 
하늘 끝 열리는 날
옷깃 스친  바람소리 같은 순간들
눈물겹도록 소중히 여기며
마른 뼈 사이에 빼꼭히 들어찬 세상의 인연들
먼지 털어내듯 바람결에 날려 보내고
그 바람 속 기침소리 잦아도
정해진 이별 앞에
뉘우침이든
아픔이든지   
더는 인생에 기대할 것 없는 날


 
별들아 네게로 가리라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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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2
바나나의 시비

 
바나나의 시비  
 

 

 

 

식탁 위에 바나나는 늘 곤혹스러웠지
애매모호한 겉과 안의 시비  

 

학교에서 울면서 집에 온 적이 있었지
지도 위에 떠 있는 나라 코리아에서 이민 온  
노란 소녀가 흰밥에 김치 도시락 먹다, 아뿔싸
또래 친구들 빗자루를 들고 쫓았지
곁에 올까봐 멀리서도 슬슬 피해 다녔지 
흰 바나나가 되기 전에는 곁에 얼씬도 못하게 선을 그었지
동물원에 원숭이 쳐다보듯 놀리곤 했었지

 

새학기 단체사진에서 내가 바나나란 걸 발견했지
과일 사이에 노란 바나나로 앉아있는 나
하지만 아무도 바나나를 희다고 말해주지 않았지

 

하지만 바나나를 원망하며 숨은 적 없었지
그것은 내가 철든 이래 가장 견고한 안쪽이었지
비바람과 곤충의 노략질에도 견뎌낸 껍질임을 알았지
노란 살갗을 벗겨내면 비로소 나의 정체가 드러났지
흠없이 잘 생긴 바나나로 살아가는 것  
사람들은 그것을 아이덴티티라고 했지.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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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8
곰의 혈통

 
곰의 혈통
 

 

 

일찌기 우리는 진화된 곰이었다
흰옷 입은 사람들 
암흑천지 주린 배를 움켜쥐고    
동굴 속 약초로 연명하며 살아남은 질긴 혈통이다

 

거듭거듭 말하노니 
상처투성이의 큰 짐승은 
심장을 지녔고 혀 깨문 입을 가졌고
간과 쓸개의 배알을 키웠고 똥을 품었다  

 

36년 식민지로 할키고 짓밟힌  
끔찍한 역사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며
해묵은 의문부호들 앞에
썩어 문드러져도 좋을 이웃 섬나라 
입술이 덜덜 떨리는 치욕이 아니더냐

 

그을린 얼굴을 짓밟는 장화, 저 짐승 
음침한 악을 숭배하는 야수의 피를 가진 야만이여
백년의 피눈물 헐하단 말인가 
그  참혹함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다

 

죄 같은 건  없다는 뻔뻔함으로
친절하게도 유감스런 과거를 지워준다는 말
그 끔찍한 계시는 앞서간 선열들 
더운피 서늘하게 거르는 분노의 창이 되어   

 

잠자는 흰 옷들 깨어 일어나라  
창마다 불을 켜고 거만한 새치 혀에 저항할   
식어 있던 몸이 다시 뜨거워지는 날
흰 눈을 이글루처럼 뒤집어 쓴 곰
앞 발톱 세워 두 눈 부릅뜨고 
부동자세로 섬나라 노려보고 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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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4
상처의 비망

 
상처의 비망 
 

 

 

비탈진 자갈밭에 돌멩이를 골라냈다
호미끝에 묻어나온 흙을 들쳐내니
몸 부쳐먹은 뿌리가 말갛게 나를 올려다 보는 거였다
내 목을 쳐 다오. 어서
던져진 밭둑에 말라가는 질긴 목숨줄
나무밑에 축축한 시름이 뿌리의 살을 밀어 올리면
나를 먹여 살린 돌덩이도 늙어 고부라지면 흙이 될텐데 
묻지 않아도 될 아픔들이 자꾸 커 보이는 시간 
이  말을 듣는날이 많아진 근래에
삽이나 호미에 찍힌 상처들이 참 크고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돌멩이를 골라낸 밭에 뿌리 내릴 수 없는 
나무들이 제 목숨을 처 내는 슬픔이야 말로 
부쳐 먹고 산다는 말이 마음에 걸리더란 말이다
힘없는 자갈의 몸을 빌어 먹고 사는 뿌리들의
은밀한 유서가 내 이야기인 듯
돌멩이의 속성을 이미 알고 있는 뿌리들

 

몸 붙여 먹는 일이 두려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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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9
꼬리에 대한 명상

 
꼬리에 대한 명상  
 

 

 

 

동트는 아침 
턱! 차도를 건너가는 짐승의 몸  
바퀴에 밟혀 광기는 바닥에 깔려 있다   

 

더운 피 낭자한 서늘한  전율
고개 들 수 없었던  창을 열고
파르르 움푹한 눈꺼풀 
몸을 떠는 발가락을 보고 말았다

 

퇴근 후 사고 현장 검증에 나섰다
등과 어깨 심지어 머리털까지
네 발 짐승에게 다 내어주고
달랑 남은 붓 한자루 
화폭 아래 찍을 낙관 한 점
오롯하게 남아 있다 

 

각을 세운  땡볕 아래 
벌레들 우글거리는 일만 남았다
온기 식을 때까지 오물거리고 핥다가
포란한 배 뒤집은 채
깃발 세운 벌레들의 행렬 지켜보다


    
한바탕 왁자지껄한 생을 살다가
화폭에 찍을 흔적 하나 남길 수 없는
내 생이 오버랩 되어  씁쓸하다 

 

가로등은 
일몰로 돌아온 어둠을 밝히며
여전히 붉게 서 있는데
나는 꼬리에게 묻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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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8
수국꽃의 유년

 
수국꽃의 유년  
 

 

 

비 내리는 칠월의 저녁
마당에 핀 수국을 바라보다
흰 고봉밥 한 그릇을  생각한다

 

둘러앉은 저녁상 너머 숟가락 부딪히던 날들
투덜대던 밥상 위로 피어나는 저 수국꽃
고슬고슬 갓 퍼온 밥처럼 
한바탕 여름을 피워내고 있다

 

앙앙, 흰밥 달라 보채던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열 살 계집의 유년
물기어린 그 기억으로
이방의 화단에 꽃을 피우려
수국 핀 그 길을 얼마나 서성거렸나

 

질긴 가난의 흔적은   
유년의 흉터를 다림질 못해
가족들 저녁상에 왁자한 하얀 웃음꽃 
꽃물 들지 못하는 밥상 위로
통증이 옆구리를 쑤셔댄다

 

수국이 다녀간 자리마다
세월에도 마멸되지 않은 
유년의 하얀 기억이  
오늘은 비에 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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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3
부추꽃

 
부추꽃
 

 

 

붙들고 싶은 것이 많은 날
나는 당신을 따야겠어요
하얘- 라고 발음할 때 누군가 왔다 간 오후
나는 꽃을 버리고 떨어지지 않은 꽃잎을 쥐고 있다

 

흰 물이 몸 속으로 흘러 들었다
언젠가 내게 살을 떠먹여준 적 있는
저 하얀손에 마지막 입맞춤을 할 때가 올 것이다

 

이름을 가져 보지 못한 
다섯 손가락을 펼쳐 보이며 번지는 꽃비린내
벌이 손을 핥았고 꽃이 거품으로 날아오르던
그런 날을 사랑이라고 해야 하나 
진물을 긁어내고 환하게 약을 발라주던 
최초의 손을 꽃은 기억한다

 

그것은 희고 아파서 꽃잎밖에는 
아무것도 가질 것이 없다는데
총총히 달린 당신 손 잡고 
하얀 세상을 마냥 걷고 싶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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