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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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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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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8
수국꽃의 유년

 
수국꽃의 유년  
 

 

 

비 내리는 칠월의 저녁
마당에 핀 수국을 바라보다
흰 고봉밥 한 그릇을  생각한다

 

둘러앉은 저녁상 너머 숟가락 부딪히던 날들
투덜대던 밥상 위로 피어나는 저 수국꽃
고슬고슬 갓 퍼온 밥처럼 
한바탕 여름을 피워내고 있다

 

앙앙, 흰밥 달라 보채던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열 살 계집의 유년
물기어린 그 기억으로
이방의 화단에 꽃을 피우려
수국 핀 그 길을 얼마나 서성거렸나

 

질긴 가난의 흔적은   
유년의 흉터를 다림질 못해
가족들 저녁상에 왁자한 하얀 웃음꽃 
꽃물 들지 못하는 밥상 위로
통증이 옆구리를 쑤셔댄다

 

수국이 다녀간 자리마다
세월에도 마멸되지 않은 
유년의 하얀 기억이  
오늘은 비에 젖고 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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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3
부추꽃

 
부추꽃
 

 

 

붙들고 싶은 것이 많은 날
나는 당신을 따야겠어요
하얘- 라고 발음할 때 누군가 왔다 간 오후
나는 꽃을 버리고 떨어지지 않은 꽃잎을 쥐고 있다

 

흰 물이 몸 속으로 흘러 들었다
언젠가 내게 살을 떠먹여준 적 있는
저 하얀손에 마지막 입맞춤을 할 때가 올 것이다

 

이름을 가져 보지 못한 
다섯 손가락을 펼쳐 보이며 번지는 꽃비린내
벌이 손을 핥았고 꽃이 거품으로 날아오르던
그런 날을 사랑이라고 해야 하나 
진물을 긁어내고 환하게 약을 발라주던 
최초의 손을 꽃은 기억한다

 

그것은 희고 아파서 꽃잎밖에는 
아무것도 가질 것이 없다는데
총총히 달린 당신 손 잡고 
하얀 세상을 마냥 걷고 싶어지는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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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7
담쟁이의 기억

 
담쟁이의 기억
 

 

 

어머니는 나를  유독 혹독하게 키웠다.
늙으막에 낳은 자식 당신 먼저 가면 
이리저리 굴러 다니는 냉장고안 찬밥신세 될까봐 
일부러 스파르타식 훈련을 강행했다
돌담 속 곤충이나 벌레를 피해가는 일이며
심지어는 세상 절벽에 관한  이론과 실기를 병행해 주었다.

 

삶이란 절벽을 기어 오르는 일이다.
잔소리로 듣던 어머니 생전의  말씀처럼 
덩굴손 뻗어 악착같이 기어 오른다 
거미가 앉았다 간 자리 눈길 거두고
바람과 이슬 온기 붙잡은 절벽 끝에서 
여린 손을 뻗어 푸르게 오르는 건 
이방에서 최후의 수단이기도 했다.

 

포복에 이골난  몸으로 살아온 30년 
넝쿨은 아래로 뻗지 않고 기어오르는  습성을 지녔다
기어오르지 않고 담장을  건너는 넝쿨은 없다.
차디찬 벽에 손을 뻗을 때마다 두 발을 받쳐주던 어머니
가르침이 이렇게 생의 나침판이 된다는 것을
곤고한 변방의 기록을 콘크리트벽에  점자로 남기고
그 기억으로 떨어지지 않고 견뎠을 것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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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30
라일락 꽃

 
라일락 꽃
 

 

 

 

향기를 품고 있는 것들이 어찌 꽃 뿐이랴 

 

꽃과 사람
마주 보고 있어도
한발짝 
더 가까이 의자를 당기고 싶은

 

그녀의 존재는 늘
홑겹 꽃잎을 지키기 위해     
바람이 풀어낸 점쾌를  따라
순간마다 보랏빛 향기를 지녔다

 

처음부터 지금껏 
굴곡없는 표정이며 그 넉넉한 품새
보탰줄도 모르고 밀당도 할 줄 몰라
그저 꽃의 중심에 서서
바람 따라 향기 날리는 일이면 족하다고

 

앞 뜨락에
마지막 꽃물 거두는 꽃의 후생 바라보며  
말이 향기가 되는 
그녀에게 안부 카톡 날려본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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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4
거미의 연가

 
거미의 연가 
 

 

 

날이 저무네 
시나브로 걸어오는 어둠을 헤치며 사방을 살피네
날선 사각의 모서리마다
낮은 음계들이 거미줄처럼 걸려 있네

 

어둠을 기다리며
거미 혼자 밥을 먹네 
밥알 담긴 숟가락을 놓고 누군가를 기다리네
순간 검은 문장들 후둑 떨어지네
그러면 별이 거미를 안아주네
거미와 별 나란히 저무는 것들에 대하여 의논하네
거미가 별을 보며 가만 웃네 

 

밥상을 치우는 거미가 어둠 속에 달그락거리네
어둔 밥상 위로 후두둑 별 떨어지네
그러면 거미가 별에게 달려가네 
숨찬 별이 거미에게 무릎 꿇어 인사하네
숙인 고개가 별빛으로 빛나면 등 낮춘 어둠이 저물어가네
저문 집에  거미 혼자  잠이 드네 
저무는 건 집만이 아니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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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7
2019-06-16
저무는 것에 대하여

 
저무는 것에 대하여
 

 

 

생각은 뒤죽박죽
풀어놓은 실타래처럼 엉키고
뿌리째 뽑혀나간 달음질하는 마음의 꽁무니

 

닫혔다 열렸다
몸보다 무거운 마음 털어낼 수 없어 
그늘이 깊고 둥근 숲 
떠나려는 봄 목덜미 붙잡으려고
애쓴 몸짓 저리 아프다 

 

첨삭도 하지 않은 말들 풀어놓고 
그저 고개만 끄덕이던 시간들  
침묵보다 더 낮게 흐르는 시간 나눠 마시며
몇 살이세요?
꿀꺽 나를 먹고 사는 일 
거듭거듭 날 먹고 있으니
부채살처럼 퍼져가는 주름 웃음살들   
이제는 저물 일밖에 없다고

 


서로에게  주저주저하는 사이 
안으로 단단한 것들은 저마다
뒷모습이 헐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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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229
9207
2019-06-10
비망록

 
비망록
 

 

 

개미 한마리
수박씨 머리에 이고 싱크대 위를  지나간다
물소리에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새가슴이었을 것이다

 

불끈거리는 팔뚝을 이마에 얹고
그의 발은 함부로 땅을 딛지 못한 채
쌀 씻는 저녁을 향해 길을 내고 있다

 

콩닥거리는 손바닥 안에 밥알이 뜨거워질 때 
두근거리는 심장에 배를 붙여 본 사람은
창틀 낭하를 기어 오르는 
그의 가슴팍을 걷어차지 못할 것이다
묻지 않았지만,  이 저녁  난간 위를 
겁없이 올라가야 할 연유가 그에게 있었으리

 

설거지 하던 손 멈추고
비탈에 몸 붙여 살아온 이민을 생각한다
낯선땅에 와서 누구든 한번쯤은
그런 날 있었으리라
제 몸에 부치는 수박씨를 보듬고
발밑 세상 속으로 걸어가야 했을 
그의 길이 내 몸을 지나간다

 

절뚝이며 창을 넘는 그의 행진을 
물의 가슴으로 지켜보며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여름밤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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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4
상처라는 거

 
상처라는 거      
 

 

 

오월의  뜨락 
비 맞은 꽃들은 다 젖는다   

 

흠뻑 젖은 채  
떨고 서 있는 보랏빛 제비꽃 

 

후드득  소낙비 한 방 얻어맞고
입술 깨문 채 고개숙인  며느리 밥풀꽃 

 

툭, 오며가며 던진 네 말 한마디
왜 이리 가슴을 후벼파는걸까

 

무덤을  목전에 두고  
남 밥그릇에 제 숟가락 집어놓고 
제 밥이라고 침 튀기며 말팔매질하는 
저 팍팍한 마음이 안쓰러워

 

젖어서 고개숙인 저 꽃들만    
춥고 아프겠는가
말매에 가시달린  넌?   

 

밥풀 달고 쓸어내리는 깊고 붉은 상처 
젖은 것들은 춥고 아파서  
손가락 발가락 오그라들고
온 몸뚱아리 뻣뻣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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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7
2019-05-24
가오리 연

 

가오리 연
 

 

 

뜬 소문을 생각했다
천리를 가는 꼬리 달린 연 
봄바람에 흔들리다 엉뚱한 소문에  휘말리는 연줄 
끝내 제풀에 걸려 날아가다 꼬리 잘리고
재갈 물린 입술 저항에 버티다 스스로 추락하고 마는

 

파릇한 보리밭둑이나 키 큰 감나무에 붙들려
등과 입술이 퍼덕거리는 가오리 꼬락서니
바람부는 방향으로 귀 열고 소문 쫓다
들판 지나는 전선줄에 매달리기라도 한다면
그 입술에 새의 배설물 짓무르겠다
제 얼굴에 튄 오물 냄새로 진동하겠다 

 

바람 불면 후욱 날아 오르다
금세 곤두박질치는 소문이라는 것이
저 연(鳶 ) 같은 것인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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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491
9207
2019-04-15
내 안의 강

 
내 안의 강
 

 

 

18살, 아들을 몇 대 쥐어박고
나선 저녁 강가
해 떨어진 그랜드강에
후둘거리는 다리를 끌고
하루를 다친 상심한 발걸음으로 앉아 
뒤채이는 강물 소리를 듣는다

 

차라리, 이곳에 발걸음 하길 잘했다.

 

내 살로 빚은 자식 두들겨 놓고
저문 강가에 홀로 선 어미는 
저 물새보다 자유롭지 못하다.

 

너 때문에 온 것이여 ! 이눔아
비스듬히 옆으로만 걸어가는 게에게
한 보따리 낙담을 풀어놓고
입 벌어지는 수북한 잔소리에
세상 문 하나 철렁 닫히고
눈가에 밴 얼룩을 어쩌지 못한 채
탯줄처럼 질긴 자식에게
세상에서 부끄러운 어미를 보이고 말았다.

 

남의 땅에서
자식 키우는 일이
겨울볕에 빨래 말리기보다
몇 배 어렵다는 것을
베개 젖어 본 사람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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