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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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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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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6
로라의 가을

 


로라의 가을

 

 
 

뒤태가 다르다
앞선 마음
적막한 몸 
성한 곳이라곤 저 쪼글쪼글한 눈빛


 

텅빈 버스에 올라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손
로라 처럼 부엌을 뛰쳐 나왔지만
혼자라는 생각에
왔던 길 뒤돌아 보며
걷다가 쉬고

 


바람은 내 등뒤를 지나 갔으나 
아무렇게나 놓인 의자에
고양이처럼 몸을 둥글게 말아
잠시 바라보는 강 언덕 
고개를 천천히 들어 하늘을 받쳐들었다 

 

시월, 바람 몹시 부는 날
잎사귀들이 땅에 얼굴을 묻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시간
끝내 풀지 못한 숙제를 안고
시간의 끝자리에 선 듯
오늘은 내가 보인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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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6
억새꽃

 
억새꽃
 

 

 

허연 아랫도리를 드러내 놓고
제 속을 털어내는 일이 흉이 될까봐
저리 눕기도 하고
심하게 흔들리기도 한다

 

사람도 억새와 별반 다르지 않다
사는 일 팍팍할 때 눕기도 하고
불붙는 외로움이 가슴을 치는 날이면
우리도 소리내어 울고 싶은 것이다
사람이니까 더 한 것이다

 

몸이 안으로 젖어서
내 안에 슬픔 하나 들이는 일이
서로를  다치는 일이어도
빈 들녘에 홀로 서 있는 것보다
마주 보고 흔들리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흔들리지 않는 것을
우리는 억새라 말하지 못한다


 
이맘쯤, 멀쩡한 사람도
움푹한 상처 하나 앞세우고
네게로 가면
솜뭉치 뽑아 올린 슬픈 몸짓
저 장엄한 행렬 앞에
죄다 눈물 글썽이게 된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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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6
가을 부부

 

가을 부부
 

 

 

 떨어진 거리를 좁히기 위해
낮게 앉았거나
서 있는 두 사람
말없이 서로를 챙겨주는
익숙함에 길들어져 있다

 

거칠고 뭉턱한 손으로
발등에 벌레를 잡아주기도 하고
가녀린  허리가  바람에
쓰러질 때는 두 팔로 안기도 한다

 

금 간 화분에 물이 새면
흙을 채워서 틈새를 막아주고
종일  서있는 아픈 다리를
오래도록 주물러 주며
이따금씩 가려운 이마를  긁어주기도 한다

 

한 사람곁에
또 한 사람
둘이서 지키는 가을은 따뜻하다

 

숲속 집 대문  앞에 서 있는
국화곁에 억새
한 평생 잘 살아온 부부같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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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6
어머니의 릴레이

마늘 한 접에 구십불이면

키운 공력에 비해 속이 쓰리다가도

 

딸 책 한 권 값이라 생각하면

그만 입맛이 돌고 배가 불러오는 거라

 

마늘쫑 한봉다리에 오불이면

뽑은 수공으로 치면 야박하다 싶다가도

 

아들에게 통화 할 전화카드 한 장 값인데 생각하면 

손톱에 배인 독한 마늘 냄새가

수화기를 든 순간 향긋해지는거라

 

내 어머니가 그렇듯

나도 영락없이  어머니를 닮은 어미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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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5
내려놓는 가을

2.25g의 칼슘, 550g의 인산염, 252g의 칼륨

168g의 나트륨, 28g의 마그네슘, 철, 동

체중 중, 산소 65%, 수소18%, 탄소10%, 질소 3%,

가격으로 따지자면 1 달러에 함량 미달.

 

내 몸의 가치 평가서입니다.

 

알사탕 한 개, 연필 한 자루, 도넛 하나의 값

1 달러 루니로 살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 커피 한 잔 살 수 없는

욕심으로 포장된 육신이

왜 이리 천근만근 무거운지요.

 

있는 것 다 내려 놓는

가을입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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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7
2019-09-16
어떤 투정

 
어떤 투정
 

 

 

 

햇빛 광광 내리쬐는 주말 오후
게임기를 든 11살 아들이
일하는 아빠에게  한마디 툭 던진다 

 

"아빠 ! 주말 하루 문 닫고 쉬어요"
-놀면 누가 밥 준다드냐?
"왜 우리는 맨날 일만 해야 돼요"?
-헛튼 소리 말아라.
남의 땅에 얹혀 사는 우리는.

 

먼지 묻은  장갑을 털어 뒷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아빠는 늘 그랬다

 

아들의 투정은 아빠에겐 투쟁이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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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4
9월에 읽는 경전

 
9월에 읽는 경전 
 

 

 

9월은 유독 생이 가볍다
곡식 익어가는 따가운 햇살을 등에 업고
앉아 있노라면 성자가 따로 없다
죄다 숙연해진다
그래서 9월의 오후는 고독하다
둥그런 저녁이 남아있는 몽상의 시간은
근심으로 가득 차 있다
돌이킬 수 없는 말들이 난무하고
듣고 싶지 않은 소리들이
편의점처럼 가까이에 있다
그것들이 우리를 지치게 한다
무한의 풍경이 이파리 끝에서 열리는
상수리나무 아래서 바라본 생의 단출함
내 기억에 유일하게 남은 건
나무도 사람처럼 위로받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빛의 생살 앞에
고요를 보는 눈
말을 듣는 귀
정말이지 9월의 오후는 경건하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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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4
지상의 이별법

 
지상의 이별법
 

 

 

 

언젠가 네게로 갈 것이다

 

얼마쯤 쓸쓸한 날에
언덕을 넘고
강을 건너서
행복했던 저녁들과 안녕하고 
하늘 끝 열리는 날
옷깃 스친  바람소리 같은 순간들
눈물겹도록 소중히 여기며
마른 뼈 사이에 빼꼭히 들어찬 세상의 인연들
먼지 털어내듯 바람결에 날려 보내고
그 바람 속 기침소리 잦아도
정해진 이별 앞에
뉘우침이든
아픔이든지   
더는 인생에 기대할 것 없는 날


 
별들아 네게로 가리라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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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2
바나나의 시비

 
바나나의 시비  
 

 

 

 

식탁 위에 바나나는 늘 곤혹스러웠지
애매모호한 겉과 안의 시비  

 

학교에서 울면서 집에 온 적이 있었지
지도 위에 떠 있는 나라 코리아에서 이민 온  
노란 소녀가 흰밥에 김치 도시락 먹다, 아뿔싸
또래 친구들 빗자루를 들고 쫓았지
곁에 올까봐 멀리서도 슬슬 피해 다녔지 
흰 바나나가 되기 전에는 곁에 얼씬도 못하게 선을 그었지
동물원에 원숭이 쳐다보듯 놀리곤 했었지

 

새학기 단체사진에서 내가 바나나란 걸 발견했지
과일 사이에 노란 바나나로 앉아있는 나
하지만 아무도 바나나를 희다고 말해주지 않았지

 

하지만 바나나를 원망하며 숨은 적 없었지
그것은 내가 철든 이래 가장 견고한 안쪽이었지
비바람과 곤충의 노략질에도 견뎌낸 껍질임을 알았지
노란 살갗을 벗겨내면 비로소 나의 정체가 드러났지
흠없이 잘 생긴 바나나로 살아가는 것  
사람들은 그것을 아이덴티티라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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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8
곰의 혈통

 
곰의 혈통
 

 

 

일찌기 우리는 진화된 곰이었다
흰옷 입은 사람들 
암흑천지 주린 배를 움켜쥐고    
동굴 속 약초로 연명하며 살아남은 질긴 혈통이다

 

거듭거듭 말하노니 
상처투성이의 큰 짐승은 
심장을 지녔고 혀 깨문 입을 가졌고
간과 쓸개의 배알을 키웠고 똥을 품었다  

 

36년 식민지로 할키고 짓밟힌  
끔찍한 역사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며
해묵은 의문부호들 앞에
썩어 문드러져도 좋을 이웃 섬나라 
입술이 덜덜 떨리는 치욕이 아니더냐

 

그을린 얼굴을 짓밟는 장화, 저 짐승 
음침한 악을 숭배하는 야수의 피를 가진 야만이여
백년의 피눈물 헐하단 말인가 
그  참혹함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다

 

죄 같은 건  없다는 뻔뻔함으로
친절하게도 유감스런 과거를 지워준다는 말
그 끔찍한 계시는 앞서간 선열들 
더운피 서늘하게 거르는 분노의 창이 되어   

 

잠자는 흰 옷들 깨어 일어나라  
창마다 불을 켜고 거만한 새치 혀에 저항할   
식어 있던 몸이 다시 뜨거워지는 날
흰 눈을 이글루처럼 뒤집어 쓴 곰
앞 발톱 세워 두 눈 부릅뜨고 
부동자세로 섬나라 노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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