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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samo
자동차 엔지니어의 세상 사는 이야기

부제: [캐나다 국경도시 윈저에 살며 미국에서 일하는 자동차 엔지니어의 세상 사는 이야기]

현대자동차 제품개발연구소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 22년째 오로지 한 길을 걷고있는 자동차 엔지니어입니다.

1995년 봄, 큰 뜻을 품고 캐나다로 독립이민, Toronto에 정착하여 약 1년 동안 살다가, 1996년 봄에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도시 Windsor로 옮겨와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캐나다장로교회 소속 윈저사랑의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직분: 시무장로), 현재 미국 Michigan주 Metro Detroit 지역에 소재한 닛산자동차 북미연구소에서 Senior Project Engineer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 사이버 공간을 통하여, 캐나다의 일반적인 생활 뿐만 아니라, 특별히 캐나다나 미국의 자동차 분야에 취업을 준비하고 계신 분들이나 현직에 계신 분들과 함께, 캐나다와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직접 보고, 느끼고, 배운 것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지속적인 관심과 성원을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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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의 시작을 위한 서곡 3
winsamo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줄을 잘 서야 팔자가 펴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Canada에 이민 와서 살면서 느껴온 것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능력보다는 줄(인맥)이 더 중요하다”라는 것이다. 한국보다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뭐라고? 그럼, 줄 없는 사람은 죽으란 말이냐?”고 항변하고 싶을 것이다. 너무 열 받지 말라. 세상 사는 이치는 의외로 간단하다. 까짓 것, 줄이 없으면 줄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줄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데, 새로 이민 온 사람이 무슨 수로 이역만리 이국 땅에서 줄을 만든다는 거냐?” 이런 질문에 답변의 여지가 궁색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여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줄을 활용하여 자신의 영역을 확대해나가는 것이다. 비교적 단기간에 인맥을 형성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우선 필자 자신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장기적으로 구축해온 인맥형성의 예를 간단히 소개해보기로 한다. 현대자동차 연구소에 재직할 때의 일이다. 1988년 3월 Tokyo Narita 공항에서 세계 자동차 수도로 불리는 미국Michigan주 Detroit 행 Northwest 비행기 몸을 실었다. 예정에 없던 갑작스러운 출장이었다. 5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일본에 심취했던 탓에 귀도 굳어졌고 영어 발음도 일본식으로 바뀐 데다 입술이 꽁꽁 얼어붙어 간단한 영어회화도 제대로 되지않는 상태에서 --그것도 혼자서 아무런 대책 없이-- 미국 출장 길에 오르게 된 기분은 착잡하기만 했다. 다행히 현대자동차 Detroit연구소로 파견된 K대리가 공항으로 마중 나오고, 함께 여행하기로 되어있어 다행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만일의 경우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평양을 지나 대륙을 가로지르는 동안 줄곧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본 광활한 미국은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환상적이었다. 감탄, 감탄의 연속이었다. 독자여러분은 숨가쁘게 돌아가는 도시 한복판에 엉거주춤 서있는 얼빵한 촌놈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당시 필자의 모습이 쉽게 연상이 될 것이다. Detroit 공항에는 일요일 아침에 도착한 것으로 기억된다. 마중 나오기로 한 K대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결국, 만일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사람들이 떠나 텅 빈 국제선 도착터미널에 혼자 남아, 그곳에서 마냥 K대리를 기다려야 할 것인지 공항근처 가까운 아무 호텔에 여장을 풀고 다음날 비상연락을 취하여야 할 것인지 판단이 쉽게 서질 않아 고민하는 중에 나타난 K대리가 그리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의 말로는, 그가 한국에서 파견 나온 지 얼마되지 않은데다 공항Pick Up 경험이 없어서, 국내선 도착 터미널에 가서 한참 헤매다 왔다는 것이다. 그 역시 미국생활에 익숙치 않은데도 불구하고, 영어도 안되고 미국여행 경험도 없는 필자의 여행길을 안내하라는 명령을 받은 터이라 부담이 많이 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나. 달리 방도가 없으니, 안면에 철판 깔고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밖에.. 지푸라기도 물에 빠진 사람에게는 생명줄이 될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방문한 회사의 공장 방문, Technical Meeting을 비롯한 출장업무를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던 것은 K대리를 비롯하여 미국에서 처음 만난 몇몇 사람들의 도움이 컸다. 이때 만난 이 사람들은, 1989년 9월 필자가 미국으로 건너가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데 큰 역할을 수행하게된다.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필자는 억수로 운이 좋았던 놈이다. 얼떨결에 미국 출장 가서 별로 힘 안들이고 건 수 하나 잡았으니 말이다. 1988년 3월 미국 출장은 방랑의 시작을 위한 서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