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을 막론하고 왕권을 세우는 데 필수조건 이었던 것은 도량형의 정비. 오늘날 국제단위의 기본으로 사용되는 미터법이 프랑스 혁명기에 어떻게 이뤄졌으며, 보편성을 인정 받을 수 있었던 객관적인 근거는 무엇인지 살펴본다.
============================================================
프랑스혁명이 탄생시킨 미터법(the metric system)
미터법은 거의 세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전통적인 계량 단위들이 사용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도 공식적인 문서들에서는 1964년1월1일부터 미터법만을 사용한다. 양을 측정하는 단위는 일종의 사회적 약속이요, 관습으로 굳어진 것이므로 새로운 단위를 사용하는 데는 많은 저항이 따른다.
이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살펴보면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우선 시행하는 제도가 단위의 통일이다. 그럼으로써 지방의 부정 부패를 없애고 중앙정부의 권한을 강하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공정한 수세와 조세의 형평성이 이뤄진다.
미터법 역시 새로운 왕권이 들어서면서 국가적인 개혁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미터법은 한 국가에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그 보편성을 인정 받아 18세기 말에 프랑스에서 제정된 이후 꾸준히 각국에서 채택됐다. 미터법은 길이의 단위인 미터(잰다는 의미의 그리스어인 매트론 mctron 또는 라틴어 메트룸 metrum에서 유래)를 전체 단위의 기초로 삼고 넓이, 부피, 질량의 단위를 규정했다. 그 당시 길이의 단위로서 1미터는 지구의 북극에서 적도까지의 최단거리를 1천만 분의 1로 나눈 것이다. 이것을 기초로 넓이의 단위인 아르(프랑스어 are, (1a=100 제곱 미터)변의 길이가 10미터인 정사각형의 넓이)와 부피의 단위인 리터(L, 모서리의 길이가 1미터인 정육면체의 부피의 1000분의 1)가 정해졌다. 그리고 부피의 단위로부터 질량의 단위인 그램이 물의 밀도와 관련돼 만들어졌다. 즉 4도 온도의 증류수 1L 질량의 1000분의 1을 1g으로 정한 것이다.
사회질서 구축 위한 도량형
18세기 말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미터법은 어떻게 이뤄졌으며, 그것이 보편적인 단위로서 인정 받을 수 있는 객관적인 근거는 무엇일까. 이를 살펴보기 위해 인류사의 커다란 변혁이 이뤄진 18세기 말의 프랑스를 살펴보자.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분노한 군중들이 정치범들이 수용돼 있는 바스티유 감옥으로 몰려 가 옥문을 부수고 새 시대를 열었다. 프랑스 대혁명은 전제적인 절대 왕권에 대항한 시민이 정권을 차지함으로써 시민이 주인 된 민주주의의 신기원이었다.
왕족과 귀족, 성직자들 속에서 이뤄진 앙시앙 레짐(구체제)의 모든 잔재를 사회 속에서 몰아내는 것이 혁명가들의 목표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새로운 도량형의 제정은 새로운 사회 질서의 구축을 위해 자연스럽게 거론됐다.
당시의 프랑스에서는 봉건적인 구습을 따른 도량형들이 사용됐다. 종잡아 7백-8백 개의 다양한 단위들이 상업, 건축, 측량, 농업, 제조업 등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이러한 단위들은 같은 이름이라도 지역마다 그 양이 다르기 일쑤였고 10진법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해서 계산이 매우 어려웠다.
(도량형: 사물을 계량, 계측하고, 물건을 비교, 교환할 때 기준이 되는 자, 되, 저울 등을 가리킨다. 길이를 재는 자, 부피를 재는 되와 말, 무게를 다는 저울은 물물교환이나 거래 시 흔히 사용했던 전통 도량형기다.)
단위의 혼란은 당연히 모든 거래와 제도들의 질서를 어지럽힘으로써 사회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러므로 도량형의 개혁에 대한 의견은 혁명 전에도 이미 여러 차례 제기된 바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혁명은 도량형 제도의 개혁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 할 수 있었다.
한편 당시 프랑스의 측정 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이었고, 여러 측정 장치들이 개발되고 개선됨으로써 다양한 양들에 대한 정밀 측정들이 과학자들에 의해 시도되고 있었다.
잘 고안된 측량도구들은 거리와 길이를 정확하게 측정했고, 정교하게 제작된 시계는 시간을 이전보다 훨씬 정확하게 측정했다. 또 저울은 미세한 질량의 차이도 감지할 수 있게 해줬다. 그리고 전하량, 열량, 기체의 부피 등을 측정할 수 있는 장비들이 개발됐다.
과학이 정성적 단계에서 정량적 단계로 한 단계 발돋움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정량적 과학의 발전은 당시 유럽 과학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파리 과학 아카데미에서 주도했다. 과학 아카데미 회원들은 과학사의 잠재력을 국가를 위해 유익하게 쓸 수 있는 예로써 도량형의 개혁을 주장했다.
도량형 개혁의 주창자들은 새로운 도량형 체계는 임의적이지 않고 표준원기를 잃어버리더라도 쉽게 재생이 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무엇보다 합리적이고 보편적이어야 하며 단순해서 사용하기가 편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단순성과 사용의 용이함을 위해서는 10진법을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1790년, 아카데미 회원인 탈레랑은 이런 조건을 만족하는 길이의 표준을 북위 45도 상에서 초 단위로 흔들리는(즉 주기가 2초인) 진자의 길이로 삼을 것을 제안했다. 또 영국을 이 과정에 초청함으로써 이 단위를 모든 나라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자는 의견도 제시했다.
한편으로는 지구 자오선의 북극에서 적도까지의 거리를 1천만분의 1로 나눈 것을 길이의 단위로 삼자는 의견도 제시됐다. 그러나 군사 공학자인 프뢰외르는 상황이 쉽지 않고 작업의 비용이 엄청나면서도 측정의 오차가 클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영국이 배제된 미터법
초진자의 길이는 이미 1백 년이 넘도록 길이의 표준 단위로 많이 사용됐다. 초진자의 길이를 길이의 표준으로 삼자는 견해에 대해 영국 측의 학자들도 큰 이의가 없었고 이에 대한 제안을 영국 의회에 상정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혁명이 더욱 격화되면서 양국의 관계는 악화됐고 아카데미가 진자의 길이를 우선적인 단위로 삼지 않기로 결정함으로써 두 나라의 공조는 이뤄지지 않았다.
프랑스의 국민의회는 탈레랑의 제안을 수락했고 이를 위해 아카데미에는 보르디, 라그랑주, 라부아지에, 콩노르세 등을 중심으로 위원회가 구성됐다. 1791년 3월에 이들은 진자보다는 파리를 통과하는 지구 자오선의 길이가 더 좋은 표준이 될 수 있다는 보고서를 냈다.
그 이유는 길이의 단위를 결정하기 위해 길이와는 무관한 시간의 단위를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고 초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 10진법을 따르지 않는 임의적인 것이기에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다. 다만 초진자의 길이는 그 편리성을 고려해 부차적인 기준으로 삼기로 했다.
이를 위해 극에서 적도까지의 길이를 측정하는 것은 너무 큰 작업이므로 위도 45도 근방의 호의 길이를 재기로 했다. 더불어 초진자의 길이를 관측하기 위한 기준 위도를 확정한 후, 초진자의 길이를 측정했다.
이어서 중량의 단위를 측정하기 위해 얼음이 녹는 온도에서 부피를 잰 증류수의 무게를 측정하고 마지막으로 프랑스에서 사용되는 옛 단위들을 세 표준과 비교하는 작업을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스인들은 이 표준들 자체가 자연적인 것이므로 당연히 다른 국가들에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제안들이 국민의회에 제출되었고 곧바로 승인을 받았고 8월에 비교적 많은 액수의 10만 리브르가 주어졌다. 그러나 정치적 격동은 이 프로젝트에 일대 시련으로 다가왔다. 1793년 자코뱅당이 정권을 잡고 이른바 공포정치가 실시되면서 과학아카데미의 엘리트주의에 반감을 품은 세력에 의해 아카데미는 8월 8일에 폐쇄되고 말았다.
프뢰외르 손에서 이뤄진 미터, 리터, 그램
정치적 폭풍 속에서도 보편적인 도량형의 재정 작업은 튼튼한 빛이었으나, 이러한 폭풍 속에서 희생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치청부업자로 민중의 원성을 산 라부아지에가 11월 28일에 체포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고, 보르다, 브리송, 쿨롱, 들랑브르, 라플라스도 왕에 대해 우호적이라 해 임시 위원회에서 제명됐다.
이러한 결정의 뒤에는 이들에게 역감을 품은 군사 공학자 프뢰외르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와 도량형 제안에 대해 반대한 이들에게 보복을 했던 것이다. 이제 미터법 프로젝트는 프뢰외르의 손에 의해 제작과 배포됐고 m(미터), L(리터), g(그램)의 기초 명칭이 확정됐다. 주요 측정 작업들은 이전에 맡았던 아카데미 회원들에 의해 수행됐다.
공포정치가 끝나자 1795년 말 과학 아카데미는 프랑스 학사원의 일부로 부활됐다. 이듬해 4월에 베르돌레, 보르다, 브리송, 쿨롱, 들랑브로, 라플라스, 르장드로, 메솅, 몽주 등을 중심으로 한 위원회에서 다시 미터 프로젝트가 수행됐다.
라플라스는 이를 위한 국제적인 학자의 모임을 주창했고 나폴레옹의 지지로 영국이 배제된 가운데 학자들이 초청됐다. 이 연합 위원회는 3개 소위원회를 구성해 작업했고 메솅과 들랑브로의 측정치로부터 미터의 길이를 확정하고 부피와 무게의 단위도 확정했다.
마침내 1799년 6월 22일에 공식적으로 도량형 표준들이 민중들에게 제시됐고 미터법은 옹호자들에 의해 “학사원이 프랑스 공화국에게 끼친 불멸의 봉사이며, 전인류에게 미친 큰 유익”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제 미터법은 인류가 그것의 혜택을 누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편성으로 인정 받은 국제단위
1872년 연합 위원회를 구성했던 29개국 출신의 학자들은 자국으로 돌아가 미터법을 전파 시켰다. 미터법은 프랑스와 합병된 지역에서 다른 단위를 배제한 채 독점적으로 사용됐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이 있었으나, 프랑스 내부에서 반대가 일어났다.
1801년 부 터 이뤄진 토지거래는 미터법만을 사용해야 했지만 사람들은 거부했다. 농부나 측량사, 건축가, 포목상들은 좀처럼 오랫동안 사용해온 자를 버리지 않았다. 국가의 강제적 조치는 결국 상용 단위와 공식 단위의 분리를 초래해 생활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결국 오래된 단위의 병용이 허용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결국 이전의 단위들은 새 단위와 뒤섞여 쓰임으로써 도량형 개혁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듯했고 미터법 제정에서 배제되었던 영국인들의 조롱을 샀다.
그러나 결국 미터법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특징과 10진법을 쓰는 이점은 서서히 그것의 사용을 확대시켜나가고 있었다. 1800년 이후로 건축 설계에서 미터법이 점점 많이 쓰이게 됐고 옛 단위와 미터법이 병행되던 단계를 넘어서 점점 미터법만이 쓰이는 일이 많아졌다.
1810년경부터 기술 서적들은 미터법만을 사용했다. 교수들과 공무원들은 미터법의 사용을 강의 및 공식 문서들에서 전적으로 요구했다. 결국 1840년에 프랑스에서는 미터법만을 사용하도록 법을 규정했다. 이렇게 미터법은 보편적인 도량형으로 자리를 굳혀 나가기 시작했다.
혁명의 과욕 1주일은 10일
한편 미터법이 제정되는 과정과 더불어 진행된 달력과 시간의 개혁은 미터법과는 다른 운명을 맞았다. 10진법의 사용이 혁명의 이상에 부합한다는 생각이 팽배해지자 아카데미 회원들은 직각을 1백 등분해 도(度)를 삼고(grad), 도를 1백 등분해서 분(分)을 삼는 식으로 10진법을 각도에 까지 도입하려고 했다. 더 나아가서 달력과 시간을 교회와 바빌로니아의 전통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했고 이러한 생각은 혁명의 정신에 잘 부합했다.
마침내 1793년 9월 20일에 과학 아카데미는 공공시도위원회에 달력과 시간의 개혁안을 제출했다. 이 개혁안은 프랑스에서 공화국이 선포된 1792년 9월 22일(이 날은 추분이기도 했다)을 혁명 년의 날로 삼고 날의 분할에도 십진법을 도입해서 한 달을 균일하게 30일로 하고 10일 단위로 순(旬)을 삼아서 주(週)를 대신하게 하며 1년을 12월로 삼고, 남은 5일 또는 6일은 휴일로 삼자고 했다. 또한 하루의 시간도 십진화해서 하루를 10시간으로 하고 각 시간을 1백분으로 나누도록 제안했다.
이러한 제안은 곧 입법화됐고 모든 공공 서류들은 새로운 스타일로 날짜를 표기했다. 각 월의 명칭에 대해서는 숫자로 하자는 의견도 강했지만 결국 기후에 따른 명칭을 붙이기로 해 9월 22일을 시작으로 해서 가을에는 포도 월(苞萄月), 무월(霧月), 상월(箱月), 겨울에는 설월(雪月), 우월(雨月), 풍월(風月), 봄에는 종월(種月), 화월(花月), 목월(牧月), 여름에는 맥월(麥月), 열월(熱月), 숙월(熟月)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요일의 명칭은 1요일, 2요일, 3요일…… 10요일로 하였다. 이로써 개혁자들은 새로운 혁명력이 특정한 문화를 반영하지 않는 보편적인 달력이 됐다고 만족해 했다. 곧 10진법에 따라 추가 움직이는 시계가 만들어져 아카데미 회원을 중심으로 시범적으로 사용됐다. 라부아지에도 그 중의 하나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의 10진화는 다른 국가와 정보를 교환하는데 난점으로 작용해 실용화되지 못했고, 1795년에 그 사용이 유보됨으로써 혁명력 자체의 사용은 난관에 부딛쳤다. 혁명력에서 가장 혁명적인 것은 주의 폐지였다.
오랜 세월 동안 일주일을 주기로 이뤄져 왔던 사람들의 생활을 10을 단위로 삼은 새로운 주기에 맞추겠다는 당찬 계획은 7일을 주기로 이뤄지는 교회의 의례를 따르지 않음으로써 교회의 지배에서 벗어나자는 혁명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센 반대의 핵심은 교회보다 민중들에게 있었다. 이 법안을 따라 공공 업무와 공공 시설들은 10요일에는 모두 쉬도록 조치되었지만 사람들은 7일마다 쉬던 것을 10일 마다 쉼으로써 휴일이 1년 동안 52회에서 36회로 줄어드는 것을 싫어했다. 결국 교황청과 조정을 이루는 사이에 나폴레옹은 몰락했다. 일주일이 10일이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는 모든 사람이 공감할 것이다.
[한국일보 연재 Math4U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