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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살아야하는 이유. Aug 18.2004
lakepurity

조국이 국제사회에서 경제적, 정치적으로 위상을 지킬수 있는 좋은 내용의 글이라고 생각되여 옮겨 실었읍니다. 저의 개인 생각임을 염두에 두시고 읽으십시요. 반대 하시는분들도 많이 계시리라 믿습니다. 토론은 사양합니다. 감사. 파병에 관한 비용에 대한 기초 인식 파병이 국가이익에 도움이 되는가? 파병에는 비용이 따른다. 미국을 싫어하는 수억 인구의 아랍권에 이미지를 실추시켜 국가이익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 대개 이 가지 비용 의식이 파병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시각이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단순한 침략전쟁으로 보느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국론이 분열돼 있다. 그런데 파병 여부에 대한 시각은 대체로 이라크 전쟁을 보는 시각과 일치하고, 아라크전을 보는 시각은 미국을 보는 시각과 일치돼 있다. 미국을 혈맹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파병을 비용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미국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파병을 비용 이전의 비도덕적인 행위로 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제까지 파병에 대한 지지파와 반대파는 서로 대화조차 할 수 없는 먼 거리에서 평행선만을 그어왔다. 이러한 차제에 원탁토론아카데미에서 대화의 장을 마련한 것은 상징적 의미에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비용에 대해 생각해 보자. 국가는 통치체가 아니라 경영체다. 경영학 측면에서의 비용은 의사결정의 목적과 분석가의 전문성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기업제품에 하자가 있을 때 고객은 불만사항을 요구해온다. 기업 입장에서는 A/S도 해주어야 하고 반품도 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정당한 요구를 모두 다 들어주다 보면 기업은 엄청난 비용을 추가로 지출하게 된다. 단기 이익을 얼마나 냈느냐에 따라 승진과 연봉이 달라지는 한국기업 풍토 하에서 고객을 만족시키다 보면 경영자는 도태하게 된다. 따라서 기업은 될 수 있는 대로 고객의 요구를 외면하고 싶어 한다. 이에 불만을 느낀 고객들이 늘어나면 기업 이미지가 실추되고 기업이미지가 실추되면 고객들은 말없이 떠난다. 얼마나 많은 고객이 기업에 등을 돌렸는지를 아는 것은 쉽지 않다. 결국 당장의 이익을 추구하다 보면 기업이 망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비용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A/S 및 반품으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이고, 다른 하나는 고객이 말없이 떠남으로 인해 야기되는 비용이다. 전자는 회계 장부에 보이는 비용이고 후자는 누구의 눈에나 보이지 않는 비용이다. 보통 사람들은 전자의 비용을 크게 생각하지만 경영에 도가 튼 사람은 남이 보지 못하는 비용을 보는 것이다. 일본의 코제 화장품은 데밍상을 받은 업체다. 데밍상은 비록 일본이 제정한 산업 상이지만 세계 산업계 전체의 노벨상이다. 데밍은 미국이 낳은 품질이론의 대가이며 일본은 전후 데밍박사를 모셔다가 교육을 받고 품질 1등국이 됐다. 일본은 그를 기리기 위해 데밍상을 제정했다. 아마 한국인들 같으면 남의 나라 사람의 이름을 본따서 상을 제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인으로부터 배워서 미국을 이긴 것이다. 그 코제 화장품 회사는 수백리 밖에 있는 지방 상점에서 립스틱 한 개를 주문해도 사람을 보낸다. 립스틱 하나를 우송만 하려해도 배보다 배꼽이 더 클 텐데 비싼 여비를 들여가면서까지 사람을 보낸다. 일본인은 비용을 모르는 바보인가? 일본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기업 이미지를 세우기 위해서다. 일본인 전체가 기업 이미지를 세우면 일본 전체의 이미지가 세계적으로 부상한다. 각 일본기업들이 이렇게 치르는 비용은 비용일까 투자일까? 한국인 몇 사람이 일본 온천 호텔에 1주일간 있기로 예약을 했다. 3일을 머문 후, 다른 곳으로 골프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나머지 기간을 해약하자고 했더니 종업원은 활짝 웃으면서 "그럼은요, 제가 손님이라고 그렇게 하구말구요” 하면서 짐을 챙겨주었다. 택시를 타고 1시간 동안 오다가 보니 허리띠가 없었다. 다시 가려면 택시비가 더 비싸기에 그냥 골프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이미 그 허리띠가 예쁘게 포장되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 죄송합니다. 이후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이들 한국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기에는 어떤 비용들이 내재해 있는가? 온천업체게 치른 비용은 없어진 비용일까 투자일까? 일본인들이 이렇게 공동의 집을 가꾸고 있는 동안 우리 한국인들은 어떻게 하는가? 일부 몰지각한 미국 교포들의 예를 들어보자. 이는 미국 교포들만의 마인드가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전체의 공통적인 마인드이다. 한국인이 미국 흑인 교통경찰에 잡히면 몰래 돈을 집어 준다. 돈 맛을 본 흑인 경찰들은 잘못이 없어도 한국 사람만 보면 잡는다. 자식들도 피해를 본다. 자기 한 개인의 순간적인 어려움을 모면하기 위해 공동의 집을 허무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비용은 어떤 것이 있는가? 개인주머니에서 나가는 돈만 보이고 이후에 국민 전체가 입는 비용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생산한 제품에 대해서는 일생동안 책임을 집니다”. “우리 일본은 의리를 중요시하고 약속을 중요시 합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신뢰받는 국민이 됐다. 한국 기업에서 인사부장이 현관에 사람을 배치하여 문밖을 나가는 사원들의 출입시간을 적게 했다. 인사부장은 그것이 사원들의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눈치 챈 사원들로 인해 소문이 퍼졌다. 사원들은 속으로 사장을 미워하면서 그럭저럭 시간을 때웠다. 어느 비용이 더 큰가? 이라크 파병에 관련한 비용도 이와 같은 것이다. 보내는 것이 동맹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 동맹관계를 유지함으로서 얻는 이익이 무엇인지, "대한민국은 의리를 지키는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어떤 이익이 되는 것인지도 매우 중요하다. 보내느냐 마느냐에 대한 결심도 중요하지만 보내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매너도 그만큼 중요하다. 우리말에 좋은 일 하고 뺨맞는다는 속담이 있다. 처음부터 기분 좋게 보내느냐, 기분을 상할 대로 상하게 해놓고 보내느냐? 내가 상대방에게 살짝 웃어주면 상대방도 살짝 웃어준다. 내가 활짝 웃어주면 상대방도 그렇게 해준다. 이는 대인관계에서만 진리가 아니라 국제관계에서도 진리다. 여기에도 말 못할 만큼의 비용이 따른다. 우리는 지금 무슨 비용에 근거하여 시각을 조성하고 있는가?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월남에 파병을 한 것에 대해 혹자는 감정적인 비난을 한다. 그러나 월남 파병이 없었으면, 당시에 안보도 없었고, 월남에 진출한 미국기업들을 통해 산업 역군을 훈련시키지도 못했을 것이며, 그들을 중동으로 내보내 중동특수를 일구어 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월남 파병이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낸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당시 야당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파병 결심을 놓고 젊은 피를 팔아먹는 흡혈귀라는 식으로 악담을 하였고, 파월 용사들의 수당으로 건설한 경부고속도로를 가리켜 농경지를 말아먹은 반국가적 도로라며 지독한 욕들을 했다. 그러나 필자는 월남전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라크 파병 역시 그러하리라고 본다. 파병기회를 통해 세계만방에 한국군의 친절함과 주도면밀한 대게릴라전 능력을 과시할 것으로 본다. 이를 막는 것은 한국군의 숨은 능력과 기개를 사장시키고, 얻을 수 있는 엄청난 국기적 이익을 당에 묻는 열등한 의사결정이 될 것이라고 본다. II. 대한민국 국민은 은혜를 잊는 국민이고 싶지 않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나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우리의 혈맹 미합중국이 일시적으로 처한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돕기 위하여 나의 아들을 이라크로 보내고자 합니다". 만일 대통령이 TV앞에서 이런 연설을 했더라면 스스로는 세계적인 스타가 됐을 것이고, 온 국민은 세계인들 앞에 으쓱해 하면서 대통령을 중심으로 단결했을 것이다. 1950년6월25일, 18만 명의 인민군이 1,609문의 야포 및 박격포를 퍼부으면서 272대의 탱크를 몰고 파죽지세로 남침했다. 9만의 한국군은 대책없이 3일만에 서울을 내주었다. 6.29일 06시, 일본에 있던 맥아더 사령관이 전광석화의 속도로 수송기를 타고 한강 남쪽 제방에 도착했다. 그는 한국군에 방어능력이 전무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6.30일 미24사단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7월1일,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수송기에 탑승하고 08:45분에 부산으로 출발했지만 안개가 짙어 10회나 회항하다 15:00시에야 겨우 착륙했다. 24사단은 전투 17일 간에 15,965명 중 7,305명을 잃었다. 1950.6.30부터 1953.7.27까지, 미군 36,940명이 목숨을 잃었고, 8,176명이 유해조차 찾지 못한 채 실종됐으며, 92,134명이 부상을 당했다. 총 1,789,000명의 미군이 한국전에 와서 싸웠다. 60만명이라는 대군이 항시 전쟁을 치르면서 한국과 한국인을 지켜준 것이다. 미합중국은 한국전에서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귀중한 목숨을 바친 전사자들에게 이런 비문을 바쳤다. "미합중국은 조국의 부름을 받고, 생면부지의 나라, 일면식도 없는 낯선 사람들을, 침략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기꺼이 나선 아들과 딸들에게 삼가 경의를 표합니다". 제24사단장인 딘 소장이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됐다. 86kg의 체중이 2개월만에 58kg가 되었다. 밴프리트 장군이 아들을 잃었고, 아이젠하워 대통령, 클라크 UN사령관도 아들을 바쳤습니다. 워커 중장이 자식과 함께 참전했다가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겁쟁이가 아닌 미국이 있었기에 해방이 됐고, 지금까지 김정일 치하에서 벗어나 오늘의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국가가 입은 은혜를 모르는 국민으로 멸시받고 싶지 않다. 그런데 정부의 우유부단으로 인해 우리는 세계인들로부터 "은혜를 모르는" 수치스러운 한국인으로 손가락질을 받게 됐다. "전투단을 보내면 피해를 본다"는 말은 겁쟁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비겁자, 겁쟁이라는 평을 듣는 것은 명예에 치명적이다. 군대는 그 나라 국민의 상징이요 프라이드다. 전쟁이 두렵다는 겁쟁이 군대는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한국군"일 수 없다. 전투를 경험하지 못한 군인은 샐러리맨에 불과하다. 전쟁에는 연습이 없다. 연습 없는 샐러리맨 군대, 전쟁을 무섭다고 실토하는 정부에 국가의 안위를 맡길 수는 없다. 유사시에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평소에 땀과 피를 흘려야 한다. 이라크 파병은 바로 그런 기회다. 한국군은 정의와 명예를 중시한다. 국민 역시 무엇이 몸에 이로운가에 따라 세상을 사는 소인배들이 아니다. 군의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은 이런 한국군과 국민을 대표해야 하는 것이다 III. 파병이 가져온 이익: 월남파병의 사례 1. 베트남전 프로필 베트남은 1975년 4월 30일 월남이 완전 패망함으로써 22년간 미국과의 전쟁을 끝내고 공산 치하의 통일국가가 됐다. 한국군은 1964년 7월 18일부터 1973년3월23일까지 8년 8개월 동안 32만5천명을 파견했다. 상흔에 대한 간단한 통계만 봐도 월남전의 규모를 알 수 있다. 미군 전사자 56,000명, 부상자 200,000명. 월남군 전사자 200,000명, 부상자 500,000명, 월맹군 전사자 900,000명, 부상자 150,000명. 민간인 사망자 1,500,000명, 부상자 3,000,000명. 한국군 전사자 4,960명, 부상자 10,962명, 한국군 고엽제 호소자 66,000명으로 집약된다. 한국군의 월남 참전은 비록 장병들의 엄청난 희생을 치르긴 했지만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유일무이한 에너지였다. 단언하건데 월남참전이 없었다면 세계가 부러워했던 한강의 기적도 없었다. 손톱깍기 하나 만들 수 없던 나라에서 불과 몇 년만에 일약 공업국가가 됐다. 권총 한 자루 만든다는 건 영원히 불가능 할 것만 같았는데 1971년부터 군의 거의 모든 야전장비가 우리 손으로 만든 신장비로 교체되기 시작했다. 북한이 AK소총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M-1, 칼빈을 가지고 의기소침해 있었지만 월남전이 끝나기 이전에 우리 70만 대군은 모두 M-16 자동소총으로 무장됐다. 당시까지 한국은 남에게 기대어 살고 수난을 받아오던 피압박민족이었다. "조센진은 할 수 없어"라는 자조적인 분위기가 팽배했고, 무기력과 자학이 온 사회를 지배했다. 한국군 역시 미군이 주는 월급을 받고 있었다. 소위 봉급이 겨우 18달러, 하숙비를 주고 나면 여유가 없었다. 월남 참전은 국가의 지위를 부끄럽던 "피압박민족"에서 일약 "남을 도울 수 있는 원정력을 갖춘 나라"로 웅비케 했다. 무기력에서 벗어나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정신적 혁명을 이룩해 냄으로써 세계가 부러워하는 근면한 나라, 기적을 이룩한 나라로 변신하도록 만들었다. 당시의 세계적으로 가장 컸던 이슈는 단연 월남전이었고, 월남전의 백미는 단연 한국군의 활약상이었다. 한국군의 독자적인 대게릴라전법, 대민 심리전, 용맹성은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완전히 다른 이미지로 바꾸어 놓았다. 당시 한국 국민은 멸시했던 런던타임스 지는 66년 5월29일 자에 "한국군이 월남전을 맡았거나, 미군이 한국군의 전술을 채택했더라면 벌써 승리로 끝냈을 것"이라는 극찬을 할 정도였다. 지금은 IMF가 돈줄을 쥐고 있지만 당시에는 서방 11개국 금융클럽이 쥐고 있었다. 불과 10억 달러 외자도입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했던 그들이 1966년 가을 서울을 찾았다. "월남전을 보니까 한국은 희망이 있는 나라더라"며 대한국경제협력단을 만들어 67'-71'년간에 27억 달러의 차관을 공여했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해외에 나간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절에 주월한국군의 선풍적인 인기로 인해 한국인들은 폭발적으로 미국, 호주, 남미, 유럽, 동남아 등지에 진출하게 됐다. 1963년 가을에 박대통령은 "경제를 자력으로 운용한다는 것은 기적일 뿐"이라고 고민했다. 그러나 파병 이후 그런 고민은 말끔히 없어졌다.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 몇 년만의 변화를 보자. 1960-1963년간 원조는 연평균 1억8,000만 달러였다. 1964년에는 1억 2,400만 달러로 축소됐다. 1967년부터는 완전 중단하기로 계획돼 있었다. 마치 폭풍 전야 같이 암울하기만 했다. 이렇게 축소와 중단으로 내달리던 원조액은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이 이뤄진 1966년도부터 1971년 5개년간 연평균 5억500만 달러로 증가됐다. 월남전이 끝나기도 전에 한국경제는 연평균 12%의 눈부신 성장을 이룩했다. 1972년부터 8개년간 제1차 율곡사업이 추진됐다. GNP의 6%를 국방비로 쓴다는 원칙 하에 세운 8년간의 율곡 예산은 15억3,000만 달러였다. 그러나 예상을 뛰어넘는 경제 성장으로 인해 81년도에 결산을 해보니, 8년간의 실 집행사업비는 60억3,000만 달러였다. 2. 파병의 당위성 954년7월29일 제네바에서 월맹과 프랑스간에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베트남에서는 호지명이 조직한 게릴라 즉 베트콩과 월남군간에 비정규전이 점점 더 확산돼 가고 있었다. 소련과 중공은 베트남, 한반도, 유럽, 아프리카, 중동 등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공격적인 공산화 팽창정책을 벌였고, 호지명 역시 이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당시 북한의 GNP는 남한의 1.7배였다. 북한은 우세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지고 노골적인 압박을 가해왔다. 1961년7월 중공과 북한간에 혈맹적 동맹조약이 체결됐다. 소련, 중공, 북한이 이루는 북방 삼각세력의 팽창 정책이 공조체제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1962년 12월에는 소위 "4대 군사노선"을 채택했다. 1965년4월 김일성은 인도네시아 방문 연설에서 남조선 통일을 위한 3대 혁명론을 발표했다. 이어서 1964년 초 중공이 핵실험에 성공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한의 입지는 점점 더 약화되어 갔다. 미국에서는 월남전의 확전으로 인해 남한에 공여 하던 원조를 삭감하는 한편 주한미군을 월남에 투입할 수밖에 없다는 정서가 확산됐다. 북한은 공세의 고삐를 바짝 조여가고, 미국은 발을 빼려하고, 그야말로 한국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공산화 도미노 현상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인도네시아가 공산화되고 월남마저 공산화되면 그 다음 차례는 한국이었다. 월남전은 한국 제2의 전선이었다. 안보만이 아니었다. 경제적으로도 암담했다. 1945년에서 1959년까지의 15년간, 미국으로부터 제공받은 원조액은 연평균 1억8천만 달러였다. 원조받은 잉여농산물, 유연탄, 석유 등을 시장에 팔아 그 돈으로 세출예산을 세웠다. 구호물자를 받아먹으면서도 봄에는 나무껍질로 연명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잉여농산물 유입은 농촌을 피폐화 시켰고, 젊은이들의 이농현상을 초래하여 수백만의 실업자를 유발시켰다. 대기업은 위에다 정부예산을 돈을 붓고, 밑에서는 업주와 정치인 및 관리들이 빼가는 돈통이었다. 오늘의 현상과 꼭 같다. 밀수품이 범람하고 정경유착으로 사회는 부패할 대로 부패해서 국가의 운명이 암담하기만 했다. 박대통령은 장충단 공관에서 집필한 그의 메모식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1956년부터 1962년까지 7개년간의 원조는 연평균 5억 달러였다. 경제원조가 2.8억불, 군사원조가 2.2억불이다. 환언하면 한국경제가 완전히 자립하자면 군사 면을 제외하고도 2.8억불과 무역적자 5천만 불을 합쳐 3.3억 불을 새로이 벌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그렇게 된다 해도 이는 현상유지 하는 데 그치는 일이다. 이에 가중되는 연평균 2.88%의 인구 증가, 즉 72만 명의 압력은 어찌할 것인가?" "원조를 받지 않고 우리의 힘으로 경제를 운용하는 것은 기적 이외에 바랄 것이 못되지 않는가? 위기를 고하는 수많은 국민의 생활난, 해마다 늘어만 가는 식량부족, 30%의 실업율, 모두가 시급한 해결의 길을 바라고 있는데 반해 해결방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기회는 간절히 찾고 있는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다. 당시 박대통령의 마음은 오직 경제와 안보로 가득 차 있었다. 그에게 월남전은 기회로 보였다. 그래서 그는 1961년11월 중순 케네디 미 대통령을 만나 한국군 파월을 처음으로 제안했다. 앞을 내다보는 그의 혜안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미국이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파월 제안을 그가 먼저 한 것이다. 당시는 물론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봐도 주한미군을 잡아 두고, 경제 성장을 위한 원조를 늘리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파병하는 길밖에 없었다. 한국은 미국과 월남 정부로부터 수 차례에 걸쳐 파병 요청을 받았다. 미국은 6.25때 피를 흘리면서 한국을 구출해 주었는데, 그 미국이 어려움에 처해 있으면서 도움을 청하는 마당에 거부한다는 것은 의리에도 어긋나지만 어려움을 당할 때 미국의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는 최악의 선택이었다. 한국군의 파병으로 주한미군은 "인계철선" 역할을 떠맡게 됐다. 미국에 의해 끌려간 것이 아니라 미국이 요구하기도 전에 미국의 바둑판을 읽어주고 훈수를 두며 미국의 힘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이용한 것은 박대통령의 혜안과 능동적인 결단의 결과라고 본다. 3. 참전으로 인해 사고방식과 무기가 현대화됐다 당시 한국군의 실정을 보자. 한국군 유지비의 70%가 군원으로 충당 됐다. 군간부들은 한편으로는 박봉에 시달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루한 군사문화에 숨 막혀 했다. 소위의 국내 봉급은 겨우 5,350월, 소득세 등을 제하고 나면 실수령액이 4,596원이었다. 환율은 1달러 당 255원이었다. 불과 18불이었다. 고급장교들은 시각이 좁아 공연히 부하 간부들을 괴롭혔고, 비전 없는 군 생활에 하급장교들의 불만은 포화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바로 이때, 장교들에게는 눈이 번쩍 뜨이는 기회가 생겼다. 파병해서 죽고 사는 건 그 다음의 문제였다. 우선은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다. 전투경험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남부다 뒤떨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비겁한 것이라고까지 생각했다. 당시 소위의 전투수당은 152달러였지만 32달러는 정부가 가져가고 120달러만 주었다. 그래도 국내봉급까지 합치면 월수입은 7.6배로 향상됐다. 파월 장병들의 사회적 인기는 대단했다. 이광재 아나운서는 "국가의 명예를 양어깨에 짊어지고 보무도 당당히 행진하는 저 늠름하고 자랑스러운 대한 건아들의 모습을 보라"며 북받치는 감격을 주체하지 못해 눈물을 흘렸고, 연예인, 주부, 여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행진하는 파월 장병들에게 꽃다발을 걸어주었다. 종로 통의 거리와 빌딩 속 창가에는 환송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당시에는 파월장병이 최고의 인기였다. 전국에서 위문품이 쇄도하고, 쏟아지는 위문편지, 펜팔이 장병들을 신나게 했다. 대한 뉴스의 앞머리는 거의가 다 파월 장병의 업적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러한 감격은 파월 장병의 가슴에 가장 아름답고 신났던 추억으로 살아 숨쉬고 있다. 파월로 인한 가시적인 성과는 엄청나다. 그에 못지 않게 중요했던 것은 군의 현대적 사고방식과 행정현대화였다. 합리적인 사고 방식을 훈련하고, 국제 매너에 익숙해지게 됨으로써 군사문화가 획기적으로 발전됐다. 이는 해외 유학보다 더 큰 기회였다. 한국군은 실전경험 특히 북한의 최고 위협이 되고 있는 비정규전 능력을 쌓게 되었고, 초 현대무기에 대한 개념을 터득했으며, 연합작전의 중요성과 방법에 대해 눈을 뜨게 됐다. 오랜 동안 외국의 지배를 받아왔던 피압박민족에 배어있던 무기력함과 자조적 열등감을 극복하고 우리도 하면 된다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인해 오늘날과 같은 한국이 있게 된 것이다. 필자는 월남에서 42개월간 근무했다. 필자의 인생에 있어 가장 황금기요, 가장 값진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은 바로 월남이다. 인생을 회고할 때, 가장 이야기 거리가 많은 곳이 바로 월남이다. 파월 기회는 필자를 군인으로서 성장시켰고, 전쟁이 무엇인지에 대한 확실한 개념을 잡게 했고, 지휘와 경영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수를 터득시켜 주었다. 월남전을 계기로 한.미 안보관계는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했다. 1961-65년, 5년간의 군사원조 총액은 8억1,500만 달러였다. 하지만 1968-72, 5년간에는 22억8,700만 달러로 껑충 뛰었다. 신예구축함 2대, M-16소총 국산화 지원, 유도무기 지원, 각종 방위산업 기술 이전, 파월 군 전체의 신무기 무장, 3개 향토사단의 정규 사단화, 17개 육군사단 및 1개 해병사단의 장비 현대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신무기 및 방위산업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원동력이 되었다. 1964년까지도 구호물자를 배급받던 신세에서 불과 4-5년만에 우리 힘으로 경제를 운용하게 됐고, 웅크리던 자세를 탈피해 해외진출에도 문제없다는 자신감을 얻게 했으며, 불과 8년만에 우리의 돈으로 방위산업을 육성하고, 군 장비를 현대화시킨 것이다. 그 외에도 외교 역량의 증대 및 한미 안보 관계의 강화는 돈으로는 환산될 수 없는 엄청난 도약을 가져다주었다. 막연히 돕겠다던 느슨한 협력관계가 "인계철선"과 "핵우산"이라는 구체적인 협력관계로 전환됐다. 아마도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기회가 못 마땅하여 주월한국군을 격하시키려 할 것이다. 베트남전을 민족해방세력과 반역세력간의 대결로 정의하고, 미군과 한국군 등을 반역군으로 정의한 친북 세력은 아마도 김일성에게 민족해방의 기회를 허락해주지 않은 한.미안보협력강화 등을 비롯한 박정희의 업적을 못 마땅해 할지도 모른다. 4. 월남 참전이 이룩한 경제성장 효과 1966-1972년간 월남에서만 직접 획득한 외화는 8억7,250만 달러였다. 이중에서 장병 송금액은 1억7,830만 달러로 베트남으로부터의 송금된 전체 외화의 20.4%에 불과했다. 나머지 80%는 베트남으로의 수출, 베트남에의 군납, 파월 기술자 송금, 파월 지원경비, 파월 건설 및 용역에 의한 수입이었다. 미국의 후원과 한국군의 맹활약, 월남특수가 일궈낸 "신인도"에 따라 외국자본이 물밀 듯 들어왔다. 원조, 차관, 상품 및 용역 수출의 물꼬가 터졌다. 1965-1972간 외자 도입액은 32억8,820만 달러나 됐다. 대미수출을 보자. 1964년에 3,600만 달러였던 것이 1973년도에는 10억2,120 달러로 도약했다. 주한미군이 한국에 뿌린 돈이 8억 달러, 군원이관 중단액이 9,300만 달러 등 총체적으로 한국군이 월남특수로부터 얻어들인 경제적 이익은 50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된다. 장병 1인당 17,000 달러씩 국가에 기여한 것이다. 이는 소위봉급 83년 치에 해당하는 돈이다. 이는 장장 14년간의 교섭 끝에 1966. 6.3일에 얻어낸 대일 청구자금 즉 무상원조 3억 달러, 재정차관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도합 8억 달러에 비하면 엄청난 금액이다. 외화보유고를 보자. 1964년도 외환보유고는 겨우 1억 2,800만 달러였으나, 1975년에는 15억4,000만 달러, 1978년에는 49억4,000만 달러로 폭증했다. 남북한 1인당 GNP를 보자. 1953년, 남북한 1인당 GNP는 각기 67 달러와 53 달러로 남한이 1.2배 더 높았다. 그러나 1959-1965 6년간에는 역전됐다. 남한이 북한의 60-70% 수준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월남이 패망한 1975년에는 남한이 북한보다 1.4배 앞섰고, 1997년에는 남한이 12.8배로 앞서가고 있다. 한국군은 월남의 8개항만 중 5개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월남의 주요 공사는 한국 기업이 맡았다. 당시 천막회사였던 한진과 현대는 기술도 없이 담요나 모기장 그리고 급수 대책도 없이 무작정 월남 땅으로 상륙했다. 한진은 월남에서 1.5억 달러를 벌어들였고, 현대는 캄란 부두 공사 500만 달러를 비롯하여 연평균 100만 달러 이상의 계약고를 올렸다. 1974년초 청와대 오원철 경제 수석이 박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중동은 고온에다 모래 바람이 부는 열악한 땅이다. 금녀, 금주의 땅이라 선진국 근로자는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가려 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군인 정신으로 무장된 수십만의 제대 장병이 있습니다. 월남 참전 용사들도 많습니다. 여자 근로자가 만든 상경공업 상품을 수출하여 지탱해오던 한국경제의 패턴을 바꿔야 합니다". 1965년-75년 9년간 중동건설 수주액은 불과 2,400만 달러였다. 1974년에는 8,900만 달러, 1975년에는 7억5천만 달러, 76년에는 24억3,000만 달러, 77년에는 33억 8,700만 달러, 78년에는 79억 8,2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오늘날의 기록과 비교해 보라. 그 엄청남 기술과 해외수주 기록을 가지고도 지금 현대를 비롯한 한국의 모든 건설업이 중동 수주에 냉대를 받으면서 줄줄이 도산하고 있지 않은가? 박대통령이 집권하기 이전에 한국엔 일자리가 없었다. 당시의 공식 통계만으로도 실업률은 1963년 29.9%, 1994년에는 29.7%였다. 공장이라고는 겨우 제분, 제당, 제약 회사들과 같은 것뿐이었고, 기계공업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손톱깎이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강도와 정밀도를 규정하는 스펙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사회 전체가 무력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청년들에겐 앞길이 막막했다. 박대통령은 월남에서 벌어들인 돈을 가지고 경부선, 댐공사, 발전소 등 대규모 인프라를 건설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능학교들을 세워 기능공을 대량으로 양성했다. 국제 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은 한국이 독차지했다. 한국은 기능공의 나라가 됐다. 박대통령은 외국에 특사들을 내보내 한국에 값싸고 질 좋은 기능공들이 많으니 들어와 공장을 지어달라고 호소했다. 대통령을 신뢰한 외국기업들이 줄줄이 들어와 공장을 지었다. 일자리가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다. 눈물과 한숨의 대명사 "보리고개"라는 말이 없어졌다. 5. 파월 한국군에 대한 평가 육군3사관학교부설 충성대 연구소는 1999년에 1,000명의 일반 국민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69.1%가 파병된 한국군을 좋게 평가했고, 좋지 않다고 평가한 사람은 불과 6.8%로 나타났다. 파병이 국가발전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85.8%가 기여했다고 대답했고, 불과 4.8%만이 저해됐다고 답했다. 88.1%가 경제성장의 계기가 됐다고 답했고, 2.4%만이 악영향을 끼쳤다고 답했다. 파월이 국가발전에 기여했다고 보는 사람도 연령에 따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60대 이상에서는 89.0%가, 40-50대에서는 94.6%가, 20-30대에서는 60.7%가, 파월이 국가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했다. 위 연구소가 265명의 참전 용사를 대상으로 조사했다. 다시 참전하라면 하겠느냐는 질문에 장교의 81.2%, 하사관의 83.3%, 병사의 59,7%가 재 참전 의사를 밝혔다. 파월 장병의 모습이 훌륭했다고 생각하는 장병이 69.1%, 파병이 국가발전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장병이 76.4%였다. 베트남 참전은 조국근대화를 이끌어낸 원동력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반 국민에게는 파월 한국군의 성과에 대한 결산서가 제공된 적이 없다. 이는 국가발전의 최고 수훈자들인 파월 장병들의 노고를 묻어버리는 매우 서운하고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이러한 빈틈을 파고들어 파월 한국군을 학살집단이요 용병으로 매도하는 집단이 있다. 33세의 여성 특파원 구수정씨를 중심으로 모인 희한한 집단이다. 그녀는 국내에서 국가 소용사태에 관련돼 처벌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겨레 21, 동국대 강정구 교수,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 등이 구수정 여인을 추종하면서 베트남 양민 학살론을 창조하고 있다. 이는 박정희 전대통령을 격하시키고, 32만 파월 장병 및 500만 파월 가족의 명예는 물론 한국군 전체의 위상과 명예를 격하시키는 음모다. 1999년 9월2일자 한겨레21 273호가 주월 한국군을 20세기의 광기와 야만 그리고 용병으로 정의했다. 베트남전을 민족해방세력과 반역세력간의 대결로 정의했고, 미군, 한국군, 월남군 그리고 월남전에 참전한 호주군, 뉴질랜드군, 대만군, 필리핀군, 태국군, 영국군을 반역군으로 정의했다. 정확히 공산주의 로선이다. 구수정이라는 여성 통신원이 이끄는 폭로 기사는 1년이 넘도록 계속됐다. "젖먹이까지 죽이고도 모자라 무덤조차 불도저로 밀어버렸다", "갈기갈기 찢겨져 흩어진 살점과 뼛조각을 주우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 . 하늘도 눈이 멀던 그날에". 동국대 강정구 교수는 2000년3월2일 한겨레 297호에 "베트콩과 양민을 구별할 수 없다는 논리는 억지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베트남 학살은 의도적이고 체계적이며 조직적인 수준에서 대거 이뤄졌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농부, 농민, 임산부, 수님, 아내, 어린 자식 등 무장을 하지 않은 이들이 대량 학살됐다. 한국군이 마을에 들어와 마을사람들을 불러보아 음식을 나눠줘 안심을 시킨 뒤, 집단사실을 자행하는 것이었으며, 교전 중에 사실된 것이 아니라 작전과는 무관한 마을이 통채로 학살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세계의 깡패국가인 미국의 오만이 원천적으로 양민학살을 잉태했던 것 같다". 이어서 한국군의 양민학살 유형을 "무차별 기관총 난사, 대량 살육, 임산부 난자살해, 강간살해, 가옥 불지르기, 아이들의 머리 깨트리기, 목자르기, 사지절단후 불에 던지기, 돌아가며 강간한 후 죽이기, 임산부의 배를 태아가 빠져 나올 때까지 군화발로 짓밟기, 마을 땅굴로 몰아넣고 독가스로 질식하기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 대부분의 월남 주민에게 한국군 따이한은 친절과 구원의 따뜻한 손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런데 28년이 지난 이 시기에, 베트남 사람들도 들추려 하지 않는 주제, 국익에 역행하는 주제를 왜 하필 이들 세력이 제기하고 나서는가?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한 것이라면 수많은 미해결의 문제들 중에서 왜 하필 파월장병이어야 하며, 그렇다 해도 왜 하필 이 시기이어야 하는가? 주한미군, 박정희 대통령, 한국군을 증오하고 격하시키면서 모종의 작전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6. 불순한 의도로 시작된 양민학살론 대부분의 국민이 파월한국군에게 찬사를 보낸다. 세계 언론들이 한국군의 활약상을 극찬했다. 유독 한겨레21에 모인 세력만이 불순한 의도를 품고 있다. 한홍구 교수는 2000. 6. 1일자 한겨레21에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베트남파병은 한국현대사의 치욕", "베트남전 파병문제를 제쳐놓고선 박정희 시대 를 정당하게 평가할 수 없다",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보내면서 그들의 피 값조차 덤핑해버렸다". 한 교수 진영 싸이트에는 "박정희란 인간에 대한 철저한 폭로"라는 제 하에 그를 "민족의 반역자", "반란군 수괴", "빨갱이", "매국노"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박대통령에 대한 증오가 그의 업적인 "파월한국군"에 대한 증오로 변질된 것이 아닌가 싶다. 월남에서 한국군에 대한 원성의 소리가 1이라면 따이한에 대한 칭송의 소리는 1만도 넘을 것이다. 통신원이 월남인들에게서 느낀 비참함이 크게 느껴졌다면 고엽제를 대물림하고 있는 한국군 전사들의 고통과 가족들의 비참함은 아마도 그 백 배는 넘을 것이다. 구수정이 베트남을 휘젓고 다닌다. "한국군이 당신에게 무슨 손해를 끼쳤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없는 말도 지어낸다. 한국인이 나타나면 무엇이든 도와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도움을 주지도 못하면서 기대를 갖도록 선동하는 것이야말로 기만행위다. 그들의 주장대로 한국군이 닥치는 대로 죽였다고 하자. 그랬다면 32만5천명의 용맹스러운 한국군이 9년 동안에 겨우 5,000-9,000명만 죽였겠는가? 도대체 한국군의 학살 능력이 그것 밖에 안 된단 말인가? 월남민간인 사망자는 150만-200만으로 발표돼 있다. 그 중에서 한국군이 겨우 9,000명을 죽였다면 그 150배에 해당하는 나머지는 누가 다 죽였는가. 베트남군과 미군이 죽인 것 아닌가? 한겨레21 세력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 150배에 해당하는 학살에 대해서는 어째서 함구하고 유독 한국군만 물고 늘어지는가? 베트남에도 "학살진실위원회"가 생겼으며, 미국에도 그런 위원회가 생겼는가? 한겨레 고경태 기자, 구수정, 강정구 교수는 얼마나 훌륭한가? 필자는 고경태 기자로부터 전화 폭력을 받은 바 있다. 강 교수는 친교모임에서 북한문제에서 논리를 달리 한 사람에게 감정을 폭발한 적이 있다. 이런 그들이 진실을 추구한다면 누가 믿겠는가? 주월한국군의 대민지원 실적을 보자. 대민치료 480만 명이다. 제 발로 걸어온 주민 480만을 왜 닥치는 대로 죽이지 않았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집 없는 주민에게 가옥 1,744개 동을 지어 주었다. 교실 357개동, 교량 136개소, 직업학교, 탁아소, 마을 회관, 고아원, 종교시설 등 1,210개 동을 지어 주었다. 베트콩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건물을 지으려면 밤사이에 베트콩이 폭발물을 설치하지 못 하도록 보초를 서야 한다. 이렇게 고단한 작업을 왜 "닥치는 대로 죽이고 싶은 주민"에게 그토록 많이 지어주었는지 그들은 설명해야 한다. 12만 톤의 식량도 나눠주었다. 경로잔치, 친선잔치, 양로잔치, 고아잔치 등 8,140회를 열었다.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면 소문이 나서 아무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9년 동안 8,140회씩이나 잔치초대에 응했는가? 지난 7월 14일자 동아일보는 '민간인사살' 사례를 처음으로 실었다. 68년 김종수 소위가 매복을 나가 새벽에 도망가는 5명의 월남인에게 사격을 가했다. 그는 주월군 군법회의에 기소돼 사형언도를 받고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받았다. 오마이뉴스는 "민간인 살해는 없었다는 국방부의 공식입장을 뒤집을 수 있는 증거다"라고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기뻐했던 진실은 그들의 무덤이었다. "조직적인 학살"이 이뤄졌다면 왜 한국군은 김종수 소위를 감싸주지 않고, 사형을 선고했는가? 이에 대해 우리는 양민을 살해한 김종수 소위를 욕할 수는 있어도, 그를 준엄하게 처벌한 한국군은 칭찬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줄기 주변엔 수많은 물방울이 튄다. 김종수는 물방울이다. 양민학살론은 결국 물방울을 물줄기인 것처럼 왜곡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폭로하고 말았다. 7. 한심한 용병론 한겨레21에 실린 한 교수의 글이다. "동일계급을 비교할 때, 필리핀군이나 태국군의 30-40%에 불과한 싼값에 우리 젊은이들을 베트남으로 보냈을까?", "대일 청구권 문제는 무상 2억 달러, 유상 3억 달러의 형편없는 헐값에 끝내고 말았다. 당연히 일본으로부터 배상 받아야 할 금액을 받아내지 못하고, 그걸 보충하려고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보낸 박정희가 유능한 대통령일 수 있을까?", 한 교수는 2000. 5. 6일 심야토론에서 용병론의 근거를 값싼 피 값이라고 했다. "한국 소장 354불, 필리핀 소대장 442불, 태국 소대장 389불"이기 때문에 값싼 용병이란다. 소위 수당을 보자. 한국군 151.55 달러, 월남군 103.35, 미군 435.85, 필리핀군 441.92, 태국군 389.33 달러였다. 여기에서 한 교수는 눈에 보이는 비교표만 본 것이다. 이런 비교는 누구라도 한다. 필리핀과 태국은 한국군이 누렸던 특수를 누리지 못했다. 파월 기간중 한국군 병사가 고국에 송금한 수당은 1억7,830만 달러에 불과했지만 한국군과 직접 연관되어진 "월남으로부터의 송금액"만 해도 8억5,760만 달러다. 수당은 전체 송금액의 불과 20%에 불과한 것이다. 이를 가지고 각국 장교들과 비교해보자. 한국군 소위가 직접 받는 수당은 불과 151.55 달러지만 소위 한 사람이 정부에 벌어준 돈은 757.75 달러였던 것이다. 이는 가장 많이 돈을 받는다는 필리핀 장교 수당의 1.7배나 된다. 여기에 무역, 외자 유치 등의 효과를 합하면 1인당 17,000달러가 된다. 이는 필리핀 소위 수당의 40배나 된다. 여기에 파월 효과가 빚어낸 외국인 투자, 수출효과, 해외진출 효과, 이민효과, 경제 및 군사원조, 한국군 현대화, 방위산업, 대미수출, 중동특수, 한강기적이 일궈낸 가치 등을 종합해보자. 태국과 필리핀에게 이런 특혜가 주어졌던가? 숫자를 놓고 단순 비교를 하는 것은 누구라도 한다. 한국현대사를 쓰고 있는 교수의 분석력과 시각이 이러하면 한국현대사에 문제가 있다. 1860대대 초에 국가별 위상을 보자. 1960년 1인당 GNP는 남한이 79달러, 북한이 117 달러였다. 이때 필리핀이나 태국은 한국보다 3배나 더 높았다. 주한미군부대에 근무하는 근로자가 미국인 근로자만큼 받지 못한다. 중국, 스리랑카 등에 임금이 싸다. 그래서 공장이 싼 임금을 찾아 해외로 진출한다. 그 나라 사람에게도 한국인의 임금을 주어야 하는가? 당시 우리보다 3배 이상 잘 살았던 필리핀이나 태국이 우리보다 더 많은 수당을 받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한 교수의 글에 나타난 대일 청구권 배상액도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는 무상원조 3억 달러, 재정차관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인데도 불구하고 한홍구 교수는 "대일 청구권 문제는 무상 2억 달러, 유상 3억 달러의 형편없는 헐값에 끝내고 말았다"고 적고 있다. 사실과 다르지 않은가? 채명신 사령관은 세계적으로 박대통령보다 더 지명도가 높은 영웅이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제너럴 웨스트모어랜드보다 제네럴 채가 더 유명했다.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1명의 양민을 보호하라"," 주월한국군은 누구나 다 외교관이다. 예의를 가지고 주민을 대하라". 내무반마다 이 구호는 부착돼 있었다. 국민적 숭앙을 받던 명장을 "양만학살의 수괴"요 "용병의 수괴"로 폄하하는 행동은 32만5천 파월장병과 500만 가족들에 대한 도전행위로 밖에는 해석이 안 된다. 한국에는 인물이 없다는 말을 듣는다. 바로 이러한 격하운동 때문일 것이다. 용병이란 사적인 이익을 위해 돈을 받고 전투를 해주는 피고용인이다. 그래서 제네바 협정의 보호대상이 될 수 없다. 파월 한국군은 스스로는 적은 돈을 받으면서 국가발전에는 천문학적으로 기여한 1등 공신이다. 필자는 소위 때, 월남에서 미군 소령의 발 밑에 대고 총을 연발로 발사한 경험이 있다. 용병 개념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팔려간 주제"에 주인 군대에게 그런 대담한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파월장병 모두에게 물어 보라. 용병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를. 8. 한국군 격하운동, 숨겨진 의도가 있다 한겨레21 등이 베트남 양민학살론을 지어내 한국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던 1999년 9월 느닷없이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이 자극적인 이슈로 부각됐다. 이는 반미정서 형성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노근리를 뻥 튀겨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베트남전을 뻥 튀겨 한국군을 격하함으로써 결국은 적화통일의 장애물을 제거해주려는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매향리 사격장 문제, 독극물 사건 등 미군의 약점만 나타나면 즐거워 비명을 지른다. 다른 것은 몰라도 노근리 사례만큼은 전쟁터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인민군이 어린아이와 부녀자를 앞세우고 미군의 인도주의에 기대를 걸면서 접근해 왔다. 아녀자들이 미군의 보호를 받는 척 하다가 갑자기 돌아서면서 수류탄을 던졌다. 월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밤중에 아녀자들이 "따이한"을 외치면서 다가왔다. 공산주의자들의 잔인한 전법을 알리 없는 대대장은 차마 쏘지도 못하고 상부에 호소했다. 채 사령관의 원격 지휘로 아녀자 그룹의 뒤에다 박격포를 쏘아대고, 머리 위로 예광탄을 쏘아댔다. 그래도 베트콩은 뒤에서 포복해 오면서 아녀자들을 협박했다. 드디어 부대 정문 앞 50m, 최후 저지선 땅바닥에 예광탄을 쏘아댔다. 그래도 다가오는 아녀자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아녀자들의 전진이 멈춰졌다. 뒤에서 무자비하게 아녀자들을 내몰던 베트콩도 달아나기 시작했다. 수색을 해보니 수십 명의 베트콩이 총을 든 채 죽어 있었다. 바로 이런 게 노근리와 월남전에서 보여준 공산세력들의 악랄한 전쟁수법이다. 노근리 문제가 보상문제로 확대된다면 미 의회가 나서서 주한미군 철수문제를 거론할 수 있다. 이는 바로 주한미군철수국민운동본부의 전략적 목표다. 주한미국철수 국민운동본부는 약자로 "미철본"으로 불리며 "주한미군 철수를 위해 투쟁하기 위한 모임"으로 규정돼 있다. 강정구 교수는 www.onekorea.net에서 주한미군의 행패들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노근리 양민학살, 대전형무소 정치범 학살 묵인 조장, 휴전선 고엽제 살포, 파주 폭발물 소동, 각종 인권침해 사건 등에 대한 "민중"들의 "뼈저린 한"을 역설하고 있다. 남한 자체로도 충분한 억제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주한미군은 철수돼야 하며, 모든 군사동맹 체제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학술단체협의회가 전투적인 북한식 용어를 그대로 사용해 주한미군을 내몰자고 외친다. 이 홈페이지에는 "북한은 남침을 할 수 없다"라는 제 하의 리영희 교수의 글도 실려져 있다. 북미주조국통일동포회의가 "주한미국 없는 21세기 한반도를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감정적 구호를 사용하여 미국의 제국주의 로선과 만행을 규탄하고 나섰다. 범민련남측본부도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민족자주 조국 통일 이루자"는 제 하의 글을 싣고 있다. "제국주의가 발악하고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다", 제국주의는 반드시 망한다. 그러나 저절로 망하지는 않는다", "민족자주의 기치를 높이 들고 조국통일의 한 한길로 내달리자", "흐릿한 인공위성 사진 하나로 이북을 세계적인 악당으로 몰고 있다", "뻔한 인공위성을 미사일로 몰아간다", "주한미군이 통일을 가로막고 있다" 등의 투쟁적 구호들이 난무하고 있다. 이들은 "월남전"을 "민족해방전쟁"이라고 정의했고, 미군, 한국군 ,월남군 그리고 다른 6개 참전국들을 반역세력으로 몰았다. "한국전쟁" 역시 북한 인민공화국에 의한 "민족해방전쟁"이었고, 미군과 한국군은 반역세력이라는 논리를 편다. 이들은 "한국전과 월남전을 더러운 전쟁"이라고 부른다. 국가의 부름을 받고 나가 희생당한 젊은이들을 "미군보다 잔인했던 용병"으로 규정하고, 월남에서 "친절한 따이한"의 명성을 세웠던 주월한국군을 반역세력이요 용병으로 매도하는 것은 분명 북한을 돕기 위한 "한국군 격하운동"이다. 주한미군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기고, 한국군을 격하시켜 군과 민을 분리하는 것은 바로 북한 공산당이 바라는 최고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