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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누구인가? ( Who are yo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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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연 (Joyoon Cho)
현 퀸즈칼리지어트 학장, 문학박사 (사회언어학)

2 Gibbs Road, Toronto, ON, M9B 6L6, CA
416-231-3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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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5
보고 듣고 느끼고 배우고 행동하는 학생이 되어야

벌써 가을기운이 든다. 지구의 온난화 (global warming) 영향인지 요즘은 날씨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미국대학탐방기간에 버지니아에서 경험했던 날씨는 높은 습도 때문이었는지 그야말로 끓는
더위 (sizzling hot) 에 다름 아니었다. 여기저기 벌써 낙엽이 지기 시작한다. 옛날 중국의 한 시인
(poet) 은 오동 닢 한 닢이 지는 것을 보고 천하에 가을이 왔다고 읊었지만 오늘 날 어떤 사람들은
한 겨울에 소복이 쌓인 눈을 보고도 겨울이 아니라고 우기는 형상이니 ‘지록위마’ (指鹿爲馬) 라는
고사성어가 나온 연유를 알만하다.

 

사람이 태어나서 부모에 의해 길러지고 스승에 의해 교육을 받고 사회에 나가서 자아를 실현하고
인격적으로도 성숙하여 가정을 이루며 다시 부모가 되어 자녀들을 기르고 스승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자녀들이 국가와 사회를 위해 일하게 하다가 늙게 되어 마침내 인생을 마감하는 인생의
주기 (life cycle)를 갖게 된다. 여기서 태어나는 것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부모에 의해 길러지고 스승에 의해서 교육받는 동안, 그러니까 대학을 졸업하기 까지 약 23년간은
부모의 식솔 (dependant)로서 혹은 선생님의 제자 (student)로서 지내게 된다. 자기가 먹고 자고
공부하는 것을 스스로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고 보호받고 (protected), 지원받고 (supported),
교육받는 (educated) 피동적인 주체인 것이다. 이 기간이 인생의 학습기간 (learning period)
인데 배우는 자는 ‘보고-듣고-느끼고-배워서-행동하는 자세’를 가져야 마땅한 것이다.


이런자세는 아주 기본적인 것이지만 왠지 이런 학생들을 만나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으니 왜 그럴까?
학생들이 오해하는 한 가지는 ‘범생이’ (모범생의 속어) 가 싫다는 것인데, 남과 다른 사람이 되려면
뭔가 특별히 튀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말을 오해하는 듯 하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그 분야에서
그야말로 특별한 ‘범생이’ 인 것이다. ‘범생이가 싫다’는 말은, 특별한 분야에 뛰어나는 사람들은 그
분야에 특별한 ‘범생이’었다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간과 (disregard) 한데서 나온 학생들의 자기
합리화인 듯 하다. 우리 젊은 학생들이 보고-듣고-느끼고-배워서-행동하는 (I see, I listen, I feel,
and I do) 의 법칙을 알면 얼마나 좋을까 하여 여기에 대해 몇 마디 하고자 한다.

 

우리는 눈이 있어 언제나 주위를 본다. 사람을 보고 사물을 보고 자연을 바라본다. 부모와 친구와
선생님과 주위의 사람들을 본다. 좋은 사람들과 아름다운 사물들을 보면 그런 모습들에서 배워야
한다. 자기를 언제나 투사 (project) 하여 자기를 늘 비춰 (reflect) 보고 부족하다 싶으면 배워서
(learn)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아름다운 모습들을 닮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런 노력이
없으면 부모를 통해 눈 (eyes) 을 만들 주신 창조주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상상을
초월하는 자연의 장관인 그랜드 캐년 (Grand Canyon) 을 보고도 ‘산에 주름 좀 잡아 놓았구먼’
이라며 감탄 할 줄을 모르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풀 한 포기 없는 황무지를 보고도 ‘와, 멋있군
(Wow, wonderful)’ 이라며 감탄하기도 한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 생각의 태도가 완전히
반대이기에 그렇다. 긍정적인 사람 (positive person) 은 하찮은 일에서도 느끼지만 부정적인
사람 (negative person) 은 대단한 것을 보고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일출 (sun rising) 을
보면서 과연 해의 고마움과 천지창조의 경외감 (wonder) 을 얼마나 느껴보았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공기의 중요성과 고마움을 과연 얼마나 느끼며 살고 있는가? 화창한 날 (sunny day),
구름 낀 날 (cloudy day), 바람 부는 날 (windy day), 비 오는 날 (rainy day), 심지어는
폭풍이 부는 날 (stormy day) 도 모두 얼마나 아름답고 숨막히게 멋진 자연 현상인 것을 얼마나
느끼며 살아가는가?


필자가 어렸을 때 5.16 장학생으로 ‘청오 (靑五)’ 라는 잡지를 정기적으로
받아보았다. 맨 첫 번째 속 표지에 ‘음수사원 (飮水思源)’ 이라는 한자성어가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그 속 뜻을 몰랐었다. 뜻을 해석은 했으되 정말로 그 뜻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는
말이다. 사람이 물을 마실 때도 그 물이 어디에서 나왔으며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 원천을 알라는
말씀인 것이다. 여기에는 학문의 태도가 들어있고 자신의 부모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두 눈이
있어 아름다운 것들과 추한 것들을 모두 보게 된다. 아름다운 것은 배우고 닮아가며, 추한 것은
멀리하고 배우지 말아야 한다. 보고 느껴서 배우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언제나 마음에
간직해야 한다.

 

우리는 귀가 있어 사람들의 말을 듣게 된다. 우리가 어려서 학습하는 기간에는 특히 부모님과
선생님들로부터 좋은 말씀을 듣게 된다. 그런데 이 좋은 말씀이 충고 (advice)로 들리지 않고
비난함 (blame)으로 들려서 서운함으로, 서러움으로 해석되기 일쑤이다. 잘되라고 하는 좋은
말씀이 자기를 책망하는 것으로만 들리는 것은 왜일까? 역시 부정적인 태도 (negative attitude)

가 그 원인이라고 진단된다. 사람이 부정적이 되면 그 끝이 안 보인다. 어떤 경우는 칭찬도
칭찬으로 안 듣고 가식적인 칭찬 (fake compliment) 이겠지 라고 해석해버린다면 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사람은 보고 들을 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두 눈 (two eyes)
과 두 귀 (two ears) 를 주셨지만, 말은 적게 하라고 입을 하나만 (one mouth) 주신 것이라고
여겨진다. 관심 (concern) 이 없이는 소위 충고가 불가능 하다. 충고를 안 듣게 되면 이를
반복하게 되기에 소위 잔소리 (nagging) 로 들리게 된다. 충고를 잘 들어 이를 고치는 자녀에게
잔소리하는 미련한 부모는 세상에 없다. 부모는 어떻게 하면 칭찬을 해줄까 기회를 보고, 부모는
어떻게 하면 용돈을 더 줄까 자녀의 훌륭한 점을 찾기에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런 부모의 심정을
모르고 서운하게 들리고 잔소리로 들리고 지겹다며 부모를 탈출하려는 자녀가 있다면 그런 원인이
어디에 있나를 생각해 볼 일이다. 모든 것은 자신이 문제라는 엄연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낳아서
길러주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공부시켜주는 부모에게 자녀가 할 일은 서운함을 느끼는 못난 생각이
아니라, 말씀을 잘 따르고 듣고 감사해야 할 일 이다.

 

우리는 두 눈이 있어 보아야 하고, 두 귀가 있어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보고 들으면 느껴야 (feel) 하며, 느끼면 또한 행동으로 실천 (do) 할 줄을 알아야
한다. 느낄 줄을 모르면 보고 들어서 무엇을 하며,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느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Immanuel Kant라는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를 잘 안다. 그는 ‘너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너는 해야 하기 때문이다 (You can, because you shall)’ 이라고 설파했다. 물론 행동을
강조한 말이다. 그가 저술한 책 중에서 ‘순수이성비판 (純粹理性批判)’ 보다 ‘실천이성비판 (實
踐理性批判)’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생각보다 실천이 중요하다는 이유에서이다.
서양문학에서 후세 사람들은 William Shakespeare 를 일컬어 ‘사상의 인간 (a man of thought)’
라고 하고, Christopher Columbus 일컬어 ‘행동의 인간 (a man of action)’ 이라고 한다.

 

전세계적으로 매 13일 마다 자신에 대해 한편의 논문이 발행되는 Shakespeare, 그가 없는 영문학이
어디 있겠는가 싶지만, 지구가 둥글다는 믿음을 죽음을 각오한 행동으로 실천한 Columbus 가 왜
세계의 역사 속에 남는지는 우리가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 젊은 학생들은 그들의 인생여정에서
지금 배우는 기간 (learning period) 이다. 그들의 할 일은 경제적으로 가정을 책임지는 일이
아니라 부모와 스승을 따르며 보고 듣고 느끼고 배워서 행동으로 실천하는 일이다. 인생의 중요한
시기 (critical period) 가 바로 지금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알고 항상 ‘보고-듣고-느끼고-배워서-
행동하는’ 그런 행동의 인간 (a man of action) 이 되기를 모든 젊은이들 에게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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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5
신언서판 (Posture-Speech-Writing-Judgment)

신언서판 (身言書判) 이라는 글 구절은 필자로서도 어렸을 때 들었던 터 라서 참으로 오래 전에
인구 (人口)에 회자 (膾炙) 되던 말이다. 그러나 교육현장에서 느끼는 절실한 심정이 바로 이
말의 중요성을 실감나게 하여 오늘의 주제 (topic) 로 삼게 되었다. 자녀교육에 관한 한(限) 어떤
말로도 일반화 할 수도 없고, 어떤 원인으로도 돌릴 수 없는 참으로 힘든 숙제라고 보인다. 왜냐하면
실질적으로 부모님들 간에 얘기를 하시다 보면 누구의 자녀 할 것 없이 문제가 있는 것 같고, 누구를
막론하고 내 자녀에게 더욱 기대를 하게 된다.

 

자녀의 문제점을 놓고 부부간에도 서로를 닮았다고 농담 (joking)을 하다가 종종 부부싸움으로
까지 발전하게 된다. 그러면 누구를 닮았을까? 양가의 조상까지를 모두 떠올린다. 부부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자녀가 기대에 못 미치는 수가 있고, 자녀를 아무리 공부 시켜도 성적이 안 나오기도
하고, 중학교까지 잘하다가 고등학교 말에 갑자기 충격을 주기도 하니, 소위 자녀문제는 결국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는 수 밖에 없다. “너희들이 내 뜻을 안 따르고 제멋대로 하니, 너희들도
자식들을 통해서 느껴봐라?” 라고 하시는 신의 메시지 (holy message) 같기도 한 것이다. 필자가
연구하는 언어학에서 언어의 기원을 논할 때 소위 이론이 많다. 언어 없이 어떻게 생각하며, 생각
없이 어떻게 언어가 나오느냐의 문제, 즉 언어와 생각 (language and thought) 중 “언어가
먼저냐, 생각이 먼저냐” 의 논란이 있다. 그래서 종국에 가서는 그러면 “하늘에서 떨어졌나?” 라고
체념하기 일 수 이다.

 

오늘 나누고자 하는 신언서판의 의미를 캐나다 식으로 말하면 Posture (몸가짐), Speech (말씨),
Writing (글씨), Judgment(판단력) 이 올 바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너무나 기본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신언서판을 골고루 갖춘 청소년들을 만나기가 정말 싶지는
않기도 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과연 신언서판을 지키는 일 일까? 사실은 아래와 같이 간단하다.
자녀들이 혹은 청소년 자신이 과연 나는 신언서판을 골고루 갖췄나 한번 스스로 생각해 볼 일이다.

 

신 (身 - posture) 은 몸 자세의 바름을 말한다. 어른 앞에서, 친구들 앞에서, 선생님 앞에서,
부모님 앞에서 과연 몸가짐이 그리고 복장이 흩어짐이 없이 올바른가 생각해 볼 일이다.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고 적절하며 예의 바르면 된다.

 

언 (言 - speech) 은 말씨와 말투, 말의 정확함, 말의 분명함, 말의 적절함 등을 포함한다. 인사를
먼저 해야 함은 물론 상대방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끝까지 마무리를 잘 해야 한다. 어떤 경우는
인사를 하다가 말기도 하고, 누구한테 인사하는지 호칭이 없이 인사하기도 한다. 더구나 한국TV의
영향이라면 지나친 추론일까? 대답하는 언사 중에 “아니거든요?” “어쩌라고요?” “심하게 (매우를
대신하여 쓰는 말)” 같은 말들은 보통이다. 많은 말들이 예를 들기 힘들 정도의 부정적 혹은 불량한
어투의 말도 많다. 굳이 학구적인 말들을 쓰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공부를 하는 학생의 순수하고
올바른 어법이 아쉬울 경우가 많다.

 

서 (書 - writing) 는 소위 글씨를 말한다. 글씨를 보면 그 사람의 마음가짐과 태도를 안다고 하면
지나친 말 일까? 그러나 글씨를 잘 쓰라고 부모님들께서 말씀하셨을 때 정성 드려 연습했더라면
1시간만 연습했어도 될 일이었다. 말씀이 듣기 싫고 자신의 것만 고집하다 보면 평생 같은 식의
글씨로 굳어지게 된다. 글씨가 작았다 컸다 누웠다 일어섰다 야단이다. 어떤 어른이 한 말씀이
생각난다. 아무도 걷지 않은 흰 눈이 소복이 쌓인 길을 걷게 해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눈 위를 걸어서 생긴 발자국이 얼마나 똑바로 갔는지 보면 그 사람의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글씨는 어떨까? 글씨야 말로 그 사람을 볼 수 있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의 반영
(reflection) 이 글씨로 나온다고 볼 수 있기에 그렇다.

 

판 (判 - judgment) 은 판단력인데 이것 또한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부모님의 말씀도 서운하게
듣고, 선생님의 도움 말씀도 때로는 기분 나쁘게 들리고, 친구들을 사귈 때도 판단을 잘 못하는 수가
참으로 많다. 특히 이성간에는 하늘의 이치인지 이상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끌리게 된다. 남자는
여자의 외모에 끌리고, 여자는 남자의 속삭임에 끌리게 된다. 그래서 남자들은 “눈이 멀었다”고
하고, 여자들에게는 “귀가 먹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여기서 이성의 문제로 까지 논의를
확대하고 싶지는 않다. 자기에게 올바른 얘기를 쓴 소리라도 잘 받아들이고, 자기에게 올바르지

않은 얘기는 아무리 유혹이 있어도 듣지 말아야 한다.

 

얘기들이 너무 상식적이어서 나는 아무 문제가 없다면 훌륭한 학생이고 모범적이 자녀임에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이 “신언서판” 이 똑바로 갖춰진 경우를 보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은
아쉬울 따름이다. 남들이 정말로 칭찬을 할 정도로, 몸의 자세가 바르고, 말씨가 고우며,
확실하고, 올바로 판단하는 우리의 학생들, 자녀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

따지고 보면 어려운 일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신언서판”에 대하여 논의되는 자체가 이상해야
한다.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선생님의 말씀을 존중해오면, 이와 같은 언어적 비언어적 행동 (verbal
and non-verbal behavior) 의 올바름은 몸에 배게 된다. 그 동안 교육칼럼을 통해서 일관되게
말 해오기도 하지만 정말로 자녀들이 부모 말씀을 듣고 따르는 자세만 몸에 익힌다면, 그래서
학교에 가서도 같은 행동을 선생님에게 적용하며, 사회에 가서도 성실한 태도로 일관되게 행한다면
자녀들의 성공 시나리오는 이미 쓰여진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별 것 아닌 자아 (自我 - self-ego) 때문에, 나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괜한 못난 마음 (inferiority
complex) 을 갖다 보면 학교생활과 인생의 여정에 큰 기회 (big opportunity) 를 잃게 되는 수가
참으로 많은 것이다. 별것 아닌 것에 지난 친 신경을 쓰는 일 (Majoring for tiny little minor
things)이 질시 (jealousy) 의 원인 (source)이 되고, 질시는 불행 (misery) 의 원인이 된다는
교훈을 마음에 새겨 둘 일이다. 마음을 열고 어른 들의 말씀을 듣고 따르면, 길이 있고 지혜가
있고, 방법이 있는 것이다. 신언서판 (身言書判)을 바로 하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면서도, 나를
포기하고 마음의 문을 열어 어른들의 말씀을 따라야 하는 대단히 어려운 청소년들의 장래가 걸린
대전제 (huge presupposition) 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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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누구인가? ( Who are you? )

지난번 살펴본 “나는 누구인가?” 는 자기자신의 신분 (identity) 을 확인하여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살펴보았다. 오늘 주제인 “너는 누구인가?”는 상대를 알고 이해함으로써 얻어지는
경우로서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우리는 나 자신을 알면서도 나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용기가 부족하여 문제되는 수가 많이 있다. 상대방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 이다. 상대가 누구인지, 상대가 나 보다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상대가 나보다 얼마나 더
훌륭한지도 잘 알면서도 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억지를 써서 변명하는 수가 많다. 상대를 알고 이를
바탕으로 판단하고 따를 때 얼마나 좋은지 함께 생각해보기로 하자.

 

첫째로, 부모의 경우이다. 부모가 누구인지를 모를 때 엄청난 모순을 가져온다. 부모 없이
나 자신은 실제로 없다. 나 자신의 탄생의 비밀이기에 그렇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신의
창조물이라고는 하지만 부모 없는 나라는 존재는 근본적으로 불가능 한 것이 어김없는 사실이다.
부모는 나를 낳고 길러주고 가르쳐주신다. 대가(compensation) 를 요구하지도 비용 (cost) 을
생각하시지도 않는다. 그저 자식이 잘 되기만을 바라신다. 이런 부모님의 존재를 무시하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걱정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부모님의 말을 잘 듣고 안 듣는 것은 구태여
말하지 않더라도 보모님에 대한 언어적 (verbal) 비 언어적 (non-verbal) 행동이 정말 가관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렇게 되면 공부 잘 하고 좋은 학교에 갈 수도 없겠지만, 소위 세상적으로
성공한다 해도 그런 사람은 사회에 해를 끼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옛 부터
어른들은 부모를 모르는 버릇없는 자들을 놓고 호리자식 (호랑이나 이리의 아들이나 딸) 이라고
혼을 내셨던 것이다. 부모를 존경하고 부모를 따를 때 잘 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세상에
어떤 부모도 자식에게 잘 못 되라고 하고 공부하지 말라고 하고 그릇된 길을 가라고 안내하는 경우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선생님의 경우이다. 선생님이 보모와 같이 무조건 사랑하고 무한히 인내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래도 부모 다음으로 믿을 수 있는 상대는 선생님의 경우이다. 아무리 세상이
물질 만능이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여도 직업의 성격으로 보나 그들의 임무를 보아도
부모 다음으로 믿고 따를 수 있는 경우는 스승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모의 은혜
다음으로 스승의 은혜를 말한다. 선생님을 좋고 나쁘고 따지는 학생들은 많이 본다. 보기에 좋지
않다. 선생님에게 배우려고 하고 따르려고 하고 나 자신을 선생님께 맡기려고 할 때 잘 못 되는
경우 또한 전무 (nothing) 하다. 나의 기분을 맞춰 줄 때, 나를 인정해 줄 때만 선생님을 좋아하는
학생은 크게 될 수가 없다. 쓴 소리로 충고해주는 선생님, 약점을 말 해주는 선생님에게 귀를
기울이는 학생은 반면에 크게 될 기능성이 많다. 나를 고칠 수 있는 것은, 나를 발전시키는 것은
단 소리 (sweet talk) 가 아니라 쓴 소리 (bitter advice) 이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이익을 바라고
잘 해주고 못 해주는 직업이 아니다. 따라서 선생님을 존중하고 따를 때 인생이 바뀌어지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더구나 선생님들은 학문적으로 선배라고 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많은
사람들은 스승을 통하여 발판을 마련하였음은 말 할 것도 없다. 헬렌켈라 (Helen Keller) 와 설리반
선생님 (Annie Sullivan) 의 경우는 그 대표적 경우라고 하겠다.

 

셋째로, 가족의 경우이다. 일찍이 섹스 피어 (William Shakespeare) 는 존재의 대 사슬 (the
great chain of being) 이라는 명언을 남긴 바 있다. 자고로 세상의 모든 삼라만상은 자체적으로
위 아래가 있어서 이 질서가 무너질 때 문제가 야기되고 갈등이 되고 이 결과 파국이 온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현상이 바로 문학의 소재가 되어 그가 쓴 희곡들, 즉 Hamlet, King Lear,
Othello 등 많은 작품들이 바로 이 ‘존재의 대 사슬’을 주제로 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존재들은
태생적으로 순서가 있어서 맨 위가 있고 맨 아래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맨 위는 왕
(King) 이고, 꽃 중에서는 장미 (rose) 이고, 광물 중에서는 다이아몬드 (diamond) 이며, 동물
중에서는 사자 (lion) 이라는 것이다. 가족의 경우에 정확히 ‘존재의 사슬’ 논리를 적용하기에
무리이고 논란거리 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한 가정에는 아버지라는 가장이 있고, 아우보다는 형이고,
아버지 보다는 할아버지 이시다. 이런 순서가 무너질 정도로 예의가 없거나 따름 (following)
이 없거나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 때 자연스럽게 질서가 무너지고 궁극적으로는 위 아래가 없고
부모 자식의 관계가 없으며 자녀교육은 무너지게 되어있다. 요즘 여권 (woman power) 이
잘 못 이해되어 어머니가 자식 앞 에서 아버지를 무시하고 결정하는 일들이 제법 있는 것 같다.
특히 캐나다에 자녀교육을 위해 이민 오셔서 아버지들의 위상이 고국에서보다 많이 무너지는

경우가 있다. 어떤 경우이든 아버지가 없고 어머니 혼자서 좌지우지 할 때 함께 오는 결과는
불행일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가정에서도 보이지 않는 질서가 상존 할 때 자녀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음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부부간에 서로를 알고, 부모 자식간에 서로를 알고,
형제자매간에도 서로를 알고,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고 따를 때 불협화음이 아니라 대 화음으로
모두가 잘 되는 아름다운 오케스트라가 연출되는 것이다. 시대가 바뀌었어도 ‘존재의 대 사슬’의
논리는 한번 생각해 볼 만 하다고 하겠다.

 

넷째로, 사회의 경우이다. 인간의 사회는 법과 규칙으로 이루어진 공동체 (rule governed
community) 이다. 미국의 사상적 건설자로 알려진 초절주의자 (transcendentalist) Ralph
Waldo Emerson은, 하나님은 절대 정당 (just) 하시고, 절대 공평 (fair) 하시며, 절대 질서
(order) 이시다. 이런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nature) 은 당연히 절대 질서 (absolute order)
로서, 우리 인간이 절대 질서이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법 (law of nature) 을 지키면 아주
이상적인 사회 (high society) 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가장 이상적인 법 (high law) 을
전제로 하는데, 이와 같은 법 또한 질서를 순리대로 따르는 우리 인간 구성원들을 전제한다. 이와
같은 세상은 꿈과 같다 하여도 최소한 인간이 스스로 만든 성문화된 법과 질서는 지켜야 된다.
민주국가에서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여 시종일관 거부하고, 회사에서
자기에게 월급을 주는 사장님을 시간 날 때마다 뒤에서 욕하고, 내가 급하다고 하여 줄을 서지 않고
기다릴 줄을 모르고, 아이들이 어른들 앞에서 안하무인으로 행동할 때, 민주시민으로서의 자격이
온데간데 없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가정과 같다. 위와 아래가 있고 법과 규칙이 있고,
따라서 여기에 맞는 언행이 있고 또 적절한 태도 (appropriate attitude) 가 요구되는 것이다.
사회라는 공동선 (public good) 을 추구하는 공동체를 이해하지 못하면 불행한 존재로 낙오하게
된다.

 

오늘 우리는 “너는 누구냐?” 라는 질문을 통해 상대에 대한 그리고 대상에 대한 실체를 살펴보았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If you know yourself and your enemy, you will win whenever you
are in a fight.) 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학교와 가정과 사회에서도 항상 상대와 나를 알 때,
그리하여 적절한 생각과 준비된 행동으로 반응 (respond) 할 때, 항상 승리하는 우리가 되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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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Who am I?)

“너 자신을 알라 (Know thyself)” 라는 Socrates의 아주 간단한 한 말씀이 세대 (generation)
와 시대 (time) 를 초월하여, 그리고 나이와 성 (sex), 직업을 막론하고 모든 이들에게 얼마나 큰
교훈이 되는지를, 한국과 미국 그리고 캐나다의 교육현장에 있으면서 절실히 느껴왔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특히 젊은 10대의 학생들에게 크게 중요한 말씀으로 여겨진다. 사실 자기 자신을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잘 안다. 그런데 왜 “너 자진을 알라!” 라고 설파하셨을까? 이는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뜻이기 보다는 너무도 잘 아는 자기 자신을 항상 마음에 새겨보라는 말씀으로
풀이된다. 왜냐하면 자기자신을 알기는 하지만 솔직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참으로
드물기 때문이다. 자기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여도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더욱이 드물다.

 

‘나는 누구인가?’ 는 바로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명령문 형식을 의문문 형식으로 바꾼 것에
다름 아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확인 할 때 올바른 판단과 행동으로 삶의 행보를 바로 갈 수
있다. 우리 학생들이 자기 자신이 학생이라는 존재임을 알 때 공부하는 것이 자신의 일임을 알고
부모님께서 자기의 공부를 걱정하시는 것이 잔소리로 들리지 않고 고마움으로 화답하며 부모님께서
걱정하시기 전에 오히려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는 자세로 바뀔 것이다. 나 자신이 신 (God) 에
비해서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지를 알고 내 힘으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으며
오직 최선을 다 해야 함을 알 때 우리 학생들은 겸손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자기
자신과 똑 같은 사람이 자기 외에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확인 할 때 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으며 이는 곧 자기가 얼마나 큰 사명 (mission) 을 띠고 태어났으며 자기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마침내 알 수 있는 것이다. 부모님이 없이 자기가 없다는 엄연한 존재를 알 때 우리는
부모님을 존중할 수 밖에 없다. 그분들의 보살핌은 어떤 말로도 보상할 수도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분들은 무엇을 바라지도 않고 다만 우리가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나 자신을 아는 것은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은 이렇게 우리의 인생을 본질적으로 바꿀
수 있는 마력 (magic power) 를 지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접근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떤 우리의 태도와 행동이 이렇게 마력적인 ‘나는 누구인가?’ 의
질문에 본질적으로 적당한 것 일가 생각해보기로 하자.

 

첫째로,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자신의 이름과 성, 그리고 부모님과 가족, 자기가 속한 사회와
나라를 인정하고 사랑해야 한다. 자기가 처한 현실 그리고 그 운명을 거역할 때 그래서 불만을 가질
때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 주변의 모든
현실을 인정하고 기꺼이 받아들이며 자기가 처한 현실과 운명을 최고로 생각하고 최선을 다할 때
만사가 형통하리라고 믿는다. 현실성 없는 불만은 필요 없는 것 (redundant thing) 으로 미련한
자들의 것 이기에 그렇다.

 

둘째로, 나의 신분을 알아야 한다. 내가 학생이고 내가 한국인의 피를 가졌고 내가 이 나라에서
크게 성공하려면 영어를 잘 해야 하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남과 다른
사람으로 자신을 자리 매김하고 남보다 더 일찍 일어나고 남보다 더 부지런하며 남보다 더 참고
견뎌내야 한다. 이와 같은 간단한 사실을 알면 캐나다국적의 한국인 (Konadian) 이라 하더라도
한국어도 배워야 하고, 유학생 신분일 경우 부끄러워할 이유 없이 영어를 익히는데 남을 의식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 나의 신분을 알 때 현실을 거부하거나 부족함을 채우는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어른들이 흔히 ‘네 주제를 알라’ 고 하시는 말씀도 겸손 하라는 뜻 이외에 너의 신분을
알라는 말씀일 것이다.

 

셋째로, 자신을 알고 자신을 변화시키려면 환경과 여건을 탓하거나 수 많은 이유와 논리로 변명
(excuse) 하지 말아야 한다. 까다로운 사람은 변명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며 행동으로 옮기는데
조건이 있는 사람이다.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의 주변과 환경도 사랑해야 하고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자기를 개선하는데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까다로운 사람 (picky
person) 은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없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선생님을 탓하는 학생이 큰 인물이
못 되고, 음식을 가리는 사람이 힘이 셀 수도 없고, 날씨를 탓하여 자기 할 일을 못하는 사람이
남보다 탁월할 수는 더욱 없게 된다. 이런 저런 이유로 실천하지 못하는 부정적인 그리고 소극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이런 저런 이유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성취해내는 탁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탁월함 (excellence) 의 다른 표현이 모든 난관을 돌파한다는 의미의 탁월함 (break
through) 일 것이다.

 

넷째로, 따르는 미덕 (virtue) 을 배워야 한다. 자아 (self-ego) 가 강한 젊은 학생들의 경우 따르는
것을 마치 복종 (obedience) 하는 것으로 여기고 소위 자존심 상하는 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따라야 할 사람을 따르는 것은 지극히 현명한 일임을 알아야 한다. 부모님 말씀을 따르는 일이 왜
자존심 상하는 일인가? 선생님 말씀 따르는 것이 왜 힘든 문제로 되는가? 사회적 규범 (norm)
을 따르는 것이 왜 귀찮은 일로 여겨지는가? 전통이 좋으면 따르고, 개혁이 올바르면 따르고,
선생님께서 나쁜 일을 시키시는 일은 없으니 따르고, 부모님께서 잘못된 길로 이끄실 일이 없으니
따르면 된다. 실수와 상처를 수없이 겪고 만시지탄 (too late to regret) 으로 나중에 알기 보다는
나를 위해 먼저 경험하신 분들의 충고를 따르는 현명함과 용기가 필요하다. 필요 없는 자존심은
진정한 자기존중 (self-respect) 이라기 보다 열등의식 (inferiority complex) 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교육자로서 역할 하는 동안, 자녀가 대학생이 되었어도 부모께서 자녀의
유급 (probation) 문제로 고민하시는 일도 있고, 자녀가 12학년이고 일단 대학에서 합격 통지서를
받았지만 학점 (credit) 이 부족하여 합격이 취소될까 하여 부모께서 고민하시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왜 자신이 해결하지 못하고 부모님께서 고민하실까? 자기의 게으름으로 결과된 일로도
자존심을 세워서 부모가 대신 고민하시는 경우를 볼 때 상담해주는 입장에서도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자기 자신을 알면 그리고 모든 자신의 문제를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하고 개선을 위해 따를 줄을 안다면 문제는 아주 간단해지고 또 아주 잘 풀일 일이다. 우리는
필요 없는 자아를 세우고, 미련하게 자기와 자기의 주변을 부정하는 우 (stupidity) 를 범하기
보다는 자기와 관련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를 따르며 고쳐나가는 현명함 (wisdom) 을
배워나가야 한다. 이럴 때 자신도 행복해지고 부모님께서도 만족해 하시며 무엇보다도 자기의 밝은
미래가 선명하게 보일 것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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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5
성공적 유학생활 ? 유혹과의 전쟁

한국에서 미국이나 캐나다로 유학 오는 학생으로서, 그리고 유학을 보내는 부모로서, 자녀에게
바라는 바는 오직 하나, 유학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고, 이것을 줄여 말하면 ‘성공적인 유학생활’
이다. 성공적인 유학생활은 영어를 빨리 습득하여 정규수업을 하루속히 따라 잡아 학교생활을 자신
있게 하는 것도 있겠고, 또 외국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이질문화에 잘 적응하는 것도 있겠으며, 더
나아가 자녀가 자기능력을 월등히 발휘하여 남 보다 탁월한 인재로 성장하는데 있다고 여겨진다.

이와 같은 성공적인 유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유혹과의 전쟁 (war against
temptation)” 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유학생들이 국민학생이건, 중-고등학생이건, 그리고
대학생이건, 그들에게는 젊음이 있다. 어른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만큼의 에너지가 몸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 에너지는 제어 (control) 가 잘 안 되는 에너지라서 어떤 모습으로라도 태워야
가라앉아 심적인 안정감을 찾는 것이다. 이 에너지는 학생들로 하여금 참을 수 있게도 하고 능력을
극대화 시키기도 하지만, 이 에너지 때문에 참을성이 없게 되고 실수를 하게도 되며 학생들의 앞날이
갑자기 얽히기도 한다. 젊음의 에너지는 순방향적 역할과 역방향적 역할을 동시에 하는 것이다. 이
상반된 방향성은 학생들이 “유혹과의 전쟁”에서 승자가 되느냐, 패자가 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아래에 열거하는 유혹들은 유학생들이 극복해야 할 대표적인 것들로서, 우리 유학생들이 정말
싸워서 이겨내야 하는 예들이다.

 

1. 주저하거나 수줍어 하거나 남을 의식하거나 체면을 생각하는 등의 유혹에서 과감히 탈피해야
한다. 실수가 있더라도 망설이지 말고 결단성 있게 (decisively) 도전 (challenge) 해야 한다.
학교에서도 수업시간에 발표하기를 주저하면 안 된다. 영어가 부족한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 이다.
언어가 주저하는 이유라면 언제까지 주저하며 바보처럼 살 것인가? 자신감이 결여된 상태로는
언어가 다른 나라에 와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2. 감정적 여과 (emotional filtering) 가 없이 언제나 기분을 노출시키고, 힘 들면 안 하고,
재미있는 것만 하는 등의 기분과 감정은 유학생활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요소로서, 학생들은
감정이라는 유혹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이것을 못 하면 학교생활도, 영어도, 친구도 모두를
잃게된다. 어려운 수학 (math) 을 안 하고 갈 수 있는 대학과 전공만 찾고, 귀찮은 불어(French)
를 안 해도 가는 길을 찾고, 숙제의 답을 친구에게 전화하여 알아내고, 에세이를 남에게 부탁하거나
인터넷에 의존하는 등의 적당주의에서 철저히 빠져 나와야 한다. 이와 같은 유혹은 소중한
유학생활을 철저히 망칠 수 있는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3. 컴퓨터 게임과 지나친 채팅, 성인물에의 호기심, 한국노래와 영화, 한국어에 대한 집착 등은
유학 온 목적을 이루는데 아주 부정적인 유혹들이다. 유학하는 나라의 언어와 문화, 노래와
영화까지, 내 것처럼 받아들여서 현지의 실존적 실체들과 함께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과거로의
회기가 아닌 미래로 향하는 젊은 이들로 거듭나야 한다. 친숙한 것들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용기와 도전이 일차원적, 본능적 유혹들을 버릴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4. 육체와 정신적 편의라는 유혹을 이겨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아침에 더 자고 싶은 것, 친구들과
더 놀고 싶은 것, 사전을 찾기 싫은 것, 책을 읽기 싫은 것, 숙제를 미루고 싶은 것, 심지어는 학교에
가기 싫은 것 등, 수 많은 유혹들이 사실은 여기에 속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유혹들을 이겨내고
유학생으로서의 목표점을 향하여 각종 유혹들과 싸워서 이겨낼 때, 성공적인 유학생활은 결실을
맺을 것이다.

 

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였던 Sigmund Freud 는 일찌기 세 가지 욕구를 설파하였다. 본능적
찰나적 육체적 욕구인 Id (무아)와, 장래를 생각해서 Id라는 유혹을 참고 이겨내는 Ego (자아),
그리고 사람들이 자기를 제어할 수 있도록, 유혹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거울 (mirror)
역할을 하는 Super-Ego (초자아) 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 유학생들은 Super-Ego를 항상 가슴에
묻고 Ego를 유지할 수 있는 아름다운 젊은 영혼들로, 실수를 두려워 않는 도전적 용기로 결단성
있게 앞만 보고 갈 수 있는 젊은 이들로, 성공적인 유학생활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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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5
Virginia-Tec 사태가 남긴 충격, 실망, 그리고 교훈

12년 전 미국의 Michigan주로 이민 왔다가 다시 Virginia주로 이주하여 일구월심 자녀교육이라는
American Dream을 이루기 위해 세탁소에서 하루하루 고되지만 열심히 살아온 Komerican
(Korean American) 이 바로 조승희 (Seung-Hui Cho) 의 부모이고 가족이다. Virginia주의
Fair Fax County 는 좋은 학군으로 유명하여 한국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조승희
부모님의 교육에 대한 열정을 알만하다. 더구나 누나인 조선경 (Sun-Kyung Cho)씨는 명문
Princeton University를 졸업한 재원으로 미국사회에 성공적으로 적응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가족을 대신하여 작성한 Virginia-Tec 희생자들 (victims) 에 대한 사과문을 봐도 학문적으로
인격적으로 확실히 뛰어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조승희 역시 135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주립대학인 Virginia-Tec의 영문학과에 들어가서 4학년을 재학 중이었으니 적어도 학문적으로는
실패한 사람은 아니었다. 조승희 가족의 교육이민이, American Dream이, Komerican의 애환
어린 결실이 눈 앞에 보였다.

 

그런데 4월 16일 이른 아침 아직 한국국적을 가지고 있던 이민자 조승희가 Virginia-Tec의
Campus를 피로 물들이고, 미국과 한국, 그리고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엄청난 대학살
(massacre) 을 감행했다. 그것도 면밀주도하게 계획된 학살이었으며, 무고한 동료들을 향한
무차별 총격 (random shooting) 이었고, 기독교와 성경을 비유하여 모두를 방탕한 부자들로
일반화하여 사탄을 쓸어버리듯 대범하고도 잔인하게 만행을 저질렀다. 미국사회는 총기관리와
이민자에 대한 정책을 재고할 수 밖에 없게 됐고, 미국은 물론 캐나다에 이민 와서 살아가는
Korean Community는 타 인종으로부터 오해 받을까 봐 심히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한국사회는 조승희와 조승희 가족에 대한 무차별 보도는 물론 조승희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대통령까지 나서서 공식적인 애도를 표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번 총격사건을 겪으면서 필자가
경험한 것은 충격과 실망 그리고 교훈의 연속이었다. 이번 사태에 대한 미국인과 한국인의 반응과
대응, 그리고 이번 사태를 통한 교훈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한다.

 

첫째로, 조승희의 문제는 상상하기도 싫지만 꼭 나쁜 악마의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의
자식에게서도 일어날 수도 있는 우리의 문제이다. 그는 원래 괴물이 아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괴물이 되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기 때문이다. Robert Louis Stevenson의 소설, Dr. Jekyll
and Mr. Hyde가 보여주듯 한 개인 속에는 선하고 지적인 지킬 박사 (Dr. Jekyll) 가 있는
동시에 악날한 살인마 하이드씨 (Mr. Hyde) 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수줍고 내성적 성격의
소유자로 엄청난 부정적 감정이 축적되어 우울증에 시달려 온 조승희, 미국학교의 동료들이
보여준 냉랭한 배타적 분위기, 일방적이고 이론적 (unidirectional and theoretical)인 신앙으로
무장한 듯 보이는 그에게, 자유 분망하고 타락한, 게다가 지극히 개인적이고 여전히 끼리끼리
어울리는 미국의 학교사회는 결국 그로 하여금 감정여과 (emotional filtering) 를 하지 못한 채,
1.5세로서의 자기자신의 정체성 (identity) 의 출구를 찾지 못한 채, 그 자신의 내부에 있던 Mr.
Hyde가 Dr. Jekyll을 누르고 화산처럼 폭발한 결과이다.

 

둘째로, 조승희 사건은 한국인이나 동양인의 인종적 문제 (ethnical problem) 가 전혀 아닌
개인의 문제 (individual problem) 인 것이다. 따라서 조승희가 한국인이라는 것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추론 (inference) 이며, 그래서 이번 사건은 정말 충격적이지만 모든
이들의 문제이고, 인간의 무서운 자화상 (self-portrait) 이며, 특히 유학생들의 경우 조승희가
겪었을 엄청난 정신적 압박 (mental pressure) 은 누구나 유학 초기에는 겪어 왔고 또 겪게 되어
있는 일이다. 이것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니다. 미국의 어린 학생들이 어떻게 그렇게 성숙하게
다른 나라에서 온 말이 잘 안 통하는 친구들을 따뜻하게 배려하기를 바라겠는가? 아쉬운 학생이,
필요한 학생이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대응하고 돌파해야 할 문제이다. 점심시간에 자기들끼리
운동하고, 자기들끼리 밥 먹고, 자기들끼리 얘기할 때 느낀 외로움과 서운함, 그리고 영어를 잘
못 알아들었던 ESL학생의 처지에서 겪은 그러나 이제는 잊혀진 수모 (insulting) 가 하나 둘이
아니었을 우리 자녀들인데, 부모님들께서 잘 모르실 따름이다. 조승희는 성격상 감정을 여과하지
못했고, 또 설상가상으로 보복심리가 많은 성격에 우울증이라는 정신적 질병이 Mr. Hyde를
폭발시키는 가속 (accelerating) 의 결과로 보인다.

 

셋째로, 이번 조승희 사건을 접하여 미국이나 캐나다에 살고 있는 이민자와 유학생 등 Korean

Community 의 예민한 반응 (sensitive reaction) 은 이해 할 만 하다. 우리는 같은 처지에
있기에 그렇다. 같은 처지에 있는 우리들은 자녀들을 생각해보고 똑 같은 감정을 겪었지만 잘
이겨낸 우리 자녀들에게, 또 지금도 학교에서 조승희처럼 놀림 받기도 하고 오해 받기도 하는
우리 자녀들에게 격려와 배려와 용기를 주어야 한다. 중국인으로 오해 받아 “중국으로 돌아가!
(Go back to China!)”, 발음이 안 좋았는지 “뭐라고 말한 거야? (What did you say?)”, 엉뚱한
것을 하게 되면, “너는 그거 하는 게 아냐! (You are not supposed to do that!)” 등은 흔히
있는 일이고, 인종적 차별로 받아들여지는 말과 욕들이, 특히 남학생들의 경우에는 많이 있다.
이것은 동남아시아에서 Korean Dream을 가지고 한국에 와 있는 외국사람들이 한국인들에게
겪는 수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지만, 사실 영어가 약한 유학초기에는 누구나 겪는 일이다.
잘 이겨내 준 자녀들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고, 지금 학교에서 영어 때문에 못 알아들으면서도
알아듣는 체 하는 자녀들에게 격려와 용기를, 극복과 돌파의 용기를 줘야 할 일이다. 우리
자녀들이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얼마나 소중한 인내와 용서, 극복의 시기를 지냈는지,
부모들로서 자녀들을 대견스럽게 생각하셔야 한다.

 

넷째로, 한국의 방송과 국민들에게 다시 한번 충격과 실망을 감출 수 없다. 어떻게 확실하지도
않은, 그것도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을 여과 없이 앞 다투어 내 보낼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조승희가 저지른 총격사건은 분명 한국민들이 수치로 받아들이고 조승희로 인하여 한국인이 받을
오해와 불이익을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지나치고도 지나치다. 부모의 자살 설이 도대체
무엇인가? 자식을 잘 못 교육하였으니 정말 자살이라도 하란 말인가? 이 세상에 그 어떤 부모가
자식에게 사람을 죽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세상 어떤 부모가 자식에 대하여 그렇게
장담하며 책임질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의 사망 설과 아버지의 재혼 설은 또 무엇인가? 아들이
문제라고 부모에 대해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매도하고 추측하고 사적인 문제들을 맘대로 보도해도
된다는 말인가? 조승희가 미국땅에서 32명을 희생시키고 미국을 충격 속에 몰아넣었어도 미국의
방송들은 조승희 부모에 대해서 일체 보도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당국은 부모를 격리시켜
보호하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이번 일로 일부 네티즌들은 보모의 자살이 당연하고, 더
나아가 나라가 싫다고 가더니 무슨 꼴이냐고 반문하여, 외국유학과 이민을 근본적으로 매도하는
의중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남의 슬픔을 내 슬픔으로 아파하기 보다는, 남의 행동이 나에게
피해를 줄까 걱정하는 신경질적인 반응 (hysterical reaction) 을 보였다. 남 얘기 (gossiping)
를 좋아하고, 남을 매도하는 문화, 남을 내 식으로 심판하는 문화, 감정의 문화, 굿거리문화는
이제 청산했으면 한다. 어려운 처지의 남을 배려하고, 내가 억울하게 피해를 보아도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승화시키는 한국인이 되었으면 한다.

 

다섯째로, 미국사회는 아주 많이 반성해야 한다. 사람들은 흔히 “낳은 부모보다 기른 부모가
진짜 부모” 라고 들 한다. 조승희가 이민자이고 국민학교 2학년 때부터 대학교 4학년 재학 중일
때까지 미국의 교육을 받았다. 미국의 교육시스템을 점검해야 할 일이다.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로 시작했고 또 모두가 이민자들의 자손이다. 미국의 역사적 처지 (historical identity)
를 살펴볼 때 누구한테도 외국인이라고 홀대할 처지가 아니다. 조승희 개인의 악마 같은
성격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미국사회가 교만하고 배타적이고 부도덕하고 부패한 것 또한
사실이다. NBC가 공개한 조승희 파일 중 일부가 미국사회를 향하여 퍼부은 독설은 시사하는
바가 엄청나다. 미국국민 모두가, 특히 정치인들은 충격 속에서 반성해야 한다. 미국은 잘 못된
자세, 교만과 독선적 자세를 스스로 청산해야 한다. 대량학살무기를 가진 자는 이라크가 아니라
미국 자신이다. 누가 미국에게 이라크의 무고한 국민을 학살하라고 허락했나? “세상사람들은
미국을 왜 미워하는지 모르겠다” 고 미국국민들이 생각한다는 기사가 캐나다 신문 1면에 보도된
것을 보고 기가 막혔다. 그렇게 자신을 모르는 게 미국이고 미국인들이다. 누가 Saddam
Hussein, 김정일, 그리고 Osama Bin Laden을 칭찬하겠나? 그렇다고 누가 George Bush를
칭찬하는 사람도 없을 성 싶다. 9.11로 인한 미국과 미국인의 충격 또한 엄청나다. 그래서
이것은 미국이 Afghanistan과 Iraq를 공격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미국의 방송들은 Iraq와의
전쟁보도를 할 때 대부분, “The War for Iraq” 로 타이틀을 잡는다. 교만의 극치이다. 이라크의
국민 누가 미국에게 자국민을 학살하고 이라크를 해방시켜달라고 했나? 미국은 자신의 국익을
위해 석유자원의 확보를 위해 남의 나라를 유린하고는 있지 않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런
미국의 교만이 조승희 사건을 불러온 것은 아닐까 반성해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신다. 어려운 기대이겠지만 미국의 엄청난 반성과 변화가 뒤 따르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한국과 한국인들도 좀더 신중하고 성숙한, 그리고 남을 배려하는 태도를 가졌으면 한다.
하나님께서 미국인에게 주신 교훈은 ‘겸손’ (humbleness) 이며, 한국인에게 주신 교훈은 ‘배려’

(consideration) 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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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5
문화와 언어장벽: 교차문화의 이해와 이질언어에의 동화

문화와 언어장벽: 교차문화의 이해와 이질언어에의 동화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이 겪는 어려움은 한국과 캐나다의 차이 (difference) 를 극복하는 과정에
있다. 이 차이는 주로 언어 (language) 와 문화 (culture) 에서 온다. 언어학적으로 볼 때
국가간의 문화적 차이는 대략 50%정도로 여겨진다. 즉, 문화적 보편성 (culture universal)
이 50%이고 문화적 특수성 (culture specific) 이 50%로 보고 있다. 이는 문화가 반영된 각
나라의 속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언어와 문화의 이질성 (heterogeneousness) 은
어떤 것이며 과연 어떻게 이겨내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교차문화의 이해 (cross-cultural
understanding) 와, 이질언어와의 동화 (assimilation to a different language) 에 있다.
문화는 이해 할 대상이고, 언어는 동화해야 할 대상이라는 얘기가 된다.

 

언어의 차이는 동족언어들 (homogeneous-stem languages) 간 에도 있지만, 한국어와
영어는 그 뿌리가 전혀 다른 총체적 이족어들 (totally heterogeneous-stem languages)
이기에 더 하다. 영어는 인도유럽언어 (Indo-European Languages) 에 속하고 한국어는
우랄알타이어 (Ural-Altai Languages) 어에 속한다. 언어구조가 인간의 사고를 규범화한다
(categorize) 고 가정한 소위 “사피어-월프 가설 (Sapir-Whorf Hypothesis)” 은 언어구조의
차이가 사고의 차이를 가져오고, 자연히 사고가 다르면 문화의 차이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언어와 문화는 이렇듯 분리되어 논의 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문화의 차이를 이해하고 언어의 이질적 요소에 동화할 수 있을까 간략히 생각해보기로
하자.

 

첫째로, 문화의 차이는 과장하지도 말고 축소하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순리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상술 (stated above) 한 바와 같이 문화의 50%는 보편적 (universal)
이다. 보편적인 문화와 사회적 가치가 오해되는 예를 보자. 캐나다나 미국에 오면 한국과
달리 나이나 관계를 떠나 버릇 없이 해도 되고, 상대방을 생각하지 않고 할 말 다 하고, 누구의
간섭을 받지도, 누구를 의식하지도 않아도 된다고 잘 못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오해이다. 서양은 마치 아무런 사회적 규범이 없는 듯 과장하여 말하는 경우가
있다. 성숙하지 않은 아이들이 혹은 자기가 속한 사회의 규범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자기편의식 해석이다. 서양의 문화는 한국과는 달리 단어의 차이를 가지고 예의를 말하는
사회나 언어가 아니고, 화체 (speech style) 나 화 행위 (speech act) 로 예절을 지키고
비언어적 행동 (non-verbal behavior) 로 상대방을 존중하는 문화이기에, 위와 같은 오해는
전적으로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몰라서 나오는 얘기이다. 서양의 문화는 간섭을 받고 안 받고의
상대방에 의한 문화가 아니라, 내가 남을 배려 (consideration for others)하고 남을 간섭하지
않는 (avoid gossiping others) 문화이다. 서양문화는 남을 험담하거나, 자기의 생각으로
남을 일반화 (generalization) 하는, 그리고 나의 방법으로 남을 재단하는 일방적 흑백논리가
아니다. 이번 버지니아 공과대학 (Virginia Polytec and State University) 의 참상을 놓고도
한국의 언론들이 보여준 혼란스럽고 성급한 그리고 부정확하며 신중하지 못한 조승휘 가족에
대한 보도는 사뭇 충격적이다. 한국언론들은 부모의 자살보도 (아버지 사망, 어머니 중태)
에서부터 재혼보도 (어머니 강도에 피살, 아버지 재혼) 에 이르기까지 확실하지도 정확하지도
않은 얘기를 마치 사실인 양 앞 다투어 보도하는 유치함을 드러냈다. 심지어는 관련 없는
친척들의 이름까지 밝히며 보도하는 태도는 가족을 피해로부터 보호하려는 미국의 언론과는
사뭇 달랐다. 마치 모든 한국인들이 오해 받을 것으로 일반화하여 가족을 희생양으로 삼아
자기들을 방어하려는 못난 심리가 아닌가 두렵기 까지 하다.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식과 부모를
일치시키며 개인의 일을 집단의 방어적 심리로 둔갑시키는 것은 이제 청산해야 할 대상이라고
믿는다.

 

둘째로, 문화의 50%는 특수적 (specific) 이다. 한국인들이 오랜 이민생활 후에도 그리고
시민권자로 된 후에도 주변 사람들 (marginal people) 로 남아있는 것은 이민생활을 하는
나라의 문화적 특수성을 이해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내 것을 너무 고집하는데 있는 것 같다.
로마에 살면 로마인들이 하는 대로 하라 (“When in Rome, do as Romans do.”) 라는 아주
평범하지만 불변의 진리가 있다. 이민자이든 유학생이든 그리고 캐나다국적의 한국인 (Korean
Canadian) 이나 미국국적의 한국인 (Korean American) 이든 마찬가지이다. 캐나다에
살려고 왔는데, 혹은 공부하러 왔는데, 현지의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이해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내 것을 고집하고 남의 것을 배타하여 항상 국외자 (outsider) 로
외롭게 살기보다는, 상대방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해주며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속의
참여자 (insider) 로서 존재해야 한다. 학생들도 모든 인종집단 (all ethnic group) 과 어울려
다 인종 또래집단 (multi-ethnic peer group) 속에서 숨 셔야 한다. 이럴 때 문화적 차이를
최소화 하고 주류사회 속에서 당당히 역할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 언어의 문제는 적극적인 태도에 달려있다. 언어가 사뭇 다르기에 열심히 익혀야 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적극성이 필요하다. 체면과 관계없고, 지식과 관계없고, 인격과 관계없고,
자기 본인과 관계가 있다. 자기를 버려야 영어를 배운다. 영어를 기초부터 접근하고, 도움을
청하고, 질문을 하고, 영어로 듣고, 말하고, 쓰고, 읽는 것을 적극적으로 시도해야 한다. 영어를
말하는 사회에 와서 공부를 하거나 아니면 거주해야 하는 상황에 무슨 주저함이 필요한가
자문하여 볼 일이다. 자기처럼 자기를 잘 아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아는 사람 또한 드물다. 자기를 겸허히 받아들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자기를
알면 자기의 현재를 그리고 자기의 실력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고 또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계획을 세워야 한다. 1년이면 될 영어를 10년이 되어도 안 되는 분들이 있다. 나를 솔직히
받아들여 계획을 세워서 행동을 위해 나서지 않아서 그렇다. 영어를 배울 때 좋은 책, 좋은
교사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솔직한 자기 자신이다. 자기한테
솔직한 사람은 영어를 근본적으로 처음부터 시작하게 되고, 배우는데 적극적이 되고, 아주 빠른
속도로 그리고 놀라운 결실을 얻을 것이다.

 

인간은 언어적 능력을 타고 태어난다. 그래서 인간의 타고난 능력 (innate faculty) 은 ‘말하는
능력 (speaking ability)’ 이다. 마치 새는 나는 능력 (flying ability) 을, 포유동물은 걷는
능력 (walking ability) 을 갖고 태어나듯, 인간은 말하는 능력을 타고난다. 언어학에서는
인간에게 LAD (Language Acquisition Device), 즉 언어습득장치가 있다고 한다.
언어습득장치를 갖고 태어난 우리 인간은 우리가 노력하는 한, 세계 어느 곳에 살든지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영어를 배우려면 발음을 의식하지 말고, 틀리는 것을 두려워
말고, 솔직하게 쉬운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신문도 읽고, 일기도 쓰고, 소설도 읽고, 작문도
해 보고, 큰 소리로 읽고, 부단히 새로운 영어를 접해야 한다. 그러면 자기의 능력을 확인 할
수 있고, 자신 있게 외국인들과 친구가 될 수 있고,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영어만 유창하게 되면 여러분만큼 많이 배우고 또 많이 아는 사람들도 드물 것이기에
그렇다.

 

캐나다 혹은 미국, 그리고 어떤 다른 나라에 유학이나 이민으로 와서 살더라도 문화적 언어적
충격은 있게 마련이다. 이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문화와 언어의 차이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충격이다. 이들을 극복하는 것은 자기를 받아들이고, 남을 이해하는데 있는 것이다. 문화의
차이는 내가 이해해야 할 일이고, 언어의 차이는 내가 상대 언어에 동화되어야 할 일이다. 이것
이외에 다른 방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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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5
유학생들과 교회생활

캐나다에서는 물론 세계 어느 곳에 가든지 한국인 목사님께서 시무하시는 소위 한인 교회들이
참으로 많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종교가 나라의 정치와 국민의 생활, 그리고 민족정신에
참으로 많은 영향을 끼쳐왔다. 불교와 유교, 그리고 기독교는 각 시대를 풍미한 대표적인 종교라고
하겠다. 기독교의 예를 들어보자. 오늘날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도 한국에 있고, 또 한국인
만큼 모든 것을 걸고 종교에 몰입하는 국민도 드물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도, 토론토에서도,
로스엔젤레스에서도, 노스캘로라이나에서도 한인교회의 열기는 대단했다. 교민들의 대화를 듣다
보면 이민생활이 곧 교회생활인 것처럼 느껴진다. 교회에 대한 관심도 많지만 불만도 많았고,
열성만큼 비판도 많았다. 감정이 이성을 앞 지르는 (emotion over reason) 한국인의 성격이 세계
어느 민족보다 가장 종교에 헌신할 수 있는 열정을 주는 것 같다.

 

이민생활에서 교회가 하는 역할은 지대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대단하다. 그리고 교회가
역할해주는 유학생들에 대한 순기능 또한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교회생활을 통해 유학생들의
정서가 순화되고, 힘든 유학생활 가운데에서도 정신적 쉼터를 찾고, 인생의 목표를 발견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필자도 교회가 한참 에너지가 폭발하는 젊은 유학생들을 위해서 순기능을 하고
또 순방향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기대하는 바램이 지대하다. 이민사회에서 그리고 유학생들에 대한
교회의 영향이 큰 만큼 부득이 몇 가지 방향을 확인하고자 한다. 사실 사회언어학적으로 볼 때
금기어 (taboo language) 에 속하는 주제의 하나가 종교이지만 여기에서는 종교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교육의 문제이기 때문에 유학생들에게 어떻게 교회와의 관계를 가져야 하는지 말해두고자
한다.

 

1. 교회는 진인 (眞人) 의 갈 길을 밝혀준 성경 (Bible) 을 가르치는 곳 이다. 따라서 학생들은
말씀을 배워서 말씀대로 실천하는 인간 (a man of action) 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유학생들이 대부분 십대 (teen-ager) 이다 보니 학교에서 부족한 영어 때문에 겪은 의사소통지체
(communication lag) 를 교회의 또래그룹 (peer group) 에서 풀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자연히
성경 말씀 보다는 또래끼리 만나서 한국말을 많이 사용하고, 또 서로 어울리는 재미에 초점이
맞춰지고, 또래그룹에 따라서는 담배와 술 등 한국교회에서 크리스천 들에게 금기시하는 것들도
배우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학생들이 교회를 생각한다면 교회의 명예에 바람직 하지 않은 일들은
교회에서 행하면 안될 일이다. 학생들은 교회를 성스러운 곳으로, 마음을 바로 하고 몸을 가다듬는
곳, 즉 정심수기 (正心修己) 하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학생들과 교회를 위해서 바람직한
일이다.

 

2. 교회는 새로운 교우와 가정을 위해 안내하는 바나바를 두고 그들의 정착을 도울 뿐만 아니라
문화적 언어적 어려움을 덜어주고 또 캐나다 학교의 제도적 차이를 잘 안내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자칫 너무 친절하여 시간 날 때마다 초대하면 새로 이민 온 학생들은 학교숙제를 미루게 되고 복습이
부족하여 학교생활에 문제가 된다면 이는 도움이 아니라 폐가 되는 것이다. 정에 약한 한국인들이다
보면, 특히 교인들의 지나친 친절이 잘못하면 새로운 학교생활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줄 수 있다.
교회생활은 새로운 이민가정의 캐나다 정착과 유학생들의 학교생활에 도움을 줘야 한다. 친절에
대한 수위가 조절되지 않다 보면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수가 종종 있게 된다. 이는 무엇이 우선
(priority) 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명제이지, 결코 무엇이 중요한가 (importance) 에 대한 논쟁이
아니다. 이는 쓸데없는 우려가 아니라 실제적 상황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3. 교회를 다니려면 교회를 빛내면서 다녀야 한다. 교회가 성경공부 (Bible study) 의 장 (field)
가 되어야 하고, 또 학교공부 (school work) 에 대한 도움의 장이 되어야 한다. 잘못하면 교회를
다니면서 공부에 소홀히 하게 되고, 이 때문에 교회를 욕되게 하는 수가 제법 있게 된다. 교회를
통해서 바른 예절을 배우고, 친구간의 좋은 관계를 배우며, 나와 다른 이웃들에 대한 이해와
또 그들을 통해 배움이 이루어져야 한다. 자기 중심 (self-centre) 에서 상호이해 (mutual
understanding) 로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 (consideration for others) 로 그 방향성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럴 때 사람들의 입에서 교회에 대한 긍정적인 얘기들이 나오고, 그와 반대인
경우 부정적인 비판이 나오는 것이다. 구성원들은 그 기관에 좋은 영향을 줘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4. 교회는 때로 너무 많은 일들을 한다. 예를 들면 성경공부뿐만 아니라 불어도 가르치고 태권도도
지도하고 영어도 가르치고 무용도 가르치고, 학교와 학원들이 할 일들을 할 뿐만 아니라 이민생활과
신규이민자에 대한 모든 서비스를 하려 든다. 서양격언에 “Grasp all loses all.” 이라는 말도
있고, “Do not major on minor things. Do major on major things.”라는 말도 있다. 교회가
이렇듯 모든 것에 의욕을 갖고 하기 보다는 각 방면에 전문적으로 취급 하는 곳을 소개해주고 또
신규이민자나 유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안내해야 한다. 교회는 가능하면 매우 교회적인 일에
집중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교회에 도서관 혹은 reading room 같은
시설을 통해 성경과 신앙생활에 대한 서적을 읽게 하고 기독교인으로서 학교생활 혹은 이민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리고 있을 수 있는 청소년들의 고민거리를 상담을 해주는 등의 역할이
그것이다. 교회에서 실시하는 여름 성경학교나 여름 선교 지에서 일하는 등의 일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5. 이민생활과 유학생활을 하면서 한국교회의 역할은 정말 크고 또 그 공로 또한 지대하다. 그런데
미국에 있을 때나 캐나다에 있을 때나 교회생활이 이민생활의 전부인 것 같이 여겨지는 상황을
보면서 고개가 갸우뚱 해지기도 한다. 한국교회들은 교인들에 대한 모든 것을 살피다 보니 도대체
개인적인 가정생활이 실종되는 때가 있다. 때로는 가족끼리만의 시간도 필요하리라. 그러나
교회가 그들을 그냥 두질 않는다. 캐나다의 휴일뿐만 아니라 한국의 명절까지 교회가 모든 행사를
주관한다. 그리고 출석을 안 하면 모두들 부담스러울 정도로 궁금해한다. 어디에 같다 왔는지
캐물어야 직성이 풀린다. 도대체 궁금해서 못살 듯한 것이다. 너무 독차지 하는 사랑보다는
이민생활을 스스로 즐기도록 능력을 배양시켜주는 사랑 또한 필요할 성 싶다.

교육에 종사하면서 교회를 충실히 다니고 봉사하는 학생들이 착하지만 학업이 쳐지고 특히 영어가
떨어질 때 안타까운 생각이 많았다. 교회를 다니고 신앙이 좋으면서 학교에서 더욱 잘 할 때
크리스천으로서 더욱 자랑스러울 터인데, 그렇지 못 할 때면 참으로 걱정스러운 것이다. 교회생활도
잘하고 학교생활도 잘하는, 그리하여 정신적으로나 지식적으로 풍요한 학생들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할 때 교회와 유학생활은 필요충분조건 (必要充分條件)이라는 멋진 공식을 만들어 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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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5
캐나다 교육기관들의 역할과 방향

캐나다 특히 광역토론토지역 (GTA) 에는 수 많은 유학생들을 위한 교육기관들이 있다. 필자가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 살 때에는 한국의 학원이란 기관들이 없었다. SAT를 위한
외국 교육기관들이 한 두 군데 있을 정도였는데, 캐나다 토론토에 오니 상당히 많은 수의 학원과
유학원 그리고 고등학교 학점을 제공하는 교육기관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더구나 지난 3-4년
전부터는 방학 때만 나타나는 학원과 캠프기관들이 있는가 하면, 매일매일 생겨나는 것이 학원일
정도로 수 많은 신문과 출판물에 광고의 홍수를 이루었다. 이와 같은 유학생들을 위한 교육은
학원이나 학교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한인 교회들과 한인 커뮤니티센터에서도 제공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학생들을 위한 교육기관들이 많다는 것은 전혀 나쁜 일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유학생들의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경쟁력이 높아져서 교육의 질이 자연히 제고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을 굳이 생각해보면, 혹시나 상업적인 방향으로 나가지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학원을 포함한 교육기관들이 서로 좋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유학생들과 부모님들 그리고 학원과 학교 등, 당사자 모두의 현명한 판단과 협조가 필요하다.

1. 교육의 질 (quality) 을 높이는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학부모님들께서도
교사에 대한 선택을 외형적인 것, 즉 인종이나 외모 혹은 학력만 보지 말고, 교육기관들은 교육의
중요성을 생각하여, 소위 전공별 자격증과 학위, 정열과 경험, 그리고 교육철학을 보아야 한다.
소중한 학생들을 책임질 수 있는 최고의 교사들을 채용하는데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동일한 수준의 학급을 편성하고 알맞은 교재의 선택 또한 중요하다.
섣불리 교재를 편집하거나 만들기 보다는, 전문가들이 편찬해 놓은 교재를 선택하는 것이 좋고, 또
Ontario 주 교육부가 제공하는 curriculum과 교재들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2. 캐나다에 있는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으니 캐나다의 교육과정과 교육방식을 따라야 한다.
캐나다와 미국 등 북아메리카의 교육방식은 과정을 중시하는 귀납적 교육방식이다. 과정을
통해서 확실한 이해를 가져야 한다. 반면에 한국은 결과만 중시하는 연역적 교육방식을 갖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좋은 점수를 받고 대학에 합격만 하면 된다. 그래서일까? 얼마 전
SAT시험지의 유출이 문제되어 한국에서 이루어진 SAT시험만 무효화하고 다시 SAT시험을
시행하기로 했다고 미국의 ETS는 발표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캐나다에서 교육하면서
학원에서 한국식 정답 맞추기를 가르친다거나 혹은 부모님들이 그런 방법을 알기 위해 역으로
방학을 이용하여 한국에 가서 소위 고액 찍기(?) 과외를 한다는 얘기를 들을 때면 참으로 마음이
답답해진다. 본말이 전도되어 있기 때문이다.

3. 학교는 물론 학원과 유학원을 포함한 모든 교육관련 기관들은 설립목적을 늘 상고하여
교육기관으로서의 정도 (正道) 만을 향하여 가야 한다. 교육기관들의 올바른 정도는 교육을 위한
교육 (education for education sake)에 다름 아니다. 자칫하면 지나치게 경쟁을 의식하고
상업적 사고에 치우쳐 과장된 광고는 물론 심지어는 허위광고까지도 서슴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꾸준히 시간을 갖고 훌륭한 교사를 초빙하고 철저한 교육을
행하고 정직과 성실로 대응하면 많은 비용으로 광고할 필요가 없어지고 그 대신 믿음과 책임
그리고 훌륭한 보람이 기다릴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유명해진 어떤 성공도 알고 보면 적어도
15년은 소요된다’는 말이나 ‘로마도 하루에 건설되지 않았다’ 는 말들이 이를 증명해준다.

4. 한국의 옛 어른들이 ‘교육백년지대계 (敎育百年之大計)’ 라고 말씀하셨던가? 그러나 선인들의
현명하신 말씀은 언제부터인가 사라지고 한국인들은 ‘빨리빨리’ 라는 사고에 젖어있다. ‘천천히
그러나 철저히 (slowly but thoroughly)’ 라는 서양의 격언을 최소한 교육에 한하여는 우리가
적용해나가야 할 것 같다. 언어가 다른 상황에서 캐나다에 유학을 와서 ‘빨리빨리’ 주의를
고집하여 외쳐대는 것은 좀 무리인성 싶다.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 매어 못 쓴다’ 는 격언이
있다. 교육기관들도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교육하고, 부모님들도 교육기관들을 믿고 여유 있게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럴 때 학생들과 교육기관 그리고 학부모님들 모두가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보람이라는 견실한 열매를 딸 수 있을 것이다.

5. 교육기관들은 학생들과 부모님들의 입장과 현실을 확실히 이해하고 최선을 다해서 도움을
주는 책임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한다. 학생들은 교육기관들을 존재하게 해주는 알파와 오메가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없는 교육기관들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교사들은 열심히
수업준비하고 학교장들은 교사들을 잘 관리 감독하며 좋은 교육을 위한 모임도 자주 있어야
한다. 영어로 교육하고 한국어는 꼭 필요한 경우만 사용해야 한다. 여기에 와 있는 학생들은
캐나다교육을 받는 캐나다학생들이며 캐나다학교에서 경쟁력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대신
학생들과 특히 부모님들이나 가디언분들도 학교와 교사를 존중하고 학생들의 말만 들어 볼 것이
아니라 학교를 통한 담임교사들의 말을 직접 들어 어떤 일 이든 정확한 판단을 해야 한다. 아직
미숙한 학생들이 둘러치는 말만 믿고 판단하기에는 아직 아이들이 어리기 때문이다. 늘 직접
확인하고 객관적으로 듣고 판단하는 현명함이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6. 캐나다에서는 학교를 외형에 의해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으로 판단한다. 실질적으로
학교에서 공급하는 수업의 질(quality)을 두고 학교의 수준을 판단한다. 공립학교들이 아직도
구태를 못 벗고 학생들을 잃을까 봐 작은 학교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든가, 일부 사립학교들이 홈
스쿨 학생들로 하여금 타 학교에서 학점을 수강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등의 편협하고 당당하지
못한 태도는 버려야 할 구태이다. 학생들은 고유한 교육번호가 있어 (OEN) 원하는 학교에서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배타하는 것은 자기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남을 거부함으로써 구차하게
자기를 연명하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교육은 학생들을 위한 것이어야지 결코 어느 교육기관을
위한 것이 아니다. 주체가 학생이고 객체가 교육기관인 것이다.

교육기관의 수가 늘어남은 교육의 경쟁력을 높여주는 좋은 변수로만 작용해야 한다. 상업적인
방향으로 잘못 가거나, 특히 학생들을 인도하는 유학원들이 교육의 질을 간과한 채 너무
사업적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한 교육을 생각한다면 위험한 일이다. 모든 교육기관들은
원래의 설립 목적을 늘 마음에 새겨 소중한 학생들, 장래 세상을 밝힐 인재들을 양성하는 주춧돌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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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5
자녀교육을 위한 가이드: 기러기 엄마의 경우


자녀교육에 관한 한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는 부모는 흔하지 않다. 그러기에 옛 어른들이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 라든가, “남의 자식 얘기 함부로 못 한다” 는 등의 말씀이
있어 구전되어 오지 않는가? 자녀 교육을 위해서 캐나다에 와 계신 많은 엄마들이 계신다.
이름하여 ‘기러기 엄마’ 라고 부르는 것 같다. 한국에 계신 아빠들은 물론 큰 사업을 하시든지,
아니면 중요한 공직에 계시기 때문에 함께 오실 수 없고, 다만 한국에서의 교육으로는 자식의
앞날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위기의식에서 소위 유창한 영어와 함께 경쟁력 있는 선진교육을 받기
위해 대단히 희생적으로 어머니께서 자녀와 함께 캐나다에 와 계신 것이다.

우선 기러기 엄마의 경우 그분들의 희생에 걱정과 함께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나이로 보아
인생의 가장 황금기에 부부가 자녀교육을 위해서 떨어져 살며 일구월심 자식교육에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을 볼 때 그 감동스러움이 한 편의 드라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다른 민족들과는
확연히 다른 일이며 그러기에 이곳 캐나다 부모들은 한국부모들의 자녀교육에 대한 이런 열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부모님들의 자녀교육에 대한 열정이, 자녀교육에
대한 희생이 한국 학생들로 하여금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들에서 현저히 두각을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러기 엄마들의 경우 특히 캐나다에 처음오시는 분들이나 오신지 얼마 안 되신 분들의
경우 참고하셔야 할 사항들이 있어서 중요한 것 들만 말씀 드리고자 한다.

1. 한국과 캐나다는 살아가는 방식이 좀 다르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한국식으로 판단하여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확실한 분들을 만나셔서 도움을 받되 비용은
계산하여 드려야 합니다. 캐나다의 격언 중에 “Demand excellence, but be willing to
pay for it.” 이라는 말이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닙니다. 여기는 모두가 시간 별로 비용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 저 사람 말을 다 듣다 보면 오해가 생기기 일 수 입니다. 그리고
일단 좋은 분을 안내자로 선택하셨으면 믿고 따라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질문이 있을
때 확실히 묻고 대답에 따라서 싫고 좋고를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체면과 관계 때문에 억지로
결정하시면 안 됩니다. 분명하지 않은 문제를 놓고 내 식으로 추리하여 내 식으로 판단하고 내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캐나다는 캐나다의 방식이 있고 또 현실은 캐나다에
정착하시는 과정입니다. 그러기에 로마에 오면 로마인들이 하는 대로 하라 (When in Rome, do
as Romans do.) 라는 말이 전해오는 것입니다.

2. 공립학교에 입학시켰든 사립학교에 입학 시켰든 자녀들이 필요한 것은 우선 영어에 대한
이해입니다. 영어의 실력은 말(talking)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읽기 (reading), 쓰기(writing),
듣기(listening), 그리고 말하기(speaking)가 동시에 얽혀져서, 문법적이며 적절한 어휘와
정리된 구문으로 이루어진 잘 다듬어진 문장 (well refined sentences) 들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방과 후 영어보충수업은 필수가 됩니다. ‘캐나다까지 와서 과외를 해야 하나?’ 라는
질문이 예상되지만 캐나다에 왔기 때문에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고 수업을
듣고 충분히 이해하여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란 정말 힘들기 때문입니다.

3. 자녀들이 받는 문화적, 언어적, 사회적 충격을 엄마들이 풀어주셔야 합니다. 자녀들이 학교에
갔다 오면 늘 묻게 됩니다. “학교수업 어땠어?” “괜찮아요. 할만 해요.” 엄마들은 궁금하고
자녀들은 긍정적인 대답을 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우리 애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캐나다로 공부하러 온 학생으로서는 자연스럽고 문제가 없지만, 실제로 현지 학생들의
실력과는 현저히 차이 나기 때문에 문제해결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야 합니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자녀들이 겪는 학교생활은 갈등과 인내와 자괴감과 서운함과 후회 같은 감정 등이 얽혀있습니다.
단지 영어 때문에 못 알아들어서 바보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니까요. 아이들이니 견디는 것이지
어른이신 엄마들께서 직접 학교에 가시면 언어장벽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셔서 그 다음날 포기하실
일입니다. 따라서 학교에서 온 자녀들을 따뜻하게 대해주고, 또 영어에 대한 보충수업의 기회를
주셔서 빠른 시일 내에 학교생활을 즐길 수 있게 해주셔야 합니다.

4. 지나친 보호보다는 스스로 자기생활을 관리할 수 있는 자녀들로 만드셔야 합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사랑에 대한 조절이 필요합니다. 한석봉 어머니의 일화를 늘 마음에 새기시면 됩니다.
아들에 대한 냉철한 사랑의 조절이 당대의 문필가를 만들어 냈습니다. 일어나는 시간부터 자는
시간 까지 언제나 일관된 하루 일과표를 갖고 살도록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컴퓨터와 TV,
친구들은 특히 아들의 경우 캐나다 생활에 많은 변수로 작용합니다. 하루 하루의 수업을 반듯이
복습하고 또 책 읽는 습관과 일기(daily journal) 쓰는 습관을 갖게 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스스로 일어나고 스스로 학교수업을 챙기고 스스로 복습하는 습관이 있으면 이미 성공적인
유학생활로 들어갔다고 보시면 됩니다.

5. 목표를 갖고 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아가도록 해주시면 합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지난
주 칼럼에도 기고했듯이 학생들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자기가 어디에서 왔는지, 자기가 왜
캐나다에서 공부하는지를 확실히 인식하게 해주셔야 합니다. 이것이 동기가 되어 생각(think)
하게 되고, 그럴 때 행동을 위한 계획(plan)을 세우게 되며,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 (action)하게 됩니다. 언제나 “think > plan > do” 로 이어지는 생활을 하는 자녀가
되도록 하셨으면 합니다.

6. 캐나다에 생활하는 엄마나 자녀나 캐나다에 동화 (assimilation) 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엄마들도 캐나다에 사시는 동안 캐나다 이웃들과 어울리시고, 또 자녀들이 열심히 영어의 장벽을
돌파하듯이 엄마들도 영어에 자신을 갖도록 LINK도 다니시고, 자녀들은 캐나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또 캐나다 TV를 시청하면서 학교에서도 여러 인종의 또래 (peer group)들과 재미있는
대화를 해야 합니다. 매우 캐나다적인 생활 (very Canadian life)에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물론
캐나다 한국사회 (Canadian Korean Community)와 등지라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 사회에만
국한해서 사시지는 마라는 것입니다. 캐나다에 오신 것은 자녀뿐 만 아니라 엄마들도 시야를
넓히셔서 함께 세계화 (globalization)의 흐름 속에 숨쉬며 사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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