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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엔지니어의 세상 사는 이야기

부제: [캐나다 국경도시 윈저에 살며 미국에서 일하는 자동차 엔지니어의 세상 사는 이야기]

현대자동차 제품개발연구소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 22년째 오로지 한 길을 걷고있는 자동차 엔지니어입니다.

1995년 봄, 큰 뜻을 품고 캐나다로 독립이민, Toronto에 정착하여 약 1년 동안 살다가, 1996년 봄에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도시 Windsor로 옮겨와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캐나다장로교회 소속 윈저사랑의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직분: 시무장로), 현재 미국 Michigan주 Metro Detroit 지역에 소재한 닛산자동차 북미연구소에서 Senior Project Engineer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 사이버 공간을 통하여, 캐나다의 일반적인 생활 뿐만 아니라, 특별히 캐나다나 미국의 자동차 분야에 취업을 준비하고 계신 분들이나 현직에 계신 분들과 함께, 캐나다와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직접 보고, 느끼고, 배운 것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지속적인 관심과 성원을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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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5
성탄과 새해를 맞이하여 온누리에 기쁨과 사랑이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성탄과 새해를 맞이하여 온누리에 기쁨과 사랑이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하루를 지내고 나면
더 즐거운 하루가 오고
사람을 만나고 나면
더 따스한 마음으로 생각하고
좋은 일이 생기면
더 행복한 일을 만들 수 있는
아름다운 새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

지난 한해 동안 함께 하사 도우시고 인도하여 주신 주님께 감사 드리오며, 성탄과 새해를 맞이하여 예수님의 사랑이 온 누리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2004년 12월 24일

정화영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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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01
미국 추수감사절을 며칠 앞두고
작성일: 04.11.23 미국 추수감사절을 며칠 앞두고 공연히 가슴이 설렌다. 세상에 공짜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필자와 같은 월급쟁이에게는 돈 받고 노는 공휴일이나 유급 휴가야말로 정말 살 맛 나게 만든다. 1999년부터 필자는 1년에 두 번씩 추수감사절의 기쁨을 맞보고있다. 올해는 10월 10일과 11일에는 캐나다 추수감사절을 온 식구 한자리에 모여 보낼 수 있었다. 아이들 모두 필자가 사는 곳에서 자동차로 3시간 거리에 있는 대학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어서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는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에) 추수감사절은 감사절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미국에서 일하고 있지만 캐나다에 살고있기 때문에, 특별히 미국 추수감사절이 필자에게는 보너스로 받는 휴일과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휴일 이상의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음에도… 유년주일학교 때부터 청교도의 역사와 미국 추수감사절의 유래에 대하여 듣고 자라온 필자에게는, 미국 추수감사절이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전혀 모르거나 생소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깊이 있게 알고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몇 년 전, 인터넷 써핑 중 어디에서인가 퍼서 저장해놓은 “추수감사절의 기원과 근본적인 의의”라는 글을 발견하고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 추수감사절의 기원과 근본적인 의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너희의 소산을 먹을 때 너희에게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명하였으며, 그 후로(혹은 그 전에도) 인간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땅의 소산을 허락해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려왔다. 추수감사절을 따로 정한 것은 미국 이주자들에 의하여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즉 이 관습은 이미 오래 전부터 유럽에서 행해졌던 것이다. 매사추세츠의 청교도들은 크리스마스 절기를 가톨릭의 절기로 간주하여 이를 지키지 않았다. 이처럼 크리스마스를 로드섬을 제외한 영국의 식민지에서 절기로 지키지 않게 되자 추수감사절을 크리스마스 절기 대신에 정통파 청교도들의 절기로 지키게 되었다.미국에서의 최초의 추수감사절은 미국에서의 첫 번째 수확기였던 1621년 가을에 플리머스 정착지에서 미국이 주자들에 의하여 지켜졌다. 미국 이주자들과 그들의 인디언 손님들은 야외에서 여러 가지 음식을 차려놓고 일주일간 이 추수감사절을 지켰다. 17세기 말 이전에 이 추수감사절은 코네티컷주와 매사추세츠주의 연례적인 성일이 되었으며, 이 관습은 서서히 다른 지역들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이 추수감사절은 특별한 종교적 절기(비록 나중에는 종교적 색채를 지니게 되었지만)가 아니었으며 단순히 영국의 율타이드(Yuletide) 절기와 같은 것이었다. 추수감사절은 일반적으로 목요일 날 지켜졌는데, 그 이유는 목요일이 강연일로서 매우 인기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관습이 보다 확고한 기반을 갖고 남부지방으로 퍼져 나가게 되자 각 주의 정치가들은 이 추수감사절을 각 주의 연례행사로 정하는 문제를 정식으로 토의하게 되었다. 한편 1840년대에《Godey's Lady's Book》의 편저자였던 사라 요세파 헤일 여사는 추수감사절(11월 마지막 목요일)을 미국 전역의 연례적인 절기로 지킬 것에 대한 캠페인을 벌였으며, 1863년 9월 28일에 추수감사절을 미국 전역의 연례적인 축일로 선포할 것을 촉구하는 서신을 그 당시 미국의 대통령인 링컨에게 보냈다. 그로부터 4일 후 링컨은 추수감사절을 미국 전역의 연례적인 절기로 공포하였다. 그 전 까지만 해도 감사일이나 기도일에 대한 대통령의 선포는 연례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추수기와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그러나 1863년 이후로 모든 대통령들은 링컨의 전례를 따랐으며 행정부도 이를 뒷받침해 주었다. 따라서 1941년까지 추수감사절의 날짜는 대통령의 연례적인 선포에 따라 각기 달랐으나 1941년에 미국의회는 대통령과의 합의 아래 11월 네 번째 토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정하고 이날을 휴일로 공포하였다. 비록 의회는 이 추수감사절 날짜를 확정지어 놓고 있으나 대통령은 계속하여 링컨이 1863년에 시작한 전례에 따라 매년 추수감사절 날짜를 선포해 오고 있다. 추수감사절의 근본적인 의의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는 큰 절기(명절)가 셋 있었는데, 그것은 유월절과 칠칠절, 그리고 초막절이었습니다. 이중에서 초막절은 수장절이라고도 불리웠으며 이 수장절은 추수를 다 마치고서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 하며 감사의 예물을 드리며 지키는 명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초막절, 또는 수장절이 오늘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23장 34절 이하에 보면 초막절에 대한 하나님이의 명령이 나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칠 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레23:42-43)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장절을 지키라고 하신 근본적인 이유는 추수한 곡식 때문에 감사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추수가 다 끝난 가을날의 계절에 과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셨던 그 일을 회상하며 감사하라는 뜻으로 초막절을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즉 초막절, 곧 수장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크게 기뻐해야 했던 일은 이 땅에서의 곡식 추수가 아니라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가장 큰 의의는 이 땅에서 무언가 많은 축복을 받았기에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이 구원을 받은 사실에 대한 감사가 가장 본질적인 감사의 이유인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3대 절기들은 신약시대에 와서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가 됩니다. 유월절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써 성취가 되며, 칠칠절, 또는 오순절은 승천하신 예수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보내주시는 성령강림 사건으로 성취가 됩니다. 그리고 수장절은 이제 예수님이 다시 재림하심으로써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인 알곡들로 추수되어 영광스러운 천국에 들어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즐거워 하는 천국잔치로써 완성이 될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에 우리는..... 우리가 장차 천국의 알곡들로 추수될 것을 소망 중에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더러는 이 땅에서 흉년을 당해 추수를 제대로 많이 못했을지라도, 또는 한해동안 어려운 일이 많고 손해를 보는 일이 많았을지라도 우리는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영혼의 구원을 받은 것을 감사하며, 장차 우리 영혼이 주님의 자비로운 손길로 추수되어 영원한 천국창고에 들어가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것을 바라볼 때 기뻐하고 감사하며 아름다운 예물로 주님께 찬양과 예배를 드리는 날이 바로 이 추수감사절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는 해마다 추수감사절에 하나님께 좋은 예물을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예물이 우리 성도들이 추수감사절에 마땅히 드릴 예물이 되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추수해 들인 곡식을 예물로 드릴 수도 있겠고, 풍성한 감사헌금으로 예물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든 성도들이 반드시 빠짐없이 드려야 할 예물은 성령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거함으로 맺게되는 성령의 열매,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5:22) 등은 한마디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우리의 인격과 삶으로서, 이것이야말로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아름다운 예물입니다. 만약 우리가 해마다 추수감사절을 지키면서도 이런 성령의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의 한해동안의 영적인 농사는 실패한 것이기에, 추수감사절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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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30
이민을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이민을 떠나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실재로 이민을 온 사람들의 단골메뉴는 “보다 나은 삶을 위하여, 자녀 교육을 위하여, 미래의 희망을 가지고 한국 땅에서 살 수 없어서”인 것 같다. 그렇지만, 개중에는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이민을 오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떠나고 싶어서 왔다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이다. 요즈음에도 상대방의 얼굴도 안 보고 결혼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불과 백년 전 만해도 이런 일은 많았던 것 같다. 백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일본 식민통치 시절에도 이런 예는 있었다고 한다. 우리 조상들은 비록 상대방의 얼굴도 안 보고 결혼을 하였지만, 결혼이 개인과 개인 사이의 결합보다는 집안과 집안 사이의 결속개념으로 성립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싫든 좋든 한번 혼인이 성립이 되면 백년해로를 하는 것이 미덕이었다고 한다. 두 아내와 사는 남편, 두 남편과 사는 아내는 오늘날 현실에도 존재하는 것 같다.“아니, 당신 무슨 얘기를 그 따위로 하는 거야?” “우리 한 번 솔직해집시다. 살아가면서, 당신의 남편이나 아내가 늘 당신이 그리던 그런 사람으로 생각되냐구? 현실의 삶 속에 존재하는 아내 또는 남편, 마음 속에 그리는 이상형의 아내 또는 남편이 없느냐구?” 여러분의 가정불화를 조장하려는 의도로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그저 사람이 살다보면, 가끔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이민의 삶을 살면서, “내가 이민 온 것이 정말 잘한 일인가 아닌가?” 수 없이 자신에게 묻고 또 묻게 된다. 마치, “내가 이 여자 또는 이 남자와 결혼해서 사는 것이 잘한 일인지 아닌지?” 질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민은 결혼보다 위험부담이 적은 것 같다. 현지답사라는 형식으로 미리 둘러볼 수도 있고, 요즈음에는 해외파견 등 미리 이민을 위한 준비운동 기회도 많으니 말이다. 하긴, 결혼하기 전에 연인으로 동거하다 맘에 들면 결혼하고 싫어지면 부담없이 헤어지는 새로운(?) 풍속에, “어허, 요것들 보래이. 제법 머리 쓴데이” 감탄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에서 필자가 말하는 결혼은 이런 결혼이 아님을 독자 여러분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민도 마찬가지다. “가보지도 않고 이민을 결정해야합니까?” 아마도 이민 알선업체들이 단골로 써먹는 질문일 것이다. 필자는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이전에 이민 알선업체들이 주관하는 세미나를 몇군데 찾아다니며 공짜로 정보를 구하기는 했지만, 정작 이민서류를 포함, 모든 준비를 스스로 해결했으니 이민 알선업체 입장에서는 얌채 짓을 한 격이 된다. 아무튼, 캐나다 이민 오기 훨씬 전, 미국에서 살 때, 캐나다 여행도 해봤고 캐나다나 미국에 대하여 전혀 아는 것이 없는 처지도 아니었지만, 캐나다 이민 결행에 앞서 개인적으로 정착후보지였던 토론토 지역에 머물면서 먹고 살 가능성을 최종 점검한 적이 있다. 캐나다 이민 와서 살면서, 의외로 대책없이 이민 온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간혹 만난다. “일단, 한 1~2년 살다 일이 잘 안 풀리면 까짓것 한국으로 다시 돌아 가지뭐.” 이렇게 간단히 말하는 사람들도 본다. 생각은 자유이다. 그런데, 필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은, “이런 정신상태로 이민 와서 무슨 성공을 하겠다는 거냐?”이다. 이민은 심심풀이 땅콩이 아니며, 그저 한번 요행 삼아 해보는 장난이 아니다. 물론, 사람마다 형편과 처지가 다르므로 필자의 생각이 모든 경우에 꼭 맞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이민을 심각히 고려하는 사람들에게 한가지 조언을 해주고 싶다. 이민은 도전이요 모험이다. 인터넷을 통하여 필자에게도 가끔 황당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극히 기본적인 것도 스스로 찾으려 하지않고 “이것 알아봐 주세요, 저것 알아봐 주세요” 하면서 무차별 명령조로 부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민을 오게되면 많은 것을 스스로 찾아 해결해야 한다. 이민 가는 순간부터 자신의 일을 스스로 처리하는 사람과 처음부터 손 하나 까딱 안하고 남에게 의지해 버리는 사람은 이민 이후의 적응에 큰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이 글이 이민을 고려하는 사람들에게 다소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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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30
이민생활이 정말 힘들까?
글쓴이의 허락을 얻어 http://www.winsamo.org 자유게시판에 게시했던 글입니다. ==================================================================================== From: Brian K. Chung To: [email protected] Sent: Mon, 19 Jan 2004 04:24:02 -0800 (PST) Subject: 메일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접한 글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런 부담없이 운영하시고 계신 웹사이트에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 제목: 이민생활이 정말 힘들까 “한국생활이 힘들어 떠난다” 라며 딴 나라로 생활의 거처를 옮기는 “이민”이라는 키워드가 돌풍을 몰아온지도 벌써 꽤 되었다. 여기저기서 사기네, 아니네 하면서 떠들어도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남는다. 나는 한국서 현역으로 군생활 마치고 유학을 온후 현지 정착한 케이스이다. 주위에 이런 사람 꽤 많다. 교회 가보아도 내 나이또래는 가족이민 아니면 대부분 이런 유학케이스 또는 주재원 눌러앉기가 대부분이다. 이민생활이 힘들 거 같다며 삶의 터전을 바꾸는데 망설이는 많은 사람들은, 한국에서도 이민 갔을 때 만큼 노력하면 열심히 살수 있다는데 머리를 끄덕인다. 절대로 맞는 말이다. 그런데, 체질적으로 한국시스템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딴 방법을 찾는 수 밖엔 없다. 헛바람이 들은 사람(특히 여자분들 중에 많음) 들도 마찬가지다. 밖에 나와서 살아보고 그 허와 실을 경험해 보는 거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간단히 한국과 비교해서 정말 외국이 살기가 힘든지 알아보자. 현재 미국에 거주하므로, 한국과 미국과만 비교하겠다.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잘 모르므로 할 말이 없다. 대부분 이민생활의 힘든 점을 얘기할 때, 대기업 중견간부를 지내던 사람이 미국에 와서 새벽같이 일어나 막노동 … 하는 얘기를 많이 한다. 이런 게 이민 생활의 힘든점 이라면 이건 주제가 잘못 된거다. 소위 비교를 하려면, 한국에서 대기업 간부의 생활과 미국 회사생활 또는 한국의 회사 생활과 유사한 미국 생활을 써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한국에서의 편했던 생활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여기서 적응하지 못해 징징짜는 그런 류의 이민생활 체험기가 대부분인 것이다. 비교를 할 때도, 한국에서의 최저생활과 여기에서의 최저생활을 비교 해야하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대기업 중견간부생활과 여기에서의 막노동 중 어떤 게 힘들 거라는 건 개나 소도 안다. 그런걸 왜 쓰나. 그리고, 한번 자리를 잡았으면 무슨 직업이든지 끝장을 볼 각오로 덤벼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징징거려봐야 도움될게 아무것도 없다. 이민생활을 자초한건 본인이다. 그 이민생활을 떠나기에 앞서 최소한의 현지조사와 굳은 각오로 덤벼야만 하는 것은 누구든 안다. 그런데 이걸 소홀히 하고, 나중에 후회한다. 이 무슨 어리석은 짓인가. 그러다 보니, 이런 글을 읽는 이민을 고려하는 사람들도 생각하기를 “현지에서는 그런 일밖에 할게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러시아에서 오는 유대인들을 보라. 그들은 먼저 온 다른 유대인들로부터 초기정착을 하는데 필요한 중고 자동차, 보험 그리고 공공기관을 통한 취업을 위한 교육 등 엄청난 도움을 받는다. 그리고 자기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유사한 도움을 선사한다. 이런 도움을 통해 빨리 현지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요령을 배우고, 이민자들 간에 도움의 가교를 만들어 나간다. 내가 아는 한 지인은 (나이 사십이 넘어 오신 한국분) 미국에 온지 오년여 만에 수백만불을 벌어들이는 무역업체 사장이 되었다. 처음 와서는 영어조차 서툴렀고, 햄버거 사먹을 돈조차 없었던 사람이었다. 자랑스런 한국인의 한 전형이다. 자기가 무엇에 능하고 또 무엇을 해야하는지 분명한 목표가 있었던 케이스 이다. 그럼 혹자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가물에 콩나듯 한다고. 그럼 한번 한인 교회 같은 곳을 가보라. 사기꾼도 있지만, 현지 생활에 잘 적응한 사람들이 더 많다. 그들은 다 운(?) 만 좋아서 잘 적응했나? 아닐 것이다. 지금도 심심챦게 “똥포” 에 대한 말들이 가끔 나온다. 제 나라 버리고 떠나서 잘 사나 봤더니, 한국 방문했을 때 보니까 옷입는 거 하며 거지와 다름없어, 저으기 업신여기며 부르는 경멸적인 표현이다. 많은 똥포들이, 특히 오랫만에 한국을 방문했던 교포들은 자신이 한국식으로 세심하게 의상을 차리고 다니지 않으면 거의 십중팔구 “똥포”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 그 이유는 물이 다르기 때문이고, 이 물이 다른 이유는 사회구조가 원하는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돈이 있어야 먹고 사는 거엔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그 액수가 차이가 많다. 거의 삶의 질을 비슷하게 놓고 보았을때 한국은 미국에 비해 월등히 적게 든다. 우선 집장만에서 볼 때, 한국서는 부모들이 거의 대부분 도와주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자기가 자기 크레딧을 이용해서 장기 융자로 집을 산다. (다운페이 정도는 한국서 도와주는 운좋은 친구들도 있다) 그러므로 이 융자금이 매달 받는 월급에서 꽤 큰몫을 차지한다. 허나 한국은 이런 융자금 내는 집이 거의 없으므로 당연히 생활비가 적게 들 수 밖에 없다.융자금 하나만 해도 한달에 최소한 백 혹은 이삼백 만원 차이가 난다. 둘째, 집소유자들의 재산세가 지역별로 다르기는 하나, 내가 살고 있는 동북부는 침실 4개 짜리 6년된 집의 재산세가 일년에 $11000 이다. 약 천삼백만원 정도인 셈이다. 일년 재산세만. 강남에서 이에 준하는 가격대의 아파트라면 약 35평 정도가 된다고 한다. 최근 이사한 친구 말로는. 헌데, 이 아파트의 재산세는 일년에 약 35만원 이라고 한다. 두배로 뛰어도 70만원 이다. 일년에. 물론 한국에선 과외비가 장난 아니다. 한달에 일 이백이 우습다고 한다. 게다가 체면유지비도 꽤 든다고 한다. 어쨌거나 한국서는 미국서 버는 거의 반만 벌어도 미국에서 사는 거 보다 훨씬 좋은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본다. 내 나이에 한국에서 직장에 있는 친구들은 대부분 대기업 부장 또는 이사에 속한다. 돈 잘 쓰고, 세상이 다 자기 거 같을때 이다. 여기서 전문직에 속한 나 같은 사람들은 대부분 재정적으로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고, 최소한 10만불 이상은 번다. 세금 띄고 뭐해도 집에 7-8만불 이상은 가져간다. 거기다 와이프가 같이 버는 사람들은 대충 20만불 이상 벌기도 하지만, 그만큼 애들에 쓰는 비용이 늘어나서 몇 만불 더 벌자고 힘들게 와이프가 일하는걸 포기하기도 한다. 연봉이 15만불이상 되면 우선 세율이 확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커가는 애들 뒤치닥거리 하면서 한편으로 자기 생활을 즐기는 와이프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생활은 내가 보기로 한국선 연봉 5천만원 정도만 되어도 가능할거 같다. 앞서 얘기한대로 집대출금 또는 재산세가 거의 없거나 미미 하기 때문이다. 각자 앞으로 차 한대씩 있고, 주말엔 가족과 외식하고 일년에 한번씩 휴가 때 해외여행이나 외국 사는 친지들 방문한다. 미국 사는 거에 비해 다른 게 있다면, 휴가를 가는 곳 (한국선 거리상 주로 동남아, 일본. 미국선 유럽또는 카리브해, 멕시코) 이 다르고, 아무래도 미국이 차값이 싸니까 벤즈나 BMW 같은걸 한국에 비해 쉽게 몰고 다닌다. 한국에 가서 보니, XG 모는 사람 정도면 미국에서 벤즈, BMW 몬다고 보면 대충 맞는 거 같다. 생활수준으로 볼 때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절대 아니다. 오해 마시라) 미국선 미용실 아가씨, 비디오가게 아줌마, 손톱손질 네일살롱 아가씨, 부동산 아저씨, 세탁소 아저씨 같은 평범한 직업들도 자기 집 (비록 은행융자긴 하지만) 과 벤즈, 렉서스 같은 고급차 끌고 다니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그만큼 인건비가 높고, 삶의 목표가 아주 거창하지 않다면 이루기도 수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것만 보고 미국이 낫다고 하는 건 개도 웃을 일이다. 이들의 삶의 질이 한국서 XG 타는 사람보다 무엇이 낫단 말인가. 못할 수도 있지. 그래서 이민살이와 한국살이를 비교할 때는 무엇보다도 비슷한 생활수준을 비교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사는 친구들 얘기로는 이런 중산층이 한국에서 최근 많이 붕괴되었다 한다. 여러가지 복합적이 사회문제가 주 원인으로 지적된걸 신문에서 보았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자존심때문에 한국에서는 못할일을 미국에 와서 하면서 무척 힘들어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사전에 철저한 현지조사 및 준비를 해가지고 와서별 어려움없이 살아가기도 한다. 중요한건 본인의 노력이다. 이민을 옆집 마실가듯 생각하며 아무런 대책없이 오는 사람들에겐, 그에 따르는 댓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고, 철저히 준비를 하고 적응노력을 하는 사람에게는 또 그에 걸맞는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 이미 생활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징징거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슬픈 글만 더 잘 보이고, 이런 글을 통해 이민사회를 배우는 아주 이상한 현상에 길들여지게 된다. 지금까지 여러가지 비교를 한건, 어느 사회건 노력을 하는 사람에게는 기회가 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말하려고 했고, 이민사회라고 해서 한국에 비해 특별한 고생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왜 그 많은 사람들이 이민와서 살겠는가를 얘기해 보려고 하였다. 천가지 만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모든 건 본인이 하기에 달렸다는 지극히 평범한 한마디로 이글을 매듭짓고 싶다. 현재 이민을 고려하거나, 모든 이민생활을 열심히 하는 분들을 위해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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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30
이민병은 불치의 병인가?
1989년 가을부터 1991년 초봄까지 1년 반 동안 미국 Indiana주 South Bend라는 작은 도시에서 가족과 함께 꿈같은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애당초 미국에 영주할 작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가면, 언제 다시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있으랴?”라는 생각에서 미국에 사는 동안 틈만 나면 자동차 여행을 하며 축복의 땅 북미대륙 이곳 저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2년 반쯤 지내다가 이민을 심각하게 고려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눌러앉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남들이 보기에 괜찮은 직업도 있었고 소위 잘 나가는 사람 중의 하나였지만, 만족감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필자는 移民病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가족과 함께 캐나다에 이민, Toronto에 정착한 것은 1995년 4월 19일이었다. 1년 반 동안 미국에서 생활한 경험은 캐나다이민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민을 오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필자 자신이 앓고있던 移民病이었다. 결국, 필자는 移民病을 고치기 위하여 캐나다로 이민을 오게 된 것이다. 移民病은 이민을 오기 전에는 치유가 불가능하다고 하는데, 요즈음 인터넷을 통한 移民病의 전염은 심각한 정도에 달한 것 같다. 필자도 인터넷을 통하여 移民病을 전염시키는 무리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독자 여러분은 이점을 주의(?)하시기 바란다. 이민을 결행하기 전에, 너 나 할 것 없이 “캐나다로 이민 가는 것이 정말 잘하는 것일까, 아닐까?” 수 없이 자기자신에게 묻고 답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 하러 캐나다 이민 왔냐?”는 질문에 마땅한 대답을 찾기가 곤란한 것이 현실인 것 같다. 캐나다로 이민을 결행하는 많은 사람들이 “과연, 캐나다는 기회의 땅일까?” 의구심을 가지고있는 것 같다. 기회의 땅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것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어느 곳이든, 그곳이 캐나다든 미국이든, 기회는 용감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기회를 잘 활용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 아무쪼록 어려운 이민의 삶 속에서 이민의 꿈을 실현하고자 분투하는 모든 이에게 하나님의 가호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한다.
winsa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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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30
"캐나다 이민생활 뒤집어보기"를 시작하며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올려놓은 정체불명의 글들이 범람하는 것을 인터넷 상에서 종종 발견하곤 합니다. 일종의 인터넷 공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캐나다 이민생활 뒤집어보기”라는 타이틀로 필자의 이민생활을 뒤집어보기에 앞서 필자의 정체를 드러내보이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하여 다음과 같이 적어봅니다. [자기소개] 1983년 3월에 현대자동차 제품개발연구소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 이제까지 오로지 한 길을 걷고있는 자동차 엔지니어입니다. 1995년 4월, 큰 뜻을 품고 캐나다로 독립이민, Toronto에 정착하여 약 1년 동안 살다가, 1996년 초봄에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도시 Windsor로 옮겨와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시무장로의 직분으로 캐나다장로교회 소속 윈저사랑의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미국 Michigan주 Metro Detroit 지역에 소재한 닛산자동차 북미연구소에서 Senior Project Engineer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는 주로 개인 홈페이지(http://www.winsamo.org)를 통하여, 주로 자동차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Windsor지역에 정착을 계획하고 있는 분들에게 정착 및 취업에 관한 조언 및 정보를 제공해왔습니다만, 앞으로는 지경을 넓혀서, 캐나다의 일반적인 생활 뿐만 아니라, 캐나다와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직접 보고, 느끼고, 배운 것 그리고 이민생활 속에서 부대낀 여러가지 이슈들을 화~악 뒤집어보고자 합니다.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시기바랍니다. 감사합니다.^_^ [약력] * 2000. 8. - 현재 Nissan Technical Center North America, Inc., Farmington Hills, Michigan, USA - Senior Project Engineer * 1999. 11. - 2000. 7. GM Truck Product Center, Pontiac, Michigan, USA - Design Release Engineer * 1999. 6. - 1999. 10. The Gates Rubber Company Automotive Technical Center, Rochester Hills, MI, USA - Technical Program Manager * 1996. 3. - 1999. 5. The Gates Rubber Company, Windsor, Ontario, 캐나다 - Engineering Project Manager * 1995. 7. - 1996. 2. Litens Automotive, Toronto, Ontario, 캐나다 - Senior Engineer * 1995. 4. - 1995. 6. 캐나다 이민, Torornto 정착 - 생계대책으로 부심 * 1991. 3. - 1995. 3. AlliedSignal Korea Ltd., 서울 - Senior General Manager * 1989. 9. - 1991. 3. Allied Signal Inc., Bendix Automotive Systems North America, South Bend, Indiana, USA - Senior Engineer * 1988. 10. - 1989. 9. 주식회사 인원개발, 서 울 - 시험연구팀 팀장 * 1983. 3. - 1988. 9. 현대자동차 제품개발연구소, 울산 - 시험연구부 사원, 연구부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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