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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서산에 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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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개봉된 리칭 주연의 '스잔나' 포스터 

 

 

 나는 3남 2녀의 집안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크게 가진 건 없어도 형제들이 공부를 잘해 머리 좋은 집안으로 소문이 났었다(나만 제외하고…). 형제 중에도 나와 둘째 형님과의 추억은 아주 선하게 남아 있다. 어린 시절 작은 형님은 나의 우상이었다. 형님은 아주 잘 생겼고 공부도, 운동도, 뭐든 잘했다. 원래 둘째는 진취적이고 적극적이어서 인생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지 않던가. 


 시골에서 수재소리를 듣던 형님은 충청도에서 인재들만 모인다는 D중.고등학교에 다녔는데 성적도 우수하고 리더십도 강해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즈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가정형편상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공직자의 길로 들어섰다. 두뇌 좋고 성품 곧으신 형님은 공직에서 승승장구했다. 이런 형님에게 사방에서 혼담(婚談)이 쏟아져 들어오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형님이 공직생활 초기에 만난 분이 바로 형수님이었다. 당시 형이 형수 되실 분과 사귄다고 들었을 때 어머니를 비롯한 우리 가족은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겼다. 솔직히 형님은 얼마든지 좋은 조건의 혼처를 고를 수가 있었는데, 당시 형수 되실 분은 객관적 여건상 형님과는 (인물 외에는) 별로 균형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얼굴이 예쁘셨던 그분에게 형님은 홀딱 빠졌던 것 같고, 가족들의 떨떠름한 반응 속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 형수를 우리 가족은 '둘째를 뺏어 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올린 형님 결혼식 피로연에서 두 분이 불렀던 노래가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형님은 '꿈꾸는 백마강', 형수는 영화 '스잔나' 주제가였다. “해는 서산에 지고 쌀쌀한 바람 부네/날리는 오동잎 가을은 깊었네…” 그때 노래 부르던 형수의 모습은 천사! 그것이었다.


 형님네는 결혼 후 분가(分家)하기까지 한동안 우리와 함께 살았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 방학에 대전 집에 내려와 있으면 형수님은 '대련님'인 나에게 밥을 해주시곤 했다. 당시 잊지 못할 추억은, 라면이 지금처럼 흔할 때가 아니라 별미로 통하던 시절이었는데, 계란과 파를 듬뿍 썰어넣은 라면 특식을 얼큰히 끓여내주신 것이다. 그 맛이 어쩜 그리도 좋은지 아직도 그런 맛은 느낄 수가 없다. 지금도 라면을 먹을 때마다 형수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군대에 간 내가 휴가를 나오면 형수는 푸짐한 술상을 차려주셨는데, 한번은 잘 담근 인삼주를 마시고 대취해 신혼의 꿈도 채 가시지 않은 두 분의 방에 먹은 음식을 그대로 반납하는 대형 사고를 치기도 했다.       


 금실이 좋았던 형님 내외는 어딜 가나 함께 다녔고 그런 두 분에게 나와 작은누나는 은근히 질투를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박봉(薄俸)의 공무원 월급으로는 살림이 풍족할 수 없었고, 형수는 이런저런 부업을 했다. 화장품 가게도 그 중 하나였다. 형님 집에 들어서면 은은히 풍기던 화장품 냄새가 지금도 아련하다. 형수는 처음엔 그저 얼굴만 예쁘고 살림 같은 건 잘 할 것 같지 않았다. 성격도 밝고 낙천적이어서 세상에 고민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내면으론 무척 검소하고 실속이 있어서 살림살이는 점점 자리가 잡혀갔고, 아들딸 낳고 잘 살았다. 시골에 자그마한 땅도 사놓고 은퇴 후에 두 분이 내려가 밭 갈면서 살뜰히 살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우리는 이민을 왔고 형님네는 10여년 전에 딱 한번 캐나다를 다녀가셨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는 소식 주고받는 횟수도 줄어들고 어쩌다 명절 때나 전화로 안부를 묻는 정도에 그쳤다. 한동안 소식이 뜸하다 1년 전 누님으로부터 전해들은 소식이 놀라웠다. 형수가 기침을 자주 하더니 증세가 심각해졌고, 진단 결과 폐암 말기라고…


 형님은 형수를 살리기 위해 외국의 유명병원까지 날아가 치료를 받게 하는 등 온갖 수단을 총동원했다. 그러길 수 개월. 그동안 우리는 형수가 어서 회복되길 기도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차도를 물어보기도 무엇해서 그냥 누나를 통해 소식만 알고 지냈다. 


 그러던 중 일주일 전, 새벽에 걸려온 전화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직감을 갖게 했다. 나와는 대여섯 살 밖에 차이가 안 나는 나이. 아직도 곱디 고운 형수님은 그렇게 이승을 떠나고 말았다. 미인은 박명(薄命)이라던가. 형님 내외는 그야말로 질투 날 정도로 금실 좋고 행복하게 살았다. 말년의 그들은 아무 것도 걱정할 게 없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신혼 초엔 고생 좀 했지만 이젠 살만하게 되니 떠나고 말았다. 인생이 그런 것 아닌가 한다. 고생하다 살만해지면 이내 떠나야 하는 것… 형수님 장례식에서는 고인이 너무 복이 많아 일찍 가신 것 같다고들 했단다. 


 0. 막내의 위치에서 한 분 두 분 떠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일곱살에 아버지를 잃고, 그 후 어머니와 큰형님, 큰 매형에 이어 낙천적이어서 오래 살 것 같으시던 작은 형수까지. 언젠가는 내 차례가 되겠지. “…꿈은 사라지고 바람에 날리는 낙엽/내 생명 오동잎 닮았네/모진 바람 어이 견디리//지는 해 잡을 수 없으니 인생은 허무한 나그네/봄이 오면 꽃 피는데 영원히 나는 가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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