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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편견 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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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한번 밉게 보기 시작하면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나쁘게만 보이는 법이다. 반대상황도 있긴 하다. 한번 좋게 보면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무조건 감싸주는 그런 것.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우가 그렇겠다. 사람에 대한 편견은 인간의 진실을 애써 외면하고 왜곡된 모습만 보이게 만든다. 편견은 올바른 인간관계를 차단하는 치명적 장벽이다.     

 

 


 지난해부터 한국을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은 탄핵정국이 문재인 대통령 탄생으로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그러나 벌써부터 걱정이다. 그가 이 험난한 상황을 잘 극복해갈 수 있을까. 한국인 중에는 여전히 그를 종북좌파 세력일 뿐이라고 보는 시각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세인들이 갖고 있는 이같은 편견을 어떻게 뚫고 나갈 것인지.   


 나는 사실 문재인이라는 인물을 잘 알지 못했다. 그저 노무현 전 대통령과 친했던 핵심 참모 정도로만 알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도 죄익종북분자라고 욕을 해대기에 대체 어떤 사람인가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학창시절 수재 소리를 듣고 군(특전사)에서는 모범병사 표창도 받는 등 꽤 괜찮은 인물이었다. 정의감과 의리도 깊고, 무엇보다 나같은 ‘흙수저’ 출신인지라 서민들의 애환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다. 


0…문재인은 1953년 1월 경남 거제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 점심 싸올 형편이 못돼 학교 근처 성당에서 배급을 타먹어야 했고 이때 급식을 나눠주던 수녀님들의 천사같은 모습에 감화돼 천주교 신자가 됐다. 어머니의 연탄배달 일을 돕다 리어카와 함께 길가에 처박힌 일은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고 한다.


 그는 자서전 <운명>에서 “돈이라는 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는 지금의 내 가치관은 오히려 가난 때문에 내 속에 자리 잡은 것이다. 아마도 가난을 버티게 한 자존심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런 가치관은 살아오는 동안 큰 도움이 됐다”고 술회했다. 그는 지금도 자전거를 못 탄다. 어린 시절 자전거를 살 돈도, 배울 시간도 없었던 탓이다. 


 이런 현실에도 그는 당시 부산경남지역 최고 명문교로 꼽히던 경남중.고교를 수석으로 입학했다. 중학교 때 그는 부유한 친구들을 보며 세상의 불공평을 느꼈고, 이 시절부터 독서에 빠졌다. 학교 도서관에 남아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성적은 좋았지만 극도로 가난한 자신의 처지에 낙담해 술•담배에도 손을 대며 방황하다 서울대 입시에 실패했다.


 이에 명문학원으로 불리던 종로학원 시험을 쳤고 여기서도 수석을 하며 학원비를 면제받고 재수를 했다. 그후 경희대 설립자이자 총장이던 조영식 박사가 '4년 전액 장학금'을 약속해 문재인은 경희대 법대에 또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러나 군사정권 시절, 반정부 집회를 주도하다 구속돼 제적당했고 출소 후 군에 강제 징집돼 특전사 공수여단에서 복무했다. 군복무 중엔 여단장(전두환)으로부터 최우수 표창도 받았다. 전역 후 법대를 졸업한 그는 전두환 정권에 항거하다 다시 수감됐고 조영식 박사의 신원보증 아래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 후 극적으로 석방됐다.


 사법연수원에선 동기였던 고 조영래 변호사, 박원순 서울시장, 박시환 대법관, 고승덕 변호사 등 쟁쟁한 동기들이 즐비했지만 차석으로 수료했다. 연수원  최고상(법무장관상)도 탔지만 학생운동 전력 때문에 성적이 차석으로 밀리고 판사 임용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대형 로펌의 영입 제의를 거절하고 고향(부산)으로 낙향, 여기서 노무현과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졌다. 함께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며 인권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두 사람에게 인권, 시국, 노동 사건이 몰렸다. 그는 <대한민국이 묻는다>라는 저서에서 “인권변호사의 길을 간 것은 변호사가 단순히 밥벌이 수단이 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적었다.


 변호사 활동 중 정치권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기도 했지만 한사코 거절했다. 대통령 후보였던 노무현이 부산시장 출마를 권유했으나 '나는 참모용'이라며 고사했다.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도 문재인은 '변호사 업무에 복귀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 


0…문재인은 노무현 대통령 집권 초기, 치아를 10개나 뽑을 정도로 격무에 시달렸다. 업무시간 외에는 직접 차를 몰고, 비행기나 기차는 늘 일반석을 이용하는 등 관행화된 특혜를 내려놓았다. 그러다, 과로에 당의 총선 출마 요구를 견디지 못해 민정수석을 1년도 못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휴식은 길지 않았다. 청와대를 떠나 네팔 히말라야를 산행하던 중 노무현의 탄핵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 변호인단을 꾸렸으며 이후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민정수석, 정무특보 등을 거쳐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다.


 그는 청와대 시절 모든 직원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다양한 의견을 듣고 상황을 명확하게 정리해내는 스타일을 보였다. 학교동문에 대해서도 사사로운 눈길을 주지 않았으며, 청와대 출입기자단과 식사나 환담 자리도 갖지 않았다. 노무현은 이런 문재인에 대해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다.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원칙주의자"라고 평가했다.


0…문재인의 인생은 그의 자서전 제목처럼 '운명'과도 같다. 학생운동 전력 탓에 판사임용이 좌절돼 변호사의 길로 들어선 것도, 홀로 계신 노모를 모시러 부산행을 택했다 노무현을 만난 것도, 노무현의 타계로 정치에 입문한 것도, 그에겐 운명이었다. 특히 권력욕이 없고 순수한 그가 보여준 절제력과 의연함이 국민들에게 각인되면서 정치인으로서 제2의 인생을 사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기쁨도 환희도 잠시 뿐이다. 앞에 놓인 짐이 무겁기만 하다. 갈가리 찢긴 민심을 한데 모아야 하고, 어려운 경제와 사드(THAAD) 문제, 북한의 도발 위기 등 그 무엇하나 간단치가 않다. 그야말로 집권 후가 더 걱정이다. 국민들도 이제는 그에 대한  편견을 깨고 난국 돌파에 힘을 합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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