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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부동산캐나다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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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방문기(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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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야로스라브의 일생을 더듬으며 그의 이름으로 붙여진 야로스라브 시를 방문했다. 이날 아침 일찍 유람선에서 버스를 이용하여 한 시간의 거리를 달렸다. 고속도로는 포장되어 있으나 많은 곳이 파손되어 불편함을 느꼈다. 수리를 하지 않은 도로는 상태가 아주 좋지 않았다. 고속도로라 하지만 조국의 산간 국도만큼도 정비가 되어있지 않아 아직 가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도로 양 옆에는 어디에서나 많이 볼 수 있는 자작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어가고 있어 이 나라의 깊어가는 가을을 알려주고 있었으며 철새 떼들은 계속 북으로 북으로 날아갔다. 아마도 시베리아 추운지역을 찾아가는 철새 떼들이라고 생각했다. 


 차창 밖의 농토는 파종을 하지 않아 수확을 할 수 없는 황무지 같은 유휴 농토가 많은 것 같았다. 고속도로 양옆 길에는 길을 밝혀주는 가로등 역할을 하는 자작나무들이 질서 정연하게 서있음이 인상적이었다.


 이곳 야로스라브를 야로스라발이라고도 하는데 이 시에는 주목할 만한 15개의 돔 교회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볼가강 강변을 끼고 있는 이 아름다운 도시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140개의 유명 유적지가 있고, 어마어마한 규모의 침례자 요한의 교회와 엘리자의 교회도 있다.


 특히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오니온식 돔교회이며 그 중에도 엘리자 교회의 내부 장식은 상상을 초월한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고, 여기 저기 박물관의 예술품은 역사적인 성지임을 잘 증명하고 있는 것 같다.


 야로스라브 현인은 1019년에서 1054년까지 살았던 러스 즉 러시아 전신의 왕자로 그는 바래진 즉 바이킹의 후손 발디미어의 아들이었다. 그는 우크라인 키에브에 있었던 수도사인 니스터에 의해 야로스라브 현인으로 명명되었다.


 1010년에 그는 노보고오드라 불리기도 한 큰 도시의 부섭정인이 된다. 그는 그곳에서 사는 동안 야로스라블이라는 도시를 세워 볼가의 야로스라발이라 부르기도 했다. 5년 후 그의 아버지의 죽음으로 맏형 시야토폴크가 정권을 잡으며 아래 3형제를 처형해 시아토폴크는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는 그의 이름을 딴 러시아 최초의 야로스라브 법정을 선포했으며, 이는 스라빅 땅에 처음으로 세워진 법정이 된다. 그리고 그는 스칸디나비안 나라와 연합을 하며 스위디쉬 왕의 딸과 결혼을 하는데 그녀의 이름을 아린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는 결혼 선물로 라도가 호수와 그 일부의 땅을 그의 부인에게 선물로 주게 된다. 러시아 땅을 선물로 받은 그의 부인은 콘스탄틴 노불과 연합하여 남쪽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해 나가게 된다. 또한 키에브에 성 소피아 교회를 건립, 영광스러운 헤이가 소피아 교회로 명명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은 비잔틴 왕의 딸과 결혼을 시킨다. 그의 부인 아린과의 사이에서 출생한 딸 엘리자벳은 노르웨이 왕과 결혼을 시키고 둘째딸 아카타는 영국의 에드와드 왕자와 결혼을 시키며 아들 이자샤라브는 그의 뒤를 이어간다. 그가 죽은 후 키에브에는 다른 자손 이고와 보이얀으로 승계케 한다.


 야스라스라브의 시신은 현재 성 소피아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는 설명이다. 그 후 백년의 역사가 흐른 후 현재 역사가들의 증언은 그의 시신이 네 곳의 다른 나라에 안장이 되어있다는 주장도 한다. 즉 러시아의 야로스라발이 그 한 곳이고, 타아르투의 이스토니아, 우크레인의 터키비아, 폴란드의 야로스라우 등을 말하기도 한다. 2010년의 야로스라브의 밀리온이어 축제라는 영국의 영화에서 야라스라브에 관한 일생을 엿볼 수 있다는 빅토리아 관광안내원  의 설명이다.


 이어 이 곳 야로스토바 시에 도착한 관광객들은 전통 시장에서 음식을 테이블에 전시하고 마음껏 먹고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 러시아 치즈와 소시지는 기름이 너무 많은 것 같고 짠 맛의 향료가 너무 들어가 있는 것 같아 필자의 입에는 맞지 않았다. 시장내의 각종 점포의 물품은 조국의 재래시장과 비슷한 듯 했으며 관광객을 이용한 시장이라 그런지 물건 값은 고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러시아 농촌에서 생산되어 직송된 싱싱한 농산물을 접할 수 있었으며 시장 밖으로 나와 좁은 골목을 다녀보니 꼭 조국의 재래시장의 축소판 같았다.


 길거리를 지나다가 점포 쇼윈도에 진열된 양복 색깔이 마음에 들어 안으로 들어갔더니 한가하기 그지없고 주인과 간단한 대화로 가격을 물었더니 캐나다의 3배 정도 비싸 놀랐다. 캘거리의 제일 유명한 신사 양복점인 해리로쟌 점포의 가격은 캐나다화 천불이면 사는 옷을 US달러 4천불을 달라해 깜짝 놀라서 도망을 치다시피 나왔다.


 이어 이 곳 옛 성주의 집을 방문하는 마지막 일정에 임했다. 성주의 따님이 나와서 성주의 집 내부의 모든 장식품과 예술품을 방마다 돌면서 직접 설명을 해주며 친절히 환대를 해주었다. 


 재미있는 것은 마지막 홀에서 5중주의 관현악단이 차이코프스키의 클래식 곡을 연주하며 관광객을 열렬히 환영한다는 인사말을 해주었다. 연주가 끝나자 옆에 있던 남자와 여자들이 관광객을 찾아와 넓은 홀에서 춤을 추자는 것이다. 우리 백여 명의 관광객은 클래식한 음악에 취해 있는데 춤까지 추자니 황홀의 극치이었다. 


 이 어쩐 일인가 경천지동할 일이 발생했으니 즉 이곳 성주의 딸이 나에게 와서 춤을 추자니 이 촌놈 정신이 아찔 다른 사람과 추라며 사양을 했더니 두 번 세 번 춤을 추자한다. 어쩔 수 없이 이 여인의 손에 이끌려 춤을 추었다. 그러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는데 두 번째 곡이 울리며 또 다른 여인, 셋째 딸이 와서 춤을 추자한다. 나 참 여기 백여 명의 관광객이 있고 나는 지금 막 춤을 추었기에 정중히 사양을 한다며 거절을 했다. 그런데 상관없다며 다시 손을 잡고 홀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어 왈츠 춤을 추었는데 나는 춤이란 것을 배운 적도 없고 또한 춰보지도 않았기에 진땀을 흘리면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유람선으로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마누라 나 인기 좋지, 백여 명의 코 크고 키 큰 서구인들 보다 내가 더 멋있는 남성이 되었으니 러시아 여인들은 사람을 제대로 알아본다”고 약을 올렸더니, 이 무슨 말인가 “나도 러시아 남자가 와서 춤을 추자해서 추었다”며 머쓱하게 했다. 우리는 서로 버스 안에서 깔깔 웃어 보았다. 이렇게 오늘도 하루해가 저물어 갔다. (다음 호에 계속)

 


 

(사진) 야로스라브 시장에서 러시아 전통치즈와 각종 음식물을 맛보며 유람선 주방장 토마스와 유람선 매니져와 환담을 하는 필자(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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