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rokim
노스욕 거주,본보 주최 제1회 정원&텃밭 컨테스트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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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6.25 회상(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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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주시기만 한 부모님의 사랑을 받기만 했다. 그런 자신에게 부모로서 자식들에게 사랑을 주기만 했느냐고 반문한다면 나는 우울해진다.


 생전에 아버님은 종종 고생하고 큰 아이들이 빨리 철든다고 하셨다. 고교 후배인 박 군은 젊은 나이에 암이라는 충격적인 죽음의 선고를 받고도 용기를 내어 많은 난관을 거쳐 극복했다. 그 후에도 시간을 만들어 장애인을 위한 자원봉사를 그치지 않고 하고 있다. 


 우리는 일생동안 잊을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다. 사람들은 좋든 나쁘든 극한 상황을 거치고 나면 인생을 알고 겸손해지고 어떻게 사는 것이 현명한가 하는 교훈을 얻는 것 같다. 내 자신도 피난 전과 피난 후의 자신은 분명 달라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논 일곱 마지기와 밭 천여 평 가지고는 현재의 여섯 식구가 겨우 먹고 사는 정도인데 거기에 두 장정이 더해져 8명. 누님의 치료비, 동생들 학비, 가용돈 등은 가축사육으로 겨우겨우 충당하는 형편이었다. 어떤 형태로든 보충하지 않으면 빚을 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서울대 사범대학 졸업반이었던 영회 형님은 임시 교사로 벌교 상업고등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어 다소 숨통이 터지게 되었다. 나는 다시 시급했던 취사용 나무를 맡았다.


 몇 년 전만 해도 아름드리 소나무로 울창해 솔방울을 가마니로 주워오던 동리 바로 뒤는 거의 황폐되어있어 매일 아침 도시락을 싸서 취사용 나무를 찾아다녀야 했다. 나무가 없으면 낫으로 띄풀과 잡목을 베어 사흘 정도 말리면 불편 한대로 취사용으로 쓸만했다. 도시락을 싸서 지게를 지고 낫을 들고 산으로 가다 중학교에 가는 동갑내기 친구들과 마주칠 때도 이럴 때마다 스멀스멀 솟아오르는 묘한 감정에 우울해지면 삭히는데에도 한참이 걸렸다.


 내 눈에 비친 이들은 마치 ‘켄터키 옛집’을 드나드는 순진하고 행복한 소년들처럼 보였고 시야는 무만동과 별교 정도로 한정된 것 같았다.


 ‘어려운 시절이 닥쳐온…’ 나에게는 일종의 가벼운 시련이지 좌절은 아니었다. 그때마다 숲 속의 통나무집에서 빌려 읽던 책이 빗물에 젖어 책값으로 일해준 링컨보다야 낫지 않느냐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 중에도 유일하게 즐거움이 있다면 소학교 때 같이 소를 먹이러 다니던 양 군, 김 군 등 목동 친구들이었다. 이들은 소학교를 졸업한 지 3년이 지났건만 그냥 집에서 농사일을 도우며 소일하고 있었다. 암담한 현실이다. 


 만날 때마다 허물없이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고 아무리 오래 놀아도 지루하지 않는 심우들이다. 마루에 걸터앉아 신라의 달밤이나 비 내리는 고모령과 같은 유행가를 부르며 떠들다가도 자정이 넘을 때까지 ‘과연 이대로 가도 좋은 것이냐?’하는 심도 있는 토론을 빈번히 하곤 했었다.

 

9.28 수복

 

 어물어물 9월도 지나 10월 초가 되었다.
 유엔 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여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탈환, 전국에 피난 갔던 서울시민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멀쩡하게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나무나 하러 다니는 자식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시고 계시던 부모님은 서울로 돌아가 복학하라고 강권하셨다.


 여비가 마련되기를 기다려 11월 초 아버님과 함께 벌교 철 다리 밑 뱃머리에서 어선을 타고 선수의 주막에 들어갔다. 다음날 새벽 2시에 부산 가는 여객선(소위 통통배, 100명 정도 수용할 수 있음)을 타고 부산으로 가서 당시 군수품 수송용인 기차에 불법편승할 계획이었다. 당시 전라선과 호남선은 불통이었다. 위험하고도 불안한 상경 여로가 시작되었다.


 그 주막에는 이미 통통 연락선을 타기 위해 장사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와있었다.
주막의 좁은 방에 앉아 이야기들을 하는 중에 해군모와 파카를 입고 들어선 남자가 아버님께 인사를 한다. 알고 보니 이웃 아래 장터에 사는 해군 문관이었다. 서울이 수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애(영노)를 복교시키러 간다고 하자 자신도 경기 여중을 다니다 식구들과 피난 내려온 딸을 복교시킬 수 있을까 알아보러 상경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부산에 가면 해군 함정으로 인천까지 갈 것이라며 그 군함으로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놀라움과 동시에 희망이 보였다. 


 새벽 2시경 여객선을 타고 여수반도와 고흥반도 사이의 좁은 해협을 따라 남행, 의자도 없는 선실에서 한숨 자고 밖으로 나오니 고흥을 끌어안고 있는 팔영산이 늦새벽의 어둠을 배경으로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펼쳐져 있다. 여수 쪽으로 뱃머리를 돌리자 다도해라는 이름이 걸맞게 무수히 많은 섬 사이를 잘도 미끄러져 간다. 돌산 섬과 육지 사이의 좁은 수로(현 돌산 연육교)를 지나 여수항에서 나룻배로 승하선을 마치고 남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현 남해대교(당시에는 없었다.) 수로를 지나 삼천포를 들러 당시 자개장으로 유명했던 통영항에서 약간 떨어진 지점에 정박했다.


 여느 항구와 같이 부두시설이 전근대적이어서 가까이 대지를 못하는 것이다. 털 손님을 싣고 나룻배가 오기도 전에 조그마한 보트 같은 배들이 다가와 ‘깨엿 사이소, 깨엿 사이소’ 소리치며 여객선 주위를 돈다. 기차를 따라 우르르 달리면서 천안 명물 호두과자를 사라고 외쳐대던 천안역의 장수들이 연상되었다. 불편하고 지루한 여행에 지친 손님들은 당시의 유일한 기호식품이라 할 수 있는 엿을 사 먹으며 기분을 전환했다.


 그 후 계속 항해하여 거제도의 장승포항을 들러 부산으로 향했다. 여태까지 남해안을 따라 수많은 섬  사이를 요리조리 헤치고 왔다면 지금은 전혀 다른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아득한 수평선이 있을 뿐 육지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해가 수평선 끝에 닿아가며 하늘과 바다가 불그스레 물들어갔다. 낙동강 물이 바다로 유입된다는 가덕도에서 대한 해협 쪽은 물결이 높고 거칠었다. 여태까지 잘 버틴 고물 선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배의 프로펠러가 지나가며 잔챙이 고기들을 솟구치게 하는지는 몰라도 수많은 갈매기떼가 까악까악 거리며 물속을 들락거렸다.


 부산에 도착한 것은 거의 밤 10시경이었다. 선창가에 즐비한 선술집 겸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같이 왔던 해군 문관은 군함 사정을 알아보러 간다며 나갔다. 군함을 타면 목포를 거쳐 인천까지 하루면 갈 수 있으니 기다려 달라고 했지만 다음 날 아침까지 나타나지를 않았다. 언제 어떻게 바뀔 줄 모르는 전시상황인 것을 감안하여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기차에 편승하기 위해 역으로 갔다.


 임시 수도인 부산은 서울의 관리, 배경이 든든한 사람, 전국의 부자와 그의 가족들이 피난살이를 하고 있었다. 마치 콩나물 시루 속 같았다. 무질서하고 혼란하고 폭력이 난무하고 너 죽고 나 살자는 것이 현실이었다. 역은 한층 더했다. 서울로 돌아가려고 모여든 수많은 피난민이 어떤 화물칸이 갈 것인가에 촉각을 곤두세운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여객열차라는 것이 없는 관계로 차표라는 것도 없었다. 서울로 올라가다 달리는 열차의 지붕에서 떨어져 죽든 말든 하는 것조차 나중 문제였다.


 그때의 전황을 보자면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한 후 국군이 서울부터 동해까지 중부지역을 탈환, 북진 중이었다. 남쪽에 남아있던 인민군과 지방 빨치산들은 산속으로 쫓겨 들어가 후방의 국군들이 소탕작전을 펴고 있었다. 최 전장에서는 유엔군들이 50년 10월 19일 평양을 함락하고 계속 북진 중이었지만 평양함락을 기점으로 중공군이 개입함으로 훨씬 복잡한 양상을 띠어가고 있었다. 따라서 북으로 가는 군수물자가 무한정 필요한 상황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유엔참전 16개국에서 보내온 군수물자를 부산 부두에서 싣고 전국으로 수송하는 것이다. 우리도 바로 이 기차 지붕을 타고 서울까지 가려고 온 것이다.


 군수물자를 실은 화차의 문은 꼭 잠겨있고 뒤나 옆에 붙어있는 조그마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지붕에 반자 정도의 판자가 세줄로 붙어있어 달리는 차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여기에 줄로 몸을 묶어 11월 초의 북풍을 맞받으며 올라가는 것이다. 한참을 기다리니 화물칸 20여 개를 단 기관차가 시동을 걸기 시작한다. 혹시 이것이 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난민들이 짐을 지고 지붕으로 개미떼같이 올라가 순식간에 지붕들이 꽉 차버린다.


 우리는 앞에서 두 번째 지붕에 올라탔는데 아버지는 솜을 두껍게 넣은 한복 상.하의를 껴입고 일제때 만든 방한모(솜을 두껍게 넣어 어깨까지 늘어트려 얼굴만 작게 드러나게 만듦. 폭탄이 터지면 파편으로부터 고막을 보호하게끔 만들어짐)을 쓰셨다. 나는 학생용 오버에 방한모를 썼다.


 이윽고 목이 메는듯한 기적 소리가 울리고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 옆에 탄 젊은 분은 자신은 몇 번이나 차 지붕에 오르내리다 겨우 서울 가는 것을 타게 되었는데 우리 보고는 단번에 적중시켜 탈 수 있었으니 재수가 좋다고 했다. 기차가 부산 시가지를 벗어나 줄곧 낙동강 변으로 달린다. 최남단인 데다가 막 기차에 오른 터라 별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기차 지붕에서 보는 탁 트인 전망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낙동강 하류는 넓고 출렁이는 물결과 넓게 펼쳐진 을숙도 갈대밭의 물결, 떼로 몰려다니며 먹이를 찾는 물오리들, 멀리 펼쳐져 있는 김해평야 등은 불안하기만 한 상황에서도 자연의 조화를 감상하게 해주었다. 자연에 도취하여 있는데 기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 다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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