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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음악가 시리즈(VI)-'샤넬과 스트라빈스키'(Coco Chanel & Igor Stravinsky)(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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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No.5'를 탄생시킨 재봉사와 전위적 
'봄의 제전' 작곡가의 불륜의 사랑을 그린 작품

 

 

 


 

(지난 호에 이어)
 혹평을 받은 원인을 놓고 디아길레프, 니진스키, 스트라빈스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진다. 니진스키는 지나치게 전위적인 음악 때문이었지 안무는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고 강변하는 한편 스트라빈스키는 "춤이 바보 같았고 리듬조차 느끼지 못했다."며 안무를 탓한다. 

 

 

 

 


 이에 디아길레프는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신 겁니다. 다만 음악 취향 따윈 없는 관객들이 너무 생소해서 아직 걸작을 이해 못할 뿐이죠."하고 이고르를 위로한다. 이어서 "괴물과 맞서려면 싸우는 게 아니라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고 격려하는 디아길레프. [註: 바슬라프 니진스키(Vaslav Nijinsky, 1890~1950)는 ‘무용의 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수많은 창작품과 고도의 발레 테크닉을 완성시키며 전설적 명성을 떨친 폴란드 출신 러시아 남성무용수였다. 디아길레프는 공공연한 호모였는데 그의 연인이었던 니진스키가 발레리나와 결혼했기 때문에 1913년 이 일을 빌미로 해고했다는데… 아무튼 니진스키는 그 후로 예전의 명성을 회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스트라빈스키 가족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스위스에서 망명객이 되어 가난하고 비참한 생활을 이어간다. [註: 러시아 제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극도의 생활고에 시달린 서민들이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빵을 요구하며 일으킨 1917년 2월 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가 세운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폐위되어 제정 러시아는 종지부를 찍는다. 
 같은 해 10월 좌파 볼셰비키에 의해 레닌(Vladimir Lenin, 1870~1924)의 지도하에 두 번째 혁명이 일어난다. 이는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에 기반한 20세기 최초이자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었다. 이 러시아 혁명에 뒤이어 레닌과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가 주도하던 혁명파 '적군(赤軍, 좌파)'과 서방국가들이 지원하던 반혁명파 '백군(白軍, 우파)'이 싸우던, 이른바 '적백내전'이 일어나, 결국 1922년 사상 최초로 공산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즉 소련(蘇聯)이 탄생했다. 이 격변의 역사 속에서 한 개인의 존재와 삶과 사랑 이야기를 담은 대서사극이 유명한 '닥터 지바고(1965)'이다.]

 

 

 

 


 1920년 봄 파리. 어느 사교모임에서 디아길레프의 소개로 7년 만에 '재봉사'와 '작곡가'의 만남이 다시 이루어진다. 코코는 연락하라며 이고르에게 명함을 건넨다. 이때 패션 디자이너로 상류사회의 유명인사가 된 가브리엘 '코코' 샤넬(Gabrielle 'Coco' Chanel, 1883~1971)은 그의 연인 아서 '보이' 카펠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져있을 때였다. [註: 샤넬의 연인인 아서 '보이' 카펠(Captain Arthur Edward 'Boy' Capel, 1881~1919)은 영국 출신의 선박사업가, 폴로 선수로, 샤넬의 창업자금을 대주고, 그의 멋있는 캐주얼 스타일은 '샤넬 룩' 창조의 영감을 주었다. 그들의 관계는 그가 죽기까지 9년 간 계속되었는데 카펠이 1918년 결혼한 후에도 지속되었다. 1919년 12월 22일 샤넬과 크리스마스 랑데뷰를 하기 위해 롤스 로이스로 파리에서 칸으로 가던 도중 교통사고로 38세에 사망했다. 운전기사는 중상을 입었으나 살았다.] 


 여기서 주인공인 코코 샤넬의 생애를 살펴보기로 하자.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의 가장 영향력있는 100인' 중 유일한 패션 디자이너로 뽑혔던 '더블 C'로 대표되는 코코 샤넬. 제1차 세계대전 후 여자들을 코르셋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샤넬 No.5' 시그너처 향수, 핸드백, 보석 등과 어울리는 고급 맞춤 여성복을 디자인하여 그녀는 부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영국 상류사회의 주류명사가 되었다. 


 어머니는 자선병원 세탁부였고, 아버지 알베르 샤넬은 떠돌이 노점상이었는데 1884년 결혼하기 일 년 전에 가브리엘 샤넬이 태어났다. 어머니는 모두 2남3녀를 낳고 결핵으로 32살에 사망하여 12살의 가브리엘은 오바진(Aubazine) 고아원에서 양육되면서 나중에 그녀의 미래가 될 재봉기술을 배웠다. 


 18살이 되면서 더 이상 고아원에 있을 수 없어 물랑(Moulins)에 있는 '라 로톤드(La Rotonde)' 카페에서 노래를 불러 팁으로 연명했다. '코코'라는 별명은 이때 붙여졌다. 그녀가 즐겨 부른 노래의 가사에서 따왔다는 설과 프랑스어 '코코트(cocotte)'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당시 카페의 주고객은 군인들이었는데 젊은 매력이 넘치는 샤넬을 보고 '품고 싶은 여자'라는 뜻의 '코코트'로 부른 것이 '코코'로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카페에서 전직 기병대 장교 출신이며 직물제조업체 '발상'의 상속자로 거부인 에티엔 발상(Etienne Balsan, 1878~1953)을 만나 그녀의 인생이 180도 바뀌는 행운을 얻는 코코 샤넬. 그녀의 나이 23살 때인 1906년이었다. 


 그의 정부(情婦)가 되어 콩피에뉴(Compiegne)에 있는 로얄유 성(Chateau de Royallieu,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었음)에서 동거하는 3년 동안 승마, 사냥, 폴로 경기 등 스포츠를 배우고, 사교계의 문화를 접하게 된다. 발상을 통해 상류사회의 미학과 취향 등을 이해하게 되어 인맥을 만들면서 패션 디자이너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기방종의 삶을 배우면서 그녀는 평생 마약을 달고 다녔으며 항상 최상품을 사용했다고 한다. 

 

 

 

 


 1909년에 샤넬이 파리에 정착했을 때 그의 아파트를 빌려주었고, 1913년 부티크 가게를 도빌(Deauville)에 열었을 때도 도와주었다. 그리고 발상의 친구인 아서 '보이' 카펠을 그녀에게 소개해 주어 그때부터 또 다른 인생이 시작되었다. 샤넬은 나중에 "두 신사는 나의 뜨거운 육체에 비싼 값을 매겼다."고 술회했다.


 2010년 영국의 자서전 작가인 저스틴 피카디(Justine Picardie•57)가 쓴 'Coco Chanel: The Legend and the Life (Harper Collins)'에 의하면, 자살한 언니 줄리아 베르트(Julia Berthe Chanel, 1882~1910)의 외아들로 샤넬이 양자로 삼았다던 앙드레 팔라스(Andre Palasse)는 샤넬과 발상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밝혀졌다. 


 코코 샤넬은 1971년 1월 10일 일요일, 30년 이상 살았던 파리의 리츠 호텔(Hotel Ritz)에서 87세로 사망했고, 스위스 로잔에 있는 부와 드 보(Bois de Vaux) 묘지에 안장됐다. 그녀의 대부분의 유산은 스위스에 있던 조카(아들) 앙드레 팔라스와 파리에 살고 있던 그의 두 딸에게 돌아갔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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