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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
yeodongwon

 
 
내가 만약 오늘 백 만불 6/49 복권이 당첨되면 내일 당장 세계일주 관광 길에 오를 것이다. 물론 그 첫 목적지로는 이집트가 기다리고 있다.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그리고 그 많은 신전 답사는 나의 지적 호기심을 유혹하기에 충분하리만큼 가슴 설레는 일생의 꿈이었으니까. 그리고 곧바로 그리스로 건너가 돌기둥만 남은 신전들을 구경한 후 로마로 갈 것이다.


거기서 원형극장과 바티칸을 찾을 것이고, 그 다음으로 유럽대륙에 숱하게 산재돼 있는 중세 고성들과 크고 화려한 교회당 건물들을 둘러보고 인도로 넘어가 그 유명한 타지마할 사원을 꼭 보게 될 것이다. 


거기로부터 쭉 동남아를 거치면서 그 많은 불상과 사원을 구경하고 중국으로 직행, 그 스케일에 압도당한다는 웅장한 고궁들을 두루 구경하고 만리장성에 올라본 후 훌쩍 남미로 날아가 신비에 휩싸인 잉카와 마야문명의 유적지를 답사할 것이다. 


이 모든 유적들은 세계 몇 대 불가사의라는 타이틀 소유답게 엄청나게 크고 웅장하고 화려한 위용으로 나를 위압할 것이다. 아니다. 나는 가지 않을 것이다. 갈 가치도 이유도 없다. 안가는 이유는 간단하다. 착취와, 수탈과, 억압과, 힘없는 민초들의 땀과 피와 목숨으로 이룩된 곳이기 때문이다. 


피라미드와 만리장성의 돌 하나하나는 끌려온 힘없는 민초들의 목숨을 뭍은 그분들의 무덤인 것을. 참으로 아이러니는 구경꾼들이 장송곡이 아니라 행복해 하고 있다는데 있다.


만약 이 지구상에 이 같은 신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신전이라는 유물들과 권력이라는 권위로 남겨진 유산들이 없었다면 세계 관광객들의 발길이 얼마나 허전해 할까? 참으로 웃기는 만화다.


한데도, 이 유물들이 인류문화유산으로서의 값어치보다 돈벌이 관광자원으로 활용, 각광받고 있다는 모순에 나는 허탈해 한다. 


아니, 이 허전한 마음은 다른 깊은 이유에 기인하고 있다. 그 유물들에 얽혀있는 만들어진 동기와 과정의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하나같이 인류의 삶의 가치(행복)를 높이기 위해서라기보다 신의 권위, 혹은 권력의 권위를 위해 힘없는 민초(바닥 백성)들을 동원하여 채찍으로 쥐어짜낸 피와 땀과 눈물과 목숨(죽음)으로 쌓아 올린 한의 구조물들이라고 하는데 이르면 나는 어떤 배신감 같은 분노에 치를 떨게 된다. 비틀린 시각일까? 과연 그를까?


이 유물들이 고대라는 시대에 마련된 흘러간 역사의 가치관으로 간주하여 이제쯤은 위대한 역사물로 봐 넘길 수도 있는 문제라 해두자, 하지만 오늘에도 권력과 신력의 관행적 버릇으로 현재도 진행형으로 복사판 흉내 내어지고 있다면 21세기 문명사회라는 말은 허울에 불과하다. 아니 달라진 것은 한 가지도(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모든 것은 민초로부터 나오는 오늘의 가치관으로 보면 권력의 권위는 물론, 하늘의 권위도 민초의 권위 위에 있지 않으며, 어떤 권력의 이름으로도, 신의 이름으로도, 조직의 이름으로도 개인(민초)의 의사가 침해 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현대라는 오늘 이 시대에 한 권력자의 권위가 신의 자리에까지 끌어올려져 혹은 동상으로 혹은 기념물로 높고 크고 화려하게 만드느라 허기진 민초의 사역이 강요되고 있다면 컴퓨터가 판을 치는 현대문명사회라는 이름이 도둑맞고 있는 꼴이다.


아무리 신의 이름아래 크리스털 유리로, 온갖 사치함의 극치로 크고 웅장하게 지어 꽃 단장으로 치장한들 인간의 욕심에 불과하며 자기자신에게 스스로 상을 내리는 상징물은 될지언정 낮은 데로 임하시는 신의 집은 분명 아닐 터이다.


그러나 이런 비문명적 구조물들도 또 몇 백 년 후에는 좋은 관광상품으로 둔갑, 외화벌이 역군이 되어줄지 모르긴 하다. 마치 신권, 왕권이라는 이름으로 채찍에 몰려 사역 당한 결과물들인 저 무덤 같은 신전이나 만리장성, 피라미드 같은 유물들이 오늘날 경외와 감탄으로 구경 되듯이.


한없이 자애롭고, 한없이 부드러워야 할 어머니 같은 신은, 그리고 백성의 안녕과 행복을 책임질 권력자는 옛날이나 오늘이나, 서양이나 동양이나 왜 이처럼 이기주의적 무자비성에서 한 발짝의 양보 없이 그렇게도 닮았는가?


내가 상상하는 오늘 이 시대의 하늘은, 그리고 바른 지도자는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으로 믿고 싶은데? 그래서 춥고, 배고프고, 고통 받는 편에 서서 그들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지는 하늘 닮은 분이라 여겨, 절대로 그런 요구를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되려 헐어버릴 것이라 희망하고 싶은데, 우리의 세종대왕처럼.


오늘 이 시대의 신전(교회당)들도 어김없이 왜 그렇게 크고 화려해야만 하는가? 동상이 왜 그렇게도 많아야 하는가? 바벨탑을 아무리 높인들 하늘 아래 탑인 것을…!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나의 애를 끊나니 

 


하늘에 닿을 크신 충무공의 심경은 어느 한 병사의 퉁소소리, 그 민초의 아픔에 잠 못 들어 하셨고, 예수님의 하늘소리는 산상수훈에서 선포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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