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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
yeodongwon

 

얼굴에만 표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깨의 균형에서도 뒷모습에서도 표정을 읽고, 전화 목소리만으로도 상대의 회로애락과 나이까지 감지된다. 골목길 돌아오는 아이의 발자국 소리만으로도 풀이 죽어있는지 기가 살아있는지를 엄마는 안다. 휘파람 소리라도 들리면 표정은 밝아있을 터이다.


사람뿐이겠는가? 창가에 놓인 화초도, 키우는 강아지도 주인의 손길 따라 표정을 달리한다. 뿐이겠는가? 자연에도 표정이 있다. 바람의 표정, 구름의 표정, 해님, 달님, 별님의 표정, 그 표정들에 내 마음 갈대처럼 흔들리며 산다.


소나기 내린 후의 햇살 받은 산골짝의 상큼한 표정과 공해로 찌든 도심의 하늘 표정은 하늘만큼 땅만큼 다르다. 이렇게 우주만상엔 표정이 있어 우리 인간은 물론 동식물이 영향을 받아 회로애락의 표정을 만들며 산다.


아프리카인의 표정이 다르고, 동 서양인의 표정이 다르다. 경찰, 도둑의 표정이 다르고, 정치가의 표정이 있고, 성직자의 표정이 있다. 미움, 증오의 표정은 먹구름처럼 매섭고 어두운데, 착하고 선한 표정은 햇살처럼 맑고 화사하다.


초식동물은 선한 눈빛인데, 육식동물의 눈매는 매섭다. 살인자의 눈빛은 충혈되어있고, 아이의 눈빛은 티없이 맑다. 뇌성번개 치는 하늘표정은 지옥의 표정인데, 진달래 만개한 뒷동산의 표정은 극락의 표정이다. 


하늘은 어이하여 이처럼 삼라만상에 표정의 그림을 그리고, 그 달리한 표정으로 서로간에 정서의 교감을 하게 했을까? 거기엔 분명 하늘 뜻이 있을 터이다. 삼라만상에 표정이 있다는 건, 서로간에 얽힌 인연에 의한 자연의 대화라 여겨지는데, 이게 우주가 살아있음의 증거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 표정들은 삼각지의 순이의 표정처럼 헤프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삶의 경륜을 거쳐 서서히 굳어진다는 것이다. 


악의 표정은 그 소리가 거칠고, 선의 표정은 그 소리가 부드러운 오랜 관습과 환경에 영향 받아 굳어진다는 사실. 그 굳어진 표정은 곧 마음의 거울이 되어 자신을 대신하는 상(image)이 되는 것이니, 평소의 내 맘 곱게 다스려 사슴의 표정처럼 맑은 표정이고 싶다.


한데도, 어쩌겠는가? 이제 회 칠한 무덤처럼 감추려 해도 100년 묵은 교활한 여우의 표정을 숨길 수 없으니, 하늘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지 못한 죄값인 걸,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 값이 아니라는 뜻이다.


요즘 TV 뉴스만 틀면 매서운 표정을 만나게 된다. 정치와 종교 표정들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정치의 궁극 목적은 국민이 골고루 잘살자 함에 있고, 종교의 목적 또한 하늘에 한 점 부끄러움 없는 깨끗한 삶을 살자 함에 있을 터인데, 그 표정들에 살기와 음모가 있다면 정치고 종교고 물 건너 가있다는 뜻이고 순화에 실패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만약에 정치를 잘하고 있다면 국민의 표정은 밝아 있을 터이고, 종교가 하늘(절대자) 뜻에 따르고 있다면 믿는 자의 표정은 맑아 있어야 한다. 세상의 정치와 종교들이 제자리 찾아 지구촌 표정이 밝아져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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