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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 타령
yeodongwon

 

내 나이 80이 눈앞인데 나답잖게 팔자타령이냐? 할 것이나, 오늘 아침 세수하다 거울에 비친 ‘나’라는 늙은이의 거울 밖에 서있는 네(나)가 새삼 신기하게 보여 묻는다.
왜 너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늘 이 시대에 태어났는고?
왜 너는 개도 닭도 아닌 사람으로 태어났는고?
왜 너는 영국인도 케냐인도 아닌 한국인으로 태어났는고?
왜 너는 김씨도 박씨도 아닌 여(呂)씨로 태어났는고? 그리고 하필, 
왜 너(나)는 여(女)자가 아닌 남(男)자로 태어났는고? 
라는 당연히 답이 없을 물음을 애꿎게 거울 속의 내가 거울을 보고 있는 나를 향에 바보처럼 묻고 있었다.


이 모든 게 하늘의 점지(필연)인지? 팔자(운명)인지? 그도 아니면 물 흐르듯, 구름에 달 가듯 이 장소에 이 모양으로 자연의 흐름과정에 우연히 참여된 한 점의 세포적 역할인지를?


만약 나라는 이 한 생(生)이 미리 정해진 예증이었다면 수용 외에 도리 없는 팔자지만, 그러나 내게 주어진 삶이라는 모양새가 시간 속에서 만나는 모든 조건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내 의지가 감당하는 행위로 결과 지어지는 그 무언가가 있다면, 내 의지라는 자존심의 운전 솜씨에 따른 삶의 모양새는 순전히 내 책임이니 주위에 끼칠 의무감의 무게가 없지 않을 터이다.


그렇다면 허술히 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아니잖은가? 주어진 운명(필연)적 내 삶이 일회적이기 때문에도 더욱 그러하다. 표정 하나하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자존심이었는데, 예삿일이 아니잖은가?


생각하면 할수록 살얼음판 걷듯 하룬들 살아낼 것 같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79년 긴 세월 거만을 피며 살아지고 있었다는 게 신기방통이다. 그런데 어떤가? 천지만물이 내 이 한 생을 위한 조건에 딱 걸맞게 정확히 운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마치 천하가 나를 위한, 내 것인 양 제 잘난 맛으로 거들먹거리며 살은 이 뻔뻔함은 무언가?


아니다. 이 당당함이 내 삶의 활력일순 있어도 오만으로 살았다면 이웃과 하늘의 눈치가 이상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 찔금 해진다. 


저 하늘과 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신호등(양심, 윤리, 법질서)을 지키며 내 삶의 운전대를 잡고 일생의 골목길을 우회전(x), 좌회전(y), 조심 또 조심하며 나를 운전해야만 했을걸? 


비뚤비뚤 이리저리 난폭 운전한 후회는 이제 늦었지만. 물론 (z)방향이라는 3차원의 삶도, 그리고 시간(T)을 넘은 4(F)차원의 삶도 있을 터인데, 내 삶의 운전대에 달린 우(x)향, 좌(y)향 2차선 두 방향 깜박이 만으로도 못 간데 없이 휘젓고 다녔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이 모든 삶의 조건들이 하늘 예증이던 내 팔자이던 자연과 이웃 없인 나라고 하는 존재자체가 불가능한 인연적 관계존재인데, 너무도 허술히 살은 것 같아 이웃과 하늘 보기에 심히 민망할 뿐이다.


더욱이 내 독립적 시작(알파)과 끝(오매가)은 영원(무한) 속의 물리적 값은 얼마짜리일까? 


그리고 계속 거울 속의 내가 거울 밖의 나를 보고 묻는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본시부터 있는 변하지 않은 진짜 너(나)는 누구냐? 고. 
물론 나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만은 안다. 흙이라는 돌아갈 집이 있다는 걸. 해서 나의 마지막 바램은

 

 

흙이고 싶다
그냥 흙이고 싶다. 
흙을 먹다 왔으니 그냥 그렇게 흙이고 싶다.
천당 지옥 비교가 없는 영육이 몽땅 그대로 
본시부터 있었던 그냥 그렇게 자연(흙)이고 싶다.

 

(유서.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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