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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값
yeodongwon

 

내 이름값은 얼마짜리 일까? 개 값일까? 호랑이 값일까? 


내 탄생이 내 선택이 아니듯 내 이름 또한 내 의사와 상관없이 붙여졌다. 그리하여 나를 아는 이는 내 이름만 듣고도 나를 떠올릴 것이고 나를 본일이 없는 이는 상상으로 내 모습을 그릴 것이다. 


이처럼 이름은 타의에 의해 붙여진 순간부터 나의 분신으로서의 충성스런 대리 역을 해내다 호랑이가 죽어 가죽을 남기듯 죽어서도 나를 대신할 것은 이름이다.
한문의 名(이름 명)자는 밤(夕)에 보이지 않는 상대를 입(口)으로 부른다는 뜻이란다. 깜깜한 밤에 보이지 않는 나를 대신해줄 것은 이름밖에 없다는 의미다. 기막힌 뜻의 글이다.


나는 하느님을 본일이 없지만 내 상상 속의 하느님은 긴 흰 수염에 부드럽고 인자하신 노인이신데 남성으로 되어 있다. 내가 존경하는 세종대왕은 하느님 모습에 많이 닮아있고, 이순신 장군은 올곧고 반듯한 의지의 눈빛을 가지신 분이라 상상 되어있다. 


세상에 나 혼자면 이름이 필요할까? 이름은 다름을 구별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래서 우주만상에 각기 이름을 붙여 구별한다. 심지어 우주를 창조했다는 절대자를 기독교에서는 그냥 하늘이라 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이라 이름 붙여 부른다.


그렇다. 이름은 구별수단이지 내 실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름 그 자체가 마치 내 실존인 것처럼 운명에 관여된다는 생각은 웃기는 발상이다. ‘성명철학’ 어쩌고 이름에 실존적 가치를 부여, 온갖 요사한 논리로 나의 운명이 내 능력에서가 아니라 이름값에 의해 좌우된다고 고집한다.


하긴 염라대왕도 그의 책에 적힌 여동원이라는 내 이름을 보고 그 행실의 이력을 검토한 다음 천당, 지옥 행을 판결할 것 같으니, 이름이 중요하긴 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어린애 장난질 같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아닐는지 모른다. 각개 이름이 있다는 건 각 개체의 독립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로 보면 이름의 값어치는 절대치가 된다. 그래서 이름을 걸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의사가 이름을 걸고 병을 고치는 모습은 아름답고, 수리공이 이름을 걸고 자동차를 수리하고 있는 모습은 아름답다. 물론 돈벌이를 위해서이지만 일할 때만은 자기 자존심을 건다. 


나는 이민 초기 10년을 기계공으로 일을 했다. 시간당 15불이라는 계약으로 하는 직업이긴 했지만 연장을 들고 일을 할 때만은 돈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전 능력을 동원하는 나의 자존심을 걸고 하게 된다.


그런데, 이름값에 책임감이라는 사회성이 실리면 깨끗한 값이 되지만, 깡패의 주먹에 실린 자존심은 사회성으로 보면 그 이름값은 똥값이다. 마치 나라 다스리는 대통령이 돈을 밝히면 이름값이 개 값이 되듯 말이다.


세상에 이름이 없다면 얼마나 불편할까? 우리집 개 이름이 통키인데 이놈도 제 이름을 기차게 안다. 소파에서 늘어지게 자다가도 ‘통키’란 소리만 나면 발딱 고개를 쳐든다.


‘통키’가 제 이름이란 걸 알고 그러는지 아니면 반복적 소리에 대한 습관적 반응에 불과한지는 모르겠으나 무리 지어 살아가는 야생 동물세계에도 각기 나름의 이름이 있는지 리더에 의해 질서가 정연하다. 통키 조상들의 야생시절엔 가족으로 뭉쳐 살았을 것이고 어떤 형식으로든 각개 구별수단이 있었을 것이다. 


수천 수만 마리 철새 떼나 고기 떼를 보면 개체가 구별되지 않지만 그 무리가 한치 어긋남 없는 질서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개체 하나하나의 가치가 허술해 보이지 않으니 개체마다에 구별법이 있을법하다.


수가 너무 많아 이름으로 불편하면 숫자로 대신하기도 하는데 내가 논산훈련소에 입소했을 때 첫 행사가 죄수처럼 목에 군번 줄을 달아주는 일이었다. 


캐나다에 이민 오자마자 그날로 시민번호(S. I. N)가 주어졌고, 새 집을 사서 들어오던 날 첫 번째로 단 것이 집 번호판이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번호가 있다. VISA 카드 번호다. 이 번호는 지구촌 어디에서도 통하는 내 고유번호가 되는데, 한편으론 어디엔가에 매어져 있는듯해 섬뜩해진다.


집에서는 5남 중 셋째로, 군대에서는 군번으로, 나라에서는 시민번호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구촌 카드번호가 나를 대신하고 있다. 아마도 미래 어느 때인가 우주번호가 통용될 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 염라대왕은 내 이름의 동명이인도 있을 것이니 대신 지구촌 번호로, 아니다. 우주번호로 나의 이력을 검토 판결해야 할는지 모른다. 우주 어딘가에 사람이 산다고 치면 말이다.


그래 내 묻힌 무덤에 비석이 세워지고 그 비석에 새겨진 여동원이란 이름석자의 의미는 무엇이며 무슨 값어치일까? 한 순간의 내 미소가 생각날까? 한때의 추억을 떠올릴까? 그 추억 그 미소가 보는 이들에게 미칠 영향은 +일까? -일까? 아니다. 다 부질없는 허망이다.

 

 

 

죽어 묻혀 흙이면 싶다 
흙을 먹다 왔으니 그냥 흙이면 싶다
웃고 우는 우열비유가 없는
몽땅 그냥 그대로 흙이면 싶다
천당지옥 영생고락이 없는 
영육이 몽땅 그냥 그렇게 흙이면 싶다.

 

ㅡ여울ㅡ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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