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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린내
yeodongwon

 

세상에 좋은 냄새 다 놔두고 왜 하필 구린낼까? 그런데 희한한 건 제 똥 구린내는 역겹지가 않다는 것이다. 분명히 구린내이긴 한데, 남의 구린내처럼 역겹거나 비위가 상하지 않고 되레 구수한 게 애교스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지금 내가 구린내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옛날 그 뒷간과는 달리 어느 방보다도 더 잘 치장된 화장실이라는 이름의 수세식 변기에 앉으면 옛 뒷간의 오 만가지 냄새가 뒤섞인 그 냄새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내 것만의 순수 솔로 냄새라 앉은 자세가 견딜만한 만큼 냄새 또한 견딜만한 것이다.


나는 이 편한 변기에 앉으면 시간 가는 줄을 몰라버린다.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고, 머리는 맑아진다. 그러하니 자연스럽게 무언가 읽거나 생각에 잠기곤 한다. 때론 중단 없는 생각을 잇다 보면 밖에서 불러야 나온다.


오늘도 무릉도원에서 도사가 되어 신선놀음 하다가 문득 냄새의 원산지에 앉아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냄새 그 본체에 대한 사고를 넓혀보는 재미에 빠져버렸다.
그럼 구린내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방귀에 얽힌 구수한 옛날 이야기부터 하나 들어보소.


첫날 밤에 신부가 “뽀-오-옹!” 그만 점잖지 못하게 소리와 함께 냄새를 풍겼다. 단지 그 이유 하나로 소박을 맞는다.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쫓겨난 신부는 10개월 후 사내아이를 생산했고, 그 아이가 자라 7살이 되었다.


“엄마 왜 나는 아버지가 없는 거야?” 


남들보다 가난하게 사는 것도 억울한데, 아버지까지 없는 것이 억울해서 엄마에게 처음으로 따진 것이다. 이 남달리 영특한 아들에게 이제 그간의 사정 이야기를 해줘도 되겠다 싶어 “안 계시긴 왜 안 계셔, 아무데 아무델 가면 열두 대문 기와집의 최진사가 네 아버지란다. 여차여차 해서 이렇게 쫓겨나 살게 되었단다.”


다 듣고 난 아들이 한참 심각하게 생각하더니 “엄마! 걱정 마세요, 제가 아버지를 엄마에게 찾아드릴게요.”


“네 효심은 가상하다만 어린 네가 무슨 힘이 있다고?!”


꼬마는 엄동설한인데도 어디선가 수박 씨를 한 움큼 구해다가 색색으로 물을 들여 괴나리봇짐 해서 아버지 최 진사 집을 향에 길을 나섰다. 


최 진사 집 대문 앞에 이르자 소리소리 고함을 지른다. “수박 씨 사려! 수박 씨 사려! 아침에 심어서 저녁에 수박이 주렁주렁 열리는 수박 씨 사려!”


하인이 이 소리를 듣고 주인에게 고한다. “한 어린 놈이 아침에 심어서 저녁에 열리는 수박 씨 사라고 소리소리 지르고 있사옵니다.”


“이리로 데려와 봐라.”


“네 이놈! 어린 놈이 맹랑하게 거짓말부터 배워, 남의 집 앞을 어지럽힌 죄 볼기짝을 맞아도 한참 맞아야 되겠구나.”


“볼기쯤 맞는 거야 어렵지 않사오나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고, 한번 시험해 보시지도 않으시고 볼기부터 때리신다니 억울하옵니다. 나리.”


“어린 것이 갈수록 맹랑하구나. 그런데 네 말도 일리가 있다. 한번 시험해보자. 대신 수박이 열리지 않으면 네 죄를 인정하렸다?”


“네! 나리 고맙습니다.”


큰 항아리에 흙을 담아 방 아랫목에 놓고 천연색 수박 씨를 정성스럽게 심는다. 점심 때가 지나고, 해가 기울어도 씨는 싹틀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최 진사는 꼬마와 약속을 한 터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밤이 더욱 깊어지고, 모두가 잠들 시각쯤 되었을 때다. 꼬마가 무릎을 탁 치며 “아차! 제가 한가지 여쭙는 것을 깜박 잊었습니다. 나리!”


“네 이놈! 거짓말이 탄로날 성싶으니까 이번에는 또 무슨 수작을 부리자는 거냐?”


“아니올시다, 나리! 이 수박 씨는 보통의 수박 씨와는 달리 부정을 잘 탑니다. 그래서 깨끗하신 분 앞에서만 수박이 열립니다. 예를 들어서 방귀를 뀐다거나 하신 분 앞에서는 절대로 열리지 않습니다.”


“요 맹랑한 아이를 보았나, 세상에 방귀 안 뀐 놈도 있다더냐?”


“그러하옵니다, 나리! 방귀 뀌지 않는 사람은 죽은 사람 외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 하온데 나리! 아니 아버지! 아버지께선 어찌하여 저의 어머니를 방귀 한번 뀌었다는 이유만으로 첫날밤에 쫓아내어 저의 모자가 눈물과 고생으로 살게 만들었습니까?”


대성통곡을 한다. “오! 과연 내 아들이로고. !”


해서 그 후 조강지처를 데려다가 파뿌리가 되도록 잘 살았다는 이야기.


자기도 방귀를 뀌면서 남이 뀐 방귀는 버릇 없는 고얀 짓으로 여긴 최 진사처럼 사람들은 자기 구린내와 남의 구린내의 주관적인 편견을 모든 사고에 독같이 적용시켜 살아가고 있는 듯 보인다. 


내 구린내와 남의 구린내를 시험관에 넣고 냄새의 농도성분을 따지면 그 객관적 수치는 같은 답일 텐데 어째서 내 코의 자극반응은 전혀 상반되는 걸까? 묘하다 아니할 수 없다.


남이 보기에 흠이 자기 눈엔 애교로, 남의 눈에 추문이 자기 가슴엔 일생일대의 로맨스가 되고, 남이 읽으면 횡설수설의 내 글이 나에겐 명문장으로 여겨지는, 내 새끼가 더 예뻐 보이는 이 편견의 착각들, 아무리 세상을 제 잘난 맛에 사는 착각도 자유라지만 판별의 추가 내 쪽으로 이렇게 기울 수가 있느냐는 거다.


그러면서도 한편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기 쪽으로 기울고 있는 편견, 착각도 때로는 필요악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풍진 험한 세상, 모든 것을 편견 없는 객관화의 차가운 눈으로 하룬들 살아낼 수 있는가? 단지 내 구린내는 달고, 남의 구린내는 구리다는 편견본능을 남도 똑같이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주면 된다. 그런데 그게 엿장수 맘대로 되지가 않는, 수양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제 조카애가 똥을 싸니까 십 리를 달아나던 여동생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자, 제 아이 똥 냄새까지도 달콤하다며 환한 미소로 기저귀를 갈고 있는 모습이 신기했다.


그러면 하늘은 왜 이런 자기 쪽으로 기우는 특혜 본능을 주었을까? 코밑 털 한 오라기, 손톱 하나에도 조물주의 의도가 담겨 있는 것처럼 이 구린내의 의도가 분명해진다.
자신을 먼저 사랑하라는 뜻일 것이다. 다음으로 자식을 사랑하고, 이웃을 거쳐 남까지 사랑하라는 하늘의 명령으로 들린다. 본능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 만으로 끝난다면 짐승의 삶과 무엇이 다른가?


저 인도의 빈민가에서 병들고 헐벗고 외로운 자를 돌본 성녀 테레사 할머니는 남의 구린내까지도 자기 구린내처럼 구수하게 맡게 끔까지 되었는지 모른다. 내 쪽으로만 향하고 있는 애정의 사슬이 남에게까지 미치는 경지, 나와 남이 동일시 되는 경지라야 가능하다. 


그만한 차원까지의 도달은 본능을 뛰어넘고자 하는 자기를 깎는 수양과 회생 결과에서만 이루어질 것이리라. 남의 구린내가 내 구린내와 동일시 되는 경지, 이를 나는 사랑의 월경이라 말한다. 말이 쉽지 성자만이 가능하리라.


변기에 앉아 제 구린내가 구리지 않은 것을 감상하고 있는 나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만 산, 조물주의 로봇에 불과한, 한심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그러나 한편 보통인간이 살아가는 평범한 길이 아니더냐? 성자가 못됨을 부끄러워하며 산 삶이 아니라, 보통사람도 못될까 염려하며 산 인간이었지 않았나 싶다.


이렇게 덤덤하게 살아왔듯 앞으로의 남은 생을 그저 그렇게 살다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을 생각하니 좀은 허전하다. 남의 구린내를 내 구린내처럼 맡을 수 있는 인격은 못 된다 해도 흉내쯤은 내며 살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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