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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의 미학(2)
yeodongwon

 

(지난 호에 이어)
 
종교와 과정


종교란 이기심(Ego)을 줄이는 과정이 아닌가? 그런데도 오늘의 종교를 보면 이기심을 줄이기는커녕 목적(신)의 노예를 자초하고 있다. 남이 떨어져야 내가 합격이 되는 기도일 수도 있는 목적 그 자체가 종교가 되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 해탈이 구원이 목적이 되고 있다. 심지어 내 종교만이 참 종교라는 오만적 이기심에 순교를 자초하며 목숨을 건다.


그래서 종교전쟁이라는 비종교적인 형상으로 지구촌이 불바다가 되고 있고, 땅끝까지 그들의 에고(Ego)를 심어 무엇을 얻겠다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참 평화, 참 자유, 참 진리는 목적이라는 허상의 멍에를 벗은 맑은 의식으로 이웃과 더불어 사는 순리의 과정에 따르는(順) 길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천리 길은 한 발짝서부터 시작되고, 두 발짝 없이 세 발짝을 얻을 수 없다. 부산서 출발해서 서울에 가려면 대구, 대전을 거치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 것, 붕 떠서 서울에 간 것은 간 것이 아니라 도착했을 뿐이다.
모로 가도 서울에만 가면 된다면 할말은 없다. 그러나 간 것과 도착은 완연히 다르다. 간 것은 가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이고, 도착은 과정이 무시된 상태다. 


삶이라는 평범한 과정을 거쳐 천당에 가는 길을 외면하고 어떤 제3의 수단을 통해 천당에 도착했다면 삶이라는 구체적 과정에서 얻어진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얻음이라 할 수 있겠는가? 쿠데타가 악인 까닭은 줄을 서는 차례를 기다리는 과정을 무시한 권력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이고도 숭고한 삶이라는 과정을 종교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쯤으로 여기며 하늘나라만을 쳐다보고 사는 사람, 해탈이 목적이 되어 일상적 삶의 과정을 외면하고 수도생활을 고집하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나는 이해 못한다. 진정한 구원, 진정한 해탈은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삶이라는 과정을 통해서만이 얻어지는 귀한 하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런 삶을 외면한, 정상적 생활을 거부한, 일상적 삶의 값어치를 모른, 그런 과정 없는 삶을 어찌 살았다 할 것인가? 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죽은 것이요, 살아보지 않고 죽음에 도달한 것이니, 삶이라는 시시콜콜한 과정의 이력서가 없는 그들에게 하늘이 있다 한들 하늘은 무엇으로 어떻게 점수를 매길 수 있겠는가?


삶이라는 과정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통해서 얻어지는 인간성 순화과정, 타인과의 만남에서 생기는 다투고 분노하고 고민하고 사랑하는 행위에 의해 낮아지고 비워지며 참 종교에 접근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그만큼 순수하고 순화되어 있을 것이라는 나의 기대는 헛것인가?


종교의 근본이 사랑임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랑이 종교의 목적일까? 사랑은 목적이라기보다 행위라는 과정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사랑은 받겠다는 욕심이 아니라 주는 행위에서 얻어지는 희열이라 한다면 분명 참 종교는 사랑행위 그 자체가 된다. 그래서 참된 기도는 무엇을 주시요, 가 아니라 받은 데 대한 감사가 되어야 마땅하지 싶다.


종교 이야기만 나오면 나는 안절부절 부끄러워진다. 죄 많고 부족한, 하늘보기가 두려워서고, 내 사고능력으로는 벅찬, 깊고, 넓고, 높은 상대이기 때문이다. 
나는 숲 속 걷기를 즐긴다. 숲은 나의 스승이고, 책이고, 문제집 답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숲은 전체로 보면 단절이 없다. 시작과 끝, 처음도 나중도 없다. 영원성의 상징이다.


숲 속에선 개개 온갖 것들이 서로 관계로 얽혀, 낳고 자라 죽는 희로애락을 거치며 잎을 떨구고 썩어 거름이 되는 생성의 과정을 만들며 영원히 그대로 숲으로 있다.
종교에서 말하는 영원과 숲의 영원성은 같은 의미일까? 내 보기로는 같은데, 종교에서 영생한다 함은 개개인의 사건이지만 숲의 영원성은 온갖 것들 개개가 서로 관계로 얽혀 죽고 낳음이라는 시종이 분명한 단절의 연속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그렇다면 숲 속의 나무, 짐승 개개는 영생이 없고 개개 인간만이 영생이 있다는 말은 수긍되지 않는다.
나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생(生)은 분명 내 몫이며 생명체라는 줄기 속에서의 나의 삶은 전체 생명체 속의 개체토막이다. 그렇다면 이 개체로서의 독립적 토막은 전체 생명체 속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만약 이 독립적 개체(영혼이라고도 하는)가 주체적 독립개념으로서의 존재론적 가치를 가진다면 인간생명체의 출현으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시간에 비례해 기하급수로 불어난 그 개체의 수를 종교적 영혼으로 인정한, 하나로 시작된 그 개체영혼의 수는 수천억 명이 되어 있어야 한다.


물론 불교에서는 윤회설로 모순을 비겨가지만 영혼을 믿는 기독교에서는 중심 과제가 된다. 그래서 납득이 안 되는 나는 각 개체 생명은 독립개체로 살다 끝나고 본래적 흙 자리로 되돌려져 다음 생(生)들에 자리를 비워 줄뿐이라 여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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