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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선의 미학
yeodongwon

 


 세계적 명화나 조각품들을 보면 나체상이 많은데 대부분이 여성의 나체상이다. 이 명화들은 나체화라는 우리말보다는 누드화라 해야 걸맞은데, 아무래도 서양풍 같아서다. 우리 동양화 화백들도 여체의 아름다움을 몰랐을 리 없었을 것이나 감히 옷을 벗겨 화폭에 담을 용기는 없었는지 몰래 훔쳐본 냇가 목욕하는 여인의 유두나 겨드랑이를 살짝 그릴 정도의 감상으로 만족해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누드 화풍의 예술적 표현이라기보다는 육감적 감상이었지 싶다. 남존여비 사상을 벗지 못한 노리갯감으로서 기녀의 요염한 자태를 그렸다면 포르노 묘사에 더 가깝지 않았을까 싶어서다.


 만약 그것이 화백의 예술적 표현이었다면 우리에게 그리도 익숙한 세련된 선으로 한 차원 다른 예술로 승화된 작품이 탄생되었을 터이다. 저 고려청자의 흘러내린 신비스러운 선의 모델은 분명 여체의 곡선(요즘 유행어로 S line)일 거라는 생각이 들고, 이런 간접표현은 우리 생활 구석구석에서 발견되는 우리 예술의 표현방법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 여체의 곡선미는 신의 솜씨가 발휘한 최고품의 완벽한 아름다움이다. 그중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젖가슴 쪽이다. 나는 그쪽을 볼 때면 숨이 멎을 듯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긴장을 한다.


 젖가슴으로부터 은밀한 곳까지 흘러내린 앞쪽의 곡선미는 아무래도 남성인 내겐 육감적이고 충격적 아름다움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해도, 측면에서 본 목 부위서부터 어깨 허리 엉덩이를 지나 다리로 이어 내린 뒤쪽의 곡선미는 가히 우주적 최상의 걸작품이라고 찬사를 받아 아깝지 않다. 그래서 나는 남성으로 태어나 상대적으로 이 최상품 여체를 감상하며 살 수 있게 해준 신에게 감사하며 그 아름다움에 취하고 노예 되기를 스스로 자청하고 있는 터다.


 여기서 잠시 남성 대 여성이라는 직설적 상대 감상법에서 벗어나 신이 심혈을 기울여 빚어낸 깊은 의도를 찾아보기로 하자. 아마도 우리는 또 한 번 놀랄 일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모체로서의 이 아름다움은 낳은 새끼가 무리 속에서 건강한 육체와 건전한 정서를 갖고 살아갈 수 있게 키워내려는 신의 깊은 배려임이 분명하다. 새끼가 어미의 아름다운 젖가슴을 보고, 만지고, 빨며 그 가슴에 안겨 새근새근 잠을 자는 모습만으로도 편안한 행복감이다.


 먹는 것, 보는 것, 만지는 것, 이 3위 감각이 건전성일 때 아이의 정서는 완벽하리만큼 건강할 것이고, 이런 아이들이 살아가는 사회가 어찌 맑고 밝고 깨끗한 쪽으로 가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서구 중심적 현대 서구화 사회가 만들어 내고 있는 오늘의 과학 문명이 무엇을 어떻게 잘못하고 있는가가 분명해진다.


 신의 최상의 걸작품인 엄마의 젖가슴을 아빠에게 빼앗긴 아이는 울 처진 자기 침대에 홀로 발랑 누워 딱딱한 우유병을 빨다 웅크려 잠이 드는 외롭고 허전한 가슴으로 자라고 있다는 사실, 이 아이들이 만들어낼 미래의 사회가 어디로 굴러갈지는 분명해진다.


 엄마 젖가슴을 아이로부터 탈취한 범죄는 우주질서를 반역한 행위이며, 이는 아담이 사과를 따먹은 원죄보다 더한 원죄로 언젠가 그 대가의 응징을 받을 것이다.


 아니 시작되고 있다. 정서적으로 불안전한 인간들이 자연파괴로 그 징조를 나타내 보이며 극도의 반사회적 이고(egoism)가 판을 치고 있음은 우연이 아니다. 엄마 젖가슴의 저 신비의 곡선미를 감상 못한 세대가 만들어내는 모든 것들은 직선화되어 날카로움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적 아름다움은 곡선이다. 직선은 과학을 낳고, 곡선은 예술을 탄생시킨다.


직선은 두 점 사이의 최단거리를 잇는 선이라는 정의가 의미하듯 언제나 과학은 직선이어야 계산이 된다. 어떤 곡선이나 계산할 때는 삼각법이라는 직선으로 쪼개서 계산하고, 미적분의 복잡한 계산 원리도 따지고 보면 곡선을 무수한 직선의 곱이나 나눔으로 한 계산법이다.


 이렇게 직선은 냉철한 차가움을 느끼게 하지만 곡선은 정감을 느끼게 하는 예술적 표현의 모체가 된다.


 각진 턱을 가진 여성보다는 둥근 얼굴형 여성에 더 호감을 느끼며, 아이의 둥근 얼굴은 한 번 더 만져주고 싶어진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앙상한 각진 얼굴에선 범접할 수 없는 긴장을 느끼는 대신 둥글고 온화한 부처상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포근해진다.


 도심의 현대적 빌딩들은 곡선을 배제시킨 직선의 연결이다. 그러나 예술품을 수집 보관 전시하는 박물관이나, 정신문화를 수집 보관 전달하는 도서관은 곡선을 최대로 살려 활용하고 있음을 볼 때 예삿일이 아니다.


 나는 이곳 북미의 하이웨이를 싫어한다. 가도 가도 직선으로 된 졸리는 그 직선을 싫어한다. 그런데 몇 년 전에 가서 달려본 한국의 고속도로만은 내 맘에 쏙 들었다. 속력 내기는 좀 위험해도 산모퉁이 돌며 강을 끼고 달리는 맛은 그저 그만이었다. 옛날의 그 추한 민둥산이 아니라 우거진 숲의 산속 사이를 거미줄처럼 뚫어 만들어진 고속도로를 달리는 기분은 마치 온 국토가 공원길처럼 정다웠다.


 나는 곡선을 좋아한다. 그래서 이 나이에도 길 가다 날씬한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되돌아 한 번 더 보는 끼를 버리지 못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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