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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兵)피아 도깨비 방망이
yeodongwon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께서 서독 광산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를 찾아주셨을 때 함께 눈물로 애국가를 부르며 다짐한 근대화의 꿈은 오늘에 한강의 기적으로 나타나 번영을 누리고 있다. 그 조국 근대화에 서독 지하 600m에서 땀 흘려 번 내 피같은 외화가, 지금에 와보면 새 발의 피만도 못한 액수라 할는지 모르지만, 한몫 한 것으로 역사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 피같은 외화를 노린 병피아의 눈초리에 걸린 나의 아픈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쩌면 60여 년 전 최빈국 공무원의 관례라는 이름으로도 통했던 부정, 비리가 아니라 경제 10대국이라 자부하는 부국 대한민국의 오늘의 문제일 수도 있는 고민거리가 아닌가 여겨져 더욱 그러하다. 바로 세월호 참사 소식이 증명해주고 있다.


 학교, 병원, 심지어 장의 절차에 까지도 촌지가 관례처럼 되어 있는, 대통령, 국회의원도 줄줄이 해 먹고 감옥에 가는 의식풍토에서는 법은 언제나 뒤처리용 법석일 뿐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신호등 같은 예방용이 되지 못하고 있는 곳에선 당연하다.


 우리에겐 법은 지키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터진 후의 뒷처리용이라 한다면, 내가 본 독일인들에겐 법은 지키기 위해 있는, 사회생활의 이정표로서의 신호등이라, 지키지 않으면 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예방적 기능 역할을 잘 감당해내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런 나라에서 나는 3년의 계약을 무사히 끝내고 때마침 캐나다에 이민이 결정되어 가는 길에 한국에 들러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결혼식을 올리고 아내와 함께 캐나다로 가기로 만반의 준비를 짜고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 병무청 직원의 올가미에 걸려 나는 그 부패에 한몫 하게 된다. 그래서 이 글은 56년 전 그 병피아 직원을 고소하는 형식을 빌려 쓰는 손해배상 청구서라 해도 된다.


 3년 계약을 무사히 끝내고 귀국길 이틀 전에 당시 서독의 수도 본에 있는 한국대사관에 여권 관계로 들렸다. 동료 귀국 광부들과는 달리 나는 영구귀국이 아니라 캐나다 이민 비자를 받은 상태로 한국에 일시귀국 경유 비자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 주서독 한국 영사님께서 경유 비자를 내주시며 하시는 말씀이 이런 케이스는 처음이라며 “어지간 하면 캐나다로 바로 가시지 번거롭게 일시귀국을 하려 하시오?” 


 “3년 기다려준 약혼자와 양부모님 모시고 결혼식도 해야 하고, 캐나다에 이민 가면 고국 방문도 힘들 것 같고 해서 귀국 전세기 편에 묻어갈까 해서입니다.”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리고 내가 할 말은 못 되지만, 혹 나오시기 힘들지도 모를 일이 생길지 모르니 하는 말이지요.”


 모를 듯한 흐린 미소를 흘리시며 한국에 들러 캐나다로 다시 출국하기 전에 병무청에 들러 여권에 병무확인 도장을 꼭 받아야 한다고 일러준다. 그 병무청 도장이 얼마나 요사한 함정인가를 내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 서독 영사님께서도 빤히 아시는 관례(?)인데.


 나의 캐나다 이민 입국 날짜는 1968년 7월 30일까지로 되어 있었다. 7월 25일 결혼식을 올리고 다음 날 오전 10시쯤 부산에 있는 병무청을 찾아갔다. 사무실 테이블이 여나무개 있는 것으로 봐 직원이 많을 듯한데 단 한 명이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내 서류를 검토해 보더니


 “예비병 훈련소집 기피로 빨간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네???!!! 어떻게 이런 일이, 말도 안 됩니다.”


 그렇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내 위기로 다가온 것이다. 나는 하늘이 노랗고, 울상이 되어 


 “그럼 어떻게 하면 됩니까?”


 “아래층에 다방이 있는 데, 거기 가서 기다리시면 누가 찾아갈 것입니다.”


 출국 3일밖에 안 남았다. 그것도 60년대 당시 그 어려운 캐나다 이민이라는 높은 벽을 코앞에 두고 지푸라기 잡는 긴박한 신세로 몰린 나는 쥐구멍을 찾는 쥐새끼처럼 다방에 내려와 염라대왕보다도 더 크게 보이는 병무청 직원을 구세주인 양 기다리게 된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민원 담당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는데 다방에는 나 같은 사정으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중 한 사람에게 다가가 정보도 얻을 겸 물었다.


 “저는 서독 광부 3년 일하는 동안 재훈련소집 기피로 되어 있는데 형씨는 무슨 일로?”


 “말도 마이소. 저도 비슷한 예지요. 월남서 2년 돈 벌고 왔는데 할 일이 마땅찮아 다시 월남 가려고 병무 도장 받으려고 왔는데, 환장할, 호적 생일과 병무 기록 생일이 하루가 다르다 카면서 생트집을 잡지 않는기요.”


 “어떻게 생트집을 잡는대요?”


 “지난번 월남 갈 때는 문제 없던 것이 지금 갑자기 와 생일이 하루가 다른기요? 하루가 달라도 그렇지, 사무는 내가 보나 순전히 지들 사무 사곤데, 돈을 그것도 거금 10만 원(공무원 6개월 봉급)을 내라 안카요? 날강도 놈들, 형씨도 단단히 걸렸소.”


 다방 분위기를 보니 T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뭔가를 흥정들을 하고 있다. 텅 빈 사무실의 이유가 알듯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야기가 지어낸 것도, 과장된 것도 아닌 실제상황을 그대로를 적고 있다. 때가 1968년이면 박정희 정부가 한참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조국 근대화의 삽질이 왕성할 때이다. 공무원 사회도 어느정도 자리 잡아 갈 때라 여겼는데 내가 맞닥뜨린 병무 행정은 6.25 혼란기 그대로였다.


 40대쯤 보이는 병무청 과장이란 분과 흥정에 들어갔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난감한 일이다. 흥정하다니?

미치고 환장할 일이다. 아니, 박정희 대통령이 이 사실을 아신다면 까무러치셨을 것이다.


 “3년 전 서독에 갈 때는 국방부, 내무부, 보사부, 외무부, 노동청이라는 촘촘한 그물망의 허락 도장을 받고 출국을 했으면 자동으로 재훈련소집은 면제되거나 연기되었어야지 기피라니 말이 됩니까? 세 살배기 어린애에게 물어봐도 웃을, 그래, 재훈련을 받기 위해 그 먼 독일에서 탄 캐다 손 놓고 하늘길을 날아왔어야 했나요? 말 같은 소리를 하이소,”


 그러나 과장의 귀엔 마이동풍이다. 아니 노골적이다.


 “그건 댁의 사정이고, 4만 원이면 됩니다. 아니면 정식 절차를 밟으시던지”


 “정식절차는 며칠이 걸립니까? 3일 후에는 캐나다에 도착해야 하는데”


 “3개월이 될지 나도 장담 못합니다.”


 목마른 쪽은 나였다. 성질 같아서는 당장 청와대라도 찾아가 하소연하고 싶었지만 3일이라는 기한은 너무 짧았다. 장소를 요청으로 옮기고 저녁내 흥정은 계속되었으나 액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당시 4만 원은 큰돈으로, 지하 7백m에서 번 땀 젖은 피같은 돈을 순순히 이 날강도 공무원에게 내줄 수가 없었다. 나는 도장을 포기한 채 그날 저녁 기차로 서울에 올라왔고, 한 여행사 직원이 사정을 듣고 2만원으로 국방부에서 직접 도장을 받아주었다. 2만원도 아깝긴 마찬가지지만.


 나는 언젠가는 뇌물을 준 나의 죄를 고백하고, 뇌물을 받은 공무원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하리라 이를 악물고, 조국 땅을 겨우 보듯이 빠져나왔다. 그때 주서독 영사님의 예언이 적중한 것이 신기했지만 나는 캐나다행 비행기에 오르며 조국 땅에 침을 뱉는 천하에 반역 짓을 저질렀는데, 그 분함도 잠시, 60여 년 외국에 나와 살면서 마음은 늘 조국 강산에 머물러 조국 통일을 꿈에도 잊지 않고 빌며 살고 있다.


 돌이켜 냉정히 생각해보면 나는 조국에 빚진 자이다. 26년 키워주고, 대학까지 공부시켜준 조국을 위해 단돈 10원의 세금을 내본 일도 없고, 그 어려운 시기 조국 근대화를 위해 단 한 번의 삽질을 해본 일도 없다.


 새삼 내 아픈 과거 이야기를 꺼냄은 다만 이제쯤은 조국 한국이 관피아 부패라는 단어가 없는, 내가 경험한 독일사회를 닮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해본 소리다. 그래야만 곧 맞이할 독일통일 같은 조국 통일의 순항을 위해서도 절실히 요구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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