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kang39
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 캐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 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캐나다사장, 전 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 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역사문화원장

캐나다 문협회원.현 GTA한카노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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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의 역사 500년(48)-반공의식의 쇠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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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공산주의자를 어떻게 알아보냐고요? 마르크스와 레닌에 관한 책을 읽은 사람이겠죠. 그렇다면 어떻게 반공주의자들을 알아보냐고요? 마르크스와 레닌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겠죠." (로널드 레이건)

 


 한국의 주사파 학생들은 어떻게 태동하였나

 


1970년 – 1980년대에 대한민국의 많은 대학생들은 박정희 군사정부의 반공사상에 반항하여, K. Marx나 Lenin 서적을 가방에 감추고 다녔다. 왜냐하면 그 때에 그러한 책자를 공개적으로 가지고 다니면 금기서적 은닉죄로 반공법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불온 문서를 몰래 구입하여 소유하면, 그러한 책을 갖고 있지 못한 학생들은 꽤나 부러워하기도 했다. 비밀리에 공산당을 연구한다는 것은 무언가 신비로운 학문을 연구하는 것으로 생각이 들던 때였다. 


인간 심리에 있어서 무언가 할 수 있는 것을 구태여 못하게 하면 더욱 호기심이 나고, 무언가 더 하고 싶은 매력적인 심리가 발생하게 마련이다. 하물며 Karl Marx와 Lenin, 그리고 김일성을 연구하며 북한의 주사파 사상을 연구하고 있다는 것은 마치 대한민국에서 누구도 연구하지 못하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것으로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 반공주의 학생들은 그러한 독존적 자부심을 가슴에 품기 시작하였다. 그 때의 그 사람들이 지금 대한민국의 청와대를 점령하였고 대통령이 됐다. 그래서 지금 대한민국은 사회주의- 공산주의-주사파 쪽으로 가고 있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때의 그 사람들이 연구했던 그 공산주의 이념은 아주 완벽한 이념이라고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었고, 그러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이념은 착취 내지는 독점의 이념이라고 배타적으로 여겼다. 실로 그들에게 자본주의는 혐오의 대상이 되었고 그러한 생각은 지금까지도 그들의 뇌리를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상에서 공산주의 실험 70년의 결과는 실패작이었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이 이를 자인하였고, 다시 자본주의로 돌아왔지만, 한 번 실패를 다시 회복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소련은 지금 무던한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며, 경제적으로 후진국 생활을 감수해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국가의 정치와 경제는 실험대상이 아니다. “해 봐서 안 되면 다시 하겠다”는 식의 정치나 경제는 국가를 운영하는 지도자로서, 절대적으로 있어서는 안 되는 금기 사항인 것이다. 


삶이란 한 번 살고 가는 것이듯이 ‘지도자 노릇’도 한 번으로 지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한 지도자가 국가를 대상으로 실험을 하여 실패를 하면, 실로 고생을 하는 것은 지도자 자신이 아니라, 온 국민이 그 짐을 다 같이 져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소련이 바로 그 실례를 보여주고 있다. 대한민국이 그 길을 따라가지 않기를 기원해 마지 않지만, 그러한 사람들이 권력을 잡아 흔들고 있으니, 그 부작용이 말이 아니다. 정책마다 부작용이 따르고 있는 것은 문재인 정권이 실험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신조가 말하는 1•21사태


김신조 목사는 2017년 12월 18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50년이 지났지만 북한은 변하지 않았다. 북한은 망할 때까지 절대 대남전략을 바꾸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1•21사태가 일어난 지 50년이 지났다.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박정희 대통령 살해를 목적으로 청와대 근방까지 침투했던 1968년 그 해는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등 한반도 전쟁 기운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다. 다음은 김신조 목사의 증언이다. 


“ 1968년 1월 22일 오전 1시경. 영하 10도의 칼바람까지 몰아쳤다. 세검정계곡(서울 종로구)은 조명탄과 플래시 불빛, 확성기 소리로 가득 찼다. ‘나와라. 살려준다. 투항하라.’ 계곡의 바위 뒤 곳곳에 자리잡은 육군 30사단 92연대 소속 장병들이 총을 겨누고 있었다.


무기는 수류탄 하나뿐이었다. 북한에서 가져온 총과 350발의 실탄, 13개의 수류탄은 도주 과정에서 인왕산 바위 밑에 숨겼다.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됐다.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 수류탄 안전핀에 손가락을 걸었다. 수년 동안 훈련 받은 대로 자폭해야 할 시간이었다. 확성기 소리가 다시 귀를 파고들었다. ‘반드시 살려준다. 믿고 나와라’. 그래서 두 손을 들고 플래시 불빛을 향해 걸어 나갔다.”


김신조 목사는 탈북자 또는 귀순용사가 아니다. 1968년 1•21사태 당시 투항한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 부대 6기지 2조 조장(소위)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지시를 받고 남파된 특수부대 장교였다. 당성과 실력을 인정받은 엘리트 군인이었다. 투항 직후 기자회견에서 “왜 내려왔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말할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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