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kang39
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 캐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 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캐나다사장, 전 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 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역사문화원장

캐나다 문협회원.현 GTA한카노인대학장
http://skang3441.tistory.com/
[email protected]
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62 전체: 256,051 )
‘설마’의 역사 500년(42)-5.16 군사 혁명(8)
samkang39

 

  

(지난 호에 이어)
마르코스가 독재를 하던 필리핀, 남미의 칠레와 아르헨티나 모두 괜찮게 살던 독재국가였다. 하나 그들은 경제를 일으키지 않고 국민에게서 탈취를 일삼는 독재자였다. 국민을 게으르게 만들었고 결국은 민주주의도 경제도 바닥으로 다시 추락하는 나라를 만들었다. 근래에는 그리스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박정희는 먹고, 입고, 잠자리를 마련하기도 힘이 겹던 우리나라였지만 모든 것을 뒤로 하고 경제개발에 전력을 투입한 것이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던 무능력의 국민들을 “우리도 할 수 있다.”의 능력이 있는 국민들로 올려 놓은 것이다. 오늘의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기초를 다져 놓았다. 


어떻게든 잘 살게 되면 자유와 민주는 쉽게 얻어질 수가 있다고 그는 믿었다. 우선 순위를 잡은 것이다. 이것이 박정희의 소위 한국식 민주주의 기본 철학이었다.


 이 패턴을 세계의 많은 후진국들이 따라하고 있다. 우선 중국의 등소평이 이 패턴을 적용하였음을 우리는 눈앞에서 잘 보고 있지 아니한가? 지금은 소련도 우리나라의 성공사례를 적용하려 한다. 비록 그가 적용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지만, 오죽하면 김정일이도 박정희의 그 패턴을 인정하고 칭찬하지 않았던가? 


 민주주의는 희생 없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국민의 단결된 노력과 인내와 투쟁이 없이 민주주의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박정희가 독재자였기 때문에, 그렇게 지독하게 다그치며 산업개발을 독려하였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된 것이다. 


 산업전선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삶을 희생하고 뛰어야 했던가? 길거리에서 많은 정치인들이 학생들을 앞장세워 자유를 달라고, 민주를 하자고, 얼마나 많은 데모를 하였던가? 


그들은 먼 길을 걸어갈 의향도, 준비도, 안되었던 단목(短目)의 인사들이었다. 오늘을 희생하자고 외쳐야 내일이 약속되는 것이다. 오늘날 젊은 세대들은 바야흐로 가파르게 발전하는 물질문명에 취해서 조상들이나 부모들의 희생을 외면하려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길인 줄로 알지마는 얼마를 살아보면 그것이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고, 제자리에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세대간에 분열이 생기고, 부모 자식 사이에도 소통이 없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물질의 풍요 속에서 정신적 고독을 느끼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박정희가 차라리 이러한 경제개발을 안 하고 장면정권 그대로 놔두었더라면 아마도 우리나라는 오늘날 라오스나 캄보디아 수준의 경제후진국이 되어있을 것이다. 


1988년 올림픽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에게 물어보니, 우리나라는 태곳적부터 꽤나 잘 사는 나라로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등학교에서 역사교육을 제대로 배운 바가 없는 (역사가 선택과목이었는데 이를 택하지 않았기에) 세대이기 때문에 박정희가 누구인지 경제개발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이제부터 4차에 걸친 박정희의 경제5개년 계획과 이후 계속된 5, 6, 7차에 걸친 경제개발의 내용을 한번 훑어보자.


■ 제1차 경제개발계획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1962년 1월부터 1966년에 완료된 그 첫 번째의 계획이다. 모든 산업의 기본요건인 전력과 석탄 등 에너지원과 기간산업을 확충하고, 사회 간접자본을 충실히 하여 경제개발의 기초와 토대를 형성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제1차 산업인 농업소득을 증대시켜 기아선상에서 굶주린 백성들의 기본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 때에 다량생산을 위한 통일벼와 아끼바리 벼 등 종자개선에 많은 노력을 집중하였다. 


수출을 증대하여 국제수지를 균형화하고, 산업기술을 진흥하는 일을 주안점으로 경제계획이 작성되었다. 이 시기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7.8%로 목표를 상회하였으며,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83에서 $125로 높아졌다. 

 

■ 제2차 경제개발계획


1967년에서 1971년까지의 제2단계 5개년 경제개발. 이 기간에 우리나라는 식량의 자급화와 산림녹화, 그리고 화학, 철강, 기계공업의 건설에 의한 산업이 고도화 되었다. 이 때에 7억불의 수출목표를 달성하였다. 


 고용의 확대, 국민소득의 비약적인 증대, 과학기술의 진흥, 기술수준과 생산성의 향상에 그 목표를 두고 있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소요자금 9,800억원 중 국내자금이 6,029억원, 외자가 14억 2,100만불 이었다. 이 중 약 6억불이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로 들어오게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