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kang39
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 캐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 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캐나다사장, 전 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 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역사문화원장

캐나다 문협회원.현 GTA한카노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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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의 역사 500년(22)-8.15 해방~남북 분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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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1)포츠담 회담(Potsdam Conference)


포츠담 회담(Potsdam Conference)은 나치 독일 항복 후 1945년 7월 17일~ 8월 2일 독일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3개국 정상이 모여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처리를 결정하기 위한 회담이었다. 회의 끝에는 포츠담 협정이 책정되었다.


이 회담에서는 일본의 항복 권고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일본에 대한 처리 문제가 논의되었고, 합의 내용은 ‘포츠담 선언’(Potsdam Declaration)으로 공포되었다. 이 선언은 1945년 7월 26일 미국, 영국, 중화민국, 소련이 독일의 포츠담에서 발표했다.

 

 

 

 


미국의 대통령 트루먼, 영국의 수상인 처칠, 중화민국의 총통인 장제스가 회담에 참여하여 선언에 서명하였고,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도 참전과 동시에 이 선언에 참가하였다. 


선언의 요지는 "일본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에 직면하게 될 것을 경고한 것이며, 그 내용은 모두 13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 그 중에 우리가 한반도 영토를 되찾을 수 있는 내용은 포츠담 선언 제8항 “카이로 선언의 실행과 일본 영토의 한정”에 명시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 선언을 묵살했고, 이에 미국이 8월 6일에 히로시마에,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소련은 8월 8일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와 동시에 참전하여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8월 폭풍 작전). 상황이 불리해지자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미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에 2차 대전은 종전되었다.


중국 대표 장제스는 중일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독일 영토인 포츠담까지 가기엔 무리라고 판단, 이후에 서명한다는 양해를 얻어 불참했다. 이 때문에 포츠담 회담은 미-영-소가, 회담 중에 발표된 포츠담 선언은 미-영-중의 서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럽에서는 2차 대전이 5월 9일 독일의 항복으로 종결됐지만, 일본은 패전이 분명한 상황에도 1억 총옥쇄(일본 제국이 전 국민을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에 총동원하기 위해 사용하던 악명 높은 1억 옥쇄(一億玉碎)는 본토 일본인들만의 죽음이 아닌 조선인, 대만인 모두의 죽음을 의미했다)를 부르짖으며 전쟁을 지속했고, 이런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권유하는 포츠담 선언이 발표된다. 물론 눈치 없는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한 큐에 거절했고 그 결과는 인류 역사 최초의 핵무기 실전 투입이었다. 


 (2)북위 38도선으로 한반도 분단


 38선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기 위해 그어놓은 군사분계선이다. 삼팔선을 확정한 것은 미국 국무부, 육군부, 해군부 기관원의 협의체인 3부 조정위원회(SWNCC)였다. 


소련군이 8월 8일, 폭풍작전을 개시한 후, 3부 조정위원회 위원장인 국무차관보 제임스 던(J. Dunn)은 1945년 8월 11일에 육군부 작전국에 소련군의 남진에 대응하여 미국이 서울과 인천을 점령하도록 하는 군사분계선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미국 육군부 작전국의 본스틸(Charles H. Bonesteel, 이후 주한미군사령관 역임) 대령과 미 육군장관 보좌관이었던 딘 러스크(Dean Rusk, 이후 케네디와 존슨 정부에서 국무장관 역임) 중령은 작전국에 걸려 있던 내셔널 지오그래픽사의 벽걸이 지도에 38선을 그어본 후 38선 분할 점령안을 미국 합참과 3부 조정위원회에 보고했고, 이 안이 대통령에게 보고되어 '일반 명령 제1호'로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달되었다.


삼팔선 분할 점령안을 미국이 제안하자 소련은 별 이의 없이 이를 받아들였고, 1945년 8월 23일 개성시까지 내려갔던 소련군은 9월 초에 38도선 이북으로 철수했다. 
1953년 7월 27일 발효된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에 따라 설정된 군사분계선은 위도상 북위 38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지만, 38선과 비교해 서쪽 경계가 남하하였고 동쪽 경계가 북상하였다. 


38선(1945.9.2 - 1950.6.25)과 현재의 군사분계선(1953.7.27 이후)은 다르지만, 한반도 분단에 있어서 차지하는 상징성이 크고, 분단의 직접적 원인이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군사분계선을 삼팔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설마 한반도가 이렇게 두 쪽이 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분단의 결과는 지금까지도 해결할 수 없는 우리 민족의 비극을 안겨 준 것이다. 힘 없는 민족의 설움이다. 힘을 키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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