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kang39
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 캐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 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캐나다사장, 전 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 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역사문화원장

캐나다 문협회원.현 GTA한카노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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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의 역사 500년(18)-기미(己未)년 3.1운동(상)
samkang39

  

 우리 민족의 약점 중의 하나는 사후약방문(死後藥房問)이다. 죽은 다음에 약방을 찾는다는 말이다. 나라가 죽은 지 9년이 지나서 약방을 찾은 것이 1919년 3월 1일, 소위 3.1운동이다. 왜 죽기 전에 약방을 찾지 못하였는가? 그것을 알았으면 지금 이 글을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 민족이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는 반드시 고쳐야 할 고질병이다. 


이스라엘 사람들 같이 나라를 지키는 일에 사전약방문(事前藥房問)을 하였다면 을사보호조약이나, 한일합병이나, 왜정 36년이나, 3.1운동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후약방문마저도 아니 하였다면 오늘날 우리 나라와 민족은 존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민족에게 3.1운동이란 사후약방문을 한 그 수고를 깊이 고려하시어 우리에게 8.15해방이란 기적을 주셨고, 다시 한 번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기회를 내려 주셨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그 하나님의 축복을 만끽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1910년에서부터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36년간은 우리 민족이 반만년 역사에서 가장 많은 수치와 아픔과 슬픔과 괴로움을 겪었던 시기였다. 한일합병을 한 이후 일본은 무단정치를 펼쳐 무자비하게 우리 민족을 탄압하였다. 


(1)조선인 민족자본 성장억제정책, (2)농민들의 토지몰수 정책, (3)조선인 노동자들의 저임금 차별정책, (4)농산물 착취정책, (5)징병 징용 정신대등 인력강제동원정책, (6)조선문화말살정책, (7)창씨개명과 한국언어금지 등 내선일체정책으로 우리는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일본을 위한 종살이 국민으로 전락하였다.


하지만 괴로움과 아픔을 당하는 만큼 우리 민족은 정치적 사회적 의식이 깨어나 자아의식이 고취되었고, 더욱이 미국대통령 윌슨의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한 “14개평화원칙”에 의거한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어 우리의 지식인과 종교인들이 불길을 댕기자 항일운동은 삽시간에 거국적인 운동으로 번져 나갔든 것이다. 


손병희를 대표로 하여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지도급 인사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은 마침 고종황제의 인산(因山, 국장)이 1919년 3월 3일로 결정이 되자,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모일 것을 예측, 3월 1일 정오를 기해 파고다공원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인쇄물을 살포하고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또 각 지방에도 미리 조직을 짜서 독립선언서와 함께 운동의 방법과 날자 등을 비밀리에 전달하여 두었다. 


 독립선언서와 일본정부에 대한 통고문, 미국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 대표들에게 보낼 의견서는 최남선이 기초하고, 비용과 인쇄는 천도교측이 맡아, 2월 27일 밤 보성인쇄소에서 21,000장을 인쇄, 은밀히 전국 주요 도시에 배포하였다. 


손병희 이하 33인의 민족대표는 3월 1일 오후 2시 정각에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한용운이 독립선언서의 낭독을 끝내자 만세삼창을 부른 후 경찰에 통고하여 자진 체포 당했다.


 한편, 파고다공원에는 5,000여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후 시위에 나섰다. 이들의 시위행렬에 수만 명의 시민들이 가담함으로써 서울시내는 흥분된 군중과 만세소리로 들끓게 되였다. 


만세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번져나가, 오후 6시경에는 진남포, 선천, 안주, 원산, 함흥 등지에서 시위가 벌어졌으며, 다음 날에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와 시위운동이 전개 되었다. 서울에서는 3일 날 국장 당일에만 잠잠했을 뿐 매일 가두시위가 벌어 졌으며, 학생은 휴교, 상인은 철시, 노동자는 파업, 관리는 퇴직으로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 독립운동은 약 2개월 가량 계속되었다.


 이에 총독부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 비무장 평화적 시위를 벌이는 군중에게 무자비한 공격을 가해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 부상, 투옥이 되는 참사가 벌어졌다. 화수리, 정주, 맹산, 강서, 대구, 밀양, 합천 등 많은 곳에서 일제에 의해 잔인한 집단 학살이 저질러지고, 유관순의 참살 등이 자행되었으며, 민족대표를 위시한 지도자 47명은 내란죄로 기소되었다. 


전국적 시위운동 상황의 결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측 발표)


 총 집회: 1,542회, 총 참가인원: 202만3,089명,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만5,961명, 검거자: 5만 2,770명, 불에 탄 교회: 47개소, 불탄 학교: 2개교, 불탄 민가: 715채 
이러한 거국적 시위로 말미암아 일제는 무단정치를 끝내고, 조선사람들을 달래야 한다고 교활한 문화정치가 등장하게 되었다. 조금은 부드러워진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하였고, 해외 무장독립운동의 촉진, 그리고 아시아의 다른 식민지 및 반식민지 민족운동 등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비폭력무저항운동,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 등 아시아와 중동지역의 민족운동을 촉진시킨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당시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있던 사건 중 중요한 몇 곳을 소개한다. 


(1)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 - 1919년 4월 1일(음 3월 1일), 천안 병천시장에 있던 3,000여명의 군중들이 일시에 독립만세를 부르니 경찰의 총검에 의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 교사 김구응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자 총으로 쏘아 죽이고 그의 두개골을 박살을 냈다. 


비보를 듣고 달려온 노모가 시신을 안고 통곡을 하자 노모마저 칼과 창으로 찔러 살해하였다. 이로 인해 현장에서 19명이 죽었다. 유관순을 포함한 많은 참가자들이 부상당하고 투옥되었다. 

 

 

  

 

 

(2)평남 강서군 사천장터 시위 - 1919년 3월 4일.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에서 약 3,000여명의 군중이 모여 사천시장 방면으로 시위행진을 벌였다. 사천지구 헌병대들이 매복하고 있다가 시위대에게 총격을 가하였다. 헌병대 주재소장 사또는 한국인 헌병보조원 강병일, 김성구, 박요섭 등과 같이 수십 명을 살상했지만 시위대의 돌팔매를 맞아 그 자리에서 함께 죽었다. 


(3)경남 창원의 삼진의거 - 1919년 3월 28일, 4월 3일. 제1, 2차로 두 차례에 걸친 삼진의거는 창원일대의 연합 대규모 시위였다. 서울에서 시위에 참가한 뒤 시골에 내려온 변상태씨가 진전, 진북, 진동, 3개 면에서 동조인사들을 모아 3,000여명이 시위를 벌였는데 헌병대와 충돌을 하여 5명이 즉사하고 11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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