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kang39
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 캐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 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캐나다사장, 전 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 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역사문화원장

캐나다 문협회원.현 GTA한카노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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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의 역사 500년(9)-인조와 병자호란(2)
samkang39

 

 (지난 호에 이어)
 아무튼 청태종에게 조선조가 굴복 당한 뒤 우리나라는 영영 그들의 힘에 눌려 시키는 대로 따라야만 했다. 하지만 인조 조정의 신하들의 내심은 명나라에 대한 애정을 내내 잊지 못하였다.


삼전도에서 군신의 맹약 이후 청태종의 군병들이 물러갈 때의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그들이 그냥 조용히 물러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수 십만 명이나 되는 조선의 여인들을 능욕하였고, 30만 명을 끌고 갔다. 


병사 한 사람이 서넛의 여인들을 끌고 가면서 농락을 하였고, 그 가족들에게는 돈이나 패물을 가지고 와서 사 가라고 까지 강요하였다. 하지만 밭에서 김을 매던 여인들이 많이 끌려 갔으니 어느 농부의 집안에서 무슨 돈으로 그 여인을 사올 수가 있단 말인가? 


마음껏 농락을 하다가 압록강을 건너면서 버리고 간 여인들이 거지가 되어 밥을 빌어 먹으며 다시 고향에 돌아왔다. 하나 가문의 체통을 지킨다는 소위 명문 집안이라는 사람들은 자기 딸, 며느리들을 배척하고 집안으로 들이지 아니 하였으니, 더 큰 비극이 계속 되었다. 과연 사람으로서 그럴 수가 있을까? 


 “청국놈에게 몸을 버린 것들이 어찌 점잖은 집안의 문턱에 다시 들어온단 말인가? 아니 된다. 자결을 해서 죽는 한이 있어도 그건 절대 아니 된다.”


 이제는 자기 가정에서까지 버림을 받은 것이 이 여인들이었다. 죽고 사는 인간의 기본권보다도 가문과 도덕을 더 중요시 하는 유교사상의 고루한 이념은 그렇게 야박하였다. 


그 여인들이 청국놈들의 포로가 되고 싶어서 끌려간 것인가? 참으로 서울 시내의 길거리가 그 버림 받은 여인들로 우글거렸다. 종로 바닥이 거지 창녀촌으로 변하였다. 종로 3가가 그 때부터 창녀촌 ‘종삼’이라는 별호를 얻은 것이다. 먹고 살 길이 없으니 몸을 파는 여인들로 전락한 것이다. 


 그래서 그 여인들을 환향녀(還鄕女, 고향에 돌아온 여인네))라고 하였다. 언필칭 ‘환향년’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기인된 말이다. 그리고 그 여인들이 청국놈 오랑캐의 포로가 되어 씨를 받아와 낳은 아이를 호로(胡虜) 자식이라고 하였기에 오늘날에도 그러한 나쁜 뜻이 욕으로 통하게 된 것이다. 


 병자호란의 비극은 그것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니라 날이 갈수록 첩첩 산중이었다. 이번에는 청나라에서 청혼이 들어온 것이다. 조선에서 아름다운 공주를 선택하여 보내면 왕비로 삼겠다는 것이다. 조정을 다녀온 금림군이 자기의 부인에게 한 숨을 쉬며 말했다. 


 “이거 또 큰 일이 났소이다. 오랑캐들에게 두고두고 뼈에 사무치는 괴로움을 당해야 하니, 이 일을 어이하면 좋을꼬? 상감께서도 수라조차 못 드시니 걱정이 태산 같소이다!”


 이러한 청혼의 소청을 받자 임금은 물론 딸을 가진 신하들은 모두 질겁을 하여 숨을 죽였다. 상감마마의 골육인 공주와 옹주를 어찌 오랑캐들에게 출가시킬 수가 있단 말인가? 진실로 정묘호란 병자호란 두 번의 난리에 지긋지긋하게 겪어 본 원수 같은 것이 청국 것들인데, 오랑캐로 믿고 있는 그 나라에 귀여운 자기 딸을 시집 보내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만일 조정에서 어느 집 딸을 지목하여 보냈다고 한다면, 그 뽑힌 처녀는 말할 것도 없고 그 가족까지 자결을 택하고 말 것이 분명하였다. 혹여 백성 중에서 어느 처녀가 가겠다고 나선다 한들 쓸데없는 소문이 퍼져 그 이야기가 청나라의 귀에 들어간다면, 어느 쌍놈의 딸을 속여서 보냈다고 하며 오히려 크게 노하여 형언할 수 없는 보복을 당할지도 모를 일인데 이를 어찌하여야 하나? 


 이렇게 많은 시름과 고민으로 온 나라가 뒤숭숭하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우여곡절 끝에 금림군의 귀여운 딸이 자청을 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녀의 그 의롭고 효성스러움에 부모는 물론 조정의 모든 사람들이 찬사를 보냈다. 그녀가 바로 의순공주(義順公主)이다.


 인조는 금림군의 딸을 의순공주로 명하고 시집 보낼 채비를 차리니 시녀 열 두 명과 아울러서 그의 혼수며 호화로운 행차를 준비해 주었다. 의순은 청나라로 시집을 가서 아주 융숭한 대접을 받고 살았다. 


 병자호란의 후유증은 이후에도 여러모로 영향력을 미쳤지만, 이제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그 무력함과, 무조건적인 친명정책과, 설마하니 청나라가 그렇게 까지 할 것인가 하고 설마, 설마 하고 등을 돌리던 일들을 다시 한 번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 임진왜란의 그 처절한 교훈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한 가지도 뉘우침이 없이 그렇게 무력했던 인조의 북방정책을 어찌 설명해야 하는가? 어떻게든 정권을 잡아야겠다는 야욕에만 심혈을 쏟고 있었지 외세의 침범에는 너무도 소홀히 했던 것이 인조 조정의 신하들이었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탈취하였기에 무조건 광해군의 북방정책을 반대한 것이고, 불 같은 청나라 앞에 시들어가는 명나라를 고수하려 했던 것이니, 결국은 그렇게 어처구니 없이 나라를 파국으로 몰고 간 것이다.


 둘째, 남한산성에 포위되어 나라의 존망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데도 주화냐 아니면 척화냐를 따지는 그 고루한 당파싸움. 그 때도 그러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민주주의를 한다는 꼴이 역시 저러한 것 아닌가? 여기에서 그 때의 무모한 당파싸움이나 오늘날의 정당싸움이 나라를 망치고 있음을 우리는 또 다시 역력하게 느끼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정권이 바뀌면 전직 대통령들의 치적을 뒤집어 엎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인조가 광해군의 치적을 바닥부터 없애고 친명정책을 하다가 망해 간 꼴을 보면서 또 그 길을 가고 있다. 


정권이 바뀌면 전직 대통령을 잡아 넣는 것이 전통으로 되어 있는 것이 대한민국이다. 미국에서 민주주의를 배웠다 하는데, 미국이 어디 전직 대통령을 그렇게 무지막지 잡아 넣는가? 자유 민주주의는 신사도의 정치체제다. 그것부터 배워야 한다. 


390년 전, 인조반정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면서 민주주의 한다고? 민주주의가 그렇게 금방 되는 게 아니다. 우리 나라가 민주주의 제대로 하려면 아마도 반세기는 더 공부해야 할 것 같다. 


셋째, 왜 사후약방문이라도 하지 않는 것인가? 임진왜란 후에 그리고 병자호란 후에도 국방의 개혁이나 굳건한 나라 안보의 움직임을 깨우치지 못했다. 그것은 우리 민족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그렇기 때문에 또 당하고 또 당하는 것이라는 것을 왜 깨우치지 못하는가? 


오늘 이 시간에도 대한민국의 국민들 사고방식 속에는 설마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 설마를 믿고 어제를 넘기고 또 오늘을 넘긴다면 미래의 역사는 또 그렇게 반복되는 것이다. 설마 설마 하는 비겁한 평화는 언제고 또 다른 전쟁을 불러 온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한다. 


 바야흐로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현실 앞에,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말하는 ‘설마, 설마’의 교훈은 지난 역사가 아니라 오늘을 말하는 역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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