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kang39
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 캐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 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캐나다사장, 전 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 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역사문화원장

캐나다 문협회원.현 GTA한카노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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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의 역사 500년(6)-광해군과 북방세력
samkang39

 

파란 많은 선조의 41년 치적이 끝나고, 1608년 15대 광해군이 등극하였다. 이 때에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쇠하고 청나라가 일어나는 시기였다. 1392년 이씨 조선이 건국을 하면서부터 형제지국으로 자처하며 형님으로 섬겨오던 것이 명나라인지라 조선의 모든 신하들은 명나라를 큰 집으로 섬기는 사대주의 사상으로 깊이 물들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임금인 광해군은 등극을 하면서부터 자신이 서족 출신이라서 스스로의 정통성 문제를 놓고 많은 스트레스에 쌓여 있었다. 자기의 왕권에 도전할 듯한 친인척은 조금도 용서 없이 제거하려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었다. 


그러한 연유로 인하여 훗날 드디어 인조반정, 쿠데타가 일어났고 왕위를 빼앗기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재임기간 중 북방정책은 상당한 합리성을 갖고 있었다. 오늘날 당시의 상황을 재평가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조정의 많은 신하들이 주장하는 명나라에 대한 대의명분론을 광해군 독단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제어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 요동벌판에서 불같이 일어나는 후금-청나라를 바라보는 광해군의 눈은 신하들의 생각과는 상당히 달랐다. 명나라에 치우치면 분명코 청나라가 시비를 걸어올 것이 분명하였다. 그래서 광해군은 처음부터 명나라에 거리를 두고 눈치를 살피며, 청나라의 근황을 살피고 있었다. 


실로 후금이라고 자칭하면서 만주-요동 땅에서 나라를 일으킨 거란족의 일부는 옛날 고구려의 후손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중국이 고구려를 자기들의 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하는 ‘동북공정’ 정책은 여기에서 기인한 것이다. 유목민이 많아서 말 타기와 야영생활에 능란한 이들은 성격이 사납고 용맹하여 단번에 그 세력이 확장되었다.


후금의 누루하치는 국명을 청(淸)이라 고치고 스스로를 태조라고 하였다. 명나라가 신생국 청나라의 세력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에 명나라에서는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명나라의 신세를 진 조선인지라 이를 거역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겪은 지가 불과 30여년 이라서 탈진한 국력의 회복이 아직도 원만치 못하였고, 조선이 명나라에 원군을 보낼 것이라면 청나라가 어찌 생각할 것인가? 광해군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을 앞에 놓고 고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청나라에서도 원군을 보내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명이냐 청이냐 그들의 싸움에 조선은 어느 편을 들어야 하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할 수 없는 고민에 빠졌다. 


이구동성으로 명나라에 원군을 보내서 청나라를 쳐부숴야 한다고 임금 앞에 엎드려 통촉하는 신하들, 그들은 요동벌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청나라 군대의 용맹성을 떠나 의리와 명분만을 내세워 임금의 마음을 흔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잘 알고 있었다. 만일에 우리 조선군이 청나라와 싸우게 된다면 도저히 이길 수는 없을 것이고, 일격에 전멸을 당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조선의 군대는 임진왜란 이후 30년 동안 훈련 한 번 제대로 한 적이 없고, 그들이 15,000명이나 요청을 하였는데, 정규군이라야 몇 천명에 불과하니 나머지는 논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을 모집하여 죽창을 들려 보내야 하는 것이 뻔한 일인데 어찌 그 용맹스러운 청나라 군대와 전쟁을 한단 말인가? 광해군은 깊은 시름에 빠져서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실세를 무시하고 명분과 의리만을 내세우는 신하들이 밉기도 하였지만 어찌하겠는가?


하지만 하루가 다급한 명나라의 독촉과 날마다 졸라대는 신하들의 등살에 못 이겨 광해군은 12,000명을 명나라에 파병하는 데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이 이렇게 풀려가니 청나라에서는 조선에 대한 반감이 더욱 거세졌고, 훗날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하는 정묘호란-병자호란의 빌미를 준 것이다. 


광해군은 선비 출신 강홍립 장군을 앞장세워 12,000명의 조선군을 명나라에 파병하였다. 그러면서 강홍립에게 밀지를 내렸다. 밀지란 임금과 신하간의 비밀언약으로, 이는 절대로 발설을 해서는 안 되는, 영원히 묵비 하여야 하는 약속인 것이다. 


“우리의 병사들은 제대로 훈련을 받은 바 없는 순진한 농부들이니 전쟁에 임하기가 어려울 것이오. 허니 임지에 도착하거든 상황을 잘 파악하여 기회를 잡아 청나라에 투항을 하는 방법도 염두에 두시오. 그 길만이 불쌍한 우리 농부들의 목숨을 구하는 길이라고 생각되오. 그러하니 전개되는 형세를 보아 강한 편을 쫓으시오.”


죽음의 땅으로 몽매한 조선의 젊은이들을 내보내면서 잠 못 이루고 가슴을 저리고 있는 임금의 마음, 그리고 형세를 보아 적군에게 투항을 하라고 부탁을 하는 광해군의 두 눈에는 이슬이 서리어 있었다. 힘 없는 나라의 설움을 혼자서 가슴 조이며, 수 천명 조선 병사들이 요동벌판에서 청군의 칼날에 쓰러지는 장면을 상상하고 있었다. 


 조선군이 임지에 도착을 하니 명나라의 지휘관은 첫날부터 우리 군대를 최전선으로 몰아 넣었다. 말을 타고 달려 오는 청나라의 기마군병들은 긴 칼을 휘두르며 우리 조선군의 두 목숨을 단칼로 베어버리는 용맹으로 달려들었다. 우리 조선군은 창 한번을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비명을 지를 뿐이었다. 


이틀간 전쟁을 하고 나니 9,000명이 다 죽고 겨우 3,000명이 남았다. 강홍립 장군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광해군의 밀지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3일째 되는 날 강홍립은 백기를 들고 부하 3,000명과 더불어 청나라에 투항하였다. 


포로가 된 강홍립은 누루하치 앞에 끌려가 무름을 꿇고 사뢰었다. “조선군대는 거의가 다 강제로 끌려 온 농부들이니 죄가 없습니다. 그들에게 군량미만을 축을 낼 것이 아니라 고향으로 돌려 보내 주시옵소서.” 


그리고 책임성 있는 장군들만 인질로 잡아두어 달라고 간청을 하였다. 그리하여 졸병들은 거의 다 고향에 돌아갔고 강홍립을 비롯한 참모들만 10년간 심양에 남아 인질생활을 하였다. 


그러는 사이 조선에서는 광해군이 밤마다 걱정을 하던 대로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반군에 의해 광해군이 쫓겨나고 16대 인조가 등극하였다. 명분과 의리만을 앞세우는 성리학적 친명 사대주의에 의해 실리적인 광해군의 균형적 대북정책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광해군은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어 있었다. 청나라의 정묘호란 군대의 길잡이가 되어, 10년만에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온 강홍립 이었지만, 정권이 뒤집힌 후였으니 어찌하랴! 


그는 강화도에 위배되어 있는 광해군을 찾아가 철조망 밖에서 신발을 벋고 삼배하면서 “소신, 강홍립은 어명을 받들어 밀지를 수행하고 이제 귀국하여 보고를 드립니다.”하니 반쯤 실성을 해 있는 광해군은 “이 사람아 나는 이제 임금이 아니네. 뭔가 먹을 것 좀 가져왔나?”하고 미친 사람 행세를 하더라는 것이다. 강홍립은 삭탈관직을 당하고, 경기도 시흥 본가에서 울화병을 앓다가 몇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돌이켜 보자. 임진왜란에서 그렇게 모질게 왜적들에게 당하였는데도, 불과 30년밖에 안 되는 세월이었는데, 벌써 다 잊어버리고, 당파적 사대주의에 얽매여, 실리를 잊어 버리고 중국 오랑캐들에게 또 당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국력이 튼튼하였다면 왜 명나라와 청나라의 싸움에 끼어들어 원병을 보낼 필요가 있었을 것인가?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힘이 없기에 그들의 요청을 거역할 수가 없었던 것이고, 거역을 못했기 때문에 멀쩡한 백성들은 개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국방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나라는 언제고 외세의 간섭을 받게 되고 그 간섭에 굴복하지 아니하면 전쟁을 불러오게 되는 것이다. 


 설마의 역사는 또 반복이 되고 있다. 일본에게 당하던 설마의 역사는 다시 청나라에게도 되풀이 되었다. 지금도 우리는 설마의 역사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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