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kang39
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 캐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 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캐나다사장, 전 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 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역사문화원장

캐나다 문협회원.현 GTA한카노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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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의 역사 500년(6)-원균과 이순신이 주는 교훈
samkang39

 

 1599년 11월 19일, 선조 31년, 풍신수길이 사망하였다. 조선에서 퇴각하라는 명령을 받은 왜군은 7년 만에 보따리를 싸고 일본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이순신 장군은 12척의 배를 가지고 퇴각하는 왜군을 대적해야 하는 것이 명량 대첩의 임무였다. 이순신은 명나라의 진린 제독과 합동작전을 폈다. 


이순신의 해군력은 배 12척, 아주 적은 숫자였지만 도망을 치는 왜군들은 사기가 죽어 있어서 싸울 기력을 잃은 것 같았다. 왜군은 400여 척이었지만 이순신의 세력에게 격침을 당했고, 불과 몇 십여 척만이 살아남아 도망을 쳤다. 이 싸움에서 이순신은 거의 모두를 섬멸하였으나 애석하게도 그 자신은 적군의 유탄을 맞아 최후를 마쳐야 했다. 


예상하건대 그 때에 이순신은 자기 자신이 일부러 죽음을 자초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순신이 다시 복직이 되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을 때에 오직 12척의 해군력을 인계 받았다. 조정에서는 그 12척을 육군에 편입하여 수륙합동으로 움직일 것을 명하였으나 이순신은 그 어명을 거역하고 자기 자신의 지략으로 조선의 해군으로 최후의 전투에 임하였던 것이다. 


전쟁이 끝나면 자신은 어명을 어긴 죄로 또 어떤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니 아예 장렬하게 장수의 최후를 마치자 하고 생각을 했을 것이라는 사가들의 해석도 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전선의 최일선으로 나가서 졸병들과 같이 싸웠던 것이고 드디어 왜군의 유탄을 맞은 것이라는 추측이다.


장수는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그의 사명이다. 비록 그가 전쟁에서 이겼지만, 임금의 어명을 거역한 것을 임금은 참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장수는 스스로 마지막 길을 택해야 하는 것이 수순이라고 손자병법서에도 써있지 아니한가? 


임금의 뜻에 아첨을 하면 싸움은 지는 것이고, 임금의 뜻을 거역하면 장수는 처형을 당하는 것이다. 어느 길을 가야 하나? 나라를 위한 애국의 충신만이 가야 하는 길을 이순신은 택한 것이리라. 


비록 도망을 치는 왜군이었지만 이순신이 마지막 12척을 육군에 병합하고 명량해전을 벌리지 않았다면 그는 목숨을 건질 수는 있었을 것이다. 의를 택하고 자신의 목숨을 버린 이순신 장군이기에 우리는 광화문 광장에 높이 서 계신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올려다 보며 그 거룩한 충정심을 읽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다시 공부해야 할 것이 있다. 오랜 전쟁의 그 난장판 속에서 원균과 이순신, 두 장군들간에 벌어진 여러 사건들을 놓고, 이제 우리는 그 상황을 다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 그들은 그렇게 앙숙이었던가?


 그 첫째는 두 사람의 병력(兵歷)상의 문제였다. 원균은 이순신의 선배였지만 성격이 직선적이고 시기질투가 있는 인물이었다. 이순신이 승리를 할 때마다 축하보다는 질투심으로 쳐다 보았으며, 자기의 부하들을 사랑하기보다는 승부욕에 사로 잡혀 있어서 많은 병사들을 무모하게 희생시켰다.


 원균의 군대 속에 왜군의 첩자들이 잠입하여 우글거렸는데도 그는 무모하였으며, 이순신을 모함하는 일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이순신은 말수가 적고 묵묵한 실천형의 성격이었다. 처음에는 원균의 작전에 협조적이었지만 차츰 무모한 그의 작전에 거리를 두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선후배 간의 거리감이 원균으로 하여금 모함의 상소를 올리게 하였던 것이다. 만일에 이 두 장군들이 서로 경쟁적 입장이 아니고 선후배로서 사랑과 협조로 이어졌더라면 임진왜란은 7년이 아니라 상당한 기간 단축되었을 것이다. 


 둘째로 생각해야 할 문제점은 이순신이 삭탈관직이 되고, 모진 고문을 받고, 죽음을 겨우 면하여 권율의 예하에서 백의종군을 하게 만들었는데, 원균이 이순신을 그렇게 미워했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안 된다. 


필생즉사(必生卽死) 필사즉생(必死卽死), 반드시 살려고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기를 각오하는 자는 곧 살아날 것이라는 신념으로 부하를 다루고 백성들을 자비로 사랑한 장군이 이순신이었는데 왜 원균에게는 그렇게 저주를 받았는가? 전투에서 승부욕 때문이었는가? 그 저주를 풀어나갈 길은 정녕 없었던 것인가? 세계사 속에서 영국의 넬슨 다음으로 위대한 제독으로 추앙을 받는 사람이 이순신인데 왜 원균 한 사람에게는 그렇게 모질게 저주를 받았는가? 아마도 이순신은 설마 원균이 자기를 그렇게까지 모함할 것이라고 믿지를 아니하였던 것 같다. 


 셋째로는 그 절박한 전쟁 속에서도 당파싸움에 눈이 멀어있던 동인과 서인의 세력다툼이다. 그러한 당파싸움이 아니었던들 애당초 임진왜란이 일어나지도 아니했을 것이고, 이순신과 원균의 싸움도 그렇게 심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당파싸움으로 인하여 유비무환의 국방철학이 무너졌고, 나라가 초토화 되었다. 


 이러한 점은 오늘날에도 변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 당시의 당파싸움이나 오늘날의 정당싸움이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 자기 패당의 이익만을 위하여 존재하는 당파, 그러한 속에서 임금인들, 아니 대통령인들 어찌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설마 설마의 당파싸움이 만드는 나라의 앞날은 예나 지금이나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이 든다. 이런 점이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선천적 비극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이제 공부를 해야 할 과제가 생겼다. 


첫째는 임진왜란 당시의 동인과 서인, 오늘날의 여당과 야당을 비교 분석해 보자. 둘째는 승복을 입은 일본의 첩자들이 조선 팔도에 깔려서 속과 겉을 샅샅이 정탐하고 풍신수길이 조선을 아주 수월하게 침략하게 하는 지렛대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오늘날, 여당과 야당의 돌아가는 모습이 임진왜란 때와 다를 바가 없다. 현재 여당은 노골적으로 내 놓고 친북행위를 하고 이러한 현상은 2018년 동계 올림픽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오죽하면 ‘평양올림픽’이라는 말까지 나왔는가? 


70년 지켜온 한미동맹은 시들해져 가고, 미국은 독자적으로 북한과 전쟁을 할 것이라고 하는 설도 나돈다. 중국에게는 천덕꾸러기 대우를 받는 나라가 되었고, 일본은 뱁새 눈을 뜨고 우리를 쳐다보고 있으며, 북한은 오히려 저희들이 남북간의 거래에서 운전대를 잡은 듯이 설쳐대고 있다.


북의 핵무기는 결코 남북간에 해결될 수 없는 세계적인 이슈로 등장하였다. 미-영-불-소-중, 세계의 최강국들이 요리를 하는 대상으로 북한의 핵무기가 등판되어 있는 판인데 문대통령은 자기가 해결할 수가 있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세계의 외교무대에서, 우리가 현재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를 알지 못하면 우리 조국의 앞날은 캄캄할 뿐이다. 


 북한의 간첩을 잡는 국정원이 정치싸움에 휘말려 완전 파괴가 되었다. 드디어 국정원 조직을 개편하여 간첩 잡는 일을 경찰에 이관하겠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늘날 탈북민으로 가장하고 남한은 물론 세계 각처에 깔려 있는 북한의 첩자는 얼마나 많은가? 자유도 좋고 민주주의도 좋지만 나라가 망하는 길이 그 속에 있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원균과 이순신 두 장군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원수가 되었는가? 그러한 처세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였는가? 언제고 인간에게는 그러한 시기와 질투와 아집과 욕심이 내재하여 있기에 역사를 그르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말로와 비교해서도 고찰해 볼 일이다. 


일찍이 2,500년 전에 “우중(愚衆)의 민주정치는 독재정치만 못하다”고 철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설파하였다. 대한민국의 민중이, 설마, 설마의 관념에서 벗어나 우중이 아닌, 현명한 민중이 되기를 진심으로 소원하고 기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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