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kang39
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 캐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 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캐나다사장, 전 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 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역사문화원장

캐나다 문협회원.현 GTA한카노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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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의 역사 500년(5)-원균과 이순신의 불목(不睦)(1)
samkang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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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심은 불화를 낳고 불화는 죽음을 낳는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면 사랑과 관용과 용서는 저절로 오고 가는 것이다. 그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하물며 나라의 큰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인지상정의 감각이 없다면 역사는 바로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임진왜란은 우리 민족의 반만년 역사상 가장 큰 외침이었다. 이 시기에 원균과 이순신 장군 간의 불화는 마음의 문을 닫은 탓이요, 욕심이 과한 탓이었다. 두 사람의 불화가 민족의 역사를 더욱 어둡게 하였고, 왜란의 아픔을 더 깊게 만들었다. 


설마 그렇게까지 심화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당파싸움으로 세상 물정 판단력이 어두워진 조정의 대신들은 나라를 그릇된 방향으로 이끌었고, 임금은 선과 악의 구별조차 흐려져 있었다. 선으로 자기 자신을 감춘 이순신, 과욕으로 죽음에 이른 원균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은 부산포를 점령하면서 첨사 정발의 군대 8,000명을 전멸시켰고, 북진을 하던 중 충주 근처에서 신립장군의 가벼운 저항을 받았지만, 일본군의 조총 앞에 우리 조선군의 활과 죽창은 일격도 힘을 쓰지 못했다. 


 조선의 육군은 그렇게 전멸을 당하였지만, 전라 좌수사 이순신은 경상 우수사 원균을 도와 첫 번째 해전 옥포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두 번째 해전인 사천전투에서 이순신은 철갑선인 거북선을 투입하여 적선을 마구 쳐부수었다. 이어서 당포(통영 부근), 당황포(고성 부근)에서도 승리를 거두니 일본의 병선들은 거북선만 보면 혼비백산 기겁을 하여 도망쳤다.


 이순신의 3차전은 한산도 앞 바다에서, 그리고 4차전은 부산 앞에서의 해전이었는데 한 번도 실패 없이 왜선을 쳐부수니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후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우리 해군의 총지휘관이 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기개 높은 시 한 수를 큰 숨 내리 쉬며 시원히 한 번 읊어보자. 

 

 

한산도가(閑山島歌) (이순신/ 이은상 역)


閑山島月明夜上戍褸(한산도월명야상수루): 한산도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撫大刀深愁時何處(무대도심수시하처):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一聲羌笛更添愁(일성강적경첨수): 어디선가 일성호가는 나의 애를 끓나니.
 

 

 

 왜란이 일어나자 각처에서 민족의 의분이 솟구쳐 사방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다. 곽재우, 고경명, 김천일, 정문부, 승려 유정과 같은 사람들이다. 의병들의 치고 빼는 싸움에 왜군은 몹시 괴로워하였다. 


남쪽에서 왜군의 수로를 막는 이순신, 육지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왜군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의병들, 그리고 평양에서 뻗치고 있는 이여송의 군대로 말미암아 왜군과 아군측간의 전투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변영로 시인의 시 한 수 ‘논개’의 이야기를 한 번 생각해 보자. 


 1593년 최경희가 전라도 장수의 현감으로 있다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임명을 받았다. 19세의 논개는 그 때에 최경희의 본처가 죽자 이어서 후처로 입적이 되어 있었는데, 최경희가 진주성 싸움에서 순국하였다. 


이에 적개심을 품은 논개가 왜장들의 진주 촉석루 연회장에 기생으로 분장을 하여 잠입하였다.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유인하여 끼어 안고 남강에 투신을 하여 순절하였다. 


그 때에 논개는 열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들어 갔는데 이유인즉 적장을 끼어 안고 바다로 내리 뛸 때에 손가락이 미끄러지지 않게 함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진주에서는 여인네들이 손가락에 많은 반지를 끼면 ‘에그머니! 논개 반지를 끼셨네!’하는 말이 지금도 떠돌고 있다고 한다.


후에 그 뛰어내리 바위 위에는 의인(義人)이라 새겨 그녀를 기념하고 있다. 변영로 시인의 민족의 마음, 그의 시를 다시 한 번 읽어보자.

 

 

논개(변영로)


 1.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깊고 / 불붙는 정(情)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후렴)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 그 물결 위에 /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 그 마음 흘러라.


 2. 아리땁던 그 아미(娥眉) / 높게 흔들리우며 / 그 석류(石榴 ) 속 같은 입술 / ‘죽음’을 입 맞추었네 


 3. 흐르는 강(江)물은 / 길이 길이 푸르리니 / 그대의 꽃다운 혼 / 어이 아니 붉으랴.

 

 

전투가 점차 소강상태에 들어가면서 왜군과 명군간에 협상을 하기 시작하였으나 성사를 이루지 못하고 질질 끌다가 결국은 결렬되었다. 이에 격노한 풍신수길은 14만 대군으로 재차 침입을 시도하니 그것이 1597년, 선조 30년에 일어난 정유재란이다. 


 이 때에 원균은 경상우수사로 있었지만 해전에서 실패를 하여 충청병사로 좌천을 당하였다. 군 경력으로 보아 이순신의 선배인 원균이 좌천을 당함에 그는 크게 격분하였다. 


이 때에 왜군은 원균의 수하들 속에 첩자를 심어 원균이 이순신에게 복수심을 불러 일으키게 하였고, 임금에게 계속적으로 상소를 올려서 이순신을 모함에 빠트리게 하였다. 왜군의 첩자 유니시유키나카 등이 획책한 간계는 원균의 작전 속으로 깊이 들어갔고, 이순신을 몰아내는 그 상소문 내용은, 임금을 움직이게 까지 영향력을 발휘한 것이다. 


원균이 해전에서 실패를 한 이유는 자기의 전함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 이순신이 도와주지를 아니 하였기 때문이라고 모함을 써서 임금에게 계속 상소한 것이다. 실로 이순신이 도와주지를 아니한 이유는 원균의 작전이 너무 황당무계하여 도와주는 날에는 전멸을 당할 것이 뻔하였기에 발뺌을 한 것이었다. 


하나 계속되는 원균의 상소문에 이순신은 자신의 정의를 입증할 수가 없었다. 이순신은 너무 겸손하였기에 자기 자신의 운명을 변명하려 하지도 않았다. 당시 동인이 정권을 잡고 있으면서 이산해 유성룡 등이 이순신을 옹호하였으나 임금은 오히려 원균의 상소에 기울어졌고 이순신을 밀어내고 원균을 복직시키기에 이르렀다. 바야흐로 나라가 위기에 몰리고 있는데도 조정에서의 당파싸움은 이렇게 나날이 치열해졌고, 임금은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이순신은 직위해제를 당하고, 죽음을 모면할 정도의 고문을 당하였으며, 감옥살이를 하다가, 권율장군의 휘하에서 겨우 백의종군을 하게끔 목숨을 구하였다. 그리고 원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왜군과의 접전에 총 지휘권을 획득하였다. 


하지만 원균은 왜군과의 일전에서 또 패하였고 드디어 그 자신도 적병에게 죽음을 당하는 수모를 당하였던 것이다. 승전의 쾌거를 올린 왜군들은 해전은 물론 진주성을 함락하고 약탈과 살육을 일삼았다. 일본에 저항하는 조선사람들의 귀와 코를 베고, 손바닥에 구멍을 뚫어 노끈으로 꿰어 끌고 다녔다. 집과 숲에 마구 불을 지르기가 일수였고, 여인네들을 마음대로 욕을 보였다. 


이렇게 비참한 일이 벌어짐에 조정에서는 다시 이순신을 불러 내어 수군통제사로 임명을 하였다. 아쉽고 긴급할 때에는 끌어 내고, 모함의 상소문에는 눈 귀가 어두웠던 임금과 조정의 대신들. 모두가 너무도 얌체 같은 처사였지만 어이하랴? 


거의 전멸을 당하고 남은 배 12척을 가지고 그는 왜적과 싸워야 했다. 이순신은 명나라의 수군 진린의 부대와 합동 작전으로 명량대첩에 임하였던 것이다. 거기에서도 전쟁은 승리를 하였지만 이순신 장군은 적군의 유탄을 맞아 최후를 마감하였다. 마지막 유언은 “내가 죽었다는 것을 이야기 하지 마라. 아니면 적군이…!”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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