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kang39
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 캐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 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캐나다사장, 전 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 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역사문화원장

캐나다 문협회원.현 GTA한카노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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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해설(23)-항명(抗命)과 아첨(阿諂), 어느 길을 가야 하나?
samkang39

 

“임금은 싸움에 지는 것은 용서를 해도,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은 용서치 않는다.” 이것은, 전쟁을 하는 가운데서도, 장수들이 늘 머리 속에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 명문(銘文)이다. 


손자병법의 ‘구변편’(九變篇)에서 “명령도 받지 말아야 하는 명령이 있다”고 했다. 그 이유는 싸움을 지휘하고 있는 장수가 궁궐 속에 앉아 있는 임금보다, 전세(戰勢)를 훨씬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장수가 제아무리 상세한 보고를 한다고 해도, 고의든 실수든 아니면 누락이든, 그 보고서 몇 장을 놓고 전세를 판단한다는 것은 어쩌면 거의 불가(不可)함일 것이다. 하지만 옛날 역사를 보면 그렇게 불가함을 놓고 전세(戰勢)를 판단하고 엉뚱한 어명을 내린 경우가 많이 있다.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 한 구절을 소개한다. 1597년 정유재란 때의 이야기다. 일본의 가토기요사마 왜병들이 대한해협을 건너 조선으로 몰려온다는 첩보를 조정에서 입수하였다. 조정은 이순신에게 출동을 명령하였다. 이순신은 육지의 험악한 지형 속에 숨어 있는 안골포 등의 왜군들을 후방에 남겨 두고 적진 깊숙이 있는 부산까지 가는 위험을 감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머뭇거렸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오히려 조정이 당황했다. 전시에 임금의 어명을 일선 장수가 거부하는 항명(抗命) 사태를 상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출동을 재촉하기 위해 급기야 도원수 권율(權慄) 장군이 직접 한산도까지 달려갔다. 그러나 권율이 도착했을 때에 가토의 왜군들은 이미 조선 땅을 밟은 뒤였다. 이순신에게 남은 것은 항명에 대한 응징뿐이었다. 


이순신이 쫓겨나고, 새로 수군통제사로 원균이 임명되었다. 원균이 생각을 하니 이순신의 생각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이 긴박한 시기에 어명을 거역한다는 것은 이순신과 똑같은 운명이 될 것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잠시 어이할 바를 몰라서 어물어물 하고 있는데 권율이 명령을 거역한다며, 원균에게 역정을 내면서 곤장을 쳤다. 


수군 총사령관이 휘하 장병들이 지켜 보는 앞에서 곤장을 맞았다. 그런 망신을 당하고 원균은 곧바로 출전의 채비를 챙겨, 마음에 내키지 않는 출정 길에 올랐다. 그리고 그 길로 조선 수군은 몽땅 궤멸되었고, 원균도 왜군의 조총을 맞아 생을 마감했다. 


원균이라고 그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을까? 전후 상황을 보면 원균도 그 출정이 얼마나 무모한 일이었는지 스스로 알고 있었다. 다만 질 줄도 뻔히 알면서 군사들을 데리고 나간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그 출정을 감행한 이유가 참으로 딱하고 애처로울 뿐이다. 한 마디로 “곤장을 맞기가 싫어서” 였기 때문이다. 


임금의 명령으로 대변이 되는 윗사람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법이 없다. 설령 장수의 생각으로 대변이 되는 아랫사람의 판단이 옳은 것으로 후에 판단이 되었다고 하드라도 그 말은 내내 인정을 받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역사는 굵은 자의 말로 따라가기 때문이다. 


“이 놈은 언제고 내 말을 거역할 놈”이라는 인식, “저 놈은 내 새끼가 아니다”라는 인식, 따위가 머리를 더 많이 점령하고 있는 것이 사람이다. 그래서 임금도 그렇다. 그것을 초월할 수가 있다면 그가 성군(聖君)이 되는 것이다. 성군은 장수 중에서도 동량(棟梁)과 서까래를 구별할 줄 아는 법이다.


항명은 사정이 허락한다면 즉시로 돌아오지만, 허락하지 않는다면 후에라도 보복으로 돌아온다. 장수가 임금의 잘못된 명령을 거슬려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 미운 털이 박혀서 죽고, 임금의 잘못된 명령을 따르면 전투에서 죽는다. 실로 원균이 그랬고 계백장군도 그랬다. 


항명으로 감옥살이 천신만고를 겪은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돌아왔지만 또 다시 항명을 저지른다. 불과 12척의 배만 남은 수군을 폐지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선조의 지시에 사뭇 거만하기까지 한 듯한 답신을 올린다. 


“지금, 신에게는 전선 12척이 있습니다. 비록 전선은 적지만 제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한 적군은 감히 우리를 깔보지 못할 것입니다.” 이순신은 결코 임금에게 육군에 합류하겠다는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 어명을 거역한 것이다.


이순신은 그러나 그 12척의 전선으로, 왜군의 수륙병진작전을 또 한번 좌절시켜, 자신의 말이 허풍이 아님을 입증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항명이었다. 이순신은 전쟁의 영웅이지만, 전쟁 이후에는 영광이 아닌 핍박이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순신이 노량으로 마지막 출전에 나서던 날, 이순신의 후원자요 벗인 전시내각의 책임자였던 유성룡은 실각을 하였다. 이제 조정에서 이순신을 보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노량 전투에서 이순신이 마치 죽으려는 듯이 선두에 나서서 북을 치고 진두지휘를 한 이유의 한 단면이 여기에 있다. 


“절대 이기는 싸움은 임금이 싸우지 말라고 해도 이기고, 반드시 지게 돼있는 싸움은 임금이 싸우라고 해도 싸우면 안 된다”고 했다. 이순신은 임금의 명령보다 자신의 전략적 판단을 앞세워서 이겼다. 그러나 주어진 길은 가시밭 길이요, 남은 선택은 자살이 의심스러운 전사(戰死)였다. ‘임금이야말로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후, 그래서 많은 장수들은 ‘알아서 기는 선택’을 한다. 아첨의 길이다. 자신이 현장에서 보고 느낀 최선의 판단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서 생각을 하고 있는 임금의 뜻을 미루어 짐작하고, 그 뜻에 맞게 행동을 한다. 나라를 위한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대신에 임금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파악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그렇게 장계(狀啓)도 써서 올린다. 올바르고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려 봤자 기다리는 것은 가시밭길 밖에 없다는 것을 벌써 400여 년 전에 이순신 장군이 보여줬기 때문이다. 


싸움 잘하는 군인이 아닌 보고서 잘 쓰는 군인이 출세를 하는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다. 공식적인 보고 채널이 아니라 껑충 뛰어서 새치기로 들어가는 보고가 유행한다. 


한비자(韓非子)는 임금을 대할 때 역린(逆鱗)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역린은 용의 목덜미에 꺼꾸로 난 비늘인데, 순한 용도 이것을 건드리면 누구든 상관치 않고 바로 죽여 버린다. 이는 곧 임금의 권위와 같은 것이다. 항명의 결과가 승리인지 패배인지 중요하지 않다. 항명이라는 행위 자체로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요즈음 북한에서 김정은이는 자기의 역린을 건드리는 자는 누구를 가리지 않고 죽여 버린다.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도 그렇게 해서 죽었고, 자기의 큰 형인 김정남이도 그렇게 죽었다. 김정은이의 역린을 건드리다가 죽은 고위직이 140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 북한의 체제는 공산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니다. 옛날의 봉건제도 그대로 세습을 하는 체제이기 때문에 ‘김씨 왕조’라고 하는 것이다. 


장수는 항명을 고민하기 이전에 임금을 설득해야 한다. 역린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싸움에 지지 않는 방도를 찾아야 한다. 이것을 아부라고도 하고 혹은 아첨이라 하기도 한다. 왜 쓸데 없는 일에 힘을 빼느냐고 푸념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장수에게 주어진 운명인 것이다. 그래서 장수 노릇을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2017.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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