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kang39
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 캐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 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캐나다사장, 전 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 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역사문화원장

캐나다 문협회원.현 GTA한카노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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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해설(9)-함부로 주먹을 날리면 안 되나니
samkang39

 

 머리로 싸우지 않고 주먹을 자랑만하며 온 몸을 던지는 일은 바보짓이다. 높은 성벽 안에 숨어 있는 적을 공격하자면 기본적으로 시간이 필요하고 그 기간을 담당할 무기와 병력과 재정적 지원을 고려해야 한다. 전쟁은 하루에도 수 천금이 들어가는 거대한 게임이다. 그렇게 인력과 돈을 투자하고 전쟁에 패배를 하기나 한다면 나라는 거덜이 나고, 자칫하면 패망의 최후를 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성을 공격하는 것은 가급적 피해야 하는 마지막 수단이지만(其下攻城), 어쩔 수가 없다고 판단이 되면 공격을 해야 한다. 하지만 성을 공격하자면 장비와 인력과 시기와 기간을 잘 고려해야 한다. 거기에는 전투용 토성(土城)을 쌓아야 하는 것이 제일의 공성(攻城)방법인데, 실로 이는 몇 달이 걸리는 일이다. 하물며 성 뒤에 숨어 있는 적군들이 방해공작을 전개한다면 토성작업은 실패작이 되는 수도 많다. 


 고구려 침략에 나선 당태종은 요하를 건너자마자 스스로 부교(浮橋)를 걷어 내고 전의(戰意)를 불태웠다. 요동성을 공격할 때는 이세민 장수가 직접 흙을 나르는 등 병사들의 사기를 고무시켜 고구려와의 첫 대전에서 요동성을 보기 좋게 함락시켰다.


 드디어 고구려의 요새 안시성을 공격하기로 당태종은 결심을 굳혔다. 사기가 등창한 당나라의 장수 이세적(李世적)은 자기가 안시성을 함락시키면 안시성 안에 있는 모든 남자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산채로 땅속에 파묻어 버리겠다고 공언을 하였다. 그리고 고구려 여자들을 모두 차지할 것이라고 병사들 앞에서 큰소리 쳤다. 


 이 소문이 퍼지자 고구려의 안시성 사람들은 오히려 살아남기 위한 전의(戰意)가 치솟았고 사력을 다하여 성을 지키게 되었다. 싸움의 실마리를 쉽게 찾지 못하게 되자, 당태종은 이도종(李道宗)에게 명하여 안시성 외각에 토성(土城)을 쌓아 올리게 하였다. 50만명의 병사들이 동원이 돼서 밤낮 없이 60여 일간이나 흙을 퍼다 날랐다. 토성이 높아지니 토성위에서 안시성 안쪽을 훤히 내려다 볼 수가 있었다. 


 손자병법서에도 “군은 높은 곳을 점령하는 것이 좋고 낮은 곳에서 전투하는 것을 싫어한다”라고 써있다. 당태종은 유리한 고지를 만들어 놓음에 만족해하면서, 곧 진격명령을 내릴 것을 생각하며 병사들에게 강인한 적군궤멸의 연설을 하고 있었다. 두 주먹을 하늘로 힘껏 치켜세우며 마치 오늘날 운동선수들이 파이팅(fighting)을 외치듯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 오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단숨에 천지를 물바다로 만든 빗물은 큰 냇가를 이루며 토성의 아래 부분을 쓸어내리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그 드높이 쌓아 올린 토성이 아무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토성의 아래 부분을 돌이나 나무토막으로 튼튼히 했어야 했는데 그저 보통 흙으로 주춧돌 없이 쌓아 올렸으니 장맛비에 쓸려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토성을 쌓느라고 병사들은 지칠 대로 지쳐서 힘이 탈진상태가 되어 있었고, 계절은 곧 추위를 앞두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식량도 거의 다 떨어져 갔다. 어이하겠는가? 힘자랑, 주먹 자랑을 하던 당태종은 할 수 없이 한숨을 내리 쉬면서 철수명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욕심이 과하면 하늘이 길을 막는 법이다. 


 전쟁을 하려면, 특히 성을 공격하려면, 성급하게 자기 힘만 믿고 서두를 것이 아니라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

 

1)전쟁을 잘 하려면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킨다(善用兵者 屈人之兵 而非戰也 선용병자 굴인지병 이비전야). 2)공격하지 않고 성을 함락시킨다(拔人之城 而非攻也 발인지성 이비공야). 3)오래 걸리지 않고 적을 무너뜨린다(毁人之國 而非久也 훼인지국 이비구야). 4)반드시 온전한 그대로의 천하를 다퉈야 한다. 그래야 군사력의 손실이 없이 이익이 고스란히 남는다(必以全爭於天下 故兵不頓而利可全, 필이전쟁어천하 고병부돈이리가전).


 이렇게 머리를 써서 안시성을 공격했어야 했는데 당태종은, 작은 나라 고구려를 우습게 여기고, 힘으로만 밀어붙이려 했던 것이다. 


 조선조 16대 인조 때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남한산성으로 피란을 간 인조를 청태종의 군대는 완전 포위를 하고 있을 뿐, 전쟁을 일으키지 아니 하며, 항복을 기다리고 있었다. 40일간 포위를 당한 조선군은 식량이 떨어지니 항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조는 스스로 내려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었다. 청나라 군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승리를 한 것이다. 청태종은 손자병법의 고수를 이미 익히고 있었던 사람이다. 


 특별히 주먹을 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킨다는 것은 아주 고차원적인 승리의 전법이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즉위 직후부터 신라 왕실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신라의 경명왕(景明王)이 죽고 경애왕(景哀王)이 즉위를 했을 때에 조문사절을 보내기도 했다. 견훤(甄萱)의 후백제군이 침략을 해오면 신라는 가장 먼저 왕건에게 구원병을 요청했고, 왕건은 꼬박꼬박 구원병을 지원하였다. 


 위기감을 느낀 후백제의 견훤은 경주를 직접 공격하는 무리수를 감행했다. 그리고 내친김에 경애왕을 죽이고, 멍청이 같이 순해빠진 경순왕을 임금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경애왕의 왕비를 차지하고 마음껏 능욕하였다. 견훤은 그렇게 보름동안 실컷 경주를 약탈하고 나서 귀환 길에 올랐다. 


 이때에 왕건은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기병 5,000여명을 이끌고 직접 달려갔다. 그러나 전투에서는 견훤이 한 수 위였다. 왕건은 공산성 아래에서 견훤의 계략에 빠져 전투에서 거의 전멸을 당하였다. 왕건은 자신의 부하 장수 신숭겸(申崇謙)과 옷을 바꿔 입고 탈출을 해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대패를 하였고, 견훤은 대승을 거둔 것이다. 


 그로부터 4년 뒤에 신라의 경순왕은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을 하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사실은 항복이 아니라 임금 자리를 양위한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그 당시에 견훤은 툭하면 신라의 국경을 쳐들어가서 무력으로 자기의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 남의 나라를 침공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한데, 군량미와 재정이 얄팍한 견훤에게는 신라 백성들의 협조가 필요했다. 하지만 임금을 죽이고 왕비를 겁탈한 견훤에게 신라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을 찌를 듯할 때였으니 견훤에게 협조할리가 없었다.


 반면 왕건은 견훤과 직접대결에는 힘이 밀리는 편이었지만, 신라의 토후 지방관들은 물론 모든 백성들이 쌍수로 환영하는 처지였다. “지난날 견훤이 쳐들어 와 우리나라의 임금을 죽이고, 왕족들을 능멸했을 때는 범과 이리 떼들이 쳐들어온 것 같이 공포를 느꼈는데, 오늘 왕공을 만나 뵈니 부모를 보는 것 같소이다”하면서 왕건을 맞아 들였다.


 이렇게 해서 왕건의 인품과 후덕한 처세술은 드디어 신라를 고스란히 인계받게 되었던 것이다. 세상 일이 그렇게 됨에 따라 고려 왕건의 세력은 일추월장으로 확장됐고, 후백제의 견훤은 시들어갔다. 


 지난날의 역사는 분명하게 말한다. 용장불여 지장이요, 지장불여 덕장이라 (勇將不如智將, 智將不如德將). 용감한 장수는 지혜로운 장수만 못하고, 지혜로운 장수도 덕이 많은 장수만 못하다는 뜻이다. 함부로 주먹을 휘두르는 장수는 결국 덕이 있는 장수를 당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2017.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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