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kang39
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 캐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 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캐나다사장, 전 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 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역사문화원장

캐나다 문협회원.현 GTA한카노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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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許筠)과 홍길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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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許筠)과 홍길동전 명인전 #39

1569(선조 2)~1618(광해군 10) 49세

제공: 강 신 봉


허균의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또는 학산(鶴山), 성소(惺所), 백월거사(白月居士)이다.

그는, 서경덕의 문하생으로 학자요

문장가로 명성이 높았든 동지중추부사 허엽(許曄)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허엽의 후취인 강릉 김씨로서 예조판서 광철(光轍)의 딸이다.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을 다녀온

허성(許筬)이 이복형이며, 허봉과 허난설헌은 동복형제이다.


5세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하여

9세가 되였을 때에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았다.

12세 때에 아버지를 잃고 더욱 시공부에 전념하였다.


학문은 유성룡에게 배웠으며,

시는 三唐詩人의 하나인 이달(李達)에게서 배웠다.

20세가 되던 1589년, 선조 22년에 생원시에 합격을 하였고,

25세(1594년)때에 庭試文科에 급제하여 검열,

시강원 설서등의 관직에 제수 되였다.


선조 40년(1607)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매월 3번씩 무려 27번이나 文臣月科에 장원을 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다.

 

 

 


26세(1594 선조 27) 때에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28세(1597) 때에는 重試에 장원을 하였다.

29세에 황해도 都事가 되였는데

서울의 기생들을 끌어 들였다는 죄로 탄핵을 받고 여섯달 만에 파직되였다.


후에 춘추관기주관, 형조정랑을 지내고

33세에(1602) 司藝, 사복시정(司僕恃正)을 역임하였고,

원접사 이정구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35세(1604)에 수안군수로 부임하였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또 다시 벼슬길에서 물러 났다.


37세(1606) 때에는 명나라 사신 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넓은 학싯과 글재주로 이름을 떨첬고,

누님 허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소개하여 이를 명나라에서 출판케하였다.


이후 삼척부사가 되였으나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이유로 세번째 탄핵을 받았다.

다시 공주목사로

기용되어 庶流들과 가까이 지내다가 네번째 파직을 당했다.

 

 

 


그 후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梅窓을 만났고 천민출신의 시인 유희경과도 교분을 나누었다.

40세( 1609년), 광해군이

등극하였을 때에 명나라 책봉사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이 되였다.


이 해에 첨지중추부사, 형조참의가 되였다.

이듬해( 1610), 殿試의 시관으로 있으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네번째)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되었다.


이후 몇년간은 泰仁에 은거하였다. 44세(1613) 때에 계축옥사가 일어났다.

평소에 친교가 있던 서류출신의 서양갑, 심우영이 처형을 당하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허균은 이이첨(李爾瞻)에게 부탁하여 대북(大北)파에 참여하였다.


이 해에 동지겸진주부사로 중국 명나라에 다녀 왔다.

이 때에 많은 책을 가지고 왔는데

그 중에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49세(1618) 8월에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 났는데,

허균의 심복 현응민이 붙였다는 것이 탄로났으며,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심문한 결과 역적모의를 하였다 하여,

허균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자 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그의 묘는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맹리 능골에 있다.

 

 

 

허균에 대한 평가는 총명하고 영발하여 문장과 식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지만,

그의 사람됨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행동을 경박하게 하고

인륜도덕을 어지럽히며, 이단을 좋와하고, 행실을 더럽혔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몇 차례에 걸친 파직처분은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한편 그는 혁명가적인 기질을 갖고 있었으며, 그러한 관련의 글을 많이 저술하였다.


확실한 정설은 아니지만 그가 국문학사상

그 첫 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것으로, 이식의 澤堂集을 통하여, 인정되고 있다.


특히 그의 생애와 그의 논설 豪民論(백성을 무서워 해야 한다는

이론)에 나타난 이상적인 혁명가상을 연결시켜 볼 때에

그 구체성이 홍길동전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가 있을 것이다.

 

 


홍판서와 홍길동

 

그의 문집 官論, 政論, 兵論, 遺才論등에서 그는 민본사상과 국방정책,

신분계급의 타파, 인재등용, 붕당정치의 배척을 이론화하였다.

 

 

그는 유교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불교와 도교 사상도 깊이 연구하였고 심취되여 있었다.


그의 작품은 아주 다양하다. 문집 성소복부고(惺所覆부고)는

자신이 편찬하여 죽기 전에 외손에게 전하였다고 하며,

그 부록에 은둔생활 방법에 대하여 쓴 <閑情錄>이 있다.


25세에 쓴 시평론집 학산초담(鶴山樵談)과 인생말년에 쓴

성수시화는 시비평의 안목을 잘 보여 주고 있는 자료이다.


반대파에 의해서도 인정받은 그의 시에 대한 감식안은

시선집 국조시산(國朝詩刪)을 통하여 오늘날 까지도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박에 허문세고, 고시선, 당시선, 송오가시초, 명사가시선, 사체성당

등 시선집이 있었다고 하나 모두 전해짖는 않는다.


또 임진왜란의 모든 사실을 적은 東征錄은

선조실록 편찬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그 외에도 계축남유초, 을병조천록,

서변비로고, 한년참기 등이 있었으나 역시 전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