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seungo
(아틀란타연합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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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되신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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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신 주님께서 말씀으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세상 만물을 만드셔서 관리 주관하고 계시는데, 주님께서 일개 피조물인 인간에게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셨으니 상상도 못할 놀라운 일이 아닌가? 인간들 간에서도 세상에서 진실한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큰 복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하물며 영이시며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께서 인간들에게 나의 친구라고 하셨으니 일방적인 주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인간들 간에 친구를 살펴보면 어린아이 때에는 같은 동네 아이들이 아무런 신의(信義)와 관념도 없이 만나 놀고 하는 것을 동무라고 하고, 이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친우(親友)라고 부르며, 친우가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서로의 신의(信義)가 생기고 친구(親舊)가 되는 것이다. 


이를 한서에서는 붕우유신(朋友有信)이라고 한다. 따라서 친구가 되어 신의 속에 서로 만나게 되면 얼마나 기쁘고 즐겁고 희열을 느끼겠는가? 한서인 논어에는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면 불역락호(不亦樂乎)아 라는 글이 있다. 서로 오해 없이 수시로 흉을 말해줌으로 고쳐가며 서로 배우며 좋은 친구를 유지하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또한 이러한 친구가 멀리에서 찾아와 종종 만난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친구에 대해 논할 때마다 나는 친구에 대해 야화(野話: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다시 소개하면 부유한 가정의 외아들이 친구가 많이 있다고 아버지께 자랑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친구들을 보면서 늘 돈을 허비하며 방탕한 아들을 걱정하는 과정에서 한가지 묘책을 발견하였다. 


어느 날 아버지는 돼지 한 마리를 잡아 털을 뽑고 사람의 시체처럼 흰 천으로 싸서 지게에 싫고 지게하고는 아들의 친한 친구부터 찾아가서 내가 어찌어찌 하다가 사람을 죽였으니 산에 함께 가서 파묻자고 요구하게 하였다. 과거에는 그렇게 반가워했던 친구들이 모두 다 아들을 문전박대 하였다. 


하는 수 없어 아버지는 아들에게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의 친구를 만나자고 하여 찾아갔는데, 아버지의 친구는 만날 때 겉으로 반가워하지도 않았으나, 아버지가 내가 여차여차 하다가 사람을 죽였으니 함께 가서 땅에 파묻자고 요청하니 잠깐 기다리게 하고는 집으로 들어가서 곡괭이를 갖고 나오자 아버지는 그때서야 아들을 교육하기 위한 나의 계책이었네 하니 친구는 그럼 그렇지 어찌 자네가 살인할 사람인가? 라는 야화다. 


여기서 과연 아버지의 친구는 진실한 친구인가? 그래도 친구를 위해 자기가 시체은닉죄 또는 은닉방조죄를 각오하고 친구를 도와주려는 우위는 인정되나 만일 진실한 친구라면 시체매장에 호응할 것이 아니라 살인사실을 고백하게 하여 그에 대한 대가를 감수하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도록 권고 하였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주님과의 친구 관계는 십자가 사건처럼 독생자 예수님께서 죄인 된 인간들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버리는 아가페의 사랑 안에서만 이뤄지는 관계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마리아의 몸을 빌려 율법 시대에 세상에 보내셔서 모든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율법대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신 것이다. 


인간들 사이에서 이뤄지는 친구관계는 오직 인간들의 신의(信義)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예수님의 친구와는 별개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죄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돌아가신 지 삼일 만에 부활시키시고, 40일 만에 승천하시게 하셨다. 우리 믿는 자들도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가기만 하면 사망권세에서 벗어나 부활 승천하여 영생할 수 있다. 따라서 부활승천 하는 성도들을 예수님께서는 나의 친구라고 부르신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하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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