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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필드를 만나다(1)
leesangmook

 

 

 스코필드 박사를 만난 것은 7년 전 일이다. 토론토 동물원에 한국정원이 조성되고 그의 동상이 세워져 그 제막식에 갔었다. 얼굴에 미소 짓는 표정을 어떻게 조각해 낼 수 있느냐가 궁금해서 장연탁 조각가에게 묻기도 했다. 


 스코필드의 명성은 여러 번 내 고막을 진동시켰다. 하지만 동상은 미소만 보여줄 뿐 자세한 얘기는 들려주지 않는다.


 지난 1일 한인회관에서 행사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1주년을 기념하는 ‘Peace & Harmony' 라는 주제의 행사였다. 거기 초청된 정운찬 전 총리는 ’프랑크 스코필드, 한국과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정의‘를 제목으로 강연했다. 


 동상 제막식에도 와서 기념사를 한 그는 스코필드가 손자라고 부르던 사람이다. 올해는 스코필드 박사가 한국에 온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다시 토론토를 방문한 모양이다.


 행사가 끝나고 나오는 입구의 테이블에 책 몇권이 놓여있다. 거저 주는데도 사람들은 스쳐만 간다. 두 권을 집었다. 하나는 한글, 다른 하나는 영문인 책은 둘 다 스코필드에 대한 평전이다. 한글 책은 내가 읽고 영문 책은 11학년인 손자에게 줄 생각이었다.


 평전은 남이 쓰는 자서전이다. 그럴 대상이라면 일단 롤 모델이다. 읽어서 손해 보지 않는다는 얘기다. 본인만 나오는 게 아니다. 여러 사람들이 나온다. 아버지는 어떻고 어머니는 어떻고 누나는 그 후 어떻게 됐는지도 나온다. 


 스코필드의 경우 일제 치하의 한국에서 지냈으니 한국 사람들이 주로 나온다. 그들 대부분이 격동의 한국 근대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다.


 한번 보고 얼굴을 잊지 못하던 사람도 나온다. 얼굴이나 체구가 평균이 아니었다. 나는 그분이 학교의 소사(여기 말로는 케어 테이커)인 줄 알았다. 그게 고등학교 때였는데 유명한 E여고를 우연히 방문했다가 목격했던 것이다. 헌데 교장이라는 거였다. 경망을 자책하면서 존함은 밝히지 않기로 한다. 


 스코필드가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세균학과 위생학 교수로 간 것은 1916년 11월. 존함의 그 분은 배재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그를 따랐다는 것이다.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면서도 스코필드가 지도하는 성경반에 나갔다고 한다. E여고의 교장이 된 건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1938년이었으니 단연 선구자의 한 사람이 아닌가. 여하튼 그분의 신원을 알게 된 것도 책읽기의 보너스다.


 내가 아는 또 다른 인물은 노순경 여사. 여사는 세인트캐서린에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기 박 장로의 어머니다. 더 알기 쉽게는 구한말 육군연성학교 교장과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까지 역임한 노백린 장군의 따님이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더 흥분한 사람이 스코필드였다. 그래서 민족대표 제34인이라고까지 하지 않는가. 노순경은 만세를 불러서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


 같은 방에는 유관순도 있었다. 스코필드는 서대문형무소를 비판하는 글을 당시 일인이 발간하는 영자신문에 실렸다. 


 이어서 형무소를 찾아가 노순경과 유관순을 만났다. 노순경은 세브란스병원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는 사이였다. 그는 매주 감옥을 방문했다. 밥은 잘 주느냐 방은 얼지 않을 정도냐 따졌다. 덕분에 무참한 고문도 없어지고 젊은 여성수감자들이 크게 위로를 받았다.


 동상만 봐서는 그 사람을 알 수 없다. 저만치 우상으로 서있기 십상이다. 평전을 읽고서야 스코필드에게 좀 더 다가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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