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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을 뒤적이며
leehyungin

 
 
얼마 전에 대학노트에 빼곡히 쓰여졌던 학창시절의 일기장을 미련없이 버렸다. 가치 평가의 수준이 미달해서도 아니었다, 애지중지 때묻은 애환의 설움들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허지만 이제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기억들이 전설은커녕 오히려 회한의 뿌리들로 우울한 환상만을 자아냈다. 


그 옛날의 이야기들은 오늘의 내 삶에 부담스럽게 심란하고 어설픔이 배어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때 그 시절의 한이 서린 나의 모습들이 뒤적거릴 때마다 다시 떠올라 눈시울이 시큰거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느 것 하나 풍족하지 않았고, 찌들은 가난의 후예들이었다. 상상하기 조차 불편하고 처연한 안타까움이 머리를 흔들게 했다. 분명한 것은 그 일기장에서부터 읽고 쓰기의 습관이 길러져 왔다,


그렇지만 쌓여 묵혀있는 서랍 속을 비워버렸다. 무려 대학노트 다섯 권이나 되었다. 스스로의 생각과 마음속을 털어내어 요원했던 격동의 시절이 질서정연 하게 표현된 일기장들이었다.


50, 60년대의 흙과 바람 내음이 고스란히 배어있던 일기장이었다. 나를 표현하고 정리했던 시절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존재함을 절대로 감사해야 할 것을… 그런데 왠걸 그 헐벗고 심란했고 암울했던 옛 시절이 싫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감사할 것이 있다. 학교 친구들과 책들을 서로 돌려가며 함께 읽고 독후감들을 써서 발표해봤던 동인지 활동이었다. ‘능암’(언덕 위의 바위가 되자) 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독서 친구들의 작품집이었다.


인쇄기를 등사기로 사용했던 그 시대의 모습, 요즘 컴퓨터 세대는 무슨 단어 일까? 알 수도 없는 외래어로, 그래도 그것으로 이 세상은 밝혀지고 있었다. 시 와 수필, 단편과 콩트들이라고, 그래도 글쓰기란 낙서들이 주섬주섬 일기장에 담겨 있었다.


"우리 엄마 아빠의 새벽은 일터다. 논두렁 밭두렁이에 먹을 것들을 가꾼다."


"아빠의 장날은 술에 취해 휘청거리면서도, 양손엔 생선이 들렸다. 취했어도 5일마다 물고기 반찬을 꼭 챙기신다"


"밖에 빗소리가 새벽을 깨워 아빠 엄마의 소곤대는 이야기가 잠을 깨웠다. 다툼인가? 들리는 소리는 논과 밭으로 지혜를 모아 쏟으려는 대화들이었다."


"룡이란 녀석, 내게 빌려간 책을 오늘도 깜박 잊고 안가져 왔잖아,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지만, 그가 다정한 내 친구 아닌가. 내일은 잊지 않겠지!"


친구 집에만 가면 친구엄마는 쪼들린 생활을 쥐어짜 먹을 것들을 삶아낸다. 고구마였다. 한 광주리 사다가 양판 속에 푸짐하게 쪄내시며 "많이들 먹어라!"  아들 친구들에게 인기만점이셨다. 어찌 그리도 배가 고팠던가?


죽순처럼 자라나는 세대가 아니던가, 그때 그 고구마가 아니었으면 아마 내 키가 지금보다 몇 센티는 못 컸을 게다. 못 먹어서, 그때는 라면이 나오기 직전이었으니 더 허덕일 수밖에. 한 많은 가난이여!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여름, 겨울 방학 때였다. 자활 능력을 체험하자는 기발하고 대담한 발상이었다. 생활용품들을 구비해 농어촌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비누, 연필, 치약, 칫솔 등등 들쳐 메고 골목길을 뒤지며 고학생 역할을 실제로 경험했다.


배우려고 학자금을 조달하는데 목적이 있었다기보다는 민심의 동향파악으로 국민적 정서를 확인하여 보려는 소년시절의 값진 이력서였다. 인간세상의 접촉으로 친근함을 배양하고, 대범함의 이치를 깨우치려는 소년시절의 절박한 투신이기도 했다.


 ‘구리무’(피부크림)며 성냥, 초 등의 농촌생활에 필수품들을 팔고 다녔다. 현금이 없다고 곡물로 값을 계산해주는 농촌의 풍경이었다. "아이고머니나!" 학생들이 공부할라고, 세상에나… 있는 것들 더 주고 싶어하는 인정이 차고 넘쳐났다.


한여름 방학을 풍성하게 값지고 진귀한 생활체험으로 유익하고 멋진 젊음의 추억이었다.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옛 어르신들의 말씀은 한국사의 ‘탈무드’에 등재한다 하더라도 분명 성현의 진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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