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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
leed2017

 

 한국 E 여자대학교에 있을 때 은퇴를 하면 어디에서 살까를 저울질해본 적이 있다. 한국에서 그대로 눌러앉아 사는 것도 생각해보았으나 캐나다에 돌아와서 살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나같이 돈 없고, 권력 없고, 배경 없는 사람은 살기가 힘들다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은퇴 후에 캐나다로 돌아가서 살 집 하나를 마련해둬야 한다는 생각은 늘 있었으나 거기에 신경을 쓸 시간적 여유도 없고 재정적 뒷받침도 약해서 오늘 내일 미루기만 하다가 2, 3년 세월이 흘렀다. 그러다가 은퇴 3년을 앞둔 해였던가 캐나다를 다니러 올 기회가 갑자기 생겼다.


 아내의 대학교 동기동창 K씨의 저녁 초대에 갔다가 우연히, 실로 우연히 K씨로부터 콘도미니엄을 뭉칫돈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캐나다에 머문 나머지 이틀동안 부랴부랴 콘도미니엄을 하나 계약했는데 그게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방 둘 달린 장난감 같은 집이다. 청소하는데 30분이면 뒤집어쓰고도 남는, 부잣집 화장실만한 크기의 벌집.


 지금 살고 있는 벌집을 계약하는 데는 내 나름대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이 벌집 가격이 우리가 감당할 수 있고(영어로 affordable이라고 하던가?) 소위 '개발이 덜 된 후진 데'라 그런지 다른 데보다는 훨씬 교통이 덜 번거롭다. 콘도미니엄이 일반 주택가 가장자리에 고성(古城)처럼 혼자 우뚝 서 있으니 시골 냄새가 물씬 풍기고 사방이 확 트여 시원한 느낌을 주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둘째, 콘도미니엄 뒤로는 큰 초원이 펼쳐져 있고 그 가장자리로는 숲, 또 그 옆으로는 험버(Humber) 강이 흐른다. 그 강물 줄기를 따라 사오십리 잘 만들어진, 북한말로 하면 '거닐 길'이 있어서 아침저녁 산책을 할 수 있다. 일곱 여덟 시간을 걸어갈 수 있다고 하는데 처음 이사를 왔을 때는 아내와 끝까지 한번 걸어가 보자고 약속했으나 한 해 두 해 미루다가 이제는 체력의 한계를 느껴 포기하고 말았다.


 셋째, 문학적으로 고상하기 짝이 없다. 즉 우리가 사는 콘도미니엄에서 자동차로 15분만 가면 클라인버그(Kleinburg)라는 작은 마을에 캐나다에서 풍경화로 가장 명성이 높은 '7인의 동아리'(Group of Seven) 회원들의(꼭 일곱 사람만은 아니다) 그림을 전시하는 맥마이클(McMichael) 미술관이 있다.


 우리가 런던에 살 때는 일 년에 한 번은 꼭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이 맥마이클 미술관으로 나들이를 왔었다. 이렇게 좋아하는 미술관이 바로 옆에 있으니 이 콘도미니엄에 살게 되면 주말마다 와서 한 바퀴 돌며 그림 구경하고 한적한 클라인버그 시내로 나와 커피도 마시고. 실로 수채화 같은 정갈스러운 계획을 세워놨다. 그러나 계획은 어디까지나 계획, 막상 이사를 와서 이 콘도미니엄에 살게 되고 나서부터는 한 달에 한 번은 커녕, 일 년에 한 번 조차 갈까 말까, 미술관을 무제한 드나들 수 있는 회원권은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이 해를 넘긴 적도 있다.


 오늘도 어느 부동산 회사에서 우리가 사는 콘도미니엄 값이 많이 올랐으니 입주자들이 집을 팔기를 원하면 알려달라는 전단(傳單)을 보내왔다. 아내와 나는 아침 커피를 마시면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의견을 주고 받았다. 우리가 이제 늙어서 앞으로 살 날이 살아온 날의 몇 분의 일밖에 안 될 터인데 지금 이 나이에 집을 팔아 무얼하노?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젖히면 저쪽으로 흐르는 험버강 물줄기가 내려다 보이고 베란다(veranda) 문을 열면 바람이 잉잉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지금 집을 팔아 이익을 남기든 못 남기든 우리와 무슨 상관이랴. 


 겨울이면 휘몰아치는 눈보라, 새잎이 구름처럼 피어나는 연초록의 봄, 창을 때리는 한여름의 소나기, 낙엽 구르는 늦가을 산책길. 이 모든 사계절의 변화를 어항에 금붕어 보듯 창밖으로 내다볼 수 있다. 안개가 짙은 날은 밖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어 마치 우리가 꿈속에서 꼼지락대는 것같은 느낌이 드는 험버우드가(街) 710번지.
 죽으면 하나님 앞으로 가는 기쁨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천만에, 이렇게 큰 도시의 한 모퉁이 벌집에 살며 대자연의 유유한 변화를 조용히 내다볼 수 있는 이 즐거움을 버리고 가기는 어딜 간단 말인가. (20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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