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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가면서
leed2017

 

 맞아죽을 각오를 하며 책을 쓴 사람이 있다더니 나야말로 맞아 죽지는 않더라도 동료 후배들로부터 "제까짓게 뭔데. "하는 비난을 각오하고 펜을 들었습니다. [교수신문사]에서 은퇴를 하면서 후배 교수들에게 교훈될 말을 적어 달라기에 어리석고 용렬한 마음에 우쭐하는 성벽으로 붓을 잡았습니다.


 후배교수들에게 교훈되는 말을 남긴다는 것은 대단한 위험하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교훈이란 말을 밖으로 내뱉는 사람의 말과 행동에는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저는 뭔데'나 '메스꺼운 소리'로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패에서 배운 사람의 말이라도 생각하면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아니꼬움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 서두가 길어집니다. 내 부탁을 시작하겠습니다.


 첫째는 현실참여에 지나치게 열심이어서 연구할 시간을 뺏기지 말라는 것을 당부하고 싶습니다. 현실참여는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현실참여야말로 자기 학문의 뜻을 구체화 해보는 경우도 되고, 상아탑이라 불리는 곳을 떠나 현실 세계를 맛보는 좋은 기회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에 보내는 시간과 정력이 너무 클 때는 책읽고 연구할 시간이 줄어들고 우리의 집중력을 흐리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400년 전에 이 세상을 다녀간 거유 퇴계(退溪) 이황은 풍기를 비롯해서 몇군데 벼슬살이를 하다가 늙어서 그의 고향 도산에 돌아왔습니다. 벼슬살이 때문에 학문에 관심 전력을 기울이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던 그는 다음과 같은 노래 한 수를 남겼습니다. 요새 말로 옮겨서 적어보면 다음과 같지요.


‘당시에 가던 길은 몇 해를 버려두고/어디가 다니다가 이제사 돌아온고/이제야 돌아왔으니 딴 데 마음 말으리’


 여기서 가던길이란 물론 학문의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400년 전 퇴계가 살던 시대와 E-mail이 왔다 갔다 하는 오늘과는 큰 차이가 있겠지요. 그러나 학문하는 사람의 정신에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둘째, 학문적으로 너무 일찍 늙지 말기를 바랍니다. 40, 50만 되어도 연구에 열의를 잃고 '원로'가 되어 뒷짐을 지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애늙은이 같아 보기에 애처롭습니다. 이런 분들이 좋아하는 말은 ". 나도 연구를 해본 사람인데. " 하는 식의 거드름에 가까운 말입니다. 물론 이런 '원로'들은 학회같은 모임에 가서 자기의 연구발표보다는 종합논평을 좋아합니다. 이렇게 학문적으로 너무 빨리 늙어버리는 풍토에서는 학문이 남에게 내보이려는 패션쇼가 되기 쉽습니다.


 세 번째 부탁은 자연과학 분야보다는 사회과학 분야에서 더 절실한 것입니다. 학문의 한국 토착화가 절실합니다. 예를 들면 내가 몸담고 있는 심리학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심리학이 세계 심리학에 끼치는 영향력은 심리학 분야에 따라 다르지마는 일반적으로 90~99%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나온 석박사 학위논문이나 학회지에 발표된 연구의 참고문헌에서 미국에서 발표된 연구를 헤아려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입니다. 이렇게 미국에서 만들어진 심리학을 '보세가공' 없이 한국에 직수입해서 쓰는 데는 문제가 있습니다. 화학이나 물리학 같은 자연과학에서는 미국물[H2O]이나 남미 물이나 한국물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미국 사람 다르고 한국 사람 다르고 남미 사람이 다릅니다. 이렇게 K 문화에서 L 문화로 옮겨 심었을 때는 그 나라 문화 풍토에 맞는 '보세가공'이 필요합니다. 또한 같은 문화권 안에서도 옛날 사람 다르고 요새 사람 다릅니다. 제가 몸담은 상담 심리학은 제가 유학을 떠나던 1960년대 중반에 '한국적 혹은 동양적 상담'을 세우자는 주장이 있었는데 40년이 지난 오늘에도 같은 구호만 외쳤지, 그에 대한 큰 진전은 없는 것같이 보입니다. 아마 우리 능력의 한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학문이 한국에 뿌리내리기 작업은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네 번째는 대학행정을 맡고 있는 어른들께 부탁입니다. 요사이 무슨 장관이다 무슨 국장이다 하는 거창한 이름의 관직에 있다가 석좌교수나 대학 총장으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앙정부 한 기관에서만 지방대학 총장으로 가는 경우가 20명 가까이 되는 데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경향이 대학의 무슨 큰 유행이나 된 듯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대학에 생기는 이득도 많겠지요. 그러나 내 생각에는 이것이 대학을 썩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대학이 썩었기 때문에 이런 짓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관리와 대학은 다릅니다. 연구업적도 없는 사람을 이렇게 모셔오는 것은 대학의 자존심을 낮추는 일입니다. 제가 있던 캐나다 대학에서는 학장직을 하다가도 평교수로 돌아올 때는 일 년 정도 다른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하고 돌아오게 합니다. "네 머리에 녹이 슬었으니 가서 충전을 해서 강단에 서라"는 말이지요. 어느 잡지를 보니 독일 함부르크 대학에서 소련의 푸틴 대통령을 석좌교수로 오는 것을 거절했답니다. 이유는 연구업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치업적으로는 충분하겠지요. 그러나 대학에서 연구업적 말고 정치업적 같은데 눈을 돌린다는 것은 대학의 종말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저의 마지막 부탁은 학생들의 말과 글, 특히 글에 신경써달라는 것입니다. 학생들의 말이나 글을 보면 쓸데없이 어렵고, 안 써도 좋을 한문이나 영어를 마구 써대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내친김에 어려운 말과 글을 쓰는 경향은 학생뿐 아니라 교수들도 많다는 것을 말해 둡니다. 나이가 드신 교수들은 어려운 한문과 일본식 우리말을, 나이가 젊은 교수들은 영어식 우리말을 마구 써대는 분이 자주 눈에 띄지요. 어려운 글을 써서 남이 잘 이해를 못 해야 '깊이가 있는 글', '학문적으로 심오한 글'로 생각되는가 봅니다. 학생들도 덩달아서 '논문개요', '본 연구'에서 시작해서 '평화에로의 길',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 방면의 연구는 Maxwell에 의해 연구되어졌다'는 등 어색하거나 필요없이 거창한 말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글은 수백 년간 한문 영향에다 35년 2달간 일본 영향, 최근에는 미국영어 영향이 우리말과 우리 글의 설 자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일일이 그 예를 들 수는 없습니다마는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대학교단에 서는 사람들은 이 삐뚤어진 자세를 바로잡을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러가는 마당에 할 말이 어찌 이뿐이겠습니까마는 더 했다가는 "이 사람, 왜 이렇게 말이 많아?" 하는 핀잔을 들을까봐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모두 건강하시고 맑고 밝게 사시기 바랍니다. (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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